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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묵상글 들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축일-운명에 거스르지 않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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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사성어 중에 ‘백락일고(伯樂一顧)’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락은 명마를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백락이 지나가다가 잠시 말을 쳐다보면 말의 가격이 10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명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천리를 가는 천리마도 그 말의 가치와 능력을 모른다면 소금밭에서 소금가마를 끌기 마련입니다. 이를 일컬어 ‘기복염거(驥服鹽車)’라고도 합니다.
삼국지의 관우는 긴 수염도 인상적이지만 전장에서 함께했던 적토마도 인상적입니다. 적토마는 관우를 만났기에 전쟁터를 누빌 수 있었습니다. 서양에서 유명한 말은 알렉산더 대왕이 타고 다녔다는 부케팔로스입니다. 부케팔로스는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싼값에 팔려갈 뻔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부케팔로스의 능력을 알아보았고, 부케팔로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왕은 사랑하던 말이 죽자 말의 이름을 딴 도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난 4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과 공약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이슈를 선점해야 합니다. 정권의 중간평가가 될 수 있고, 코로나19에 의한 국난극복이 될 수 있습니다. 선거에서 국민들에게 다가가 선택을 받을 수 있는 후보가 있어야 합니다. 정책, 공약, 이슈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보여 줄 수 있는 후보입니다.
그러기에 선거에서 공천은 가장 합리적이어야 하고, 이길 수 있는 사람에 의한 공천이어야 합니다. 백락이 명마를 알아보듯이, 관우가 적토마를 알아보듯이, 알렉산더가 부케팔로스를 알아보듯이 국민과 당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후보를 공천해야 합니다. 교구의 인사이동도 시스템의 구축과 다양한 자료가 축적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목의 분야가 세분화되고, 다양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 사제의 역할이 크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대화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 것도 세례자 요한의 능력과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가장 큰 능력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십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더 큰 진리와 더 큰 가르침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의 인품과 능력을 알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고 해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큽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엘리사벳은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도 이미 태중의 아드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가치와 능력을 알아주는 이웃을 만나는 것도 기쁨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가치와 능력을 알아보는 것은 축복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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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축일-운명에 거스르지 않고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다른 성인들은 모두 죽은 날을 기념하여 축일을 지내지요.
탄생 축일을 지내는 것은 주님 외에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왜 그런 것이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반 성인들은 죽을 때까지 거룩하게 살았음을 기리는 것임에 비해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일생을 살았느냐 이전에 탄생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탄생서부터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분들이고,
그래서 성모님의 무염시태나 성모 성탄이 성모님의 거룩하심을
기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구원 계획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념하는 것이듯 세례자의 탄생도 마찬가지지요.
그렇습니다.
두 분 다 하느님 구원 계획과 섭리 안에서 미리 탄생이 정해진 분들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성모님이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여인의 몸을 빌려야 하니
어머니 역할을 하실 분이 꼭 있어야 했고, 그래서 미리 정해져야만 했지만
세례자 요한은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이 주님 오실 길을 미리 닦았다고 하는데
세례자 요한이 없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얘긴가요?
그렇지 않지요.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이 꼭 필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맞갖게 맞이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곧 우리를 위해서이고 그래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 구원 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탄생에서부터 다시 말해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미리 정해진 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운명이 지어졌다고 하고 영어로는 ‘destined’라고 하지요.
이런 운명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 구원사업의 협력자로 정해졌다면 영광스러우실까요? 거부감이 들까요?
저는 어려서부터 신부가 되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고 은퇴 신부님 복사하고 매일 미사 하면서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든 것이고 그래서 소신학교 때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몇 년 지나서부터 손해 봤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요.
좀 더 놀다가 들어왔어도 되는데 괜히 일찍 들어왔다는 생각에서부터
이렇게 내 운명이 정해졌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까지 들기 시작하면서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까지 들어 수도원을 나왔다가
결국 제가 이 수도생활을 다시 선택하여 들어왔고 지금까지 이르렀지요.
