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16-22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다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6: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6: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6: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잠시 보지 못했다가 다시 보게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게 될 때에는 너희가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근심합니다.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기대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 육신의 근심 염려꺼리를 해결해 주시지 않고 떠나가신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인데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뜻과 내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 믿고 있지는 않는지요.
영혼의 구원자인 예수보다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성경의 예를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하심이 어느 때입니까?(행1:6) 질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보고도 여전히 세상의 회복을 꿈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 차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언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근심하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고는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제자들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마치 여자가 아이를 낳을때가 되면 그 출산의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하나 그러나 아이를 낳게 되면 그 고통을 아이 낳은 기쁨으로 잊어 버리게 되듯이 너희의 근심들이 오히려 기쁨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기뻐하였습니다(요20:19-20).
그리고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여 구하게 되는 것들이 자신들의 욕심이나 세상의 것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께 구하신 것들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구한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고 그 응답을 받으니 그 기쁨이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얻어 맞고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편지들이 옥중서신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다가 매맞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4절에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하는 것입니다.
무슨 기쁨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9절을 보면- 자신의 약함 자신의 핍박 고난중에 오히려 기뻐합니다.
우리가 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근심과 고민거리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안타까움, 주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근심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어떻게 사람이 밥만 먹고 삽니까?
다른 아이들 과외 시키면 우리 아이도 과외 시켜야지요?
100세 시대에 노후도 준비해야지요?
그러니 어찌 걱정이 안됩니까? 걱정 되시지요.
그런데 적어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러한 경쟁에서 초연할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디도서 1:16절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입으로는 예수님을 제일이라고 하면서도 행위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니 가증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근심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후7:10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금 저나 여러분이 과연 무엇을 위한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의 근심이 나중에 기쁨이 되는 근심입니까?
아니면 지금의 근심이 나중에 사망에 이르는 근심입니까?
우리의 근심은 주로 세상의 것에 대한 근심일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그 뜻에 대한 근심이 얼마나 됩니까?
20절에 보면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근심거리가 되는 일을 없애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근심거리고 염려할 것 밖에 없습니다. ㅡ 제자들
하지만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질 때 그들에게서 근심 대신에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시 태어났는데 옛사람의 생각 그대로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새롭게 태어난 사람답게 새로운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좋은 것, 선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며 선한 것이 아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볼 수 없었던 하늘의 귀한 것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주저앉지 마시고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일 때문에 근심되십니까?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해 근심되십니까?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근심과염려 그리고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말씀을 깨닫게 되므로 영적인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