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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4월 12일에는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렸습니다. 회담 결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립니다. 한반도 뿐 아니라 세계평화를 향하여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결국, 북한이 유리한 결과를 얻어냈다며 한반도의 비핵화와 안보를 우려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한반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룰 수 있기를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북미정상회담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지방자치 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치러졌는데, 역시 예상했던 결과로 끝이 났습니다. 늘어나는 실업자 수가 18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합니다. 실업률은 4.1%고, 실업자수는 112만명, 15~29세 청년층 실업률는 10.5%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도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기대와 이전 정부에 대한 심판론에 묻혀서 선거에서는 이슈가 되지 않았고, 정책이나 인물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직 여배우 스캔들만이 이번 선거에서 이슈로 떠올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후보자의 도덕성에 관한 이러한 이슈도 선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아시는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 째 왕입니다. 첫번 째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지파별로 땅을 분배한 후, 왕정이 들어서기까지 약 400년간을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여호와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지파동맹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사기의 이야기는 똑같은 패턴의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신앙에서 빗나가면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이방 민족이 침략하여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셔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사사가 다스리는 동안은 이스라엘은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가 죽고나면 이스라엘은 다시 이방신을 섬기게 되고, 다시 똑같은 패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백성들을 친히 다스리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왕이 없었으므로 정규 군도 없었고, 그래서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의 침략을 받으면 이스라엘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사무엘에게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좀 더 강력한 힘으로 정규 군을 양성해서 외적도 막아내고 백성을 보호해 줄뿐 아니라,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섭섭하였습니다. 자신이 사사로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면서 블레셋 군대도 물리치고 영적인 지도자요 행정적인 지도자로서 열심히 일을 해 왔는데,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불신임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섭섭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백성들에 대하여 섭섭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평화와 행복의 길인데, 백성들은 지금 강력한 지도력과 군사력이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을 기대하며,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운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새로운 왕을 세우는데 모든 지파가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공정하게 제비를 뽑는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열 두 지파가 제비를 뽑아 베냐민 지파가 뽑혔습니다.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지파였습니다. 베냐민 지파 중에서 가족별로 제비를 뽑았습니다.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습니다. 마드리의 가족 중에서 제비를 뽑았더니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막중한 직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왕으로 선출된 이 현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짐보따리들 속에서 그를 찾아 데리고 나왔고, 백성들은 왕의 만세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하겠느냐’고 멸시하면서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잠잠했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서 암몬을 완전히 무찔러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백성들의 완전한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을 멸시하며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자들을 직접 쳐 죽이겠다고 나섰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가 구원을 베푸신 오늘 같은 날,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만류하고, 다시 한 번 백성들을 길갈로 모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사울을 왕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사울은 정식으로 인기와 기대를 한 몸에 지닌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울왕을 버리고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사울에게 실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사울은 스스로 베냐민이라고 하는 작은 지파 출신이요, 스스로 왕이 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겸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외적을 물리치고 백성들의 신임과 인기가 높아지자 스스로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인기에 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왕으로서의 직무를 넘어서 제사장의 직무까지도 스스로 행하였습니다. 제사는 반드시 제사장이 드리도록 하나님은 정하셨지만, 사울은 사무엘이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또, 전쟁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을 진멸하라고 하나님은 명하셨지만, 사울은 그 가운데 하찮은 것들만 진멸하고 기름지고 좋은 것들은 남겨 두었습니다. 진멸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이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이므로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이 진멸법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그 전리품들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일부를 남겨둔 것은, 자신의 지도력과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라고 하는 교만한 공로의식이 작동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또 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념비를 종종 세웠습니다.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의미로 에벤에셀의 돌로 기념비를 세웠고, 범람하는 요단강물이 멈추어 신발을 적시지 않고 건너온 것을 기념하여 열 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요단강가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자신의 권력에 취하고 자신의 업적이나 공로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욕망, 그것은 곧 추락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실망하고 사무엘로 하여금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 명을 받들어 사무엘은 유다 지파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새에게 아들들을 데려 오도록 해서 차례대로 한 사람씩 면접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먼저 엘리압을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이 사람이구나’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쳤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라고 판단한 그 기준이 무엇이었을까요? 