이런 저에 비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데,
정리를 하자면 주님의 선구자로서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된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요 은총이지만 그가 자신의 운명과 소명에
거역하지 않고 충실히 협력한 것은 그의 사랑이요 순종이요 사랑이며,
이것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 제일 위대하다 한 그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위대偉大하다는 말에 빗대어 위대胃大하다고 곧 위가 크다고
농담하곤 하는데 위가 큰 사람이 많은 음식을 담을 수 있듯이 진정 위대한
사람이 하느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과 사랑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겠지요.
그리고 진정 위대한 사람이라야 더 큰 분 앞에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도 할 수 있겠지요.
노자가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크고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다고
하듯이 세례자 요한은 진정 자신을 낮추었지만 가장 큰 분을 담은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다는 백부장의 겸손도 있어야겠지만
주님의 큰 구원 계획에 세례자 요한처럼 협력하겠다는 위대한 겸손도
있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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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예수님 다음으로 큰 인물,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날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각자가 모태에서부터 받은 소명을 숙고하라고 초대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이사 49,1).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도입부입니다. 주님의 종이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자연스레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게 됩니다.
소명은 생명과 함께 주어집니다. 마리아 태중의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엘리사벳 태중에서 세례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이름은 존재의 방향과 목적을 담습니다 이름은 소명과 분리될 수 없지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60).
아기의 할례식 때 늙은 산모 엘리사벳이 외칩니다. 이는 아기의 탄생 예고 때 천사가 전한 그대로입니다(루카 1,13 참조). 이를 알 리 없는 이웃과 친척들이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려 했지만, 엘리사벳은 이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인생길에는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용감히 "안 됩니다"를 외쳐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념이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해야만 하지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분위기가 냉각되는 게 싫어서,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하면서 대충 되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 되는 일이 분명히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사도 13,25).
바오로의 증언을 통해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메시아를 고대해온 온 백성이 요한의 입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대에 찬 그들의 간절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요한은 주저없이 진실을 외칩니다.
"나는 ... 아니다."
사실 이는 그리 하기 쉬운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 중심의 문화 속에 나고 자라면서 온 가족과 친지와 이웃의 기대치가 "너는 ... 이어야 한다"고 우리를 규정하기 일쑤니까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또 나는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 내 삶을 보람과 의미로 채워줄 나의 소명은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획일적 꿈과 경쟁, 비교의 경기장에 세워진 우리는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도 모르고 그저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는 ... 아니다."
목구멍에서 맴돌던 이 말을 처음 입밖으로 내놓을 때가 어쩌면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힘든 순간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작이 무섭지, 계속 하다 보면 자아는 점차 명료해집니다.
자기 인생에서 "아닌 것들"을 과감히 지워나가는 것도 진정한 개인 소명을 찾아가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무수한 꿈과 가능성과 이상들을 떠나보내는 과정에는 상실감과 아픔이 따르지만, 자신이 부여받은 하느님 모상, 영혼의 진짜 모습을 찾는 희열 또한 깊고 진하지요.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의 모습으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쓰고 산 타인의 가면(假面)은 그분께도 나에게도 생소할 뿐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시기 전 그분의 길을 충실히 준비하고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예언자의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온 생애를 통해 모태에서부터 주님께 받은 소명을 채워나갔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벗님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벗님에게 어떤 소명을 부여하셨습니까?
그분은 벗님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십니까?
벗님의 소명을 살아가는데 가장 두렵고 부담스러운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벗님의 소명이 완성되길 바라신다고 믿습니까?
