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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적 이타성
흡혈 박쥐(vampire bat)는 소나 돼지 같은 대형 포유류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 하지만 사냥(?)에 나선다고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피를 먹지 못하고 돌아오는 때도 있다. 흡혈 박쥐는 몇일만 피를 먹지 못하면 죽는다.
피를 먹지 못한 흡혈 박쥐에게 다른 박쥐가 피를 토해서 나누어 주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친족에게 나주어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친족 선택으로 잘 설명된다. 하지만 일부의 사례는 친족이 아닌 사이에서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족이 아닌 사이인 경우 피를 받은 것과 피를 주는 것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보통 피를 받은 쪽이 다시 상대에게 피를 주는 것이다. 일종의 우정 또는 은혜 갚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논의의 편의상 친족 선택으로 설명되는 피 나누어주기는 다수의 사례를 차지하지만 무시하기로 하겠다. 만약 친구를 사귀어서 자신이 운이 없을 때 피를 받고 상대가 운이 없을 때 피를 나누어 줄 수 있다면 둘 모두 이득을 볼 것이다. 실제로 흡혈 박쥐는 그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것 같다. 이것을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는 상호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이라고 불렀다. ‘호혜적 이타성’이라고도 번역하지만 나는 ‘상호적’으로 번역할 생각이다. 왜냐하면 ‘reciprocal punishment(상호적 처벌)’라는 용어도 있기 때문이다.
상호적 이타성이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계 효용(marginal utility)과 관계가 있다. 이미 어느 정도 배가 부른 흡혈 박쥐에게는 한 모금의 피가 그리 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사 직전인 경우에는 똑 같은 한 모금이 매우 큰 가치가 있다. 따라서 오늘 A가 B에게 한 모금의 피를 주고, 며칠 후에 B가 A에게 한 모금의 피를 주었을 때 얼핏 보면 아무런 이득이 없는 것 같지만 한계 효용을 생각할 때에는 서로에게 엄청난 이득이 될 수 있다. 만약 오늘은 B가 아사 직전에 있고 며칠 후에는 A가 아사 직전이라면 말이다.
서로가 상부상조의 정신을 발휘한다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이것은
트리버스가 1971년에 「The evolution of reciprocal altruism(상호적 이타성의 진화)」를 발표하기 전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무임승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흡혈 박쥐의 무리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이 자신이 아사 직전일 때에는 남이 주는 피를 날름 받아 먹고, 남이 아사 직전일 때에는 못 본 척한다고 하자. 어떤 박쥐가 상대적으로 더 성공할까? 이기적인 박쥐가 성공할 것이다. 결국 이기적인 표현형이 그 개체군에 퍼져서 상부상조의 정신은 사라질 것이다.
트리버스의 업적은 이런 무임승차의 문제를 명확히 하고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지를 밝혔으며 그것을 동물계의 실제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진화론자들은 위에서 말한 싸가지 없는 개체를 사취자(cheater)라고 부른다. 사기꾼이라고 번역하지만 사기꾼은 의식적으로 사기를 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사취자로 번역할 것이다.
사취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누가 싸가지 없는지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그 싸가지 없는 자가 아사 직전에 있다 하더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된다. 모두가 이런 전략(상대가 착하면 도와주지만 상대가 싸가지 없으면 도와주지 않는다)을 취한다면 싸가지 없는 자가 끼어들기가 힘들다.
로버트 알섹로드(Robert Axelrod)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이것을 보여주었다. Tit For Tat(눈이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은 상대가 착하면 나도 착하게 대하고, 상대가 이기적이면 나도 이기적으로 대한다. 그리고 처음 상대를 대할 때에는 선의로 대한다. 어떤 개체군에서 거의 모든 개체들이 Tit For Tat 전략을 쓴다면 이기적인 전략을 쓰는 개체는 성공하기 힘들다. 처음에는 선의로 대하는 남들을 등쳐 먹고 살 수 있겠지만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왕따 당하기 때문이다. 왕따 당하면 우정의 이득을 누릴 수 없다.
