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꽃향기는 사랑
요하나의 촉은 예민했다.
제인의 눈빛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 보았던 여리고 순수한 소녀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장성한 숙녀의
그윽한 연정의 눈길만 가득해서 그때처럼 좋아하느냐고 물었던 것이었다.
제인은 요하나에게 심중을 들켜버렸다. 사랑의 고픔은 주머니에 송곳처럼 아무리 숨겨도 뚫고 나오기
마련이었다. 제인은 소심하고 눈치도 없어 보이는 벤이 들으라는 듯 대답을 했다.
“언니 그때처럼 이라니 언제부터요?”
“숨바꼭질을 할 때 벤을 한번이라도 더 바라보려고 일부러 들켜주었던 거 아니었어?"
"어? 언니 그게 그러니까.....”
“들켜준 것 말고 또 있지, 분명히 나를 찾아 놓고도 못 본척하고 벤을 찾으러 다녔잖아?”
“어? 그게......”
“그뿐 인줄 알아? 숨을 장소도 많은데 벤 뒤를 따라가 같은 곳에 숨었던 이유는 무얼까?”
“아이 언니도~”
요하나는 벤을 제인에게 엮으려는 듯 말하고, 제인은 적나라하게 들켰으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벤이 소심해서 먼저고백도 못할 것 같아 적극적으로 다가가려고 했는데 언니가 숨바꼭질
이야기로 간접고백을 하고 말았다.
제인은 여기까지 온 목적을 달성하자 한편은 기뻤지만 한편은 쑥스러웠다. 벤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거짓말을 하다가 들킨 아이마냥 얼굴이 붉어져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키예프 삼촌에게 갔다.
그 모습에 요하나와 제인은 서로 눈을 맞추고 ‘쿡!’ 웃었다.
키예프와 숙모는 체르노빌을 보자 궁금해서 물었다.
“처음 뵙는 분인데....보라색차를 타고 오신 주상절리 관광객인가요?”
“예?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루카스는 그제 요하나와 결혼한 신랑 우크라이나 청년 체르노빌이라고 소개를 했다.
곁에 서있던 제인은 깜짝 놀랐다. 비록 사촌의 자녀라지만 이런 오지에서 젊은 남녀인 벤과 요하나 언니가
부부가 되었으면 어쩌나하고 마음을 졸이기도 했는데 무척 반가운 말이었다.
이젠 벤과 함께라면 특별 대접을 받는 조향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제인은 무인도와 같은 이곳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걸 묻기엔 너무 당돌한
것 같아 망설일 때 루카스가 한나에게 말했다.
“피난 중에 고장난차를 고치고 있던 빌 가족을 만났는데 고향 체르노빌까지 데려다 준다고 해서 피난
동지가 되었어요.”
“아 그럼 그때 요하나와 빌이 사랑하게 되고... 아니 그런데 왜6년이나 지나 결혼을 했어요?”
“무척 궁금하지요? 러브스토리가 너무 긴데 극적인 이야기는 날이 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이었다. 오스카는 한 때 친딸 요하나의 러브스토리에 과묵함도 잊고 루카스
대신 무용담을 꽃피웠다.
“키예프. 우리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당도 했을 때 우크라이나 군인들과 차를 타고 좆고 쫓기는 총격전이
벌어졌지. 그때 요하나가 운전하는 차에 탄 빌은 우크라이나 장군의 경호원을 했던 특등사수였지.”
“와우 특등사수라면 상대가 안 되었겠는데요?”
“그렇지. 빌은 요하나와 우리 가족을 지키려고 그 엄청난 사격 솜씨로 두 명을 제거 했는데 우크라이나
장교 오데사의 쌍권총에 총상을 입고 말았지.”
“예? 오데사 그분?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오데사장교는 군 시절 교관이고 그의 도움으로 치료차 우크라이나에서 헤어졌는데 빌이 6년 만에
찾아왔지.”
“와우 자네는 우리 요하나와 가족을 위해 신께서 보내주신‘우세종의 출현’이었어. 고맙네.”