세례자 요한, 엘리사벳, 즈카르야와 함께, 모태에서부터 벗님을 부르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꼭 무엇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모든 소명은 다 귀하고 가치롭고 아름답습니다. 한 조각만 잃어버려도 영영 완성될 수 없는 퍼즐(puzzle)처럼, 벗님만의 고유한 소명 하나가 빠지면 이 세상의 완성은 요원하답니다. 무엇이어도 좋으니 벗님 자신으로 활짝 꽃피어 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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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축일.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1,63)
4복음서 중에서 루카 복음서만이 세례자 요한의 탄생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탄생 소식에 앞서 세례자의 요한의 탄생 예고와 탄생 소식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고 마쳐지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세례자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이사49,1-6)는
선택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선택된 주님이신 예수님께 주어진 사명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에 앞서 세례자 요한을 먼저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주님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 사명은 오늘 제2독서(사도13,22-26)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다 마칠 무렵에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사도13,25)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먼저 자신의 신원과 자기에 성소(聖召)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성소에 충실하고,
성소에 충실한 후에는 겸손한 모습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많아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무늬만 사제요 수도자요 신자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삶이 사제이고 수도자이고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봅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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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야 49,1-6
사도행전 13,22-26
루카 1,57-66.80
<겸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물론 사랑의 실천이겠지만 그 이전에 가져야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랑은 위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요한 세례자도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겸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방향’입니다. 내가 겸손해져 작아질 때 내 등 뒤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빛보다 어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친구와 함께 집 앞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폭 세 명이 들어와 옆에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처음 조폭이 술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일 큰 보스가 중간 보스와 이야기하며 막내에게 술을 따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의 술잔이 어디 있는지 보지도 않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막내는 보스가 술을 어디에 따르든 손을 뻗어서 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포장마차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술을 마시고는 다시 잔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먼저 일어나 집으로 나오는데 그 막내가 쫓아 나왔습니다.
저희가 비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인상도 조폭 같았는지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폭들은 다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이쪽 조폭들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저 담배 한 대 같이 피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배우지 않았지만, 저도 조폭인 척 담배를 받아 물었습니다.
기침이 나왔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참았습니다.
그때 보스가 무슨 일이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키도 크고 몸집도 컸습니다.
위압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막내가 뭐라 변명을 하니 보스가 “찌그러져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이 그렇게 찌그러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스는 괜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하고는 우리를 보내주었습니다.
겉만 보면 조폭 두목의 부하는 매우 겸손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하며 누군가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듭니다.
문제는 조폭 두목을 크게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겉으로만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직장 상사에게 굽신거릴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들에게 겸손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억지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뛰어났던 이유는 그가 작아짐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작아짐입니다.
내가 굽히고 작아짐으로써 내 등 뒤에 있는 누군가를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의 겸손 뒤로는 사탄이 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의 겸손 뒤로는 그리스도가 보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꼭 필요하지만 내가 겸손함으로써 무엇을 드러내는지 살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 뒤로 그리스도께서 보이게 하신 이유는 그가 ‘광야’라는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두 방향을 향할 수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 혹은 광야나 도시입니다.
광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난하게 살며 재물의 욕심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낙타털옷은 옷을 지어 입기 위해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는 뜻은 육신을 절제했다는 뜻이며 마귀를 멀리했다는 뜻은 자신을 낮추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모든 영광이 그리스도께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육체의 욕구, 혹은 명예욕이 있는 상태로 겸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도시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보름에 한 번씩 며느리의 가계부를 검사했습니다.
콩나물과 두부, 연필과 공책값도 철저히 점검했습니다.
결혼 예복을 50년 동안 입었습니다.
손자들의 속옷을 기워주는 것이 그녀의 취미였습니다.
그녀의 유언은 “나를 위해 꽃을 장식하지 말라. 그리고 1달러를 황금처럼 아껴라.”였습니다.
세수한 물로 머리 감고, 머리 감은 물로 세탁하고, 세탁한 물로 걸레 빨고, 걸레 빤 물은 화단에 뿌렸습니다.
‘절제’와 ‘청빈’의 상징인 이 여성의 이름은 프란체스카이고, 한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영부인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가 어떻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대통령을 더욱 크게 만들어주는
영부인의 멋진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손길로 인도되던 사람이었고 그 결과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삼구와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광야입니까, 아니면 도시입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광야로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광야는 내 안의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의 장소입니다.
이 욕구와의 싸움이 없다면 겸손은 위선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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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왜 하필 나인가?
유다 사회 안에서 대대손손 내려오던 관습이나 전통은 구속력, 결집력 측면에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관습은 어기면 인간취급도 못 받게 될 정도의 강제성까지 지니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갓 출생한 남자 아이의 할례와 작명에 관한 유다 전통입니다.
통상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식을 거행하고, 동시에 아기의 이름을 짓는데, 그 역할을 주로 친척들이 도맡았습니다.
