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우 베네딕토(원주교구 횡성본당)
나는 군에 있을 때 통신교리로 세례를 받았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성당도 없고 신부님도 안 계셔서 매주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인접 부대에서 신부님을 모셔 와 강당에 제단을 꾸미고 미사를 드리곤 했다.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제대로 된 교리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 따라서 묵주기도를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처음에 묵주기도는 할머니들이나 바치는 걸로 알았다. 불교에나 있는 염주(?)를 왜 천주교에서 들고 다니는지 의아해 했다.
우리 부부는 결혼 전 종교가 달랐다. 아내는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종교의 통합을 요구했으나 아내는 좀처럼 듣지 않았다. 나는 강요하기보다는 기도를 통해 설득하기로 마음먹고 나 혼자 열심히 성당에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는 스스로 미사에 참례하겠다고 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때 내가 묵주기도를 알아 열심히 바쳤더라면 더 일찍 우리 가정에 종교적 평화를 주셨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우리 가족은 아이들까지 세례를 받았고, 견진성사도 받은 후 지금까지 23년간 신앙생활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동안 사목회 총무와 전례부에서 활동하면서 그런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음에도 묵주기도의 신비를 맛들일 기회가 없었다. 처음에는 하는 방법도 방법이려니와 짧은 성모송조차도 잘 외워지지 않았다. 이것 또한 나의 의지가 아니고 그분의 뜻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아내가 어느 날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나더러 함께 9일기도를 바치자고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묵주기도 드리는 방법과 신비를 잘 알지 못하던 나는 당연히 머뭇거렸고 아내는 9일기도를 열심히 바쳤다. 기도 지향은 가족과 무엇보다도 나의 진급이었던 것 같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나는 뒤늦게 묵주기도 방법을 깨닫고 가족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가족 4명이 모두 모여 잠자기 전에 함께 바치기도 했다. 가족이 함께하니 은총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본격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한 것은 대대장 임무를 수행할 때였다. 부대의 안전을 위해 출ㆍ퇴근 차에서 5단씩 바쳤다. 그 이후는 언제, 어느 때라도 특히 혼자 있을 때, 새벽에, 등산할 때, 걸으면서 등등 수시로 습관적으로 바치게 됐다. 이렇게 매일 바치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묵주가 없어도 손가락을 묵주 삼아 손가락 묵주기도를 드린다. 특히 운전할 때는 더욱 그렇다. 몇 번의 큰 교통사고가 날 뻔한 것을 막아주신 것도 묵주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묵주기도를 드릴 때마다 왜 그리 하품이 나오고 졸음이 오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러한 방해조차도 이겨내야만 기도의 참뜻이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성모님께서는 작년에 내게 신장암 발병 사실을 알려주시고, 큰 수술을 하게 하시면서 묵주기도의 신비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셨다.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병실에 오셔서 드리는 기도가 그렇게 은혜로울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매일 20단을 바친다. 내가 오늘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모두 성모님께 드리는 묵주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손을 잡고 바른 길로 이끄시는 그분의 은총과 사랑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싶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며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며 하느님과 성모님께 바라기만 한다. 이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주님 뜻대로 열심히 기도하며, 묵주기도의 참 뜻을 알고 주님 말씀에 따라 하나하나 실천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는 묵주가 여러 개 있다. 그 중에서 지금 나에겐 지난 여름 딸이 배낭여행 중 로마에서 선물로 사온 묵주가 수호천사다. 이 묵주를 가지고 기도를 드리면 왠지 기분이 좋다.
주님! 처음 저에게 주님의 힘으로 제 손에 묵주를 들려 주셨듯이 죽는 날까지 이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어머니! 묵주를 그냥 돌리기보다 쉰아홉 개의 둥근 묵주알 한 알 한 알에 새겨진 참 뜻을 깨닫고 늘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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