“아닙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삼촌과 숙모는 빌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오스카는 딸을 향한 입담이 쉬지 않았다. 자녀의 행복이 곧
부모의 행복이었다.
“그리고 애타게 기다리던 빌은 오지 않고, 벤이 요하나와 결혼 결정을 하러간 여행에서 돌아와 결혼
날짜를 받아 두었는데 디데이 4일전에 빌이 숲정이에서 전통목걸이 함 속에 담긴 마리아님 편지를 들고
찾아 왔다네.”
“예? 폭격으로 부서진 집에서 26년 전 편지를 찾아왔다고요? 와 정말 대단한 친구네요. 요하나를 엄청
사랑했나 봐요. 하하하”
리나는 키예프 부부에게 편지를 보여 주었다. 삼촌부부는 물론 제인도 편지를 받아 읽고 쌍둥이 남매라는
사실에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남매의 근친결혼을 막은 체르노빌이 고맙고 숲정이
1호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하며 힘찬 박수를 보냈다.
한나는 이때다 싶었다. 자신이 온 목적, 숲정이 가족 제2호를 떠올렸다. 그리고 제인과 함께 오게 된
이유를 가족에게 설명했다.
“제인이 벤을 생각하면 늘 꽃향기가 난다고 했거든요? 그때 마침 벤이 왔고요.”
“숙모님. 그건 조향사가 향수를 많이 다루니까 몸에 배어서 나는 것이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예? 그럼 뭐에요?”
체르노빌이 이때다 하고 대화를 끊고 들어갔다. 자신이 목걸이 함을 찾아와서 벤이 결혼을 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한방에 날려 버릴 방아쇠찬스라고 생각했다.
“숙모님. 저는 숙모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도 요하나와 헤어진 6년 동안 한때 삶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요하나를 생각하면 수선화 향기가 진하게 났거든요.”
가족들은 이미 아는 이야기였지만 제인도 그랬다는 말에 급 화색이 돌고 이자벨라가 말했다.
“뭐야 여기나 저기나 남녀가 좋아하면 꽃향기가 나다니 희한한 일이네요. 신께서 요즘 젊은 사람들
에게는 사랑하면 꽃향기가 나는 선물을 주셨나 봐요 우리 때는 설레기만 했는데요.”
모두가 한바탕 웃고 제인의 ‘꽃향기 사랑’에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숙모는 더욱 신바람이 났다.
신바람은 이자벨라와 죽이 맞는 동급이었다. 폭탄 발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제인을 데리고 온 제목적은 벤과 짝을 지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러면 머지않아
제2의 숲정이에 아가의 울음소리도 들리겠고 제 생각이 맞고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고 생각되시면
아멘으로 화답합시다.”
“아멘~”
요하나와 체르노빌이 제일 큰 목소리를 냈다. 아멘이라는 거절할 수없는 확답에 벤과 제인은 얼굴이 화끈
거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은 좋은 결실을 새에게 들켜 파 먹힐까봐 감추려고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
였다. 한나는 결실을 확인이라도 하듯 제인에게 물었다.
“제인, 꽃향기의 주인공을 동쪽에서 만났는데 독일로 따라가지 않고 여기에 남을 수 있어요?”
제인은 이미 수없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떠나온 마당에 숨바꼭질처럼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벤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들켜주었던 것처럼 숨김없이 드러낼 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숙모님. 제가처음부터 숲정이 사람이었어요. 늘 숲정이가 그리웠고요. 그래서 여기서 특별한 제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살고 싶어요.”
리나가 말했다.
“능력? 여기서 무슨 능력? 우리처럼 채식 음식도 익숙하지 않고 여러모로 어려울 텐데?”
제인은 자신을 받아주는 가족들의 승낙에 힘을 얻어 장황하게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향을 연구했는데 이젠 이 숲에 많은 나무와 꽃 잎사귀와 열매 이런 것들의 향을 추출해서
좋은 천연 향수를 만들고 싶어요.”
“제인~ 그럼 벤보다 향수가 먼저라는 이야기야?”
