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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일한 神의 영역 침범, 그 오만한 당당함을 탐닉하다
— 황지우의 『묵념 5분 27초』가 도발한 침묵의 시학과 전위성
나병훈 /문학평론가
1. 여는 글
언어의 파산(破産), 혹은 침묵이라는 가장 격렬한 전위(前衛)
문학이 시대의 고통을 기록하는 대변자라는 명제는 오랫동안 자명한 진리로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언어가 도저히 현실의 참혹함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스스로 파산(破産)을 선언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한계 상황과 마주하곤 한다. 1980년 오월의 광주가 남긴 실재적 비극이 바로 그러했다. 제도화된 언어는 권력의 검열 아래 박제되었고, 기성의 서정성론은 거대한 학살과 죽음의 무게 앞에서 한낱 무력한 수사에 불과했음을 자인해야 했다. 언어가 현실을 배반하고, 수사가 슬픔을 모독하는 야만의 시대 속에서 시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비극적 질문의 최전선에 황지우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의 기교적 세련을 거부하는 차원이 아니다. 일찍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의 참상 앞에서 시의 야만성을 경고했듯, 1980년 오월의 광주는 기성의 모든 서정적 수사를 전면 유예시켰다. 계엄군의 총칼 아래 박제된 제도 언어와, 그 안위 속에서 슬픔을 탐미적으로 소비하던 당대의 제도 문학은 그 자체로 역사의 실재(The Real)를 모독하는 행위였다. 황지우는 이 지점에서 시를 ‘짓는’ 자가 아니라, 시를 ‘부수는’ 자로 등장한다.
황지우의 시학은 언어를 정교하게 조탁하는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무력함을 폭로하고 그 형식을 잔혹하게 해체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그는 신문 광고, 약도, 기호, 만화 등 일상의 온갖 파편들을 텍스트 내부로 끌어들이며 기성 문학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의 전위성이 도달한 가장 극단적이자 숭고한 정점은, 역설적이게도 활자 자체를 완벽하게 소거해 버린 ‘텅 빈 침묵’이었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묵념 5분 27초』는 시적 웅변이 도달할 수 없는 심연을 메우기 위해, 언어 이전의 완전한 공백을 선택한 작품이다. 이는 단순히 정통 시학에 대한 오만한 도발을 넘어, 인간의 언어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즉, 신(神)의 영역이자 역사의 거대한 실재를 향해 던지는 가장 당당하고 격렬한 질문이다.
따라서 황지우가 감행한 시적 형식의 담대한 파괴 과정을 추적하고, 그가 남겨둔 5분 27초의 여백이 어떻게 동시대의 슬픔을 위로하는 미학적 성찬(聖餐)이자 현실을 재구성하는 실재(The Real)로 기능하는지 규명해 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해남 땅끝에서 목격했던 그의 전위적 체액이 여전히 오늘날의 안일한 서정성 시학을 향해 어떤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지, 그 '당당한 오만함'의 미학적 궤적을 심층적으로 탐닉해 보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본론
2-1. 기성(旣成)의 집을 떠나는 전위, 그 ‘당당한 오만함’의 시적 출현
텍스트의 행간을 모두 지워버린 채, 오직 허공에 걸려 있는 제목 하나만을 화두(話頭)처럼 툭 던져놓은 이 오만한 시를 마주하는 순간,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강렬한 호소문이 하나 있다. 일찍이 강은교 시인이 어느 문학 칼럼을 통해 동시대 시인들을 향해 던졌던 절박한 경구이다. “시인이여, 어서 떠나라. 아직도 거기 머물고 있는가. 옛집은 틀이며 진부함이며 상투성이다.” 이 강렬한 외침은 제도화된 문학, 체제 내에 안주하는 언어적 타성을 향한 엄중한 경고였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의 본질적인 회의로 이어진다. 도대체 ‘시’라는 예술 형식은 황지우에게 있어서 무엇이었을까? 그는 기성 문학이 구축해 놓은 견고한 영토를 파괴하고 어디로 떠나고자 했던 것일까.
강은교가 촉구한 ‘옛집을 떠나는 가출’의 행위는 황지우에 이르러 단순한 주거의 이전이 아닌, 집이라는 구조 자체를 폭파하는 테러리즘의 양태를 띤다. 그의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가 던지는 사지선다는 독자에게 건네는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시를 예술의 왕좌에서 끌어내려 길거리의 잡소리와 동등한 위치에 놓겠다는 미학적 평등주의이자, 기성 문법의 엄숙주의를 비웃는 전위적 오만함이다. 이 오만함이야말로 제도의 안락함에 포섭되지 않겠다는 시인의 유일한 방어기제이다.
