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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은 1857년에 세워졌다.
현재 10만점이 넘는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된 유물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최소한 3~4일이 소요된다
▼ 스핑크스
스핑크스는 이집트 어로는 '살아 있는 형상'이라는 의미의
'셰세프안크(shesep ankh)'라고 불려졌다.
사자의 앞부분과 인간의 머리가 결합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 고대인들이 가장 힘세고 완벽한
사자의 앞부분, 황소의 뒷부분,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구성된 신화적인 동물입니다
▼ 박물관 주위 전시물
▼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 피라미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조물인 피라미드는
고 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2, 352, 000개에서 268만 여개 정도의
각 2.5t 내지 10t 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다.
밑변의 길이 230.3m, 겉표면에 있었던 돌의 17만여개는
아랍과 터키 점령하에서 건축자재로 재활용 되느라 벗겨 졌다.
▼ 옛날 그림과 사진 모음
ㅁ 세계 역사 공부 Subject: 이집트의 빛과 그림자 & 5000년 역사 ㅁ 이집트의 빛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다. 카이로는 아라비아어로 '승리자' 를 의미한다. 카이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전략적인 요충지로, 고대부터 도시가 건설된 것이지만 같은 이유로 지배자의 변동은 심하였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통치할 때에는 문화가 정체하였으나, 1798∼1801년프랑스 점령시대에는 시가가 확장되었고, 영국과 터키의 연합군이 카이로를 프랑스에서 탈환하여 터키의 주권하에 메메드 알리 왕조의 수도가 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영국보호령화(1918), 형식적인 독립(1922) 등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1946년까지 카이로를 지배하였다. 나일강 서쪽에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고, 시내에는 옛 성채와 아므르사원(642)·알아즈하르 사원(970)을 비롯하여 많은 이슬람 사원과 궁전 등의 건축물· 박물관, 그 밖의 문화시설이 있어 관광자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인구 : 690 만 ) 한 장으로 요약한 이집트 5000년 역사 이집트 5000년 역사 중 전반기 2500년간은 이집트인, 그 뒤 2500년간은 외국인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집트는 흔히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린다. 여러 민족과 종교가 이 땅을 스쳐갔다. 5150여 년 전 최초의 통일국가가 일어나고,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한 4700년 전 古王國 시대부터 계산하면 고대 이집트人, 아시리아人, 페르샤人, 그리스人, 로마人, 비잔틴 사람들, 아랍人, 맘루크(투르크계의 노예 戰士), 오스만 투르크人, 프랑스人, 알바니아人, 영국人이 잇따라 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였다. 종교도 자주 바뀌었다. 고대 이집트 종교, 그리스-로마의 多神敎, 기독교, 이슬람이 交代하였다. 지금은 약90%가 이슬람, 10%가 기독교인(콥트)이다. 고대 이집트가 역사에 등장한 서기 전 3150년부터 페르샤의 屬國이 된 기원 전 525년까지 약2600년 간 이집트는 外勢의 침략을 막고 매우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 아시리아가 서기 전 670년에 쳐들어왔지만 곧 토착세력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26세기에 걸친 안정된 문명은 人類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이 기간에 이집트는 가장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문명을 유지하였다. 이집트의 문화재가 많은 이유도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길었던 덕분이다. 그렇게 많이 약탈당하고도 이집트에 남은 遺跡과 유물은 찬란하고 방대하다. 발굴되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페르샤에 정복된 기원 전 525년 이후 약2500년간 이집트는 外勢통치를 겪었다. 이집트 5000년 역사 중 전반기 2500년간은 이집트人, 그 뒤 2500년간은 외국人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1952년 나세르가 주도한 자유 장교단의 쿠데타로 알바니아계 王家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건은 서기 전 6세기 이후 2500년 만에 처음으로 이집트人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 돌아온 것을 뜻하였다. 시저,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연애를 하고, 기원 전 30년에 독사에 물려 자살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人이 아니고 그리스人이다. 