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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국가의 공모" -3부- 종교가 국가를 개혁할 수 있을까
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더욱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내면화되는 이유에 대해 종교, 국가, 자본주의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토론했다. ‘서영보이’(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에서 있었던 지난 토론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토론회 이름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토론자(가나다순):
김근수(가톨릭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
박광수(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종교학/원불교학)
박일준(감신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책임연구원, 종교철학)
서보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제정치학),
신익상(성공회대 연구교수, 조직신학, 정리),
원영상(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철학/신학)
이병두(종교칼럼니스트, 전 문화체육관광부 불교담당 종무관),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 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종교가 국가를 개혁할 수 있을까
- 서보혁: 일반 사회구성원들 중에는 종교, 정치, 권력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도 있고 비판적인 사람도 있다. 또 민주주의 실현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 중에서 선거를 통한 민주세력의 집권을 주요 전략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최근에는 지역 풀뿌리 활동을 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종교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박일준: 「공유의 비극을 넘어」라는 책을 보면 6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마을 공동체의 공유지 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책은 공유지를 관리하는 세 가지 시스템들을 소개한다. 국가 통제 시스템과 자유 시장 시스템과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공동체 자치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어부들이 수십 년간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어장을 공유한다고 하자. 이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서로 아는 구조 속에서 자체적으로 감시망을 형성하는 공적인 구조를 만들어 간다. 그러다가 행정관이 개입하고 법의 잣대를 들이대 획일화시키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도리어 공유지가 파괴된다. 이 때 마을 공동체 운동이나 종교 단체들이 시도하고 있는 작은 교회 운동 등이 공동체 자치 시스템을 되살릴 수 있는 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원영상: 행정관을 국가의 개입이라고 본다면 이처럼 종교와의 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종교와 국가, 그리고 국가를 실질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자본주의 간의 관계 설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 설정을 위해 먼저 종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봐야할 대상은 국가이다. 오늘날 국가의 양태를 보면 실질적으로 만족스러운 기능을 못 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향한 기대도 있지만 사실 “지금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민중 다수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정치의 직업화로 인해 세금으로 거두어진 재원을 담합으로 분배하는 구조고착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국가 간의 시비이해로 인한 비용 낭비만 해도 천문학적이다. 현재의 국제적 동향들을 살펴보면, 국가 간의 갈등이나 분쟁에 종교가 관여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국가 간의 충돌로 인한 살상은 물론 질병, 기아, 난민 등의 대처에 종교는 거의 무력한 것처럼 보인다. 국가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종교 세력은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 사회적 역할은 국가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음을 잘 볼 수 있다.
평범한 신도들은 두 가지 세계의 지배를 받는다. 삶의 외형에서는 국가의 지배를 받고 내적 세계 안에서는 종교의 지배를 받는다. 이찬수 목사님이 지적하였듯이 적어도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외형의 국가 조직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국가의 기원에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국가권력을 놓고 보면, 작은 폭력을 보다 큰 폭력으로 제어하기 위한 조직이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강요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무력을 통한 혁명이 빈번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대다수의 민중은 그러한 혁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국가 형태는 실제적으로는 폭력으로 만들어진 집단이나 조직이다. 국가의 이러한 근원적인 한계로 인해 현재 지구상에는 온 인류가 먹고 살만한 양식이 충분히 생산되고 있지만, 기아에 허덕이는 민중들에게 충분한 배분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관할이 미치는 지역과 이를 배타적으로 설정한 국경이라는 지리적 분할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경제적 효율성 때문에 한 지역의 풍요가 다른 지역의 불황을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폭력성을 지닌 국가에 대해 그 정당성과 신성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종교이기도 하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에 의해 설립된 일본의 근대국가만 보더라도 잘 드러난다. 폭력을 통해 일어난 국가의 권력 확립을 위해 막부 체제 하에서 거의 무력했던 천황을 끌어들이는 한편, 천황의 신성화를 위해 신도(神道)를 종교로부터 탈색시켜 국가의 제사 기능으로 탈바꿈시켜간 과정을 보면 종교는 국가권력에 얼마나 휘둘릴 수 있는 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를 비롯한 기성 종교는 물론, 일반 국민마저 이러한 국가 종교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사실 국가는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말하듯 ‘상상의 공동체’이면서, 민족주의나 기원설화를 끌어들여서 영토와 국민과 주권을 하나로 통합하여 만들어진 이익 집단 같은 것인데,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보장해준 것이 바로 종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떤 식으로, 국가는 영속적이며 절대적이라고 하는 신화를 해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가변적인 조직을 뛰어 넘어 종교 고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 문제의 해법을 위해서는 국가적 승인 하에 기능하고 있는 종교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즉, 종교 또한 로마 가톨릭처럼 국가의 형태를 닮아가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종교 그 자체의 기원이나 순수한 역할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다. 종교인 일부의 일탈이 아직은 종교 전체를 폄훼할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국가조직화 되어가는 종교의 내적 환상을 스스로 지워내고, 순기능적인 측면에서 국가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나면 분명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역할이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를 위해 종교 또한 태어남, 성장, 늙음,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생물학적인 조직임을 알고, 자신을 가두었던 종교적 신화화(神話化)를 해체하여 인간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도할 필요도 있다.
