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의 환국정치와 왕권강화
9밤 전명수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하였던 기간이 숙종시대라 할만하다. 그것은 숙종이 비상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 안정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한 사회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조선사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왕이었다. 그런 뒷면에는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문제로 숱한 옥사를 유발하여 성군의 치세에 흠결을 남기기도 하였다.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명성왕후 김씨의 소생이며 1661.8.15 경덕궁에서 태어났다. 1667년 7세 때 세자로 책봉 되었고 1674년 8월 현종이 죽자 14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라 바로 친정을 시작한 조선 제19대 왕이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현종 때부터 계속되어오던 예송문제(禮訟問題)에 휘말리게 되었다. 1674년 정월에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조대비가 입어야할 복상문제로 서인과 남인들의 논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서인은 대공복인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복인 1년 복상을 주장하였는데 당시의 현종은 남인이 주장한 1년 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현종이 죽고 숙종이 등극하자 서인의 송시열이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와 기호학파와 영남학파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전국의 유생들은 예론시비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에 숙종은 예론정쟁이 발발하자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1년상)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을 유배시켜 버렸다. 이로 인하여 서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조정은 남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하여 남인의 세력을 견제해 나갔다. 김석주는 본래 서인출신이었는데 제2차 예송 때 남인 쪽을 지지한 사람이다. 서인 송시열을 제거하자 서인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고 말았다. 이에 김석주는 다시 송시열의 세력과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내려고 하였는데 삼복의 변이란 계략을 짜내게 되었다. 이것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삼복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고변을 한 사건을 말한다. 이는 물론 김석주의 사주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고 정원로가 고변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인의 허적을 비롯한 그 세력들이 정계에서 밀려나가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한다. 이 경신환국을 통하여 다시 서인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이 아들 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윤을 원자로 삼고자하였으나 서인들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하고 나섰고 숙종은 이를 무시하고 5일 만에 윤을 원자로 확정하고 생모 장옥정을 빈으로 승격시켰다. 서인 송시열은 왕자 윤을 원자로 삼는 일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숙종은 송시열을 사사시키고 노론계의 수많은 정치인들을 유배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인현왕후 민씨는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중전자리에 앉고 원자 윤은 세자로 책봉 되었다. 이렇게 노론계가 축출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의 주도권은 남인인 민암, 이의징 등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 서인 대출척 사건을 ‘기사환국’이라한다.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민암, 이의징 등은 페비 복원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시키고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었던 중이라 민암 등 남인들을 축출해 버렸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하고 폐비 민씨를 복원시키고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준, 김익훈 등의 관직을 복구시키고 소론계의 인사를 등용시켰다. 그리하여 조정은 남구만 등 소론계열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한다.
갑술환국으로 빈으로 강등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하여 안간 힘을 쓰게 되었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신당이 발견 되었는데 이곳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민씨를 저주하며 죽기를 빌었고 이 사실을 숙종이 알고 분노하여 희빈 장씨를 자진케 하였으나 듣지 않아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궁녀 및 무속인을 국문토록 하였다. 이 때 소론 세력들은 세자를 위하여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 소론 세력을 귀양보거나 파직시켜 조정에서 제거해 버렸다. 이로써 다시 노론계 인사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였다. 이 사건을 무속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무고의 옥(巫瞽의 獄)’이라한다.
이렇게 수많은 당쟁은 숱한 명사들을 죽게 하였고 붕당정치의 폐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하여 벌린 환국정치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숙종은 왕실의 권위와 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환국정치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왕은 군주의 고유권한인 용사출척권을 행사하여 정치국면의 전환을 꾀함과 동시에 붕당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시대에는 대신들 간에 정쟁이 격화되었지만 왕권이 강화되어 사회전반이 안정된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대동법의 전면실시, 전국에 걸쳐 양전의 종결, 화폐주조 사업의 활성화, 상평통보의 통용, 수많은 서적발간 보급, 압록강 연변의 경계확정, 사육신과 단종의 복위 등 수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렇게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사회를 안정시켰던 숙종은 1720년 재위 46년10개월 만에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9명의 부인과 6남2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명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에 있다.
첫댓글 조선나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붕당정치로 국력이 약화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네요. 정말로 안타깝네요. 현대의 정치가들이 역사를 바르게 배워 정치하는데 참고를 해야 될 것 같네요. 잘 읽고 물러갑니다. 송하님 행복하세요.
사색당파, 붕당정치, 건전하고 발전적으로 운용하였더라면 이상적인 정치가 돠었을 텐데 사리사욕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고 벡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읽어 주시어 고맙습니다.
숙종하면 생각나는게 장희빈 밖에 없었는데 서인과 남인을 오가며 어느세력한테도 완전히 휘둘리지 않고 왕권을 잘유지하셨네요 재임 기간도 영조임금 만큼은 않되지만 오래계셨네요 역사공부 하고 나갑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찾아 주시어 고맙습니다.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숙종시대에 서인과 남인을 오가면서도 정치 세력을 굳건이한 숙종은 수많은 정적을 사사하고
숙청하며 수만은 인재들이 죽게 대네요 현대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일이 업서야 겟지요
역사 편집 잘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찾아 주시어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