이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레미 王朝의 마지막 왕이었다. 프톨레미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다. 대왕이 죽은 뒤 이집트를 차지, 王朝를 세운 뒤 서기 전 305년부터 서기 전 30년까지 275년을 통치하였다. 이들은 그리스人이었지만 이집트化 하여(북방 민족이 중국을 차지한 뒤 중국화 하듯이) 古代 이집트의 전통을 이어갔다. 왕도 고대 이집트처럼 파라오로 불렸다. 이집트의 중요 유적을 복원, 재건한 것은 프톨레미 王朝였다. 당시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지시로 만든 이 도시에는 수많은 학자, 예술人들이 모여 들고 古代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들어서는 등 그리스- 로마 세계의 학문적, 사상적 중심이 되었다. 기원 전 30년에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옥타비우스(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패전, 자살한 사건은 古代 이집트의 종언을 뜻한다. 이집트는 로마영토가 되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는 4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기독교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였다.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고 마가복음을 쓴 마가가 이 도시로 와서 교회를 세웠다. 이 신도들을 콥트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거의가 이들이다. 자신들을 세계 最古의 기독교라고 여긴다. 三位一體 등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인들이 발전시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공식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집트는 로마가 동서로 갈라지자 동로마제국(비잔틴) 영토가 되었고, 아랍족이 이슬람으로 무장,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에서 쳐들어와 비잔틴 세력을 몰아내고 이집트를 점령한 7세기 초까지 기독교 국가였다. 7세기 초부터 21세기인 지금까지는 이슬람. 이집트를 사람 몸에 비유하면 下體는 古代 이집트, 허리는 그리스-로마, 가슴은 이슬람, 머리는 西歐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 多인종, 多문화, 多종교 사회이다. 이런 복잡성을 구현하는 도시가 카이로이다. 피라미드, 모스크, 교회가 공존한다. 지금의 이집트는 1400년간 계속된 이슬람 세력 통치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겉으로는 이슬람 문화이다. 1400년간의 이슬람 통치 기간중에 아랍족이 지배민족이었던 시기는 짧았다. 1250년 경 투르크 노예戰士 집단인 맘루크가 쿠데타로 집권, 王朝를 세워 16세기 초 오스만 투르크에 망할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特記할 만한 사건은 서구, 중동으로 밀려들던 몽골 騎馬군단의 進軍을 저지한 것이 맘루크의 騎馬군단이었다는 사실이다. 1260년 이집트의 맘루크 기마군단은 바이바르스 장군의 지휘 하에 지금의 이스라엘(당시는 이집트 영토)에 있는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군대와 결전, 승리하였다. 맘루크는 몽골의 騎馬術과 비슷한 戰法을 익힌 집단이었으므로 유럽의 기사들처럼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장군은 이집트를 원정, 일시 점령하였다. 교양 있는 이 영웅은 수백 명의 학자들을 데리고 와서 이집트의 유적과 문화를 조사,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는 피라미드 앞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4000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고 연설하였다. 그는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 '왕의 방'을 구경하고 나왔는데 큰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창백하였다고 한다. 이집트의 고대 문명을 유럽에 알리는 데는 나폴레옹의 이 원정이 결정적 계기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 문명을 지켜냈고 나폴레옹은 잊혀진 그 문명을 다시 드러냈다. 오스만 투르크 치하의 알바니아에서 태어난 무하마드 알리가 1805년에 이집트의 총독이 되더니 사실상 독립국처럼 다스렸다. 이집트 사람들은 무하마드 알리를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칭송한다. 알리가 지은 모스크는 카이로 시내를 내려다 보고 멀리 피라미드까지 보이는 언덕 위 요새 시타델 안에 있다. 이 모스크엔 그의 무덤이 있다. 모스크로 올라가는 길목은 골목처럼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맘루크의 잔존세력이 최후를 맞았다.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근대화 개혁을 반대하는 맘루크 귀족들을 식사에 초대한다면서 소집하였다. 400명이 넘는 맘루크 귀족들이 골목을 지날 때 양쪽에 매복하였던 군인들이 총을 쏴 沒殺시켰다. 무하마드 왕조의 이집트는 1882년엔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집트는 1922년에 정식으로 독립하나 영국 군대는 1954년까지 이집트에 주둔하였다. 