종교 먼저 탈신화화 해야 한다
- 이관표: 국가에 대한 탈신화화가 되지 않았던 게 문제다. 국가의 신화화가 계속되면서, 60~70년대 박정희 정권만 하더라도 국가가 종교적인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국가를 비판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이 성장하면서 탈신화화 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종교도 탈신화화고 스스로 정화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가 갖고 있는 신화적인 요소나 구조를 종교가 해체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국가를 탈신화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박일준: 글쎄 그럴까. 세속화, 탈신화화의 방법이 종교에 해방의 차원을 가져다 줄 거라는 낭만은 근대에 깨졌다. 기존의 공동체적 권력으로부터 개인에 초점을 두고 해방을 추진한 것이 종교개혁이었고, 그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 프랑스혁명이었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관통하면서 근대 시대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혁명에서 이야기했던 자유와 평등의 이상에 과연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느냐’, ‘난민도 포함되어 있었느냐’ 비판할 수 있었다. ‘백인 남성 중심의 인간이해를 가지고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냐’ 성찰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세속화, 탈신화화가 해방의 힘이었다기보다는, 어떤 권력과 결탁한 억압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이 해방의 운동들은 ‘탈세속화, 탈신화화’가 아니라, 도리어 종교가 가져다 준 통찰에 기반 한다.
이제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네트워크로 자본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스템이 이루어졌다. 자본이 국가를 초월하는 임계점을 지난 것으로 보인다. 자본이 흐르는 메커니즘이 권력시스템 전체를 주도하는 식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자본의 주체가 아니라, 이제 도리어 자본이 국가의 주체가 된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자본주의화한 지구촌에 대한 비판이 시급하고, 여기서 종교는 어떻게 전통적으로 추구해왔던 이상들을 새롭게 재번역하고 해석해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즉, 세속화 혹은 탈신화화가 아니라, 도리어 탈세속화 혹은 재종교화가 21세기 자본이 네트워크를 통해 지구촌을 장악한 시대에 대안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종교가 폭력을 줄일 수 있을까
- 이관표: 그런 상황에서도 국가는 항상 폭력과 결부되어 있는데 종교가 그런 시스템에 뛰어들어 그 폭력을 없애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 박일준: 종교에는 다양한 얼굴이 있다. 권력에 밀착한 종교가 있을 수도 있고, 그 시대의 권력으로부터 떨어져서 자신만의 영성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종교들을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동일한 시대를 살면서도 국가 폭력과는 반대의 입장에서 다른 운동을 해 온 종교들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한다.
- 이찬수: 인류는 다양한 차원에서 폭력을 줄여가는 행위를 할 수 있고, 또 해오고 있기도 하다. 긴 안목에서 보면, 이른바 종교가 평화에 공헌한 측면도 있다. 가령 자식을 부모의 부속물이나 재산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하나의 인격으로 간주할 수 있는 법적, 문화적 장치가 마련되어 왔다. 이것은 인류가 경험해 온 평화적 확장의 사례이자 근간이다. 서구의 상황을 예로 들면, 이런 변화는 중세의 신학적 가치와 교회 제도가 세속화하고(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사회 안에 녹아들고), 사회가 도리어 신학적 가치를 수용해 종교화한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종교가 폭력적 양상을 띠기도 하고, 우리가 그것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인류의 평화 경험에 공헌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 원영상: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는 국가를 매개로 한 신자본주의의 그물에 민중이 포획되어 가는 야만의 사회, 양육강식의 사회에 가깝다. 이러한 때에 종교는 야만의 사회에서 그마나 숨 쉴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삼백 년 넘게 지속된 국가가 없다. 이렇게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대치하는 사회에서도 종교는 계속 유지되어 왔다. 이를 보면 분명히 종교도 그 시대 시대마다의 요구에 부응해온 지혜를 갖추고 있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역량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 나름의 가르침과 방법을 지혜의 보고로 삼아서 이 시대의 종교적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이를 통해서 종교 스스로의 목표를 재설정한다면, 폭력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한다. 결코 종교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판을 하면서도 그런 가능성을 끝까지 부여잡을 필요가 있다. 물론 현재의 양태로 종교가 하나의 세력으로 끝까지 군림하고자 한다면 회의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회의적인 측면이 더 크다
- 이병두: 국가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종교가 이런 국가권력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형식상 정교분리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사실 아쉬우면 국가든 종교든 정교분리 같은 것은 무시한다. 불교만 보더라도 국가에 전통사찰을 지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전통사찰이 된다는 말은 국가로부터 간섭을 받겠다는 뜻이다. 국가에서 예산을 받고 기대고 간섭을 받고 싶어 한다. 종교는 이런 유혹을 못 벗어 던질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평화의 역할을 해내는 것은 결국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한다.
