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서 의미를 어떻게 담을까?
롤랑 바르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수필에서의 의미를 다루어보자.
그는 이발소에서 ‘파리마치’ 잡지를 보았다. 표지는 프랑스 군복을 입은 흑인 청년이 눈을 약간 치켜 뜬 체 주름진 프랑스 삼색기를 주시하면서 군대식으로 경례를 올렸다.
이 잡지의 표지가 주는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을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읽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며, 프랑스의 모든 자손들은 인종차별 없이 프랑스 국가 아래 평등하게 군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지의 이미지는 제국주의를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 흑인 청년이 보여준 이러한 열광적인 충성보다 더 나은 대답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해석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눈에 보이는 그림은 흑인 청년이 프랑스 국기에 경례를 하는 것이지만, 그림의 전체가 우리에게 하는 말은 위의 인용문의 내용이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림 자체는 형식이 된다. 그림의 부분 부분이 아니고, 전체 그림이 주는 이미지가 의미가 되면서,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말이 내용 즉 이 그림의 주제가 된다. 이 말을 수필에 그대로 가져오면 수필의 형식은 수필 한 편이 만들어내는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이야기가 된다. 수필의 주제는 수필에 사용한 단어, 문장, 단락의 부분이 주는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고, 수필 전체가 주는 이미지가 의미 작용을 한다.
파리마치 지의 표지 사진은, 사실은 프랑스 육군이 군인을 모병하는 광고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사진의 본래 의도는 젊은이들이 군대를 동경하여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수필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주제이다.
나의 생각으로 군대의 모병에 백인 청년보다 흑인 청년의 지원이 많았으므로 ‘인종 차별이 없는’이 아니고 아예 흑인 청년을 대상으로 한 목적성 광고가 아니었을까 쉽다.(나는 프랑스 문화를 모르므로 이것은 순전히 나의 추측입니다.)
파리마치지의 표지 사진의 의미 또는 내용이 군대 모병이든, 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것이든, 제국주의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것이든, 의미는 사진 전체가 주는 이미지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진의 세세한 부분으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수필인 ‘피천득의 인연’을 예로 들어보자.
이 수필에 대한 평도 다양하다. 단순히 작가 개인의 연애담일 뿐이지 무슨 교시적 의미가 있는가, 에서, 인간이 갖는 서정적인 감정을 잘 표현해냈다. 등등이다. 또 형식상 소설이다. 수필이다 등의 논쟁도 있다. 어린 소녀와의 관계를 연애담이라고 보기에도 얼른 납득이 가지 않고, 아사코라는 여인의 변신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는 글 전체의 흐름에서 이해해야 하겠지만 쉬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 식으로 의미(주제)를 찾는다면 우선 수필의 세세한 부분이 아니고, 전체를 읽고 난 뒤에 느낌으로 오는 이미지가 주제가 될 것이다. 어떤 느낌이 올까? 여학교를 찾아가면서, 과거로 회상 여행을 하는 것은 수필쓰기의 기본 양식이다. 어린 아사코와 만남이 이 글에서 너무 강력한 인상으로 다가와, 이 부분이 수필의 의미를 만들어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일까?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난 뒤에 오는 느낌은 아름다운 애정심리일까. 아니면 아름다웠던 일도 인생사라는 여정에서 보니까 아름다움이 아닌 그냥 삶일 뿐이더라, 일까? 이 중에 어느 것을 주제로 하든지 간에 어색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또 하나는 김규련의 수필 ‘거룩한 본능’도 예로 들어보자.
내가 아는 지인이 이 수필의 허구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수필의 배경 지역까지 직접 찾아가서 확인까지 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새가 목을 감고 죽었다는 사실이 논리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부분은 수필의 중심 사상이기는 하지만 글의 전체가 아닌 부분이다. 그러나 글의 전체가 이 부분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 이 부분이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우리의 감성을 지배하면서 의미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수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수필은 주제가 너무 강렬하여 수필의 형식을 가볍게 다루었다는 느낌이다. 기승전결이라는 이야기 형식으로 쓴 글이 아니고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보여주기만 하였다. 말하자면 소재가 주는 의미가 너무 강렬하다보니 소재를 드러내기만 했지 형식에는 소홀했다는 느낌이다. 문제는 수필에서 의미를 강조하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지만, 이런 방식으로 의미를 강조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수필에서 의미를 어떻게 담아야 할까?
위에 인용한 두 수필은 우리에게 아주 많이 알려진 유명한 수필이지만 의미를 담아내는 방법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수필을 읽을 때는 주제는 생각하지 않고 재미에 이끌려서 전부를 읽는다. 읽고 난 뒤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재미를 주는 구성이 우선이다. 재미를 주는 구성은 이야기 형식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야기의 구성원리는 기, 승, 전, 결이다. 기승전결로 된 이야기를 전부 읽어야 총체적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거기에서 의미가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글의 기본구조가 기승전결이라는 이론이 나온지는 1500년이 되었다.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면 거의 진리라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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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마치지의 광고 사진을 한 눈으로 보고 이미지를 떠올리듯이, 우리 수필도 (한눈으로 보듯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난 뒤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의미가 되리라. 그러나 표현에서 공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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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수필에서 읽기를 다 하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의미로 생각하면, 독자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는 다양할 것이다. 다양성은 과학이 아닌 문학의 답이다. 잘못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의미 찾기에서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이유를 나는 표현 형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흐름을 만드는 기승전결이 아니고, 세부의 표현이 우리의 상식에서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승전결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표현 방법에서 독자의 공감을 엊지 못한다면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연에서는 청년과 아직 유치원생인 여자 아이 사이에 첫사랑의 감정이 느껴질까 이고, ‘거룩한 본능’에서는 아무리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동물인 새가 사랑의 표현으로 목을 감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필에서 표현은 작가의 고유 권한이지만, 언어이론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공통되는 사유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독자가 고개를 갸우뚱한다면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지금 제가 올리는 글은, 수필쓰기의 기초가 아니고 제 나름으로 추출해본 고급이론이라서, 중진 이상의 수필가님에게 제 의견을 전하는 글입니다. 제가 올리는 글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므로 참고로 보십시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