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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36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그렇게 말했다. 이것을 지금까지 말하고 있다.
예수를 그렇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지 실제로는 그게 아니다.
예수가 참람 죄로 죽었지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형상을 만들어 놓으니까 써 먹기 좋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있지만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없는 것이 맞다. 안다는 것은 모두 우리가 만든 하나님이다. 전능하다는 것도 우리가 모른다. 전능한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아가페라고 하는데 아가페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정의를 해 놓고 있다.
왜 그러냐면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그렇게 되고 싶은 소망이다. 그러니 형상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된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증거 한다고 아무리 해봐야 다른 분을 증거 하게 된다.
어린양이 무엇인지 우리가 아는 것은 순하다, 말 잘 듣는다, 약하다. 이런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예수님의 본 모습인가? 막상 실체를 찾아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 이것 때문에 말이 많다. 왜 하필 그 말하냐? 내려오지 못한다는 말을 왜 하필 하냐? 그 말만 빼면 안 되냐? 이런 사람이 정말 많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을 자기가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주님이라고 섬기려면 십자가에 못 박아도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을 섬기고 싶다. 그 말은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나님에게 투사해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어떤 형상이 되어 버린다. 형상이 되면 사람들에게는 그 형상이 쉽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후 안 보이자 백성들은 금방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것이 애굽에서 하던 짓이었다. 쉬운 것을 먼저 해 버린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신약 시대는 베드로와 바울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 만난 것이 보통 사람 같지 않고 특이하다. 예수를 만난 것이 특이한 사람들인데 그것을 가지고 예수를 전하려고 애를 썼다.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와 바울이다.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일 없다' 로 시작했다. 놀라운 말이다. 놀라운 말인데 베드로가 다 모르고 한 말이다. 거기서 기독교가 시작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말이다. 바울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산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의가 세상에 왔다.' 대단히 놀라운 말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왜냐면 바울과 같은 경험이 없다. 우리가 설사 안다고 해도 바울이 말한 그 본 뜻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왜냐면 바울이 만난 예수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메섹에 가다가 예수를 만났다. 다른 사람은 그 음성을 못 들었는데 자기만 들었다고 한다. 사울아 너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아무도 못 들은 말이다. 같이 가던 친구들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우레가 울었다거나 벽력이 쳤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그러니 우리도 짐작할 뿐이지 도저히 확실히 알 수 없다.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이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거나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이 많다. 그것을 흉내 내느라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들도 바울처럼 그렇게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도저히 안 되더라.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너무나 고상하고 높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들어도 안 된다.
여러 사람을 경험해 봤다. 말씀이 아무리 있어도 소용 없다. 성경을 들이 대도 소용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은 사람의 세계를 초월했구나. 결론이 그렇게 났다.
말로 될 사람도 아니고 말씀으로 될 사람도 아니다. 전혀 다른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을 몇 사람 직접 만나봤다. 말해봐도 안 된다.
자기가 실패해도 또 가서 한다.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 안하는 것 같지만 딴 데 가서 또 하고 있다 그러니까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너무 합당한 말이다. 어떤 형상을
봐 놓으면 사람은 그것이 안 잊어진다.
본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I See. 안다는 말이나 본다는 말이 같은 말로 쓰여진다. 장님들도 어디 잔치 집에 갔다 오면 아이고 어디 잔치 집에 가보니 아주 잘 차렸더라. 그런다. 장님도 봤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직접 본 것이 너무 중요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조용기 목사가 참 진실한 사람이다. 그는 만나기를 병 고치는 예수를 만났고 평생 그 얘기를 한다. 다른 얘기는 절대 안한다. 마지막에 파킨슨으로 사람이 완전히 망가져서 말소리도 제대로 안날 때 설교를 들어봤다. 말소리는 별로 안 나오는데 내용은 똑같다.
그리고 마지막에 또 역시 병 고치는 순서가 나온다. 그래서 이사람은 본 대로 하는 사람으로서 진실한 사람이구나. 신학을 공부하고 이런 것은 배운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는 본 대로 했다. 그러니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다.
