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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본문: 출애굽기 16:1-12
결론: 양식을 풍성히 공급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머리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 아침은 드시고 나오셨습니까? 지난 한 주 동안 식사는 꼬박꼬박 잘 하셨는지요?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건강과 식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큽니다. 절박한 현실적인 필요가 있을 때는 새벽기도도 나오고 하면서 신앙 생활에 간절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일상이 너무 각박해지면 마음의 여유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기면서 믿음이 움츠러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루는 문제가 바로 이에 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셨을까요?
이 문제는 우리들의 삶에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가 어렵고 삶에 대한 원망이 싹틀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대하실까요? 과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의 배고픔과 어려움을 계속해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이런 현실적인 신앙의 질문들에 대해 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1. 매일의 양식은 자격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3절) 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매일의 양식은 자격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양식을 받아먹을 자격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를 부당하게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3절에 보면 백성들이 원망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이들의 원망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가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 기억을 왜곡합니다. 애굽에서의 시절이 아름다웠던 것처럼 회상합니다. 하지만 실제 애굽에서의 과거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채찍질을 맞으면서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혹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었더라도 종으로서 주인이 먹을 고기와 떡을 구워야 했습니다. 주인 눈을 피해서 몰래 한두 조각 훔쳐먹던 비참한 모습을 행복했던 기억으로 왜곡해서 떠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차라리 애굽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정말 그럴까요?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경시합니다. 애굽에 임한 열 가지 재앙은 바로와 신하들조차 두려움에 떨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 정도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자신의 큰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면, “차라리 애굽에서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으면 좋았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들은 자신의 불행의 책임을 직분자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당한 이 굶주림의 책임은 모세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주신 고통입니다. 죽으라고 주시는 굶주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기 위한 굶주림입니다. 애굽에서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려면 광야를 지나야만 합니다. 배고품을 지나가야만 더 큰 구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는 원망은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입니다. 7절에 모세가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었을 뿐입니다. 원망하려거든 그 책임은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입니다. 8절에도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현실적인 배고픔 앞에서 그동안의 감사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직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에게 양식을 공급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멸망당할 자격이 충분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완고한 점에서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습니다.
만나는 누릴 자격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하루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2) 우리가 먹는 양식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존의 본질이 은혜에 있다는 것이 아주 명료하게 확인되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광야는 황무지, 건조한 사막 지형을 말합니다. 식물이 자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게 아주 가시적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공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존의 조건을 깊이 들여다 보면 광야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3장은 우리의 인생길을 이 광야 여정에 빗대어서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7:38에서도 “광야 교회”라고 해서 신약 교회와 광야 생활을 연결시킵니다. 우리는 매우 풍족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사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광야와 같은 척박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 우리가 굶주리고 고통받는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와 비참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땀흘려 수고해야만 소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서 모든 피조물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성실한 노동의 대가가 항상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기대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다 인간의 죄와 비참의 결과입니다.
최근에 나온 “노력의 배신”이라는 책에서는 한 개인의 성공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선천적 재능이나 사회적 환경이 성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하려면 노력해라”는 말은 개인에게 열등감과 자책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광야와 같이 척박한 현대 사회의 본질을 사회학적으로 잘 설명한 책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자신의 삶의 조건에 좌절하면서, 감사보다는 원망하는 마음이 자꾸 올라오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누리는 풍요와 성취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멸망받을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실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나의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다, 내가 노력해서 돈을 번다는 생각 자체가 이 시대가 일으킨 환상입니다. “나는 노력했는데 왜 지금 이러냐”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노력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돈을 벌고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건강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재능을 주시고, 내 지식과 기술이 녹슬지 않도록 간직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내 직장을 지켜 주시고,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또 우리 사회와 세계의 경제 상황을 지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이 중에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흔드시면 나의 일상 자체가 전부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이 바울 사도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시편 기자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 내가 나의 생존을 결코 책임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만이 밤에 평안히 잠들 수가 있습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노력이 다 소용 없다, 아무렇게나 살자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시편에서도 집을 세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파수꾼은 밤새도록 깨어서 성을 지켰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노력할 수 있도록 힘 주시고, 우리의 노력이 열매맺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항상 기억해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우리 각 사람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한가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길 바랍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원망하기보다, 이미 주신 것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삶의 결핍이 있을 때에도 원망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소망과 간구의 긍정적인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매일의 양식은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4-12절) 1) 죄인에게 양식을 공급하시는 은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는 가망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요? 만약에 우리의 자식들이나 부하직원이 이런 식으로 원망을 표현한다면 징계를 내리고 혼을 내면서 우리의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해결책은 우리와 다릅니다. 4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율법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시험하고 확인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법은 바로 더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원망하고 거역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출애굽의 과정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금새 잊어 버리고, 여전히 불신하고 불안해하는 이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한량 없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 더 큰 은혜를 장대비처럼 폭포수처럼 하늘에서 쏟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 크고 높고 강력한 무언가를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조금 다릅니다. 6-7절에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또 8절에도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대구법이 쓰였습니다. 