“그건 아니에요. 벤과 제 이름을 걸고 각종천연 향수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싶어요. 그리고 벤이 지난번에
왔을 때 저에게 지독한 감기인지 향기인지는 몰라도 그날 너무 강력한 충격을 받아서 향기를 전혀 맡지
못했던 일이 있었어요. 조향사는 향기를 맡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거든요. 그런데 이곳 입구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었는데 코가 뻥 뚫리는 꿈을 꾸었어요.”
“무슨 꿈?”
“그리고 꿈이 깼는데 저의 온몸의 세포가 모두 열렸는지 꽃들의 향기가 제 몸 안으로 파고드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코의 기능이 살아났어요.”
“아멘~”
“그래서 내가 살 곳이 바로 여기다했어요. 하지만 벤과 요하나 언니가 결혼이라도 했으면 어쩌나 했는데
어떻게 제 마음을 아시고, 제 두근거리는 심장을 저격해서 멈추게 해주신 특등사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끝으로 저를 기쁘게 받아주시면 숲정이 가족이 되겠습니다.”
“아멘~”
모두 아멘으로 화답을 하고 체르노빌이 말했다.
“와우~ 명 간증, 명연설로 벤을 향한 명 프러포즈였습니다. 이런 마음은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저도 체르노빌에서 6년 동안이나 요하나를 생각 할 때마다 수선화 향기를 느꼈던 사람입니다.
상대에게서 느끼는 꽃향기는 바로?”
빌이 의문 부호의 말을 남기자 요하나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랑입니다.”
“아멘~ 제인을 환영 합니다. 이제 벤이 대답을 할 차례입니다. 한번 들어 봅시다.”
벤은 소심하고 부끄럽고 쑥스런 트레이드마크 얼굴로 일어났다. 역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제인이
벌떡 일어났다. 제인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벤의 손을 잡았다. 박수가 가득하고 제인은 잡은 손을 마구
흔들자 벤은 요하나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이성의 새로운 꽃향기가 다가왔다.
“제2호 숲정이 가족으로 제인을 환영합니다.”
모레는 키예프부부도 지질학자 일행도 떠나는 날이라 다음날 모두의 축복 속에 결혼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찬송이 울려 퍼지고 축하의 결혼예식이 열렸다. 신혼의 시작은 벤의 방에서 시작했다.
두 가정이 생기니 이마를 맞댄 집을 한 채 더 짓자고 했다. 축하 파티는 하루 종일 열리고 헤이든이
말했다.
“제가 폴란드에 아내 곁으로 돌아가면 기자로 돌아가서 크리스천 숲정이 가족 마을 탄생의 비화와 함께
채식요리를 소개하는 책자를 발행 할 겁니다. 그리고 주상 절리도 소개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저만 며칠 더 남을 겁니다. 책을 집필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데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박수~ ”
키예프와 숙모는 회사일로 소비에트 부랸스크로 가고 지질학자도 돌아가고 헤이든도 며칠을 더 지내고
집필 내용을 싸들고 돌아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제인은 꽃과 풀과 나뭇가지 새 이파리와 이른
열매를 찾아 천연향수 연구에 몰두하고 벤은 보조역할을 즐겁게 시작했다.
그렇게 지난 6개월 동안 헤이든은 책을 발행하고 유럽의 새로운 식사문화의 대 혁명이 일어났다.
헤이든과 그의 아내 니엘 그리고 정보를 제공한 숲정이 식구들을 공동 저자로 올린 책자는 밀리언셀러가
되어 유럽인들의 비만 탈출과 채식 선식 화식은 가난의 굶주림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 봄에 점차 많은 사람들이 주상절리를 찾아왔다. 하지만 살아갈 환경이 너무나 열악해서 관광과
음식에 대한 것만 묻고 배워 돌아갔다. 가족은 정착민이 없어 대 실망이었다. 7개월째가 되고 소비에트
정부에서 관계자들이 대거 찾아왔다. 그들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시작했다.
“지난번에 브랸스크 교수님 일행이 조사한 결과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부에서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돈강’부근까지도 광범위하게 선정된 이상 농사도 불가하니 모두 여기를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