1952년 민족주의 열정으로 무장한 자유 장교단이 나세르의 주도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알바니아 계열의 마지막 왕 파루크를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웠다. 이집트가 서기 전 6세기 페르샤에 망한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인이 지배세력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 군부가 배출한 세 사람이 나세르, 사다트, 그리고 무바라크이다. [사진설명] - 카이로시 피라미드 :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조물인 피라미드는 고 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2, 352, 000개에서 268만 여개 정도의 각 2.5t 내지 10t 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다. 밑변의 길이 230.3m, 겉표면에 있었던 돌의 17만여개는 아랍과 터키 점령하에서 건축자재로 재활용 되느라 벗겨 졌다. - 스핑크스 : 스핑크스는 이집트 어로는 '살아 있는 형상'이라는 의미의 '셰세프안크(shesep ankh)'라고 불려졌다. 사자의 앞부분과 인간의 머리가 결합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 고대인들이 가장 힘세고 완벽한 사자의 앞부분, 황소의 뒷부분,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구성된 신화적인 동물입니다 - 피라미트 주위노점상 -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 고고학 박물관은 1857년에 세워졌다. 현재 10만점이 넘는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된 유물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최소한 3~4일이 소요된다 -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 멘피스 박물관 : 멤피스 박물관은 람세스의 거상이 있는 곳이다. 무릎아래는 잃어버렸지만 머리쪽은 완벽한 굉장한 미남이다. 긴 수염에 왕권의 상징인 코브라 모자를 쓰고 미완성인채 누워있는 높이 5m, 신장15m의 거대한 석상이다 - 카이로대학 - 아즈하르 사원 - 무하마드 알리 사원 : 이슬람교 예배당으로 1857년에 사이드 파샤에 의해 완성되었다. 연필 모양의 뾰족한 2개의 첨탑이 특징이다. 이스탄불의 사원을 본따 만든 사원이다. 이집트가 오스만 터키 지배 하에 있을 때, 이집트를 다스리던 총독이었다. - 카이로 전경 : 카이로 시내를 흐르는 나일강. 나일강과 그 삼각주 지대의 수로에 의한 수운도 발달하였다. - 타흐리르 광장 전경 : 카이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광장으로 왼쪽에 나일강이 바로 흐른다. 오른쪽 뒤쪽의 옆으로 길게 나 있는 빨간색 건물이 이집트 박물관이다 - 카이로의 전경 - 시가지 풍경 - 카이로 시장 모습 - Opera House - Opera Aida가 초연된 곳 - 카이로회담 (1943년11월27일) :카이로 선언이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한국에 관한 특별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항은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 독립 국가로 만들기로 결의한다"고 명시해, 한일합방 이후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했다. 이 선언의 내용은 45년 포츠담 선언에서 다시 확인됐다. ============================================================================= 메시지 열기FW: 美國이 보관중인 朝鮮時代寫眞展 招待 (UNCLASSIFIED) 보낸 사람: "Covell, Amanda P CIV USA TRADOC" 받는 사람: amanda.covell@gmail.com; 박재택 ========================================================= Have a good day! ♧ 美國이 보관중인 朝鮮時代寫眞展招待 1880년대 당시의 남대문 1880년대의 남대문 중앙로 조선시대의 길거리를 가운데 두고 늘어선 초가집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Namdaemun"(Great South Gate in Seoul) Date: 1904 Collection: Willard Dickerman Straight and Early U.S.-Korea Diplomatic Relations, Cornell University Library Willard Dickerman Straight -1931년 박흥식(朴興植)이 서울 종로(鍾路) 2가에 세운 "화신 백화점" 당시 한국의 랜드마크적인 존재로 일세를 풍미했다. -화신백화점은 1987년에 문을 닫았고 1988년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되어 1999년 그 자리에는 미국 건축가 설계로 "삼성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1935년 서울 남대문 왼쪽의 상업은행과 오른쪽 중앙 "레토크림"(レ-トクレ-ム) 화장품 세로 광고탑 오른쪽 "기린맥주"(キリンビ-ル) 가로 광고 -평양에서 영업중인 왕복 노면전차 -운임 5전- -1942년 흥남공업 도시 -조선 질소비료공장 . 일본 마그네슘 . 조선광업 등 -수풍 댐 수력 발전소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만주국과 조선의 전력확보를 위해 건설이 개시되었다. 건설된 것은 압록강하류의 평안북도 신의주로 부터 80 km지점의 한만국경(현재는 중.북 국경). 