비슷한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해서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영광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구출해 내신 것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것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힘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오래 참으시고 이들의 허물을 덮어 주시면서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8절 후반부에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또 10절과 1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관계가 더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필요로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 한 가운데서 고립된 자들이었습니다. 배고파서 아무 말이나 쏟아놓는 갓난아기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자식이 무언가 결핍되어서 짜증이 나서 부모에게 원망하는 말을 내뱉을 때, 왜 버릇없이 구냐고 호통을 치고 혼을 내면서 권위를 세우는 것이 영광이 아닙니다. 아무 말없이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배불리 먹게 해주는 데서 부모의 영광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잘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재산을 탕진하고 부끄러운 심정으로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그때 이 아버지는 두 말 없이 아들을 불쌍히 여겨서 안아주고 입을 맞추고 잔치를 벌여 환영합니다. 또한 첫째 아들이 그 모습을 보며 철없이 질투할 때에도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다” 하면서 큰 아들도 격려해 줍니다. 이 자녀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무조건적인 긍휼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혹시 이 중에서는 “왜 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많이 누리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불신자들이 우리 신자들보다 훨씬 더 풍족하게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이 때로 우리에게 큰 시험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불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은혜를 보면서 비교하고 질투하기보다,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찬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오늘도 찬란하게 온 세상을 비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정서적으로 결핍되어서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는 우리를 향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 계십니다. 이 큰 은혜에 감사합시다.
2) 매일의 양식은 백성들을 원망에서 순종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백성들을 변화시킵니다. 이 백성들은 본래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명령하셨습니다. 16절에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두라.” 19절에 “누구도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지만 이들 중 어떤 사람은 많은 양을 거두고 아침까지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자 음식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25절에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여튼 이 사람들은 말을 진짜 안 듣습니다.
이들이 말씀을 어겨 가면서 만나를 계속해서 모아 두려고 한 것은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계속해서 날마다의 양식을 주시고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해 스스로 대비하려고 했습니다. 말씀을 넘어서 과도하게 만나를 비축해 두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저축을 부정하는 말씀으로 오해하지는 말길 바랍니다. 이 광야 시기는 일상적으로 재산을 축적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정주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고, 농작물을 기를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의 본질을 일깨워 주는 표준으로서 교회의 특정 시기에 주어진 특별한 환경였습니다.
오늘 4절에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시험에는 그냥 테스트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훈련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매일의 만나가 신앙의 훈련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풍족하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매일 쓸 것을 그날그날 나가서 얻도록 하셨습니다. 날마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살도록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3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사람은 빵과 떡, 돈이라는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 자체를 추구하면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됩니다. 물질 너머에 그 물질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은혜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물질도 풍성하게 공급받게 됩니다.
또한 백성들은 자족을 훈련해야 했습니다. 하루에 먹을 만큼만 거둬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나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민수기 11장에는 백성들이 만나를 먹으며 자족을 훈련한 내용이 잘 나옵니다. 저녁에 메추라기가 공급된 것은 아주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계속해서 공급된 것은 만나 뿐이었습니다. 그 자체로는 아주 달고 맛있는 과자이고, 영양소도 풍부하지만 화려하고 다양한 식사는 불가능했습니다. 백성들은 원망이 쌓았습니다. 고기까지도 먹게 해 달라고 항의를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큰 진노를 당합니다.
이 백성들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서툴렀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할 줄 몰랐고, 자족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책망도 하시고 징계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결코 만나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멈추지 않으시고 매일매일 계속해서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결과 이 백성들은 서툴지만 조금씩 순종을 훈련해 갑니다. 21절에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또 30절에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몇몇 사람들이 불순종했지만 교훈을 얻어서 순종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이런 순종의 감동적인 변화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끊임없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34절에 하나님께서는 항아리를 가져다가 만나를 담아서 지성소의 증거판 앞에 보관해 두도록 했습니다. 증거판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성막과 성전의 중심이 되는 장소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의 증표입니다. “내가 항상 너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희를 굶기지 않겠다. 이 만나를 곁에 두고 보며 항상 기억하겠다.” 이런 의미가 담긴 증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백성들이 아무리 부족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계속해서 은혜 베풀어 주십니다. 은혜의 능력으로 죄인들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3. 참된 양식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6장)
이제 광야 생활은 끝났고, 만나는 더 이상 공급되지 않습니다. 성전도 허물어져서 만나를 보관한 항아리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진정한 생명의 양식이 하늘에서 우리 곁에 내려왔습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에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친히 양식이 되셔서 몸과 영혼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예수님을 먹는 방법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풍성한 생명으로 배부릅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면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쪽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죄를 용서해 주고,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주는 것은 맞다. 하지만 예수님 믿는다고 실제 양식을 공급받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불신자들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논리 중에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우리 신자들 중에서도 예수님 믿고 물질을 공급받는다는 생각을 기복신앙처럼 경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신앙생활 따로 물질생활 따로 하는 이원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 되시면서 동시에 천지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몸과 영혼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구원하시고 복 내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물질적 필요도 채워 주십니다. 요한복음 6장 앞부분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말씀을 듣다가 배가 고프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성인 남성만 오천 명, 다 합치면 이만 명 정도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그 제자들은 힘을 얻어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잘 배웠을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만 믿으면 부자 되게 해 주신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5:33)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주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우리의 물질적 필요도 채워 주십니다. 화려한 잔칫상을 펼쳐 주신 게 아닙니다. 소박한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되, 배부를 정도로 충분히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급하심 가운데 자족을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의 양식과 육신의 양식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필요가 채워질 때, 우리는 더욱 힘을 내서 이 땅에서 노동을 하고 양식을 얻게 됩니다. 또한 물질적인 필요가 충족되면 더욱 힘내서 영적인 은혜를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빌립보서 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현실적인 곤궁함 앞에서 우리의 영혼도 크게 낙심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공급됩니다.