옛날에 나는 아이고 저것은 할 사람이나 하지 아무나 할 것이 못 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분도 젊었을 때 폐결핵이었다가 나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평생 그것을 전하는 것이 자기로서는 맞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것을 전해야 한다. 내가 확실하게 본대로 전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또 본 결과 못 박혀서 못 내려온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까지 됐어도 역시 죽을 때 보니까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인가? 우리보다 훨씬 더 바닥인 사람이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고, 나는 저런 사람 되기 싫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누가 되고 싶겠는가. 그래서 2천 년 동안 버려둔 것이다. 버려져 있는 예수다. 지금도 버려져 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 버려져 있다. 어떻게 보느냐는 자기가 어떻게 살고 싶으냐? 하는 문제와 같다. 예수가 나보다 나아야 한다. 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뛰어내리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자기도 뛰어내리고 싶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뛰어내릴 수만 있다면 뛰어 내려야지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안타깝고 비참하지 감사하고 좋을 수만은 없다. 그것이 좋아서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싫지만 할 수 없이 받는 것이다.
그래서 다 유명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처럼 돼 보려고 한다. 죠지 물러 같은 사람은 고아의 아버지고 5만번의 기도에 응답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다 그럴줄 알고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나.
옛날 이야기인데 효성 여대 약대생들이 모일 때가 있었다. 잔디밭에 모여 있는데 어떤 학생이 하나 왔다. 간증을 하는데 들으니까 신기하더라. 경상도 말로 '아부지예' 하고 손가락 다섯 개를 펴면 5만 원이, 세 개를 펴면 3만 원, 꼭 그렇게 주시더라고 간증을 한다.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아부지예' 하고, 손가락 다섯 개 펴면 5만 원, 아부지예 하고 손가락 셋을 펴면 3만 원이 생긴다,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게 주더라고 했다.
지금도 우리 교회에 있는 자매인데 옛날이야기니까 내가 한다. 그런데 나를 만나서 그 신기를 써 먹지 못했다. 계속 발전했더라면 조지뮬러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한 예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수다. 그렇게 됐으면 하는 예수다. 죽고 다시 부활하고, 예수와 함께 동거하고, 내 몸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믿는데 그렇게 안 되는 것이다.
다 바울처럼 살고 싶다. 그런데 역시 안 된다. 그것이 문제이다. 다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셋째 하늘까지 갔다 왔다고 하는데 누가 안 그렇고 싶겠는가. 다 그러고 싶다.
내가 젊었을 때 무엇을 좀 얻어 보려고 쫒아다닌 일이 역력하게 생각난다. 그것은 신비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방황 자체보다 어떤 신비가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알려고 찾아 다녔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바람직한가. 내가 영 계를 돌아다니고 신비한 세계를 돌아다닌다면 이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그런데 끝까지 안 되더라. 그래서 못했다.
예수는 신비하게 존재하는 사람도 아니다. 신비하게 존재한다면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다.
왜 몰랐는가? 아담 안에서 아니까 모른다. 그 아담과 다르니까 모르는 것이다.
나는 아담 안에 있고 예수는 지금 다른 사람이니까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우리가 못 알아본다.
미국에서 차를 타고 가는데, 백인이 앉았는데 옆에 흑인이 앉으면 백인이 딴 데로 가버린다. 같이 안 앉는다.
우리는 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체면상으로도 그냥 거기서 견디고
있는데 백인들은 아주 냉정하다.
옆집에 흑인이 이사오면 집을 팔고 가버린다. 남부지방에 어떤 신학교에서 직접 경험한 사람이 말하는데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니 흑인과 함께 예배를 보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 물으니 40%가 반대했다고 한다. 흑인이 가는 천국이면 자기는 안 가겠다고 한다. 남부지방은 흑백문제가 심각하다. 목화밭 때문에 심각하다.
그러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예수를 알고 있으면 천 년 만년 알아도 소용없다. 내가 직접 봐야 한다. 어린아이도 볼 수 있도록 봐야 한다. 새 언약이 그것이다.
