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국제 대회 통산 51회, 슈퍼 750 이상 최고 등급 대회 31회째 우승을 달성한 안세영
이번 안세영의 세계선수권 우승은 배드민턴 역사에서 엄청난 의의를 갖는다. 지금까지 국제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던 선수는 올해 은퇴한 남자 단식의 빅토르 악쎌슨이었는데, 안세영이 이번 우승으로 불과 24세의 나이에 51이라는 그 거대한 숫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점이다.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중국 마스터즈에서 우승하는 순간 안세영은 남녀를 통틀어 역사상 가장 많은 국제 대회 우승 기록을 가진 선수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지난 6월의 인도네시아 오픈 우승 때 여자 단식의 전설 인도네시아의 수시 수산티가 보유하고 있던 슈퍼 750 이상 최고 등급 대회 우승 횟수 30회와 동률을 이뤘던 안세영은 이번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31번째 최고 등급 대회 우승을 달성하며 이 기록에서 이미 전인미답의 지위에 올라섰다(대다수의 최상위 랭커들조차 평생 한 번 우승하기도 힘든 대회들인데 말이다). 다음 주에 있을 중국 마스터즈에서 우승하면 이 숫자는 다시 32로 바뀌고,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하면 33으로 바뀐다. 그야말로 전설은 현재 진행형이다.(이와 관련해서는 안세영이 인도네시아 오픈에서 우승한 직후 올려진 아래 영상을 참조)
1. 결승전 하이라이트 영상 및 안세영의 승인(勝因)
AN Se Young (KOR) vs Akane YAMAGUCHI (JPN) | World Championship 2026 Badminton - YouTube
안세영에게 왕즈이나 천위페이와의 경기는 거의 항상 4단 기어로 달리는 마라톤 혈투의 느낌이라면, 최근 야마구치와의 대결은 5단 기어로 풀악셀을 밟는 속도전이 되곤 했는데,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드민턴 여자 단식 역사상 가장 빠른 스텝 스피드와 가장 완벽한 공·수 기술을 겸비한 두 여왕들의 대결이었던 만큼, 관중들은 랠리 중 잠시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조금도 지루할 새가 없는 최고의 스피디한 명승부가 펼쳐졌다. 그럼에도 승자와 패자는 갈리는 법...... 이번 경기 안세영의 승인(勝因), 다시 말해 야마구치의 패인(敗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른 선수들에게라면 여유 있게 통했을 야마구치의 완벽한 위닝샷들이 엄청난 반사 신경과 코트 커버력을 가진 안세영에게만은 안 통했고, 14cm나 더 큰 키와 더 빠른 스텝 스피드를 가진 안세영의 움직임을 야마구치가 따라잡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을 수 있으리라.
2. 이번 결승전 결과가 의미하는 바 & 전술 변화를 예고한 야마구치
이번 대회 직전(그리고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도) 야마구치는 부상도 없고 최상의 컨디션임을 본인 입으로 밝혔었고, 실제로 준결승까지의 5경기에서 보여준 다른 하위 랭커들과의 압도적인 경기력 차이는 그 말의 진실성을 입증하였다. 그랬던 그녀를 왼발 부상에서 겨우 회복한 안세영이 2 대 0으로 완파한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금까지의 라이벌 관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안세영이 야마구치보다 확실하게 한 단계 위의 레벨에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확인시킨 경기라고 봐야 하리라.
위 인터뷰 기사에서 야마구치는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속도전 대신, 왕즈이처럼 긴 랠리를 통한 지구전으로 가볼까 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별짓을 다 해봤지만 자신이 애용하던 기존의 전술로는 도저히 안세영을 못 이기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다.(물론, 왕즈이나 천위페이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듯, 긴 랠리 게임으로 간다고 해서 안세영을 이긴다는 보장은 전혀 없을 거라는 게 문제지만, 현명한 야마구치가 속도전과 지구전을 어떻게 잘 조합해서 새로운 전술을 들고 나올지 흥미로운 대목이다.)