- 전병술: 교회를 가든 절을 가든 많은 사람들이 종교단체를 찾는데 나는 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사람들은 무언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종교를 찾는다. 그것은 속죄나 영혼의 정화일 수도 있고, 혹은 사교활동 등을 통해 창출되는 물질적 이득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나는 종교단체에서 이런 이득을 기대하지 않나보다. 아니면 영성이 부족하거나. 어쨌든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든 헌금이든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내주어야 하고, 이런 주고받기 가운데 종교(단체)는 유지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와 국가 간의 관계, 국가와 폭력간의 관계, 여기에서 파생되는 종교와 폭력간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려고 교회나 절에 가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간다. 정치인들도 표가 필요할 때 종교를 찾지 않는가. 이것이 종교가 대중과 공감하는 수준이 아닌가. 종교와 국가의 관계도 서로의 이익을 위한 공생관계일 뿐이다. 이러한 모습이 종교(단체)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또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도 종종 생각해본다. 어쨌든 큰 걱정 없이 그저 평온하게 하루하루 보내고 싶다. 내 삶이 팍팍하면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진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가장 성장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못 살고 힘들 때였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종교가 가난하고 힘든 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가 정말로 가난하고 힘든 자의 편에 서는 모습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개인의 안녕도 담보하지 못하는 종교가 어떻게 공동체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 신익상: 개신교 개혁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박득훈 목사의 말을 빌리면, 개신교 또한 물질적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교회 목회자의 설교는 주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른다: “재물을 섬기지 마시고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부자가 되실 겁니다.” 이것이 종교가 시민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를 비롯해서 종교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간 제도종교는 종교심을 통해서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지나치게 정당화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신앙인들의 삶에 내면화하도록 도와왔다고 할 수 있다.
- 박광수: 이런 것들이 기복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복된 삶이며, 복 받으려는 종교심을 키우면서 성장해온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종교성만을 기반으로 성장하고자 할 때,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종교도 그대로 이어받게 된다. 종교든 봉사든 복지든 국가의 지원을 받아내려는 체제에 스스로를 예속시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현재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과연 종교가 국가 권력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종교가 국가 권력을 넘어서기는커녕, 국가에 의해 존망이 결정되는 경우도 많다. 동학을 보면, 종교가 국가 권력에 의해 사라질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념적으로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종교지만 국가 권력에 의해서 없어지거나 힘을 잃어버리는 사례들도 있다. 인도의 시크교가 이 같은 경우이다. 종교가 세계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국가 권력에 좌우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종교를 이야기할 때도 어떤 규모와 내용의 종교냐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 간 불균형과 종교의 가능성
- 박광수: 세계에 다양한 국가가 있고 국가 간 관계도 다양하다는 사실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국가의 권력들도 또 다른 권력에 종속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그런 종속적 외교관계에 놓임으로써 남북문제에서 주권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과연 제대로 된 주권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세계문제가 대개 그렇다. 아프리카나 절대빈곤 국가들이 그렇다. 정치, 문화, 권력에 의해 다른 국가에 예속되고 지식문화는 종속되는 현상들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세계주의가 이루어지고 세계시장이 열리지만 그 세계 속에서 우리가 강대국에 종속․예속되는 경제, 문화, 군사 시스템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겠는가에 대한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세계종교인평화회의(World Conference of Religions for Peace: WCRP)와 세계종교의회(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 PWR)에서는 세계보편윤리를 여덟 가지로 제시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경제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다시 세계종교인평화회의가 열렸을 때(2013년) 과연 세계보편윤리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세계경제윤리를 보편적으로 내놓을 수 있겠는가가 논의됐었다.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약소국의 사람들까지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보편윤리를 경제부분에서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하나의 의제로 토론됐었다. 과연 종교계에서 다양한 열린 지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해서 대안을 만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 공유경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포콜라레(focolare)운동의 창시자인 키아라 루빅(Chiara Lubich) 같은 경우에도 공유경제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세계가 절대적인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속에서 그 부를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가능하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줄 때에라야 세계적인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김근수: 종교가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을까. 나는 크게 회의적이다. 종교가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려면 먼저 종교 내부의 권력 배분 문제가 처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종교 지배층의 완전한 통제 아래 놓이고 만다. 종교 지배층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가들과 타협할 가능성이 크다. 종교 지배층과 자본가들은 적대 관계가 아니라 공생 관계가 되어버린다.
