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결 금강이
감싸흐르는 고풍스런
성곽을 걷다!
운경건강대학원 임원단 여행은
충청남도 공주의 공산성,무령왕릉,박물관
코스다
대학원생활이 벌써 1년, 세월의 흐름은 나이에 비례한다고 했던가.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불참자가 많아
버스 2대에 좌석이 남아돌고
폭염 속의 일정은 땀으로 얼룩졌지만
세계유산을 품은 백제의 숨결을 찾아 떠난
공산성을 걸어 보는 기분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백제의 옛도시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제 7월 21일이면 졸업식을 마치고 3년 차
은빛대학원으로 입학을 한다.
공산성 公山城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 쌍수산성으로 불린다.
표고 110m의 구름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 때부터 사비로 옮기기 전까지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축성 시기는 백제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서 현재까지
이른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 1,810m, 토축 약
390m이다. 상단의 너비는 약 70cm 정도이다.
토축 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 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깊이 2m 정도의 호가 형성되어 있다.
성내에는 영은사·광복루·쌍수정과 비석
주초석·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관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진짜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이다.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 도읍기에 재위하였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무령왕릉을 포함해
7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무령왕릉은
1998년까지 관람객에게 공개되었으나 이후 보존 차원에서 출입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복원관을 통해
실제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 사마왕
둘레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이 나온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에는
백제 25대 왕이었던 무령왕과 왕비의 능에서 출토된
108종 4600여 점의 유물이 모여 있다.
그래서 박물관 관람은 마치 두 부부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왕과 왕비의 관장식, 귀걸이, 금제 뒤꽂이,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과
묘지석 등의 왕릉 출토품을 통해 세련되고
외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웅진(공주) 백제 문화의
정수를!
처녀분으로 세상에 공개된 무령왕릉
1971년 무령왕릉의 발굴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 같다.
1930년대 백제의
돌방무덤이 주종을 이룬 '송산리 고분군'을 조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백제 왕과 귀족의 무덤
7기가 있는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은 처음에는
왕릉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내부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굴착공사를 하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났다.
수많은 무덤이 도굴당한
것과 달리 무령왕릉은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후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역사의 현장에서 어쩌면 '최악의 발굴'이라 불릴 만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무덤이 갑작스럽게
무령왕릉임이 밝혀지면서,
역사적 현장을 눈에
담고자 하는 수많은 기자와 동네 주민들이 몰려든 것이다.
세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발굴은 취재 광풍의 통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밤 8시부터 다음
날까지 급하게 유물을 수습하고 단 하루 만에 끝났다.
그리고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를 장마철이라는 날씨도
발굴을 서둘러 마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됐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고대의 무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무덤에 묻힌 사람 즉
피장자가 백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이후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로서 가치가 뛰어나고,
연대가 확인된 유물이라
특별하다.
국립공주박물관을 입장할 때 '무덤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흥미로운 주제 때문에 눈을 반짝인다.
실제 무덤처럼 재현한 전시 공간은 역사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현장이다.
박물관의 전시물은 '국보'의 위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어지는 묘실
복원 모형 안에 들어서면 실제 무령왕릉 안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덤 벽을 보면 벽돌을
가로로 해서 네 개 층을 쌓아 올린 다음,
벽돌을 세워 그 위에
한 층을 쌓기를 반복하고 있다. 벽 가운데에는 다섯 개의 등잔도 있다.
그 아래에 있는
'책꽂이' 같은 검은색 네모 모양의 벽돌은 무엇일까? 바로 창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묘실을
돌아가신 왕의 집이라고 여겨 창문도 만들고, 불도 켜놓았다.
무령왕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은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사마(斯摩)였다.
서기 501년 동성왕의
뒤를 이어 40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의 안정을 도모했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거듭되는 침입을 물리쳤다.
대외적으로는
신라·가야와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일본 열도의 왜에
오경박사를 보내 우수한
백제 문물을 전파했다.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국과 우호 관계를 강화하며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백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묘지석과 오수전
박물관 무령왕릉실에 입장하면 제일 먼저
'지석'(국보
제163호)과 '석수'(국보 제162호)를 볼 수 있다.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연월일, 행적 등을 기록해둔 돌을 말한다.
석수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는 돌짐승이다.