새 언약의 특색이 뭐냐면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이 다 알게 되는 것, 하나님을 알라 할 필요가 없는 세계, 그것이 새 언약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2천년이 지나도 아직 안 왔다. 예수까지 왔어도 아직 안 왔다. 그러니 예수를 잘못 안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예수가 오신 것이 아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이것만 찾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믿어도 별 감동이 없다. 믿는다고 내가 무슨 큰 감동이 오는가? 혹시 순간적으로 왔을지라도 항상 영속하지 않는다. 내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 나 대신 죽었다. 그러면 가만히 있을 일이 못된다. 나 대신 죽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형상으로 만들어진 예수는 자기는 알지만 남은 모른다. 나만 독특하게 만난 경험 속에서 신비하게 만난 예수는 나만 확실하게 봤지만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면 복음이 못된다, 어린아이라도 볼 수 있어야 복음이다.
예수를 맨 먼저 증거 한 사람이 세례요한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는데 막상 자기가 감옥에 갇혔을 때는 전혀 그것과 상관없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을 물어보고 있다. 내 죄를 짊어지고 죽었으니까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러고 죽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해놓고 막상 자기 문제가 오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사람들을 보내서 묻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너무 무성의하다. 가서 보고 들은 대로 얘기하라는 것이다. 보고 들은 대로 얘기해봤자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장님이 눈을 떴다. 이런 얘기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목이 잘리냐 안 잘리냐 이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세례요한은 이 세상이 뒤집어져서 이 나쁜 왕이 없어지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 2천년 동안 예수 사건이 진전이 안 되었을까? 왜 이렇게 발전이 안 되었을까? 발전되기보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렵다. 새로운 신학이 나올 때마다
더욱 복잡해진다.
새로운 신학을 예를 들면 조직신학의 대 신학자가 나오면 또 하나의 교파가 생겨난다. 시원찮은 사람이 해서 교파가 되겠는가. 그런 신학자들은 정말 보통 신학자들이 아니다. 천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 이후에 바르트는
몇 백 년 후에 나온 사람이다.
칼빈을 뒤엎자고 나온 사람이 바르트다. 문턱을 내려라. 담 벽을 헐어라. 세상과 교통을 해라. 하고 나온 사람이 바르트다. 그런데 지금은 둘이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바르트쪽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보면 맹목적이라고 하고 칼빈주의에서는 바르트쪽 사람을 보고 진리에 물 타기 했다고 한다.
물 타기 하니까 먹는 사람이 많아졌다. 취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금복주가 25도짜리 소주를 15도로 낮췄다. 그랬더니 원료는 적게 들어가고 술은 더 많이 팔리게 되었다. 술 먹는 여성 인구가 많아져서 술 한병 놓고 노닥거리고 있다.
취하지 않으니까 포도주 마시듯 마신다. 그러니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술 도수를 낮추면 아무도 안 먹을 줄 알았더니 새로운 고객이 창출되어서 나왔다.
예수도 믿기 쉬우면 다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쉽게 쉽게 하자는 것이 바르트 사상이다. 쉽게 하자. 칼빈주의처럼 그렇게 까다롭고 복잡하고 어렵게 할 것이 뭐가 있느냐. 그런데 결국은 답이 없다. 답이 있는데도 답을 이루지 못한 데가 있고, 아예 답이 없다고 해 버린 곳은 답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칼빈이 말 한대로만 된다면 그것이 전부 완벽하다. 그런데 그대로 안 되니까 문제다. 예수 십자가에 죽은 사건,
이것은 사건이다. 이것은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세례요한은 결국 억울하게 죽었다.
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들에게
목을 바치게 됐다. 의롭다고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의로우니까 개 목숨처럼 목을 잘라 바쳤다.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자. 만들어진 형상을 보고 따라가려 하지도 말자.
내가 직접 보자. 내 눈으로 확인하자.
그가 누구인지 내가 확인하자.
예수 사건을 보고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다. 예수 사건을 보고 '메시아다,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은 사람이다' 할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피할 수 없다. 그 사람의 그 길을 내가 피해갈 수 없다. 그러면 결국 나는 거기서 피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피할 수 없는 나, 이 피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하면 나는 세상이 바뀐다. 그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면 나는 바뀌게 된다. 세상이 확 뒤집어져 버린다. 다르게 태어나 버린다. 태어난 자리가 달라져 버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정말 피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는 너무 좋은 것이다. 더 이상 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누구 모양으로 예수를 찾아가려고 하면 나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되겠는가. 책을 읽으려면 눈이 아파서 못 읽겠는데 무슨 수로 찾아가겠는가? 기도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무슨 힘을 얻어서 기도를 하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안 잊어진다. 모르겠다. 노망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안 잊어진다. 너무 확실하니까 안 잊어진다.
