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웃던 그 시절 생활속의 자화상]
이 사진들은 정확히 1971년도의 자료들입니다
가난했던 그시절 웃고 울던 우리의 국민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정도의 시절과 그때의 자화상과 생활모습을
되돌아 보고자 합니다.
공공 장소에서 휴지 없으면 가래침이나
콧물을 삼키(생키)라는 계몽을 하네요.
이 시절에는 어린이들 대부분이 손수건이 없어서
옷소매에 흐르는 콕물을 닦고는 했지요^^*
반들 반들.. 하얐게 말라서..
그땐 더러운것도 몰랐답니다.
한때 유행했던 동물 농장 춤입니다.
여럿이 함께 각종 짐승들 흉내를 내는 춤이었는데
괴상 망측한 춤이 다나오곤해서 배꼽을 잡곤 했답니다.
[만화가게]
가게에서 직접 볼때는 1원에 5~6권
대여는 3권정도.. 한 사람이 빌려가면
온 동네 다돌려서 보다 보니 금방 헌책되고
좋은 그림들은 찢어서 보관하고 반납할때
주인에게 걸리면 책 값 다물어주던 시절이었죠..^^
극장 포스터입니다
우리나라 모 항공사의 여승무원 정복입니다.
단정한 학생복 차림같지요?
구로공단 방직공장..털실로 니트를 생산 하는 공장입니다.
눈물과 함께 사연도 많으실 겁니다..
[고등학교 교복]
우리나라 남자 교복은 모두가 똑같았습니다
당시 대졸출신 월급 3만 5천원.
좌측에 보이는 흥신소는 가정사나,사건을 의뢰하고
해결해주는 사립탐정 비슷한 요즘의 해결사 사무소입니다.
[레코드판]
( 전축판)지금의 CD의 원조라고 할수 있겠네요.
이후에 테이프가 나오고 CD가 나왔지요.
[맥주마시기 대회]
당시 양대 산맥이였던 두개의 맥주 회사들이
홍보를 위해 이런 행사를 했답니다
아파트값 무척 싸지요?
현재도 이곳에 사시는 분 계시면 손 좀 들어주세요^^*
먼지가 자욱하도록 비비고 또 비비고
젊은이들 여럿이 모이면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입니다
도로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바위(사기)노름꾼 들입니다
막대기 뽑기/화투/장기등으로 서민들 많이도 울렸지요
90마력 1500CC급 코로나 승용차입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무작정 가출한 어린 소녀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모쪼록 평안한 삶이
이어졌기를 바래봅니다.
당시는 농어촌 젊은이들이 서울만 가면 출세하는 줄 알고
부모 몰래 한 밤중에 서울로~서울로~괴나리 봇짐싸서
무작정 상경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청량리역과 용산역은 늘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이 북적 거렸지요.
명절때 서울 먼저간 친구가 시골 내려오면 어떻해서든지 따라 가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답니다.
이때는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서 머리에 이가 많았습니다.
위생상 불결하다고 어린이들 대다수가 빡빡머리였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DDT 백색가루 살충제를
어른아이 할것 없이 몸에 뿌리곤 했답니다.
지금도 발전이 덜 된 제3국에는 DDT가 사용이 되고 있다네요.
[국회의원 선거유세장]
신문깔고 머리에 모자 만들어 쓰고 박수부대 같습니다.
당시에 많이 보던 풍경입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돈도 받고 식사 대접도 받고
공공연하게 부정선거가 치러져도 별로 문제가 되지않았던
정치적 암흑기라 할 수있겠습니다.
불량 전자제품 전시회 입니다
연극 "소" 의 한 장면이며 당시 배우들입니다.
창경원 식물원 같은데요.
두루마기에 갓을 쓴 촌로의 뒷모습이 이채롭네요
선거유세를 참관 하고있는 어르신들입니다
긴 장죽(대나무 담배대)에다가 하얀 고무신,갓, 발목에는 한복
아랫도리를 묶은 대님등이 이채롭습니다..^^
손에는 쌈지(돈,담배가루등 담음)를들고 경청 중이네요
[선거유세장]
나무가 견딜런지 불안합니다..^^
우측 철봉대에도 아슬아슬....
한쪽에 드럼이 보이고 신바람나게 노는것이 학교 축제 같죠?
