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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시작하였가가 육체로 마친 사람들 갈 2:16-3:5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전쟁와 평화 ,부활, 안나카레리나 등과 같은 뛰어난 작품을 인류에게 남겼던 세계적인 작가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는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는 1천명의 농노를 거느린 영지에서 부유하게 살았으며 그의 어머니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였으며 피아노도 능숙하게 다를 수 있는 교양이 풍부한 어미의 막내로 태어났으나 모친은 다섯남매를 남겨 놓고 톨스토이가 태어난지 1년 6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7년 뒤 아버지 니콜라이도 뇌출혈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그 충격으로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청년이 되어 대학입학시험에 낙방하였고 다시 도전하여 대학에 들어갔지만 허무함으로 대학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고향땅에 돌아가 농노들과 이상적인 농촌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농노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여 그 꿈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크림 전쟁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가족과 어머니의 가족을 모델로 삼아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을 쓰게 되었는데 그 작품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갈채를 받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삶의 허무와 죄에 대한 공포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던 중 어느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의 얼굴은 유난히 평안해 보였고 톨스토이는 그가 너무 부러워 농부에게 평화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에 언제나 기쁨뿐입니다.”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다 갖췄고 많은 재산과 성공 세상적인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시골농부보다 더 불행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5년 전 나는 정말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 들였는데 나의 전 생애가 변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렇게 좋게 보이던 것들이 좋지 않게 보이게 되었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찾아다니며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성생활이거나 술에 취해 기분좋아하던 것들을 더 이상 행복으로 간주할 수 없게 되었다.”그는“세 개의 의문”이라는 글에서 우리에게 세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그는 82세로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 이런 일기를 남겼는데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날 도와주소서라는 기도문이었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죽음에 대하여 누구보다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는 인생의 삶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기에 죽음은 다만 삶의 형식을 바꿀 수 있음에 불과하며 산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잘 죽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죽음은 우리의 영혼이 덮어 쓰고 있는 바깥쪽 껍데기의 변형이다. 바깥 껍데기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환상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 그는 죽음을 삶의 연장이라고 본 사람입니다. 톨스토이는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통해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중의 하나였습니다. 또 그리스의 철학자 Aristotle의 명언중에는 시작이 반이다 라고 한 이 말은 시작을 한 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당장 무언가를 도전하기 망설여졌던 사람들에게 한번쯤 용기를 주는 명언인 것 같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처럼 세상일도 시작하기가 어렵다는 말인데 하물며 내 마음을 드리면서 보이지 않은 신을 믿는 신앙은 더욱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시작하기 어려워도 시간이 가면 끝이 있는데 신을 믿는다는 것은 끝나는 시간도 없이 죽을 때 까지 믿어야 하니 알고보면 신앙생활은 시작하는 것 자체가 가장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믿는 그 신이 참신이 아니라면 어쩌나! 그 인생은 아무리 후회를 해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믿는 신이 참신이고 그 신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세상일 보다 더 어렵다고 볼 수 있지만 일단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말씀을 믿기만 하면 천국은 이미 반은 이루어 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했을 때 디모데와 함께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행16:6) 바울의 복음전도로 갈라디아의 패역한 세대와 우상 속에서 신음하던 자들이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됨을 보면서 바울사도는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은 갈라디아 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는지 모른다. 성령의 사역은 거룩하고 진실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쁘게 하는 사역이다. 이것은 무더운 여름날 땀흘려 일하는 농부에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같은 것이어서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역사는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 능력을 뛰어넘는 지극히 초자연적인 것이어서 놀라운 이적과 기이한 역사를 이룬다. 이 놀라운 역사가 갈라디아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겠는가? 우리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생각하며 구원에 대한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본성으로 이룰 수 없는 속죄나 거룩해 질 수 없는 죄인에게 의인의 신분을 주시며, 또 어느 누구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자를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주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복음의 차원에서 성령의 사역을 알고자 하면 먼저 우리의 육체의 본성부터 깨달아야 한다. 인간이란 대체로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지만 아담의 피를 이어bg l;.받은 인류는 죄악속에서 잉태되었고 죄중에서 태어나고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한숨이 나오게 마련이다. 만약 어떤 교회지도자가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과 함께 육체가 온전하게 변화되어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면 이것은 그릇된 가르침이다. 육체의 본성은 이 세상에서 온전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오실 주님을 통해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육체는 온전하게 변화되지 아니한 채 다만 그들의 신분과 상태가 변화되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교회사 2,000년 동안 꾸준히 인간에게 선한행동을 하여야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속여왔고 또 교회에 한 가지 불순한 사상을 은밀하게 침투시켰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좋은 대로 주님을 섬기게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가는데도 사탄은 선한행위를 하며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여야 천국에 간다고 속여왔다. 지금도 많은 목사들이 정욕을 억제하면서 고난에 동참하여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물과 말씀을 통해 거듭나야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거듭난다는 말은 부모로 부터 출생한 것과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말한다. 또 어떤 교회는 거듭나지도 않는 사람에게 성도의 삶을 가르치고 있다면 이것은 임신하지도 아니한 사람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다그치는 것과 같다. 사탄이 교회를 속이는 방법 중 하나는 육체를 학대하므로 거듭난 자처럼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수양을 하고 그리고 성경이 신성시 하는 결혼을 죄악시 한다. 분명한 것은 카톨릭이 유일하게 강조하는 독신은 마귀로부터 왔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딤전 4:1-3) 1 그러나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밝히 마귀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였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일지라.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수도원 고난의 삶을 산다거나 독신으로 살겠다는 사상은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고 마귀로부터 왔다. 생각하여 보라. 