안세영은 귀국 인터뷰에서 2023년의 세계선수권 첫 우승 때보다 이번 우승이 더 기뻤다고 밝혔는데, 아마도 왼발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증을 참아가며, 그것도 거의 두 달 가까운 실전 공백을 극복하고(한 달 전 일본 오픈에서는 달랑 1경기밖에 뛰지 않았으니) 거둔 우승이어서가 아닐까 한다. 그것도 야마구치와 왕즈이라는 강력한 라이벌들이 부상도 없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한 대회에서 그들을 모두 2 대 0으로 완파하고 우승한 것이니, 이는 안세영에게는 커다란 자신감을, 두 라이벌들에게는 엄청난 좌절감과 안세영에 대한 공포감을 안겼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3. 그럼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왕즈이 & 아시안게임 2연패를 향해 안세영이 놓쳐선 안 될 포인트
안세영의 이번 세계선수권 우승의 최대 도우미는 16강전에서 왕즈이의 양쪽 허벅지를 박살 내준 인도의 푸싸를라 씬두였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왕즈이가 푸싸를라 대신 좀 더 수월한 상대를 만났더라면, 그래서 양쪽 허벅지가 온전한 상태로 4강에 올라와 안세영과 대결했다면 어땠을까를 안세영은 꼭 생각해 봐야 하리라. 그랬다면 왕즈이의 스텝은 훨씬 더 빨라서 안세영의 위닝샷들을 좀 더 많이 수비해 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랠리가 훨씬 더 길어지면서 지난 전영 오픈 결승전처럼 안세영이 먼저 지치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스매시도 훨씬 날카롭게 안세영을 위협했을 테니, 아직 완전치 않은 안세영의 왼발 상태를 감안했을 때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두 다리가 한없이 무겁고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준결승전 막판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왕즈이의 독기와 집념 또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적어도 왕즈이의 수비력과 지구력, 그리고 정신력만큼은 이제 안세영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안세영의 다리나 발 상태가 조금이라도 안 좋을 경우, 그래서 정상적인 발놀림이 불가능할 경우엔 언제든 승리를 빼앗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그녀다.
최근 2~3개월 사이에 수비력이 급격히 향상된 푸싸를라 씬두는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안세영의 2연패에 강력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안세영에게 가장 좋은 대진표는 이번 세계선수권처럼 8강 이전에 왕즈이와 푸싸를라의 대결이 짜이는 것이고, 최악의 대진표는 안세영 자신이 8강 이전에 푸싸를라를 만나는 것이다. 안세영이 그 경기에 질 리는 없겠지만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왕즈이가 그랬듯이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채 라이벌들(왕즈이, 야마구치, 천위페이)과의 다음 경기에 나서야 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5월말에 있었던 싱가포르 오픈에서 안세영은 8강에서 푸싸를라를 만나 2 대 0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녀의 강력한 공격과 향상된 수비에 고전하며 48분간 혈투를 벌인 끝에 오른쪽 무릎 부상이 재발하면서 그 다음 주에 이어진 인도네시아 오픈까지 계속 힘겨운 경기들을 치러야 했다.
다음 주에 있을 중국 마스터즈에는 푸싸를라가 불참하는데, 아마도 이번에 왕즈이와의 혈투에서 그녀 또한 심각한 데미지를 입었기에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충분한 재활 기간을 갖기 위함일 것이다. 즉, 아시안게임 때는 다시금 그녀가 100%의 강력한 몸 상태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고, 우승을 노리는 모든 최상위 랭커들에게 가장 껄끄러운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안세영이 준결승에서 야마구치를 만나느냐 천위페이를 만나느냐보다 그 이전에 푸싸를라를 만나느냐 안 만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변수일 수 있다. 다행히 대진 추첨에서 푸싸를라가 왕즈이와 같은 조합으로 묶인다면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이 경우 푸싸를라를 만나더라도 결승에서나 만날 테니까), 불행히도 안세영과 같은 조합으로 묶일 경우엔 푸싸를라를 조금이라도 쉽게 요리할 수 있는 특단의 전술을 반드시 생각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개인전에 앞서 열리는 단체전에서도 가급적 인도를 만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푸싸를라와 자주 만나서 이득될 건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