어떤 점성가가 내 사주를 보니 2019년 이후에는 사주가 안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이것이 괜히 한 소리가 아니다. 요즘 김윤동 교수 얘기를 들으니 태양 주변을 돌고 있는 인간과 관계된 별을 찾아내는데 주역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다. 하나는 열 개, 하나는 열두 개, 한 바퀴 돌면 60년이다.
주역도 마찬가지이다. 열두 개는 짐승이다.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 전부 열두 개이다. 그런데 시는 열둘이 아니고 우리가 잘 모르는 막연한 위치를 얘기한다. 갑을병정 무기경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을 합해서 한 바퀴 돌면 60년이다. 노아는 120년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두 바퀴 돈다는 말이 아니겠나.
사람은 120년까지 살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 90살 넘은 사람이 인구의 약 5% 된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한다. 나의 아버님이 조선 나이로 83세니까 82세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면내에서 가장 고령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82세로는 명함도 못 낸다. 적어도 90쯤 되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노아가 말한 대로 120년 살 시대가 돌아온다면 나도 희망이 있다. 옛날 사주팔자에는 내가 없으니까 염라대왕이 못 올 것이다. 그래서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진짜 덤으로 살고 있구나.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촉박하다.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오늘도 성경을 다른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눈으로 보려고 하니 침침해서 못 읽겠다. 옛날에 알던 성경 외에는 기억도 잘 안되니 그 당시에 성경을 많이 좀 읽어서 외워놓을걸 그런 생각도 든다.
하여간 오늘 우리가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사건은 십자가에 못 박으면 못 내려온다는 것이다. 못 내려오는 것을 아무나 보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죽을 때 보니까 사람이더라는 것이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물으니까 그렇다고 대답하고 죽었다. 얼마나 확실했으면 죽을 줄 알면서
그렇게 대답하겠는가.
자기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 말을 한다. 그것을 못 믿었으면 그 말을 하겠는가. 자기가 확실히 알았으니까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분명히 하나님 아들인데, 하나님 아들이라도 죽을 때 보니까 사람이더라.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아들이라도 죽을 때 보니까 사람이더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도 사람이 되면 죽을 때 보면 사람이다. 모세가 죽을 때 보니까 사람이었다. 바로를 굴복시키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겠는가? 광야 4십년을 지나올 때 사람의 힘으로 2백만 넘는 군중을 이끌고 가겠는가. 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죽을 때 보니까 사람이더라. 이것이 너무 명백하다.
사람이 무엇이 되고 어떻게 된다 해도, 어떻게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역시 죽을 때 보면 사람이다. 예수 죽음은 그래서 특별하다. 우리 같은 사람은 당연히 그렇지만 예수는 당연히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참 묘하게 그 사람이 나다. 피할 수가 없다. 우리 목사님들도 못 피한다. 목사라고 그것이 피해지겠는가. 못 피한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였다고 해도 이것은 피할 수 없다. 5십만 성도를 거느린다고 해도 역시 피할 수 없다.
단일교회로 오십만 성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다. 세계사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역사적인 문제다. 그래도 죽을 때 보니까 사람이다. 파킨슨병이 걸리니까 어쩔 수 없이 죽더라.
누가 신문잡지에 줄기세포를 맞고 좋아졌다고 해서 나도 돈을 좀 썼다. 혹시나 하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폐는 안 된다고 한다. 신경은 1차 세포지만 폐는 3차 세포라서 거기까지 줄기세포의 영향이 못 간다고 한다.
그래서 조목사는 괜찮아 질줄 알았더니
병 그대로 죽더라. 어쩔 수가 없다.
육신의 병을 많이 고쳤지만 자기 병은
못 고치고 죽는다. 왜? 사람이니까.
내가 있던 교단에도 유명한 분 한 분 있었다. 젊었을 때는 금강산에 가서 기도하던 분이다. 설교를 하면 불이 나오듯 하던 분이다. 오죽하면 친구가 고등학교 3학년 말에 이분을 만나서 아버지가 고려대를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신학교를 갔다. 신학교도 훌륭한 큰 신학교를 간 것이 아니고 이제 부지를 사서 교사를 지으려고 하는 그런
신학교를 갔다.