외모였을 것입니다. 사울 왕도 용모가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9:2에 보면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 생긴 사람이 없었고, 키도 보통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우리가 제비 뽑은 이 사람이 우리의 왕으로 손색이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사무엘은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왕으로 세울만한 자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서 '용모'는 곧 얼굴 생김새나 풍채와 같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용모, 즉 겉모습을 보지만, 그러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심'은 히브리어로 ‘레브’입니다. 직역하면 '마음'(heart)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외적인 용모가 아니라 그의 속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성계에 탈코르셋 운동이 번지고 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단체 관람하였는데, 스칼렛이 자신이 연모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보정속옷을 입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하녀가 뒤에서 허리 띠를 졸라매고 스칼렛은 한껏 숨을 들이쉬며 힘들어하는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그 때 처음으로 여성들이 자신의 몸매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보정 속옷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과도한 코르셋을 착용하는 여성들 중에 몸에 무리가 되고 심지어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 코르셋을 벗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텔레비전의 뉴스를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진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동안 여성 앵커가 안경을 쓸 수 없었던 것은 시력이 좋은 사람만 뽑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화장 노동’, ‘꾸밈 노동’이라는 용어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여성들에게 화장하고 꾸미는 것이 노동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남성들 세계에서도 화장이나 성형, 혹은 몸매를 가꾸기 위한 다이어트나 운동이 관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겉으로 보이는 용모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의 겉으로 보이는 용모, 겉 모습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겉 모습, 신장이나 외모, 그의 옷이나 장신구, 그리고 직업이나 재산, 스펙이나 지위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인간, 즉, 신앙과 인격, 겸손과 진실성 등, 성품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H 팩터의 심리학>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 동안 학자들은 인간의 성격 요소로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여 왔습습니다. 정서성(Emotionality), 외향성(Extraversion), 원만성(Agreeableness), 성실성(Conscientiousness), 개방성(Openness to Experience)이 그 다섯가지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여섯 번째 요소로 ‘H 팩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H 팩터’는 영어의 ‘H’로 시작되는 두 가지 단어, 즉 정직성-겸손성(Honesty-Humility)을 말합니다. 인간의 성격 요소 가운데 이 ‘정직성과 겸손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외향성은 높은데 정직성 즉 H 팩터가 낮은 사람이 있습니다. 정직하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않은데 매우 외향적인 사람,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 많습니다. 성실성은 높은데 정직성이 낮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실하기 때문에 자기 관리도 잘하고, 학점 관리도 잘 하지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외면만 보고 내면을 보지 못합니다. 그의 외향적이고 친화적인 성경, 그럴 듯한 스펙에 속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 눈에 보기 좋아, 지도자가 되었을 때, 사회는 병들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내면의 정직성과 겸손함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선택할 때, 그의 외적인 조건들만 보고 기대를 하지만, 그러나 그의 속 사람을 알고 나면 실망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 인상으로는 별로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인격과 성품에 깊이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무엘의 눈에는 엘리압이 첫 눈에 들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아비나답도 아니었습니다. 삼마도 아니었습니다. 일곱 명의 아들들을 차례대로 만나보았지만 하나님은 아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들들이 이들뿐인가? 또 다른 아들은 없는가?” 이새가 말했습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가장 어리고 키가 작은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새는 이 막내를 사무엘에게 소개조차 하려 하지 않고, 형들을 대신하여 양을 돌보도록 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보니,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총기어린 아름다운 눈을 가진 홍안의 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뜻밖이었습니다. 너무 어렸습니다. 키 작고 얼굴이 붉은, 그러나 눈에 총기가 아름다운 이 아이에게서, 왕에게 요구되는 어떤 귄위나 카리스마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들이 모인 가운데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한 것과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영은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을 번뇌하게 하였습니다. 불안해 하고 번뇌하는 사울을 위하여 신하들이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곁에 두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악령이 역사하고 번뇌가 찾아올 때 수금으로 연주되는 음악을 들으면 시원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음악치료 요법을 권한 것입니다. 사울이 좋게 여겨, 그런 사람을 데려 오라 하니, 한 신하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16장 1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본즉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여호와가 그와 함께 계신 것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에 감동된 증거입니다. 성령이 함께 계시는 증거가 그의 인격과 그의 삶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의 안에 내주하시며 그로 인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고 내가 그 영에 감동되어 오늘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영에 감동되어 오늘을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의 외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과연 성령이 살아계신지, 그것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며 그 감동이 내게 있는가? 정직성과 겸손함이 나에게 있는가?’ 오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할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