첫째, 각 개체는 개체군 안에 있는 다른 개체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누가 싸가지 없는 자인지를 알 수 있다.
둘째, 개체는 다른 개체들의 이전 행동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누가 싸가지 없는 행동을 했는지를 기억해 누어야 그런 개체를 회피할 수 있다.
셋째, 같은 개체들이 장기간 상호작용해야 한다. 몇 번의 상호작용으로는 상부상조의 이득을 얻기 힘들다. 사취자를 가려내고 착한 개체끼리 서로 도와주어서 이득을 얻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여러 조건들이 있기 때문에 자연계에 상호적 이타성은 친족 선택만큼 흔하지 않다. 특히 상당한 기억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보통 포유류 같이 뇌가 큰 종에게서 관찰된다.
인간은 친구를 사귄다. 즉 우정이 있다. 트리버스는 이 우정이 상호적 이타성 진화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우정의 존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지 못했는데 트리버스가 제대로된 진화론적 설명을 찾아낸 것이다.
인간의 우정은 상호적 이타성 모델에 잘 들어맞는다.
첫째, 인간은 각각의 다른 인간들을 구분할 줄 안다.
둘째, 인간은 다른 인간들이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기억할 줄 안다.
셋째, 사냥-채집 사회의 인간은 같은 사람들과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상호작용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의 과거 행적에 따라 그 사람을 대한다. 싸가지 없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착한 사람과는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인가? 은혜를 갚을 수 아는 사람이 바로 착한 사람이다. 반면 배은망덕한 사람은 싸가지가 없는 사람이며 진화론자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취자다. 인간에게는 배은망덕에 대한 분노 메커니즘이 있어서 사취자에게 계속 당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인간에게는 고마움이라는 감정이 있어서 착한 사람이 되게 한다. 만약 은혜를 계속 갚지 않는다면 결국 사취자로 찍혀서 왕따 당할 것이다.
인간의 우정 메커니즘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착하게 살자 그리고 사취자를 회피하자”라는 단순한 알고리즘이 아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면 우정이 매우 정교하게 조율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배은망덕의 죄를 저질러서 사취자로 찍혀서 왕따 당할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에게 간과 쓸개를 다 빼줘서 결국 손해를 보게 될 수 있다. 위에서는 설명의 편의상 “착한 전략”과 “사취자 전략”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세상 일은 보통 이분법적이지 않다.
착함의 정도는 스펙트럼을 이룬다.
만약 자신이 어떤 사람을 얼마나 도왔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도왔는지를 정확히 기억해 두지 않는다면 미묘하게 착취당하거나, 미묘한 사취자로 몰릴 수 있다. 따라서 단지 누가 자신을 도왔는지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가 자신을 얼마나 도왔는지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즉 단지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고마움의 정도도 기억되어야 한다. 별로 배고프지 않을 때 받은 고기 한 점과 굶어 죽기 직전에 받는 고기 한점의 경우 서로 다른 크기의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내가 상대방에 베풀 때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로 양적인 크기까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친족 선택 이론이나 상호적 이타성 이론을 접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고귀한 특성을 냉소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기겁을 한다. 자식에 대한 엄마의 무한해 보이는 사랑과 친구를 위한 희생이 결국 이기적 유전자를 위한 것이었음이 기분 나쁜 것이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고 진리가 바뀌지는 않는다. 모정이 아무리 고귀해 보여도 그것이 이기적 유전자 즉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또한 모정을 고귀하게 느끼는 감정조차도 아마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일 것이다.
우정이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라고 해서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를 위해 의식적으로 계산을 하면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저 친구는 받기만 하고 은혜를 잘 안 갚는 경향이 있으니까 결국 저 친구과 계속 사귀면 나의 이기적 유전자의 복제에 지장이 있겠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다. 친구의 배은망덕의 정도에 대한 계산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배은망덕의 정도가 심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고 화가 많이 나면 절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내가 저 친구에게 받기만 하고 주기만 하면 결국 사취자로 찍혀서 나의 이기적 유전자의 복제에 지장이 있겠군”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계산 역시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도움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고마움을 크게 느낄수록 나중에 그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더 크게 느낄 뿐이다.