그런데 나에게 뭐라고 유서를 보냈냐면 이러저러한 사건이 생겼는데 내가 신학교를 못가면 죽으려고 한다. 내가 죽으면 그런 줄 알라고 나에게 유서를 보냈다.
그전에 한 번도 예수 믿는다는 말을 안 했고 여름방학 때도 안 한 것을 보면 분명히 후반에 그런 것이다. 3학년 말에 이런 사건이 생긴 것 같다.
그 유명한 분도 늙으니 마지막에 중풍으로 의식없이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조문 다녀온 어느 목사님이 하는 말이 저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저렇게 죽으면 뭘 알겠는가. 그렇게 말하더라.
나도 그때 생각에는 그래야 할텐데 했다. 그래도 죽을 때 나 어디로 간다. 이러고 가야 할 것인데 의식이 없이 몇 달을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으니 입에서 불이 나오던 분이 저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그 목사가 오면서 그런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다. 그분이 나를 잘라내신 분이다.
누구나 다 유언을 다하고 자손들을 놓고 그러고 가고 싶지 않겠나. 옛날 우리나라 할머니들 중에 그런 분이 더러 있다. 옷 다 갈아입고 날짜와 시간을 다 알아서 자손들 불러 놓고 일일이 다 유언을 하고 그 시간에 가는 할머니들이 있다. 예수 안 믿어도 그렇다. 사람이 뭔가 있는가보다. 그래서 영물이라고 한다. 남자 중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는데 여자 중에는 그런 사람을 더러 본다.
토론토에서 어떤 사람이 늦게 예수를 믿었다. 신유 때문에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신유만을 주장하는 사람인데 토론토에 3천 명이 모인 교회를 세웠다. 외국에서 한국 사람이 3천 명 모이는 교회면 엄청나게 큰 교회다.
그런데 그분이 간암이
에 걸려서 병원에 가라고 아무리 해도 안 가고 분명히 기도로 고칠 것이라고 있다가 그대로 죽었다. 그래서 교회가 뒤숭숭 해졌다. 우리 목사님은 기도해도 못 사는데 지금까지 한 말이 뭔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거기서 몇 사람 떨어져 나와서 토론토의 우리 교회가 됐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르는 게 맞다. 그 사람들은 증거가 있었으니 그랬지 증거가 없는데 그랬겠는가. 그리고 또 증거가 없는데 사람들이 모였겠는가?
그래도 하나님을 모른다. 내가 기도해서 누구 병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모르는 분이다. 어느 날 가면 기도해도 안 되는 분이다. 자기 병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나. 그래도 안 된다. 자기가 죽으면 교회가 어떻게 될지 다 알았을 것 아니겠나. 그래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증거 한 첫 번째 증거인데 이 증거
때문에 지금 기독교는 여전히
그것을 앞에 내세우고 있다.
참 그럴듯하다. 세상 죄를 짊어졌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내 죄를 짊어졌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가? 내 죄를 짊어지고 죽은 사람을 놓고 가만히 있겠는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예수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나를 거기서 알아야 한다. 싫던지 좋든지 피할수 없는 사람이고, 싫지만 내가 피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그것을 피하면 나는 아담같이 돼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된다.
지난주에 대구교회에서 그랬다.
그전에 한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일부러 거짓말 하려고 한 게 아니고 잘 하려고 했는데 거짓말이 돼 버린 것이다. 왜냐면 자기를 모르고 한 말이니까. 밖에서 들으면 충격적인 말이 될 것인데 우리 교회에서 그 말을 들으니 속이 시원하더라.
누가 거짓말 할 줄 알고 했겠나. 거짓말이 될 줄 모르고 했다.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왜 그런 말이 나왔겠는가. 우리는 모른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해도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자기를 모르고 한 말이니까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돈을 똥 보듯 한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하자. 돈 뭉치를 갖다 놓아보면 양심이 뒤집어진다. 돈을 보면 양심이 바뀌어 버린다. 몇 억, 몇 십 억 자기 앞에 있어봐라.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양심이 그냥 있겠는가.
