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충기의 세계배낭여행기 175>
광활한 대륙의 나라 미국<21>
◆ 체로키 민국(Cherokee Nation)
그러나 그들은 텔레쿠아가 척박한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체로키국을 건설했다. 1839년 8월 존 로스는 체로키국의 최고 추장으로 선출됐다. 2년 만인 1841년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남녀 공학 학교를 설립해 또다시 이곳에서도 아칸소나 텍사스 주의 백인들보다 훨씬 낮은 문맹률을 기록했는데 체로키인 90%가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체로키 인디언 / 체로키 보호구역 / 잭슨 대통령
체로키 문화유산센터 정문 앞에는 3개의 원주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건국 후 11년 만인 1850년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체로키 여성 고등 교육기관(Cherokee Female Seminary)의 남은 자취다. 체로키의 교육기관들은 탈레쿠아에 있는 노스이스턴 주립대(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추장 로스는 피의 1/8만 체로키였다니 오늘날 인디언부의 기준에 따르면 아메리칸 인디언이 아니다. 하지만 순수 혈통의 체로키인들로 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특히 백인들의 회유에 넘어가 고향 땅을 미 정부에 헐값에 넘겨준 뉴 에코타 조약(Treaty of New Echota)에 서명한 몇몇 순수 혈통의 체로키 지도자들과 명확히 대비됐다. 그는 고난 속에서 분열되기 시작한 부족을 흩어지지 않게 하나로 묶고 유배지에서 ‘체로키국의 황금기’를 이끌다가 1866년 세상을 떠났다.
눈물의 길은 탈레쿠아에서 끝나지만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눈물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제몰수와 추방, 대량학살에도 불구하고 거친 평원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저력을 보여준 체로키인들은 이곳에서도 점점 늘어나는 백인들에게 포위되고 있었다.
체로키인들은 개인적으로 땅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땅을 개인적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은 낯설었다. 땅은 공동체가 관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체로키인들에게 땅을 개인에게 할당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땅을 사고 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1880년대 헨리 도즈(Henry Dawes) 상원의원이 체로키의 땅을 조사하러 왔다. 체로키국에는 빈민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부족은 단 한 푼의 빚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기심을 장려하지 않는 부족의 시스템이 잘못 됐다고 설파한다. 이기심이야말로 발전의 동력이며 문명의 기초라고 말했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돌아가 1887년, 땅의 개인적 할당을 의무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 법이 1898년에 만들어진 커티스법(Curtis Act)인데 부족 단위의 땅 소유를 아예 금지해버렸다. 그리고 1908년 오클라호마가 미합중국의 46번째 주가 되면서 인디언 영토(Indian Territory)는 소멸돼 버렸고 체로키국도 사실상 와해됐다.
체로키인들은 그 이후 ‘눈물의 길’ 보다 더 험한 길을 걸어왔다. 기댈 언덕이 없어졌고 1930년대 대공황이 닥쳤을 때는 살길을 찾아 각자 눈물의 길을 떠났다. 체로키의 언어인 세쿠오야는 더 이상 쓰는 사람이 없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법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해로운 법뿐이었고 우리는 미국의 법정신에서는 보이지 않은 투명인간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공존(Co-existence)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결코 잊지 않는다.’
체로키인들은 체로키국을 인정받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 끝에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체로키인들이 지도자들을 다시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에 서명함으로써 재건의 발판을 닦았다. 이로서 준 자치정부인 체로키민국(Cherokee Nation)이 정식으로 세워졌는데 이 때 체로키국의 ‘공무원’은 불과 3명, 예산은 1만 달러였다. 오늘날 체로키국의 공무원은 4천명, 예산은 2억 7천만 달러로 늘어났다. 체로키국은 국토도 없이 정부청사만 있다. 국민도 있고 세금도 내지만 체로키인들은 이중국적자다. 주정부에는 세금을 안내지만 연방정부에는 세금을 내고 체로키국에도 세금을 낸다. 하지만 체로키국의 주요 재원은 연방정부의 보조금과 카지노 운영 수익이다.
체로키국의 수반은 최고 추장(Principal Chief)으로 불리며, 현재 채드위크 콘터셀 스미스(Chadwick Corntassel Smith)이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늑대와의 춤을’을 보면 인디언들이 ‘주먹 쥐고 일어서’, ‘늑대와의 춤을’, ‘발로 차는 새’, ‘머릿속의 바람’과 같이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스미스 추장의 경우 콘터셀이 그렇다. 콘터셀은 ‘옥수수수염’이라는 뜻이며, 그는 법학 박사 학위가 있는 인디언 법 전문가다.
체로키국도 나라인 만치 일 년에 한 번씩 최고 추장의 국정(State of the Nation)연설이 있다. 옥수수수염은 이 연설에서 체로키국의 목표가 10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눈물의 길이 100년 전으로 돌아가야 끝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닐 것 같다.
‘지금부터 100년 뒤, 우리가 100년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다면 우리가 나라를 성공적으로 재건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100년 전이란 오클라호마 주가 생기기 전의 체로키국. 문자 해독률이 90%에 이르고 넘치지도 않지만 부족할 것도 없었던 공동체 생활을 누리던 그 상태다. 그는 그 상태를 "삶의 질"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삶의 질이란 둑방에서 낚시하는 겁니다. 호화 보트를 타고 알래스카로 원정 낚시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질이란 우리의 아들딸과 손자들이 조그만 공을 갖고 마당에서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겁니다.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구단주 특석에서 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구상에 있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즐기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게 삶의 질입니다. 불평하고 남을 탓하는 불안정한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와 같이 이어졌다. 마지막은 ‘삶의 질은 존재하는 것이며 행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Quality of life is being and doing, not having)’ 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언어와 일, 그리고 공동체를 중심단어로 던졌다. 언어를 잃으면 문화를 잃는 것이다. 눈물의 길도 원래 체로키의 말로는 ‘Nunna dual Tsuny(The trail where they cried)’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길이라는 뜻이다.
‘눈물의 길(The trail of tears)’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짧게 해야 하기 때문에 줄여서 그렇게 했겠지만 체로키 말에서는 아직도 피눈물이 나는 것 같은 동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반면 영어로 표현된 ‘눈물의 길’에는 눈물이 왠지 응고되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어로 옮기면서 의미를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체로키(Cherokee)도 영어식이고, 원래는 다스라게(Tas-La- Ge)로 ‘마을’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옥수수수염은 언어를 통해 풍요로운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면서 일을 통해 자립하며 공동체를 통해 함께 나누는 삶을 기약하자면서 연설을 마쳤다. 세계의 어느 나라의 국가수반으로부터도 듣기 어려운 내용의 연설이다. 이 연설은 ‘당신의 초라한 종(Your humble servant)’ 이라고 자신을 낮추는 말로 끝난다.
그러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다. 많은 인디언들이 사회 부적응자로, 알코올 중독자로, 정부의 구호대상으로 현대를 살아간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인디언들의 국가적 실체(체로키국)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엄연히 살아 있다. 오클라호마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던 공화당의 톰 코번(Tom Coburn) 하원의원은 ‘미 연방정부와 인디언 국가들과의 조약은 원시적이고 웃기는 합의’ 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인디언의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의 말은 ‘독립국 안에서는 독립국이 있을 수 없다’는 미국 내 반(反) 인디언의 오랜 전통을 대변하는 것이다. ‘눈물의 길’이 현재 진행형인 ‘눈물을 흘리고 있는 길’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물의 길’은 미국 체로키인디언의 가슴에 패인 깊은 흉터가 아니라 아직도 피가 흐르는, 아물지 않은 상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