황지우는 자신의 또 다른 메타시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라는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매우 실험적이고도 도발적인 설문을 요청한 바 있다. 그는 그 작품 속에서 시를 정의하기를,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지금 이 시대를 위한, 지금 이 시대의 유언(遺言)”으로 쓰는 것이라 진술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 처절한 진술이 과연 “오만인가? 당당한가? 위험천만한가? 아니면 천진난만인가?”라며 독자의 안목을 시험하듯 되묻는다. 이는 실로 기발한 작시법(作詩법)인 동시에, 기성의 문학적 서정성을 단숨에 무력화시키는 전위적(Avant-garde) 도발이 아닐 수 없다.
비평가로서 필자는 이 잔혹하고도 매혹적인 사지선다의 설문 앞에서 오랫동안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는 위험천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대의 모순을 응시하는 천진난만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 사유의 끝에 필자는 ‘당당한 오만함’이라는 선택지를 고르고, 설문지의 빈 여백에 붉은 잉크[朱記]로 강하게 밑줄을 긋고 만다. 왜냐하면 기성의 틀, 물화(物化)된 진부함과 타성적인 상투성은 황지우의 문학적 영토에서 이미 완벽하게 소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40여 년 전, 등단이라는 제도적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그 제도의 안락한 ‘옛집’을 스스로 부수며 끊임없이 탈주하고 있었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황지우에게 시학이란 안주가 아니라 영원한 가출이며, 기성 문법에 대한 끊임없는 배반의 역사이다.
2-2. 악연(惡緣)의 시대와 감시자의 슬픔, 그리고 마법적 정치성
필자가 그의 시세계를 ‘당당한 오만함’으로 규정하는 비평적 근거는 또 다른 결구(結句)의 고백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황지우는 동시대와 맺어진 잔인한 ‘악연의 고리’를 도저히 풀어낼 수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유언(遺言)’으로서 시를 쓰고 있다고 고백한다. 1980년대라는 압도적인 폭력과 야만의 시대 속에서, 시인이 마주한 역사적 현실은 정면으로 돌파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했고,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의 고백의 언저리에는 시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감시자(Panopticon)로서의 처절한 슬픔과 자기학대적 고통이 짙게 배어 있다.
황지우가 응시하는 현실은 거대한 원형 감옥, 즉 파놉티콘과 같다. 시인은 감시당하는 수형자인 동시에 그 감시체제의 모순을 고발하는 역(逆)감시자의 위치에 선다. 그가 선택한 풍자는 단순한 냉소가 아니라, 성(聖)과 속(俗)의 위계를 뒤흔드는 카니발적 전도이다. 가장 세속적인 찌라시의 언어로 종교적 숭고함을 질문하고,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틈새에서 일상의 비루함을 노출시키는 이 ‘마법적 정치성’은, 체제가 구축한 견고한 상징계를 교란하는 고도의 미학적 게릴라전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슬픔의 늪에 침잠하여 신파적 눈물을 흘리는 대신,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와 가차 없는 부정(否定)의 정신을 작동시킨다. 바로 그 비평적 거리두기와 냉소의 지점에 ‘당당한 오만함’이 고여 있는 것이다. 결국 황지우의 시는 그러한 지적인 오만함을 무기 삼아,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비극적인 시대를 잔혹하게 풍자한다. 그러나 그의 풍자는 단순한 파괴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상향(Utopia)을 꿈꾸는 시의 행간에는 미학적인 마법이 존재한다. 그는 시라는 좁은 텍스트 내에 단일한 목소리를 담는 대신, 정치성(政治性), 종교성(宗敎性), 그리고 지극히 세속적인 일상성(日常性)을 한데 뒤섞는다. 이 이질적인 가치들이 황지우라는 용광로 속에서 버무려질 때, 그의 시는 기이할 정도로 독특한 미학적 감칠맛을 내뿜는다. 이 마법 같은 연금술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의 시에서 시대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고도의 정치적 저항과, 인간 구원을 향한 종교적 갈망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2-3. 神의 영역을 파훼하는 담대한 파괴, 문법 없는 시의 진실
이러한 미학적 마법이 가장 극단적이고 흥건하게 흐르는 작품이 바로 지극히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텍스트, 『묵념, 5분 27초』이다. 활자가 모두 사라진 이 거대한 빈 공간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읽어내야 할까? 어떤 시인은 일찍이 시를 일컬어 “자연과 인간을 꿰뚫어 보는, 神을 닮은 인간의 눈”이라고 찬사했던가. 시가 신성한 계시의 대리물이자 절대적 진리의 표현이라는 믿음은 오랫동안 문학의 신화로 군림해 왔다.