이병철씨 같이 돈이 많은 사람이면 몇 십 억이 별것이 아니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몇 십억이 있고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양심이 그대로 있겠는가. 이것을 가져다 교회당을 지어야지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돈 앞에서 보면 양심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다 거짓말이다. 나는 돈을 돌보듯 한다 해도 거짓말이다.
참 말은 나를 알고 한 말만 참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예수를 피할 수 없는 나로 알면 거짓말을 할래야 할 수 없다. 알고 거짓말 하는 사람은 없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도 왜 거짓말 하냐고 물으면 내가 언제 거짓말 했냐고 한다. 전혀 다르다. (47:00)
자기 형이 그러더라. 다 함께 있는데서 하는 말이 저놈은 숨쉬는 거 빼고 다 거짓말이라고 한다. 형이 자기 동생을 놓고 그렇게 말하는데 본인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서 내가 한번은 정말 망설이다가 단둘이 얘기했다. 다 좋은데 그 거짓말 때문에 문제라고 했더니 와, 시인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얼굴을 붉히고 완전히 딴판이더라. 그래서 내가 알게 된 것이, 거짓말 하고 있지 않았구나. 자기로는 참말이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그랬구나. 그것을 그때 알았다.
그래서 거짓말 하는 사람보고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을 못하게 됐다. 그것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자기가 살려고 하는 것이다. 부모가 엄하면 아이들이 밖에서 무엇을 잘못하고 오면 거짓말한다. 빵점 맞으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앞에 1자를 하나 더 붙여서 온다.
그러니까 아담 안에 있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참말을 하겠는가. 우리는 참말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해봤자 안 된다.
그런데 이 예수를 나로 알고 이 운명을 나로 알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세상에 누구도 알고 거짓말 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을 내가 알았다. 몇 사람 경험하면서 자기로는 참말하고 있구나. 우리가 들을 때 거짓말이지 자기로서는 참말을 하고 있다.
앞으로 여러분도 혹시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말해보라. 절대 안 된다. 그것을 고치려고 해도 안 고쳐진다. 다른 길이 생기기 전에는 안된다. 거짓말 할 필요 없는 기조가 생기면 안한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얼마나 좋은 말을 했는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이렇게 놀라운 말을 했어도 이 말은 간 곳 없고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되겠습니까?'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좋아했는가?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승천하신 날 또 뭐라고 하냐면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합니까?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예수를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속하였으니 너희가 알바가 아니요.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나의 증인이 되라.” 그렇게만 말씀하셨다.
예수의 증인이 될 때 그때가 때다. 증거 할 때는 아니고 내가 증인이 될 때 그때가 우리가 만날 자를 만나는 때다. 그때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때다. 그러니까 더 이상 하나님을 알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버렸다.
내가 몇 년 동안 헤매다가 마지막에 완전 바닥이 되니까 하나님은 모르겠지만 나는 피조물이구나. 내 위에 누가 있구나. 모르겠지만 누가 있구나. 그렇게 만났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을 누구에게 얘기해봤자 모른다. 나만 아는 하나님이지만 다른 사람은 모른다. 내가 이 얘기를 몇 번 했다. 몇 번 했더니 처음에는 신기하게 듣다가 몇 번 해보니까 또 하네 이렇게 듣는다. 별로 모르겠다는 말이다. 또 하네 저 얘기를 왜 또 하지? 자기는 경험이 없으니까 그렇다.
말을 짧게 하려는데 더 길어졌다. 박00 목사는 뭔가 심각하게 앉아 있다. 시원한 사람은 시원한데 심각한 사람은 더 심각해진다. 그러니까 내가 이상한 세계를 내가 살고 있다.
지금 다친 지 25개월이 넘었다. 수술한지가 2년하고 석 달이다. 그러니까 다친 지 2년 6개월이다. 안 되니까 어쩔 수 없다. 이번에도 한방에 되는 것이 없나 하고 약을 썼다가 손해만 잔뜩 보고 안됐다. 한방에 낫지 않는다. 나는 한방에 낫지 않겠나 하고 유명하다는 약을 먹어봤는데 손해만 잔뜩 봤다.