이와 같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성경으로 말미암은 것이 결단코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현실도피에 있지 아니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여 죄인들 곁에 가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여러 지방에서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우상과 더러운 죄악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그와 같은 것들이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받아들이고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그들 마음에는 성령께서 거하시며(롬 8:9, 요 14:17), 참 그리스도인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역사는 온전히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 바울이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가르쳤는데 바울이 떠나고 난 후 유대인들이 들어와 그들에게 율법을 행하여야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들에게 서신을 보낸 것은 그들이 받은 은혜로 만족하지 않고 은혜와 행위를 섞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기에 갈라디아서를 보낸 것이다. 오, 사랑하는 독자여!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언제 수도원을 지었으며 수도원을 통하여 육체를 학대하여야 의로워진다고 언제 수도사들을 가르쳤던가? 교회 조직에 순종 잘하고 충성을 다하여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아 감사패나 상장을 방에 걸어 놓게 하였던가? 언제 바울이 교회 재정이 어려워 헌금을 강요하였던가? 오! 이 모든 것은 육신적인 방법이 아닌가? 성령으로 시작한 초대교회가 오늘날 교회를 향해 육체로 마치게 되었다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성령의 사역은 거룩하고 진실하며 억지나 무리함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깊이 생각하고 회개하기 바란다. 기독교는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진행하고 성령으로 마쳐야 한다. 성령은 말하고 듣고 가르치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시며 인격이시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이시며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능력이시다.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로다(눅 19:10).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여리고에서 만난 삭개오를 변화시켰고 마지막 십자가위에서 강도를 구원시킨 주님을 통해 우리들도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을 좇아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온전한 선물이며 기이한 일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일을 성령을 통해 하고 계신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요한복음 16장에 잘 나타나 있다.
(요16:8-9) 8 그가(성령)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드러내고 계시다는 뜻인데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죄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창세 이래로 발생한 모든 죄가 단번에 사하여졌다는 것이다.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 (요19:30)는 이 한 마디는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다는 선언이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믿기만 하면 죄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롬8:1), 구원을 얻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것이다(엡2:8,요5:24). 이제 인간을 지옥으로 데려갈 수 있는 모든 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해결되었니 누구든지 이런 위대한 십자가의 속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둘째로 성령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로마서 3장 21절과 22절에 보면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는 인생에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의가 되신 것을 증거하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로워진다는 진리를 증거하신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용서받아 의롭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셋째로 성령은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인 뱀의 머리가 깨어진 것, 즉 사탄의 권세가 예수님 앞에 완전히 패배된 것을 말한다. 사탄은 사망을 무기로 하여(히2:14)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가던 바,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사망 권세가 여지없이 무너졌고 주님의 부활 권세가 온 세상 사람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었다. 이 세 가지 성령의 사역을 종합하면 우선 예수님은 인류가 범한 죄악을 다 청산하셔서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신 분이시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되셨으니 그분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은 장차 의와 불의를 심판하시는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 왕인 사탄의 권세를 심판하셨으며 이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발아래 복종케 하셨다(빌2:9-11). 그분은 인생 구원의 근원이시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은 것이며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 것이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엔 성령으로 시작하여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다. 이 때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갈2:4)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일지라도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갈4:10, 5:2-3, 6:12). 이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미혹 받아 그들 신앙이 유대인의 율법적인 신앙 형태로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심각한 경고의 메세지를 보냈던 것이 다음의 말씀입니다.
(갈3:1-3) 1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분명히 제시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 3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육체의 의미는 율법 준수를 말하는데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즉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어 결국 신앙생활의 마침이 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에는 인간을 세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으로 한 마디로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3:1)"인데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를 말합니다. 셋째는, "영에 속한 자(고전3:1)"로서 이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를 뜻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고전1:7) 즉 아홉 가지 은사(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방언 통역)를 다 받은 교회입니다(고전12:8-10). 소위 성령충만한 교회였으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신령한 자"라 하지 않고 '육신에 속한 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은사는 부족함이 없지만 성도들 간에 서로 시기와 분쟁이 있고, 파당을 지어 당파 싸움을 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4)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를 향해 책망한 말씀을 비추어보면 오늘 우리들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장본인이 아닌가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열심을 다하여 충성한다면서 '행위 운운하며 율법적인 신앙행태나 00 교리중심의 전통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혹은 하나님의 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힘써 자기 의를 세우려함은 아닌지?(롬10:3), 또 성령 충만을 자처하며 서로 시기, 분쟁하고 파당을 만들다가 결국 교회가 쪼개지고, 교파가 갈라지는 행태를 연출하고 있진 않은지? 오늘날 교회가 이 문제를 놓고 스스로의 성찰을 해야 합니다. 이런 작태들은 모두 자기들은 신령한 싸움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똑바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의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시작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떠나는 순간 사탄의 미혹을 받기 때문에 미련한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미련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사단에 속아 거짓 인생으로 전락되는 것에 대해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어리석은 자의 특징.
