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아니 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학교 들어가면 그의 콘서트에 꼭 가고 싶었는데 그는 무심히도 제가 동의대에 입학원서를 넣었던 그날 자살했죠 그때부터 그가 그리워서인지 계속 듣게 되더군요 가끔씩 노래방가서 주위의 압력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그의 노래를 열심히 부르곤 하죠^^
[강헌이 만난 우리시대 가수]<11> 김광석
풍부한 울림·짙은 시정 동반 비판정신 담은 '민중의 가객'
김광석(1964~96)의 노래들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가로지른 심연의 혼돈 속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는 저 70년대부터 대항문화의 이름으로 대학가에 복류해 온 통기타의 자유주의 정신이 밑그림을 이루고,80년대라는 거대한 함성에 대응하는 신서사이저의 음향이 새로운 음악의 집단적 경험을 제련해 나갈 즈음 그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미지의 무한경쟁으로 치달은 90년대에 이르러 그는 달랑 남은 기타와 하모니카를 두른 몸으로 이미지의 유령들과 외로운 백병전을 전개했다.
따라서 80년대 전반 서울 지역 대학의 노래 동아리인 연합 메아리에서 민중문화운동협의회,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의 활동에 이어 그룹 '동물원'의 보컬리스트로 전신했다가 마침내 직업음악인이 된 그의 어깨에 걸린 노래운동이라는 전력과 모던 포크라는 음악적 과제는 힘겹기 그지 없는 화두였다.
80년대의 비합법,혹은 반합법 공연에서 그의 '녹두꽃'과 '이 산하에'에 매료된 진보적인 대중들은 그가 김민기와 한돌(한의 아는 아래아),그리고 정태춘으로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이어 내려온 '민중의 가객'이 되어 주기를 희망했으며 사랑타령과 탈인간적인 기계적 리듬의 범람에 휩쓸려 버린 비판 정신의 담지자가 되어 주길 기대했다.
그에게 관객은 어떤 존재였을까. '나의 무대를 찾는 관객들은 제각기 다른 기대를 가슴에 안고 무대를 지켜본다. 특히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하는 소극장 무대에선 눈빛만 마주쳐도 관객의 반응을 알 수 있다. 그 각각의 기대를 얼마나 만족시켜줄 것인가가 공연의 관건이다. 그럴 때 나는 광대이다. 무대의 나와 객석의 관객이 혼연일체가 되어 고양될 때 우리는 모두 잠깐이나마 해방을 맛본다. 나의 많은 노래들 중에서 '이등병들의 편지'를 부를 때가 특히 그러하다. 장교로 복무할 때 돌아가신 형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고 와이셔츠를 입은 관객들이 또한 이 노래의 동심원 속으로 합일되는 짜릿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 결국 무대는 '놀' 장소이다.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는 무대는 양쪽 모두에게 의미가 없다. 이 이외의 목적이 무대에선 존재하면 안된다.'
실제 김광석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한 구청이 주최한 초청공연에서 그가 무대에 섰는데 그만 앰프가 타버렸다. 주최측은 사인회나 하고 가라고 했지만 김광석은 '앰프가 없다고 노래 못하는가'하며 관객들에게 앞쪽으로 좁혀 앉으라고 손짓했다. 곧바로 그는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불렀다. '스피커를 통해 증폭된 소리가 울려퍼질 때보다 관객들과의 교감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고 '어쩌면 이것이 진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다.
그렇다. 김광석은 이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 멀고 먼 스타의식보다는 우리의 이웃 오빠와 같은 친근함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섰기에 고인인 지금도 그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저려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김광석은 전투적인 예술가가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모던 포크의 가장 중요한 전제인 싱어송라이터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추지도 못했다. 그의 대중적 명성을 결정지은 노래 역시 동물원의 데뷔 앨범의 첫머리에 실린 '거리에서'(김창기 작곡)와 그의 솔로 2집을 견인했던 '사랑했지만'(한동준 작곡) 같은 풍부한 울림과 짙은 시정을 동반한 러브 발라드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대중음악의 80년대와 90년대에 있어서 그의 의미가 사소한 것으로 제쳐놓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90년대에 이르러 더 이상 소망스러운 공간이 되지 못하고 힘없이 퇴조해 간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의 문화를 움켜 쥐고 중흥의 자양분을 공급했던 것만으로도 평가받아야 한다. 나아가 '더 이상 나의 음악을 포크로 보지 말라'는 강박관념에 기인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댄스 뮤직과 발라드에 밀려 거의 사멸해 가던 모던 포크의 불꽃을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중음악사적 과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의 네번째 정규 앨범과 두번째 '다시 부르기' 앨범은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을 향한 최선의 교두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외롭기 그지 없었던 그의 홀로 서기는 미완으로 끝이 났고 그의 과제는 극히 전망하기 어려운 후계자들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직업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노찾사가 아니라 대학가의 또 다른 감수성을 형상화한 그룹인 동물원이었다. 김창기 유준열 등 재기 넘치는 청년들이 결집한 동물원은 88년의 데뷔 앨범과 그것의 성공을 이어간 이듬 해의 두번째 앨범을 통해 정치적 전복의 감수성이 닿지 못한 또 다른 대안 요청의 빈 공간을 채웠다.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거리에서'와 '변해 가네''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혜화동' 같은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노래는 일상적 구체성과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명징한 이미지를 구축하여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이 된다.
동물원 시절의 이 '작은 아름다움'의 노선은 그가 솔로로 전향한 이후의 그의 음악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따라서 80년대를 마감하는 해에 솔로로 데뷔한 뒤의 그의 음악적 과제는 결국 노찾사와 동물원의 음악적 이념을 발전적으로 결합하는 작업이 될 것임은 거의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이후 두번째 솔로 앨범의 상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모던 포크의 핵심을 향해 신발끈을 조여 맨다.
95년 한국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이 일기 2년 전에 김광석은 3집의 성공을 잇는 '다시 부르기 1' 앨범을 발표한다.
노찾사와 동물원 시절에 부른 노래들과 김민기에 의해 이루어진 '겨레의 노래' 속에 담겨 있던 '이등병의 편지'를 담은 이 음반을 통해 김광석은 '거리에서'의 세계와 '광야에서'의 그것이 모두 자신이 속해 있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가 추구해 나갈 것임을 암묵적으로 밝힌다.
그러나 10여년 만에 마악 자신의 자리를 찾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빈 자리가 더욱 커 보이는 것은 그가 그 동안 수행해 온 수많은 성과보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후의 관문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음악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자격을 지닌 거의 첫번째 인물을 영원히 잃은 것이다.
'난 아직 한번도 제대로 포크 음악을 한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굳이 포크라는 이름으로 나의 음악을 한정시키고 싶지 않다. 나에겐 지나온 시간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훨씬 많으며 음악의 끝없는 가능성을 줄기차게 도전해 보고 싶다. 통기타와 하모니카의 이미지를 언급했는데,일렉트릭 기타도 못해서 안하는 것이지 싫어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 일렉트릭 기타도 꾸준히 연습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 악기로 나의 음악을 보여주고 싶다.' 생전 그가 말한 '언젠가'란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거린다.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