단발머리 묶어 매고 자세 나오는 여학생 귀여운면이 있네요
위의 그림.
이곳은 부산 금정산 산성마을(행정동; 금성동)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누룩마을로 불렸고 현재는 전통 산성 막걸리가
염소고기 식당과 함께 명성이 자자합니다.
종이가 귀할때라 행사가 끝나면 종이를 모아서 팔곤 했지요
부엌에 앉아 숯으로 종이대신에 부엌삽에 글씨 연습하곤 했답니다.
[가족 나들이 갈때도 한복]
당시는 어머니들의 외출복은 거의 다 한복이었지요.
교련 훈련 반대 시위입니다( 교련=학생 군사훈련)
모든 학교는 학생들에게 사격을 비롯한
각종 군사 훈련을 실시했답니다
(일부 여학교도 포함)
시위가 가열되자 일부 학교나 도서관은 휴교/휴관하고
시위 진압군들을 투입함.
당시는 전경이란 제도가 없었으며
사회적인 문제는 군에서 통제를 많이 하였습니다.
시골에선 남자들 재산 목록 1호가 자전거.
여자들은 재봉틀..
뭐.. 이런 순서였어요.^^
부부가 나란히 자전거타고 외출갑니다.
아마도 장날 나들이 일듯..
돈이 없어 자전거 소유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답니다.
일본식 건축물(적산가옥)이 많았습니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현지인들이 붕괴된 사회 질서속에
아무런 제제없이 들어가 많이 살았고 그게 바로 현재의 소유자가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식육점에는 고기를 바깥에 걸어두고 팔았지요.
일부는 냉장고와 냉동고에 저장도 했지만
그때는 그런 시설 자체가 부족했고 또한 위생 개념도
현재와 달리 조금은 부실 했던 때랍니다^^
용산동 기지촌 이라고 들었읍니다.. 맞는지?
[청평 댐 버스 추락 사고]
국내 자동차 사고로는 최대의 참사로 80명이 사망했답니다.
지금도 "일반 시내버스"는 "정원"이라는게 없다시피 하지만
당시는 교통수단이 워낙 숫자가 적어서 버스 정원이라는 것이 없고
콩나물 시루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싣고 다녔으니
사고가 나면 저런 참사를 피할 수없었겠네요.
"이거 되겠읍니까!"
어느 대학교의 계몽 캠페인 같습니다
모습들이 참 청순해 보입니다..*^^*
저이가 누구여..?
선거 유세장에서 홍보물 인물과 후보자가 맞는지
대조해보네요^^
실내만 아니라 야외놀이 문화에도 빠져서는 안될 장고..
지금은 저런 모습 잘 볼수 없지만 예전에는 봄,가을 외출하기
좋은 계절을 만나면 유명 관광지 어딜가나 흔히 볼 수있는 풍경
이었습니다.
곗돈 부어서 일년에 단 한번이나 두번 정도의 외출이니
본전 생각이 날만도 하니 죽자사자 두드리고 흔들어야
잘 놀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요^^
[시장풍경]
북적이는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죠.
당시에는 물건 사는 사람보다
시장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답니다.
농기계가 거의 없었던 시절..
평생을 우리의 부모님들은 낫과
괭이 만으로 농사일을 하셨답니다.
대학교 주변 대포집에 낙서는 변한게 없는 것 같군요
삼베를 짜기 위해 손질 하는 중입니다
저걸 베틀에 한올 한올 끼워서 몇날 며칠을
매달려 타닥 타닥 베틀소리...베 한필을 짜곤 했지요
담배 가게겸 우표 판매소 입니다
우표 수집을 취미로 하는 이들이 많아서
새 우표 나오는 날에는 우체국에 줄을 서곤 했답니다..
못 먹고 못입고..
모든게 부족했던 그때 그시절..
날마다의 삶이 오직 살기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그때..
살기 팍팍했던 그때이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이웃간의 情이 있어 좋았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좋은 추억 여행이었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우와! 전부 제가 옛날에 겪었던 일들이네요. 대학 1학년 때 금정산 위 산성마을에서 막걸리에 취해서 해롱대기도 했고, '74년도 제 초임이 4만 9천원이었는데.... 이런 자료들을 어떻게 찾어셨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반갑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