담수면적은 일본 비와코의 거의 반에 상당해 총공비는 약 5억엔이다. (이 금액은 동경에서 시모노세끼를 잇는 신칸센 건설 규모에 필적하는 금액이었다) 그 비용은 당시 한반도에서도 일대 중화학 기업인 조선질소비료 (현재의 질소/日チッソ-칫소)가 부담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참인 1944년 3월에 수풍수력 -발전소(발전 능력 60만 kW)와 함께 준공했다. 이 발전 규모는 당시의 세계 최대급이며 1940년 당시의 일본내의 수력 발전 규모가 280만 kW와 비교해도 그 크기는 용이하게 비교할 수 있다. 7기의 발전기는 각각 약 10만 kW의 발전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당시 세계 최대급의 능력이며 설비제조를 수주한 회사는 동경시바우라 전기(현재의 토시바)에서 제조를 맡았으며 시공업자는 일본 하자마구미와 니시마쯔 건설(間組, 西松建設)이 했다. Hazama Corporation and Nishimatsu Construction Co., Ltd. -한국전쟁 당시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총 7기의 발전기중 5기를 약탈해 갔다. 약탈된 발전기는 카자흐스탄 공화국, 이리티슈 카와카미류의 댐에서 확인되었다. - 한국 전쟁중에 뇌격을 포함한 미군기의 공격을 받았지만 댐 구조가 워낙 견고했었기 때문에 파괴를 면했다. 전후에 북한은 발전 능력을 증강해 이 댐 덕에 부흥했다. -준공으로부터 60년 이상 경과한 현재도 댐 본체는 큰 개수 공사를 하지 않고 현역으로 활동 중에 있다. -사족(蛇足) :북한의 국장에는 이 댐을 디자인한 도안으로 되어 있으며 또 2009년 북한 중안은행발행 5원권 지폐 뒷면에 수풍댐의 사진이 그려져 있다. -1940년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호텔 "조선호텔" 선룸무도가 崔承喜의 모습 -당시 번화가 명동의 모습 -오른쪽 모자쓴 남성뒤로 "빅터 SP 레코드 -""(Victor) 세로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간판 위쪽에는 레코드 판 광고판이 걸려 있다. -< 누가 고종황제를 죽였는가? >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1912∼1989) -1897년10월12일 고종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덕수궁 대한문(대안문) 앞은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고종황제의 장례행렬 -1919년 1월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KBS 1TV '역사스페셜'은 15일 오후 8시 -광복절 특집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을 통해 고종황제 독살설의진실을 파헤친다. -최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해 고종 독살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제시되었다. -그가 찾은 것은 당시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의 일기. 거기에는 고종황제의 죽음이 일본의 지시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의 시신 상태는 처참했다.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져 있었다. 또한, 30㎝가량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제작진은 "고종이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은 식혜로 알려져 왔는데, 고종은 정말 식혜를 마시고 죽은 것일까" 라며 "현대 법의학을 통해 고종황제의 구체적 사인을 추적한다"고 밝혔다. -1919년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뒤이고, 고종도 이미 퇴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고종 독살설이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구라토미의 일기는 일본이 고종황제가 해외에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막으려다 여의치 않자 독살을 감행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고종은 이회영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1919년 19살의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와 진왕자가 탄생했을 때의 영친왕 부부.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친왕(가운데)의 모습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의 일본친정 가족 사진 - Archive : 한일 친선에 생애를 바친 일본 -황족 출신 이방자(李方子) 여사 -- 대담했던 한국 아낙네들 -- -톱레스 치마 저고리 -문명사회에 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 이었던 조선시대 아낙네들의 대담한 모습 -러일전쟁 무럽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 여성의 "젖가슴 드러낸 치마 저고리" 풍자화 본문 일본어 내용 - 조선을 둘러 싼 러일간의 대립 - "조선중립"(조선 여성의 손을 주목)이라고 쓰인, 이미 깨져버려 못 쓰게 된 단지를 든 조선에 위로 말을 붙이는 일본. "그러나 가엾다. 만약 내가 침략해 오지 않았더라면, 대신 침략한 것은 저 털보 소련놈들이었을 테니...!" -18세기 이후 조선 여성의 민족의상 "치마 저고리"에 변화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장남을 낳은 여성은 젖가슴을 노출한다."