즈카리야의 친척들은 관례대로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와 똑같이 즈카르야로 명명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기겁을 하면서 펄쩍 뛰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즈카르야라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친척들은 뚱딴지같은 엘리사벳의 말에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그간 즈카르야 가문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친척들 입장에서 정말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사건이 계속되었습니다.
멀쩡하던 즈카르야가 갑자기 아무 말도 못하는 ‘언어장애우’가 되지 않나, 꼬부랑 할머니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지 않나, 아기의 이름을 전혀 엉뚱하게 짓지 않나...
연속되는 기이한 사건의 종결자는 누가 뭐라 해도 즈카르야였습니다.
엘리사벳의 고집에 친척들은 할 수 없이 말 못하는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겠냐고 손짓으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즈카르야는 ‘화이트보드’를 달라고 하더니 매직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다른 이름은 안 됩니다. 오로지 요한입니다.’
그 글씨를 적는 순간 즈카르야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 친척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밀고 나갔을까요?
이는 이제 구약 시대가 즈카르야를 통해 종결됨을 암시합니다.
요한은 신약시대, 예수님 시대, 생명과 구원의 때가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 그는 마치 아침노을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의 개봉박두를 알리는 선구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도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곤 합니다.
그때 마다 우리는 신세 한탄에 여념 없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큰 십자가가?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돌발적인 사고가?
왜 하필 나에게만 이토록 끔찍한 바닥 체험을?”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가신 박완서 선생님은
오랜 수행의 결실로 큰 은총을 체험하셨다지요.
사고의 틀 자체를 바꾸셨답니다.
‘왜 하필 나인가’ 에서
‘왜 하필 내가 아니어야 하는가’로 말입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새로운 인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새로운 가치관을 터득시키기 위해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정말 납득하기 힘든 당혹스런 사건들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대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침묵입니다.
꾸준한 기다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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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
-주님의 충복忠僕인 성 요한 세례자-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편139,14ㄱ)
화답송 후렴이 신선한 감동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런 감사의 고백과 더불어 몸과 맘, 튼튼해 지는 은총을 받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어제 참으로 곤경중에 있는 분의 미사신청을 받으며 저절로 나온 탄식입니다. 이런저런 사유로 자기 탓없이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전 국토가 쓰레기장이 되겠고, 전 나라가 병원이 되겠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너무 1회용 쓰레기들이 많고 너무 영육으로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제대로 된 분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사람은 많은 데 사람이 없다 할까요.
어제는 5개월만에 예수성심자매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매월 1회 모임을 갖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1월달에 모임을 갖고 6월 예수성심성월에 처음 모임을 가지니 참 반가웠습니다. 예수 성심 자매회 7명의 자매님들과 함께 조촐히 미사를 봉헌하니 흡사 예수 성심 대축일 미사를 드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수성심을 닮아 모두가 열심한 분들입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자매는 벌써 10년을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맡고 있습니다. 사람은 있는 데 참으로 할 만한 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아주 예전에 듣고 자주 강론에 인용했던 어느 수녀님이 던진 화두와 같은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서의 갈망일 것입니다. 비상하게 잘난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 제정신으로 제자리에서 제대로 반듯하게 사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제대로 된 분, 참 사람 한 분을 오늘 만납니다. 사람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제대로, 참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힘껏 좁은 문을 통과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성인들을 기억,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성인이 되라 있는 성인 축일들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도 하느님 뜻하신 본래의 내가, 평범한 참 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때되면 어김없이 거기 그 자리 피어나는 꽃이다
자귀나무꽃 은은한 향기 맡고 찾아 내는 꽃
접시꽃, 모 시인의 ‘접시꽃 당신’에 열광했던 때가 생각난다
시같으면 수절守節해야 했어야 마땅한데 곧 재혼해 잘 살고 있단다
까맣게 잊었겠지
누가 보아 주든 말든 알아 주든 말든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한 청초한 모습에 향기 은은한 꽃들
무아無我의 사랑으로 피어난 진아眞我의 꽃들
말없는 스승이다 부끄럽다”-
이런 하늘 사랑만으로 꽃같은 지족知足의 사람이 성인입니다. 누구도 탓하지 않고, 삼망三望함이 없이 삼감三感과 삼실三實을 사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백해무익한 삼망이요, 참으로 아름다운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에, 참으로 최선을 다하는 진실, 성실, 절실의 삼실입니다.