그러니 할 수 없이 나도 이것을 짊어지고 가면서 해야겠다. 이것만 생각하고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이것 다 나으면 하겠다고 하면 언제 하겠나. 그러니까 그냥 못 걸어도 죽을 때까지 해야 내가 손해를 안볼 것이다. 나도 손해 안 봐야 한다.
어떤 자매가 어제 줌으로 간증하는데 그 얘기를 그대로 하더라. 항상 몸이 아프니까 항상 그것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말을 듣고 아 그것은 그것이고 내가 할 일은 따로 있구나. 처음으로 생각이 됐다고 한다. 40년 이상을 나를 따라온 사람이 그러더라.
그러니까 사람은 내가 이것이 좋아지면 이렇게 하지. 그렇게 생각을 한다. 소용 없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나으면 해야지, 빨리 나아야지 그러고 있으면 그전에 데려가면 어쩌겠나. 그전에 갈 수도 있으니까 가기 전에 해야 한다. 가기 전에 하고 죽어야지 왜 손해를 보는가?
가기 전에 할 말은 하고 밝힐 것은 밝히고 전할 것은 전하고 그래야 되겠다. 안 그러면 손해다. 나만 손해다. 그것이 나만 손해인가? 예수 손해다. 예수님이 다 고쳐주고 쓰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도 딱 걸을 수 있게 해주고 예수님이 나를 쓰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러지 않고 놔두고 있다. 고쳐주길 기다리고 있으면 나는 한 번도 못 쓰인다. 안 고쳐주면 안 고쳐주는 대로 그래도 해야 한다. 예수는 그런 분이다. 우리를 다 고쳐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나.
늘 그런 꿈을 꾼다. 내가 뚜벅뚜벅 우리 대구교회를 들어가면 모두가 그 날의 감격이 어떠하겠는가. 다 기립박수를 할 것이다. 그런 꿈을 늘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면 말을 못하겠다. 할 수 없다. 그 날을 기다리고 있으면 알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집안에서도 해야 한다. 아파도 해야 한다. 못 걸어도 해야 한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이것을 생각하고 하지 않으면 헛일이다.
우리가 그 말을 자주 하면서도 어렵다. 아주 옛날이다. 중학교 다니는 학생 하나가 상담할 것이 있어서 왔다. 자기가 사귀는 여학생이 하나 있는데 다른 남학생이 생겨서 양단간에 결정을 하라고 했더니 이번 수요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더란다. 기다리려니 도저히 조급해서 기다릴 수 없어서 왔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 얘기를 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성경에 이런 말이 있더라며 그 부자 얘기를 했다. 곳간에 다 쟁여놓고 쥐가 안 먹게 하고 염려를 했더니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냐고 했다더니 학생이 그 말을 알아듣고 꼭 내 말 같습니다. 그랬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그 여학생과 교제를 했는지 모르겠다.
세월이 흐른 후에 누구 면회하러 병원에 갔더니 그 남학생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쳐서 누워있었다. 옆에 보니까 부인이 있는데 차마 어떤 여자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나는 못 알아봤는데 그 남학생이 아는 체 했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을 알고 있냐고 묻는다.
좋아하던 여자가 며칠만 기다리면 답을 주겠다고 하니까 그 기간을 기다리기 어려워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우리 인생이 꼭 그 학생과 똑같다.
그러니 지금 박풍성 목사는 심각한 얼굴 하고 있지 말고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늘 선포를 해야지 어쩌겠는가. 오늘밖에 없다 하고 사는 게 맞다. 내일은 내 날이 아니다. 어제도 지나가 버렸고 내일은 내 날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를 위해서 산다고 생각해야 손해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요즘 그럼게 살고 있다.
이 놈의 걸음이 집안에서 한 바퀴 돌고 있는데 돌때마다 어찌나 아픈지 간신히 한 바퀴를 돌고 있다. 발 폭을 넓히려고 해도 의족하는 사람이 발로 끌고 문지르듯이 간다.
어느 날 갑자기 ‘걸어지네.’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안 된다. 잘하려다 더 손해만 보고 안 되겠다. 이제는 못 걸어도 말하고 드러누워 있어도 말하고 좌우간 해야 되겠다. 여러분 손해 안 보려면 그렇게 해라. 안 그러면 내일 내일하다가는 못한다. 아이고, 한 시간 얘기했다. 꼭 한 시간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