『묵념, 5분 27초』는 인류 문명이 구축해 온 로고스(Logos)의 성벽을 향해 던지는 폭탄이다. 신의 대리자로서 진리를 받아 적던 시인의 책무를 내려놓고, 활자 자체를 소거하는 이 담대한 파괴는 역설적으로 신이 부여한 언어적 독점권에 대한 반역이다. 문자가 사라진 자리, 문법이 파괴된 진공의 상태야말로 권력의 오염 물질이 묻지 않은 유일한 순수의 영토가 된다. 시인은 독자에게 완성된 텍스트를 배달하는 공급자가 아니라, 함께 침묵의 사건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연출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지우가 감행한 이 행위—즉, 시적 언어 자체를 소거함으로써 神이 부여한 언어적 영역을 파훼해 버리는 시 형식의 담대한 파괴를 우리는 여전히 ‘시’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오직 제목이라는 파편적 기호만을 남겨놓은 채, 정작 본문으로서의 시 쓰기는 독자들의 능동적인 상상력과 몫으로 툭 던져버리는 이 전위적인 예술 행위(Performance)가 과연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비평가라면 이 도발을 기꺼이, 그리고 엄숙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본래 ‘시의 절대적인 문법’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 쓰기란 기성의 제도적 규칙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시험하는 ‘영원히 대답 없는 무모한 질문’에 가깝다. 그런 맥락에서 『묵념, 5분 27초』는 오만의 극치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예술적 당당함이 지닌 실체를 가장 순수하게 증명하는 텍스트다. 황지우는 과거 자신의 언어를 불신하고, 스스로 쓴 시를 모독하며, 심지어 “두 번 다시 보기 싫다”고 극단적인 혐오를 표출할지언정 기성의 정통적인 시의 길을 거부했다. 그는 안락한 중심을 잃어버리고 기꺼이 미지의 변방에서 길을 잃기 위해 모태적으로 타고난 시인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 오직 ‘5분 27초’라는 구체적인 시간의 무게만을 부각시킨 그 텅 빈 공간이야말로 가면을 벗어던진 황지우 시인의 가장 진실하고 처절한 민낯이다.
2-4. 無와 有의 변증법, 여백(餘白)이 잉태하는 미학적 실재
이제 외형상 ‘5분 27초’라는 절대적인 비극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시의 행간, 혹은 그 거대한 빈 공간을 세밀하게 살피고자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일찍이 “문학에서 형식을 떠난 내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남겼다. 이 말은 역으로 형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였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절대적인 내용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대저 문학과 종교, 그리고 철학의 깊은 심연 속에서 무(無)는 곧 유(有)이며, 유(有)는 곧 무(無)라는 역설적인 변증법이 성립한다. 언어가 끊임없이 대상을 왜곡하고 현실을 가두는 감옥이라면, 시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시란 ‘언어 이전의 언어’, 즉 ‘안(無)으로 말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해야 하는 숙명’일 것이다.