또 빌립보서 4:19-20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현실적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로 나갑니다. 이런 본문들을 보면 물질적 필요가 채워지는 것과 영적 필요가 채워지는 것이 서로 나눠질 수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죄인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하늘의 양식을 한량없이 공급해 주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합시다. 이 은혜에 감격하여 순종으로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주신 물질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눕시다. 고린도후서 9:10-11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양식을 주셔서 의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물질을 통한 의의 열매는 교회를 통해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드리는 헌금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의를 이루십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서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을 돕습니다. 교회가 돕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 가운데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 성도들의 영적 필요 뿐만 아니라 물질적 필요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참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 모두의 구주가 되십니다. 건강이나 경제적 필요가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주님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성도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돌아보고 채워주는 은혜의 통로로 쓰임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헌금으로 섬기고, 또 우리 여러 집사님들이 직분을 잘 감당하여서 양식이 비같이 내리는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맺음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에게 은혜로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건강과 물질적 풍요,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합시다.
비록 우리는 감사에 서툰 죄인이지만, 주님의 은혜가 어디서나 우리를 덮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은혜 안에서 자라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주님께만 의지하며 자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가 받은 물질의 은혜를 다른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의 유일한 생명이요 공급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늘에서 비같이 내리는 은혜의 양식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
어린이 설교
우리 어린이들은 장래 희망이 뭐에요? 무슨 일을 하고 싶나요? 네, 꼭 이루길 바래요.
우리가 직업을 갖는 이유 중에 중요한 것이 돈을 벌기 위한 거에요. 직장에서 일을 하면 돈을 주는데, 그 돈을 가지고 음식도 사서 먹고, 옷도 사서 입고 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어요.
돈은 누가 벌게 해 주는 걸까요? 많은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번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직장에서 일해서 돈을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 돼요. 또 학생 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쌓아야 돼요.
하지만 사실 그 돈을 벌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지켜 주시고, 나에게 능력을 주시니까 내가 일해서 돈을 벌 수가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일도 제대로 못 해요.
우리가 가진 것들이 전부 하나님께서 주신 거에요. 엄마가 해 주는 음식, 우리 집, 학교, 이것이 전부 하나님께서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사용하셔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이에요.
가끔 불만족스러울 때도 있거든요. 왜 이렇게 맛이 없어? 우리 집은 왜 이렇게밖에 안 돼? 왜 나는 이런 식으로 생겼어?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여러분한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에요.
하나님께서 나한테 좋은 것들을 주신 거거든요. 감사하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누리길 바라요. 또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기도를 들으시고 공급해 주실 거에요.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본문: 출애굽기 16:1-12
결론: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1. 매일의 양식은 자격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3절)
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2) 우리가 먹는 양식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 (신약 282쪽)
시편 127:1-2 (구약 899쪽)
2. 매일의 양식은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4-12절)
1) 죄인에게 양식을 공급하시는 은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15:11-32 (신약 122쪽)
2) 매일의 양식은 백성들을 원망에서 순종으로 변화시킵니다
신명기 8:3 (구약 274쪽)
고린도후서 9:10-11 (신약 296쪽)
3. 참된 양식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6장)
빌립보서 4:6-7, 19-20 (신약 323쪽)
개인 묵상과 소그룹 나눔을 위한 질문
1. 지금까지 살면서 먹고 사는 문제에서 큰 어려움을 겪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2. 우리가 먹고 살 것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 누군가에게 용서받고 은혜를 받은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4.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까지도 채워주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질문
1. 이 땅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충분한 양식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2.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배고파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셨습니까?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넉넉하게 채워 주시는 것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4.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하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