이 두 돌은 빛나는
황금 장식품을 보기 전에 아이들이 꼭 알아둬야 할 내용이다.
무덤 속 주인공이
무령왕릉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지석 덕분이다.
무령왕릉의 입구에서
널방에 이르는 통로에 놓여 있던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마왕은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출토 당시 왕과 왕비의 이름이 새겨진 지석 두 매 위에
오수전 한 꾸러미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양나라에서
통용되던 동전인 오수전은
여행 갈 때 여비를
가지고 가는 것처럼 저승 갈 때 노잣돈으로 사용하라고 올려놓은 것이다.
석수
석수 또한 아이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한다.
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네 다리를 가진 이 짐승은 상상의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한쪽 다리에 금을
그어, 다리를 부러트렸다고 한다.
달아나거나 도망가지
않고 무덤을 굳건히 지키라는 의미에서다.
크기는 높이 30cm,
길이 47cm이다. 석수는 뭉툭한 입을 한껏 벌리고 있는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도 남아 있다.
찬란한 황금빛 유물의 향연
무령왕릉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왕과 왕비의 유물을 비교해보자.
국보 제154호와 국보
제155호의 무령왕 금제관식과
무령왕비의 금제관식이
대표적이다.
왕의 것은 얇은 금판에
인동, 당초, 타오르는 불꽃 무늬를 새겼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여기에 금실을 꿰어
127개의 영락(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을 달아놓았다.
왕비의 것은 이와 달리
좌우대칭이며 영락이 없다.
중앙에는 일곱 개의
연꽃잎이 바닥으로 늘어진 모습과
그 위에는 막
피어오르는 꽃을 꽂은 꽃병을 조각해놓았다.
이를 통해 백제 왕실
문화 깊숙이 불교가 스며들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 은잔과 금동 신발,
청동 거울을 통해 중국의 양나라,
일본의 왜와 교류를
했던 백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무령왕릉이 6세기 백제가 주축이 돼
건설한 '한·중·일
합동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왕의 공간에서는
무령왕이 쓰던 금제뒤꽂이가 눈에 띈다.
날아가는 제비처럼
날렵한 느낌의 뒤꽂이는 머리를 틀어 올리는 데 쓰는 비녀의 일종이다.
유려한 무늬는 금을
뒤에서 두드려 새겼다. 왕비의 공간에는
백제 상류층 의(依)
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동으로 만든 다리미가 있다.
다리미는 둥그렇고
바닥이 평평한 몸통에 긴 자루가 달려 있다.
무령왕릉 안 왕비의
묘지석에는 '왕비가 왕이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난 해에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는 기록이 새겨 있다.
그런데 발굴 당시
무덤에서 어금니 한 개가 발견되었다.
치의학 전문가들은 이
치아를 30대 여성의 것으로 추정했다.
천명을 다했다는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는 결과인데,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이 치아는 사랑니이기 때문에
치아의 마모 정도로
나이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정지산 유적을 통해서는
당시 백제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과 왕비는 각각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 상태로 3년 상을 치르고
왕릉에서 정식으로
장사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과 왕비가
가매장되었던 곳이 바로 정지산이다.
아이들을 위한
'우리문화체험실'에서는
무령왕릉의 벽돌을 직접
쌓아 올려보고 탁본 등을 해볼 수 있다.
또 어린이 자녀를 둔
가족을 위한 주말 박물관교실, 문화 나눔 박물관교실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
무령왕 금귀걸이(국보
제156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귀걸이 한 쌍으로 귀걸이 하나가 8.3cm나 된다.
무게는 약 86g으로 한
돈짜리 돌반지 23개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이 귀걸이를 통해 백제인들의
우아함과 세련미, 정교한 금세공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첫댓글 멋진 사진 가져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수고하시구요
한송님! 백제의 숨결 잘 느끼고 갑니다. 송산리 고분군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봐야할 곳이지요.
댕큐! 늘 격려 말씀 감사드립니다
늘푸른 솔(汗松)님 백제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공주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좋은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 등을 올려주신 늘푸른 솔(汗松)님 감사합니다. 늘푸른 솔(汗松)님 홧팅!!!
당일 함께 여행하셨더라면 참 좋았을걸요
댕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