라는 이상한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아직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깊은 이 시대에 "장남을 낳지 못하면 여성의 가치가 없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이 의상은 여성에게 있어서 "남아를 출산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라는 상징적인 자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일본 순사에게 뺨까지 맞아 가면서도 굳건히 지켜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뒤인 1950년대까지도 이어졌었다. -아래의 사진은 프랑스 판화 화가 Paul Jacoulet(1896-1960)의 작품 그녀는 3살 때에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중국, 폴리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애를 일본에서 보내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서민의 기묘한 습속 인물화를 섬세한 선과 파스칼 컬러로 여성답게 표현했다 - 시골의 결혼 피로연과 톱레스 치마 저고리 아낙네들의 분주한 움직임 - 1921년 - 아침의 잡담 - 1921년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조선 서민의 기묘한 습속 당시 조선시대의 "톱레스 치마 저고리"는 1911년 한일합방이 되고서도 이런 풍습은 남아 있었다. 일본 통치하에서는 풍속문란이라고 하여 일본 순사로부터 길거리에서 뺨 맞아 가면서도 그렇게 쉽사리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바티칸 교황청 한국 대사관에 기증된 "한국판 마리아 상" -2005년 바티칸의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관에 안치된 한국형 성모마리아상. -성염 주 교황청 한국대사의 의뢰로 돌조각가 오채현씨가 약 10개월간 걸쳐 만든 약 2m 높이의 이 작품은 한복을 입은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가 등에 발가벗은 아기 예수를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물동이는 천주교회에서 쓰이는 성수(聖水)를 나타낸다. -역시 압권이라면 성모 마리아가 가슴을 전부 대담히 드러낸 모습이 한국적이다. -당시 양반계급의 여성이 외출 때의 모습 장날 -노점상, 비녀를 비롯하여 면빗, 얼레빗, 참빗들이 엿장수 소년이 커다란 엿목판을 걸치고 있다. -꽈배기 장수의 청년과 소년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의 붕괴사고 장면 원인은 영추문 바로 옆을 종점으로 하여 운행된 전차의 진동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독뚜껑위에 자배기를 지게에 교묘하게 올려놓았다. 이 당시에는 자배기와 독뚜껑은 특히 여인들이 잘 깨뜨리는 그릇이었다. -닭을 어리에 넣고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 닭장수 -연당의 여인 -쌍검대무 -단오풍경 -신윤복의 미인도 -옹기그릇 시장 -연소답청 -청금상령 -주사거배 -월하정인 -월하밀회 -누룩과 찰밥으로 지은 지에밥(술밥)을 햇볕에 펼쳐 놓고 말리고 있다. -복덕방 할아버지들 -한강 용산 나룻터 -참숫 팔러 가기 -1900년 무렵의 조선 호랑이 사냥군들 -여성들이 외출때에 쓰는 파라솔, 양산 대용 -평양의 장터 길 -일본의 조선 철도 기공식 : 당시 신작로가 전부였던 조선에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반도 곳곳에는 급속히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는 그 길이는 총영장 5,000km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일본은 한국 식민지 정책에서 남은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하 대장군과 천하 여장군 -기생의 나들이 -서당의 학생들 -쌀 티고르기 -장터로 가는 길 -결혼하는 날 -소시장 -멧돌로 콩을 갈고 있는 남성 -쌀 찢고 있는 남성들 -삽?墟歐? -양반들의 장기두기, 한 팔이 넘는 긴 담뱃대에 주목.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American Electric Trolley, 1903 남대문으로 노면전차가 지나고 있다. -남대문 앞으로 일본군이 지나고 있다. 1903 -괭가리, 징, 놋그릇, 갓, 촛대 등등... -당시의 광화문 정문 -북쩍 거리는 장터 -한약방 -조선시대의 곤장 -전당포 -주유 청강 -바구니 장수 -당시 마포나루터의 풍경 -네덜란드인 얀 아드리아니씨가 1904년 -평양 시내를 촬영 모습 -개천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모습 -아직 눈이 남아 있는 계절이다 -멀리 언덕 위 높은 곳에는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이 3장의 사진은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품 -- The Flag of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Korean Forces -- By Felice A. Beato (미해군 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사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전사한 어재연 Classification: UNCLASSIFIED Caveats: FO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