평신도들은 자본주의 피해를 심리적으로 위로받기 위해 종교를 택하기도 한다. 그때 종교는 현실의 아픔을 잊기 위해 자발적으로 먹는 아편이 되고 만다. 국가나 종교 권력층이 사람들에게 이런 아편을 먹도록 권유하게 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사라진 종교는 자본가들이 바라는 종교 형태다. 종교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도 자본가들은 그런 종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영하게 된다. 그런 신도들이나 종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권력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적절하게 배분되지 않으면 자본가들은 종교 지배층만 장악하면 된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종교 지배층이 바라는 경제적 안정을 자본가들이 제공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종교 지배층을 마치 하청업체 직원처럼 여유있게 요리할 수 있다.
그들만의 언어로 끝나지 않으려면
- 정주진: 종교가 국가와 자본의 결탁과 그로 인한 폭력을 비판할 수는 있고 실제 영향력은 크지 않아도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의 비판이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그런 부분도 이야기해봐야 한다. 지금 이 모임의 목적도 폭력을 줄이기 위한 종교의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이 무엇이 있을까,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들의 지지까지 얻을 수 있는 비판적 접근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시도의 진정성이 제대로 전달될 것인가 하는 또 다른 고민이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가 상당히 낮기 때문에 그것까지 감안하면서 이야기해야 종교의 비판과 그 영향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나머지 50%의 비종교인들이 가능성이 있다고 봐줄 것인가?” 그것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나머지 토론이 첩첩산중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서보혁: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보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상부구조이다. 지배관계를 정당화하는 문화이자 이데올로기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종교 내부에서 대안을 찾자고 한다면, 이러한 맥락 속에서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가도 권력이고 종교도 권력이다. 국가와 종교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류가 계속되는 동안 둘 다 없어지지 않는 사회·역사적 실체라는 점이다. 종교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분류하거나 개념화하기에 앞서서 역사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국가와 종교를 비교할 수 있을 텐데, 이때 유의할 것은 비교의 대상이 동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국가를 현실 차원에서 논하는 대신 종교를 이론적 차원에서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는 비교방법이다. 종교를 이론 차원에서 논의한 후 현실 정치를 평가하는 것은 비대칭적인 논의일 뿐만 아니라 답을 정해놓고 전개하는 목적론으로 흐를 소지가 크다. 말하자면, 국가와 종교 모두 현실 차원에서 진지한 성찰을 먼저 한 후에 그 대안을 향한 사유가 필요하다.
- 원영상: 종교와 국가에 대한 논의는 사실 비대칭적이다. 하지만 이 모임은 애초에 종교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제기된 문제에 대해 어떤 대응 가능성을 열어보자고 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물론 종교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어디선가 모색을 감행해야 하는 데, 역시 수천 년 간 이어 내려온 종교 자신에게서 가능성을 봐야 한다. 가령 간디는 “내가 이제까지 믿어온 것은 신이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깨닫고 보니, 진리가 신임을 알게 되었다”는 언명이, 외부로부터의 압제와 내부로부터의 무명(無明)으로 뒤덮인 인도 사회의 변화에 큰 힘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시즘에서도 끊임없이 그 가능성을 보고 있다. 마르크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행형이며, 여전히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현실 대응의 원천적인 수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의 문제에 대응하고 있는 후기 마르크시즘은 사상 자신의 세포분열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제도적인 것을 벗어나서 시야를 넓게 보면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볼 수 있다. 애초에 종교를 창시했던 사람들을 다시 보면, 그들은 기존의 관념과 관습은 물론 기존의 문화나 국가적 행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열망 또한 강렬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 정신의 세포분열로 보이는 부정적인 측면의 종교적 다양성을 현실 대응을 위한 긍정적인 모색 차원의 다양성으로 인식한다면, 종교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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