모든 성인들이 그렇지만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삶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선물인생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삶은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입니다. 평생 노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첫째,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는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했던 내용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뿐 아니라 우리 역시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하니 우리 수도원의 개인 복돌이가 생각납니다. 수사님들의 전폭적 사랑을 받고 있는 충견忠犬 복돌이처럼 주님을 충성스러이 따르는 ‘주님의 충복忠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고백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끊임없이 확인했을 요한 세례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셨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대로 셰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신원입니다. 결코 무의미란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바로 이 말씀이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또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인지요. 결코 비상한 어려움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런 이들은 좌절해도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합니다.
“나는 쓸데 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항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하느님께 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둘 때 허무와 무의미의 심연에 빠지지 않습니다. 좌절의 순간, 엑소더스, 탈출하여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합니다. 다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 나의 삶을 시작합니다.
둘째,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참 나의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입니다. 예수님 없는 요한 세례자 생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곧 무지와 허무, 무의미한 삶에 자기를 잃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몰라 무지와 허무, 무의미한 삶중에 자기를 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대부분의 정신질환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오늘 제2독서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의 요한 세례자에 관한 인용이 참 적절합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그 삶의 비밀을 밝혀 줍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의 선구자 요한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중심한 겸손하고 진실한 요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성 요한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이자 영광입니다. 주님과의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늘 되뇌이며 사랑을 고백해야 할 주님이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셋째, 광야의 고독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응답한 것도 긴 내면의 광야의 고독과 침묵의 피정을 통해서 였음을 봅니다. 바로 그 결실이 다음 묘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바로 우리가 매일 아침성무일도 마지막에 바치는 그 유명한 즈카르야의 찬미가입니다. 고독과 침묵의 내적 광야의 피정중에 주카르야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요한이란 이름이요 아름다운 찬미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도 의미심장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광야 수도원에서 수련장 하느님의 지도하에 고독과 침묵중에 단련된 요한의 정신임을 봅니다. 정말 굳센 정신, 굳센 영혼을 위해 내적 광야의 고독과 침묵은 필수입니다. 닫힌광야의 고독과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열린 내적 연대의 고독과 침묵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삶의 깊이를 잃어가는 것도 내적 광야의 부재에서 기인합니다. 예수님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광야의 고독으로 물러나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통해 내적 깊이를 더하면서 자신을 충전했습니다. 바로 다음 고백처럼 우리의 앞문은 세상에, 뒷문은 광야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저 역시 이른 새벽 광야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중에 강론을 씁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광야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제정신으로 하느님 주신 내 제자리에서 제몫을 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는 사람없다고, 사람 하나 없다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 줄 몰라 무지의 삶이요, 살 줄 알면 지혜로운 성인의 삶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십니다. 주님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성 요한처럼 우리 모두 ‘주님의 충복忠僕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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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새벽을 열며.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빠다킹신부님.
말을 그린 두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색칠을 하는 등 누가 봐도 정성이 가득 담겨 있는 그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휙휙 그린 그림으로 도저히 정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장난삼아 끄적인 그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이 더 잘 그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성이 담겨 있어 보이는 그림은 6살짜리가 그린 것이며, 정성 없어 보이는 휙휙 그린 그림은 천재 화가라고 알려진 피카소의 선 드로잉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다시 바라봅니다. 어떤 그림을 다시 볼까요? 맞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다시 보면서, 다른 시점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선의 움직임, 간결함 속에 드러나는 말의 모습 등을 찾습니다.
누가 그렸냐에 따라 나의 관점이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비추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셨으니 피카소의 작품에 비할 수 없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다시금 바라보면서, 왜 훌륭한 작품인지를 긍정적인 모습으로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작품임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6살 아이가 만든 작품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느님의 손길을 또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치가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준비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서 어떤 사람은 “미쳤다.”라고도 손가락질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 나가서 낙타 가죽옷을 입고 벌꿀과 메뚜기만 먹으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로 믿는 사람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요한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를 보고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늙은 나이에 주책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정말로 그들의 아이가 맞을까?’라며 의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번 더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섣부른 판단, 특히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느님의 은총을 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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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연결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메리 파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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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주고받는 사랑.