라캉의 시각에서 보면 1980년 오월의 광주는 상징계의 틈새를 찢고 튀어나온 잔혹한 ‘실재(The Real)’였을 것이다. 어떤 수사학적 은유나 정교한 형용사도 그 피비린내 나는 도청의 새벽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황지우는 ‘5분 27초’라는 극도로 구체적인 숫자의 감옥 속에 침묵을 가둠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침묵을 폭발적인 유(有)의 에너지를 품은 미학적 성찬으로 전환시킨다. 활자가 지워진 여백을 마주할 때, 독자는 활자의 부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여백 속에서 들려오는 오월 광주의 비명과 신음, 즉 은폐된 역사의 실재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그 치열한 사유의 되새김질은 이 작품이 제시하는 거대한 여백의 빈 공간 속에서 비로소 고요하게 갈무리된다. 그리고 독자가 그 침묵의 시간(5분 27초)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순간, 침묵은 비로소 세상 밖(High 유)으로 가공할 만한 언어가 되어 뱉어질 것이다. 여기서 텍스트의 여백, 즉 ‘무(無)’는 시인이 독자에게 베푸는 숭고한 시적 성찬(聖餐)으로서의 ‘유(유)’로 환골탈태한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밀도 높은 외침이라는 진실을, 황지우 시인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묵념, 5분 27초』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1980년 5월 27일—광주민주화운동의 마지막 항쟁과 무고한 죽음들이 멈춘 그 시간—은 활자로 인쇄되는 순간 한낱 정치적 구호나 상투적인 애도로 박제될 위험이 있었다. 시인은 그 위험을 눈치채고 활자를 지워버림으로써, 박제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실재를 여백으로 보존해 낸 것이다. 이 침묵의 여백은 그 어떤 정교한 시적 구조나 수사학적 은유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시의 바다에서, 혹은 숲이나 아득한 허공에서 미학적 상상력을 꿈틀거리게 만든다. 독자는 이 빈 칸을 마주하며 1980년 찬란했던 오월의 피비린내와 총성을 스스로 재구성하게 되며, 이는 지체 없이 우리가 발딛고 있는 비극적 현실을 비추는 거대한 실재(The Real)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3. 맺는 글
약 3년 전, 남해의 푸른 바다를 여행하던 중 필자는 우연한 이끌림으로 해남에 위치한 ‘땅끝순례문학관’에 발걸음을 들인 적이 있다. 그곳은 한국 현대시의 가장 뜨거웠던 중심이자 동시에 변방이었던 이들의 흔적이 모인 공간이었다. 1980년대라는 압도적인 암울함 속에서, 시인 이성복과 쌍벽을 이루며 시대의 폭압에 온몸으로 항거했던 한국 현대시의 거장, 황지우의 체취가 그곳에 묻어 있었다. 그것은 정돈된 박물관의 냄새가 아니라, 여전히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전위적인 해체의 냄새였다.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에서 목격한 황지우의 흔적은 박제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전히 기성의 제도권을 향해 분사되는 전위적인 체액이자, 안일한 문학적 타성에 젖어 있는 오늘날의 서정시학을 내리치는 죽비(竹篦)였다. 거대한 사회적 비극 앞에서도 사소한 개인의 내면 풍경만을 복제해 내는 21세기의 무기력한 언어들을 향해, 그의 『묵념 5분 27초』는 여전히 거대한 입을 벌린 채 매서운 질문을 던진다. 침묵이라는 신의 영역을 침범했던 그 당당한 오만함은, 언어의 홍수 속에서 정작 아무런 미학적 저항도 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비겁한 문학을 향한 영원한 격문(檄文)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의 시학은 근본적으로 '부정(否定)의 시학'이었다. 혁명과 시가 단일한 호흡으로 맞물려 돌아가던 현실참여 문학의 시대 속에서, 황지우는 단순히 시를 쓰는 노동자가 아니라 문학의 형식 자체를 혁명화하는 아이콘이었다. 한 시대의 거대한 불신과 모독, 그리고 기성 체제를 향한 오만한 당당함이 그가 남긴 수많은 흔적 속에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종이 위에 무작위로 배열된 문자들, 해체된 문장 부호, 신문 기사의 스크랩과 몽타주(Montage), 만화적 기호들... 그것들은 단순한 유품이 아니라 문학관 전시실의 차가운 유리창 벽을 뚫고 나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황지우의 뜨거운 ‘체액(體液)’ 그 자체였다. 그 기호들과 기증된 육필 원고들은 침묵의 여백과 버무려진 채,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활자를 지움으로써 도리어 가장 거대한 역사의 신음소리를 들려주는 시,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여 감히 침묵이라는 ‘神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던 그의 전위적 아우라를 대면했을 때, 필자는 온몸에 전율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 압도적인 미학적 폭력성 앞에 겁이 덜컥 나, 필자는 마치 대단한 비밀을 훔쳐보다 들킨 범죄자처럼 서둘러 문학관을 도망쳐 나오고 말았던 기억이 선하다. 그러나 그날 도망쳐 나온 필자의 등 뒤로, 여전히 황지우의 『묵념, 5분 27초』는 그 오만한 여백을 벌린 채, 동시대의 비겁한 침묵을 향해 가장 당당하고도 매서운 질타를 퍼붓고 있었다.
나병훈|문학평론가
' 57년 전북 임실 출생. 계간《문학사계》등단. 문학평론집『언어의 숲,사유의 길 』外 , 동인디카시집 『감정계약서』外, 전문칼럼집『쌀과의 연애론 』外, 前 계간《씨글》편집장. 사) 한국디카시학회 운영위원. 글벼리디카시문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