인간은 왜 먹는 것일까? 먹지 않으면 에너지를 얻을 수 없고, 에너지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궁극 원인(ultimate cause)에 대한 설명이다. 배고프기 때문에 먹는다는 답도 맞는 답이다. 이것을 근접 원인(proximate cause) 또는 근접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이다. 우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 인간은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은혜를 갚으며, 봉이 되지 않기 위해 사취자를 경계한다. 이것은 궁극 원인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도움을 받으면 고마움을 느끼고, 상대가 배은망덕하면 분노를 느낀다. 이것은 근접 메커니즘이다. 둘 다 맞는 설명이다. 설명의 수준이 다를 뿐이다. 진화 심리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상호적 이타성의 설명이 냉소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궁극 원인에 대한 설명과 근접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을 혼동하기 때문인 것 같다.
궁극 원인은 근접 메커니즘의 존재 자체를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배고픔이라는 근접 메커니즘이 있는데 그것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에너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고마움, 배은망덕에 대한 분노 등의 근접 메커니즘이 있는 이유는 트리버스가 밝힌 상호적 이타성의 논리 때문이다.
친족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인 반면 친구에 대한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다. 자식이 싸가지 없다고 자식과 절교하는 부모는 거의 없는 반면 친구가 싸가지 없으면 보통 절교한다. 부모는 자식이 어떻게 행동하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반면 친구는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조건적으로 사랑한다. 이것이 친족 선택의 논리와 상호적 이타성의 논리가 다른 점이다.
친족 선택의 경우 친족끼리는 유전자를 더 많이 공유하기 때문에 사랑이 생기는 것이다. 친족이 싸가지 없다고 친족 안에 있는 유전자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모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식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반면 상호적 이타성의 경우에는 유전자의 공유 때문에 사랑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계 효용의 법칙 때문에 발생하는 상부상조의 이득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가 나를 더 이상 도와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친구로서의 가치가 없다.
만약 상대가 싸가지 없다면 나의 도움을 받기만 하고 내가 어려울 때는 도와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싸가지 없는 친구와는 절교하는 것이 유리하다. 또한 만약 상대가 너무 무기력해서 나를 도와줄 능력이 없다면 그런 친구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매우 무능력해진 친구와도 대체로 절교하는 경향이 있다.
친족 선택의 논리와 상호적 이타성의 논리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친족끼리는 친족 선택의 논리만 작용하고 상호적 이타성의 경우에는 친족이 아닌 사이에서만 작동한다고 보면 오산히다. 친족이 아닐 때에는 오류가 개입되지 않는 한 친족 선택의 논리가 작동할 수 없다. 반면 친족 사이에서 상호적 이타성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
형제 사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더 친하고 어떤 경우에는 덜 친하다. 형제끼리라고 하더라도 매우 싸가지 없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기피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상호적 이타성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족이 아닌 경우에는 매우 싸가지 없는 사람과 완전히 절교하지만 친족끼리는 완전한 절교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친족 선택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Tit For Tat 전략은 처음 대할 때에는 선의로 대한다. 그러다가 상대가 싸가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두들겨 패는 식으로 처벌하거나 회피한다. 이 때문에 사취자에게는 착취의 여지가 생긴다. 만약 전체 개체군 중 착한 개체가 절대 다수이며 사취자가 극소수라면 사취자들이 이 “처음 대할 때의 선의”만 거두어들여서 남을 등쳐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정신병질자(psychopath)를 거칠게 정의하자면 매우 싸가지 없는 인간이다. 일부 진화 심리학자들은 정신병질자가 사취자 전략이라고 본다. 만약 인구의 1~2% 정도가 사취자 전략을 취한다면 남들의 선의를 등쳐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그럴 듯한 가설이다.
하지만 인간 정신병질이 진짜 자연 선택의 결과 잘 설계된 전략인지 아니면 뭔가 고장이 난 것인지를 가려내려면 골치 아픈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아직까지 누구도 그것이 전략인지 고장인지 여부를 설득력 있기 입증한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