어느 책에서 4살 된 아이의 기도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4살이니까 깜찍하고 순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동생을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저는 동생과 실컷 놀았어요. 이제 동생을 다시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세요.”
많은 맏이가 이런 기도를 바친다고 합니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동생이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부모도 편애(약간의 편애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를 일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단지 본인의 생각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카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됩니다. 나만 특별한 사랑을 받아야 하고, 사랑을 나눠줄 수 없다는 마음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만듭니다.
잘못에 대한 논쟁은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붙잡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웃을 먼저 유심히 바라보고 나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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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이영근 신부님.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고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또한,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던져진 무의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이다.”
진정, 우리는 세상에 던져져 있되, 그 신원과 사명이라는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이 틀림없습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기에,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자,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결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요 가치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신원과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처럼, 우리 주님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과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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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7-66.80: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모님 외에 세례자 요한 한 분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요한이란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고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언어장애인이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시다. 성인은 그 누구에게도 옳은 것을 말할 때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주장한 분이다. 이 때문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셨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게 해 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도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결심하며 그분과 같이 굳센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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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세례자 요한 ♣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여기서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는,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셔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입니다.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는 “엘리사벳의 일을 기뻐하면서 축하하였다.”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태어난 아기가 어떤 아기인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생각만 했고,
자기들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또 요한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더라면,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큰 자비를 받았음을
알았을 것이고,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 강생의 서막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인류 모두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경축하는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주님의 큰 자비’를 받은 것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5-66).”
세례자 요한의 탄생 전후에 일어난 일들을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특별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보기에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신 것으로 보였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손길’이 자기들을 보살피고 계시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보살피고 계시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인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라는 말은, 사람들이 아기의 미래에만
관심을 가졌고, 하느님께서 그 아기를 통해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은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때문에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과
그를 통해서 하신 일 안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해서 말을 못하게 되었던 즈카르야는
아기가 태어난 뒤에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면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었습니다(루카 1,64).
그때 즈카르야가 말한 ‘하느님 찬미’는
루카복음 1장 68절-79절의 ‘즈카르야의 노래’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즈카르야는 이 찬미가를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의 의미와 요한의 사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6-79).”
(‘즈카르야의 노래’는 전체적으로 하느님과 메시아를 찬미하는 노래이고,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은 조금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의 탄생의 진정한 의미는 ‘메시아 강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 용서와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께서 하실 일을 미리 준비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메시아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킨 일이기도 합니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첫고백을 할 때, 고해성사는 사제가 주지만,
고해실 밖에서 교리교사가 고해성사에 관한 교리를 미리 가르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한 일은 그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6-17).”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신 분이고,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께서
하실 일을 미리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라는 요한의 말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곡’과 ‘쭉정이’에 관한 말 때문에,
“혹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구세주가 아닌 심판관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다면 그가 선포한 회개는
단순히 심판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회개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심판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올바르게 알고 있었어도
심판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심판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한 적극적인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8).” 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회개,
또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인데,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되었을 때의 기쁨과 구원에 대한 희망 등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회개를 하라고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떠났지만,
그의 회개 선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일입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모든 사람’은 회개해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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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른다면 당시 관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아버지처럼 사제가 되어 명망을 얻고 존경받으며 안정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요한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언자가 되어 명망과 존경보다는 박해를 받고, 기득권의 삶보다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배 한 척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갑판 위에서 보니 어떤 불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확성기에 대고 외쳤습니다. “여보시오. 남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그러자 저쪽에서 즉각 반응이 왔습니다. “그 배가 북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선장이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쳤습니다. “이 배는 거대한 함정이란 말이요. 그쪽이 움직이시오.” 그러자 상대편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쪽이 움직여야만 하오. 이곳은 섬이고 나는 등대지기요!”
섬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배가 움직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게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삶 또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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