(1)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자
올림픽경기는 마라톤으로부터 시작한 스포츠이다. 마라톤은 약 40km를 달리는 것인데 출발점에서 1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렇다고 반환점에서 1등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으며 완주하여 골인점에서 1등이 진짜 일등이다. 인생살아 가는 것을 흔히들 마라톤 경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생들도 마라톤 출발점에 해당하는 학교다닐 때 1등하는 것이 인생일등이 아니며 그렇다고 결혼하여 자녀들 키우는 중년들 보고 인생 1등이라고 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노년을 어떻게 살아가는 가 이다. 만약 노년에 예수님을 잘 믿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면 이는 마라톤에서 골인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인생도 나서부터 중년을 거쳐 노년까지 큰 변동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상속 받았어도 관리를 잘 못해 다 잃고 나면 나중에는 비참해지는 것이 성경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것이 이런 비유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등잔불이 계속 타려면 기름을 계속 공급하듯이 예수믿는 사람들도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신앙이 좋을 때는 은혜가 넘쳐나지만 죄를 짓게 되면 성령이 떠나가고 신앙은 하나의 형식적인 모습으로 남게 된다면 열정이 식어지고 마귀의 타킷이 되어 결국은 비참한 모습이 된다. 비참한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살전 5:19)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소멸치 말라) 하였는데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가 성령을 소멸하면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이란 육체가 살아있는 이상 자존심, 고집 - 이런 것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므로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이 사는 목적이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어 은혜를 받아도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 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영광을 누리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한순간에 성령이 떠나고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가기 쉬운 것이 인생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교인들도 바울이 있었을 때는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인데도 바울이 떠나 있는 동안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누구둔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으면 며칠짜리 어리석은 자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정말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던 사람이 어느 날 불신앙의 사람으로 변하였다면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후서에는 이런 사람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기록해 놓았다.
(벧후2: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벧후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2)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모르는 자
바울사도는 예수님 믿고 나서 엄청나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매 맞고 감옥에도 갇혔고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지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에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도 있었고(행16:27) 셋째 하늘 낙원에 올라갔던 은혜를 받았던 종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에게도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치더라도 하나님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날마다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에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죽음의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이 왜 육체에 빠집니까? 바울이 떠나자 유대주의와 싸워 이길 능력이 없으니까 고난받는 것이 두려워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훈련과 고난은 은혜를 유지하는 안전 방패막이 된다는 것을 모르면 또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싫어하여 성령님이 떠나게 되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훈련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꼭 이렇게 해야하는가?'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삶도 편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612개의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보다 몇십배 어렵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면서도 힘들어하지 않는 이유는 율법을 행할 때 자기의 영광이 나타나고, 자기의 공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들 편하게 살 것 같습니까? 내 힘 가지고 살면 더 바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인생은 천국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렇지 않는 인생들은 돈과 시간, 에너지를 쓰고 나면 나중에는 심판거리로 사용되지 않을까 합니다. 갈라디아교인들도 예수님 믿는 삶이 너무 쉽게 보여서 그들은 율법으로 선한 행위로 살면 힘들지만 그래도 자기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에 율법주의로 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썩어질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면 고생해도 힘들지 않다고 합니다.
(3) 믿음을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 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으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
과거에는 음란, 거짓된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을 지키다가 믿은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은 것이냐?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선한 행실로 살다가 믿게 된 것인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믿게 된 것인지 따져보라. 이전처럼 죄만 짓고 살았던 인생이 예수님을 믿고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이 좋은지?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았느냐? 아무 종교의식도 행하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 너희의 인생이 변화되었는가? 너희들이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데 내 고집과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마치 낡은 가죽부대에 갇혀있는 인생과 같습니다. 몇 년을 다녀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살이 강한 곳에 그냥 가만히 서있을 수 없듯이 성령의 역사를 거스리며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가장 존경스러운 사람은 갈수록 인격이 성숙해지는 사람이며 계속 성령충만함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환난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느 기간 동안 성령의 역사로 수렁에서 건져냄을 받았고 그렇게 변화되었어도 교회를 떠날 때는 욕하고 떠납니다.
교회가 웅장하고 교회 성도들이 많아 질수록 구원받는 사람도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틈새로 안주하는 종교인들도 많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지 않으면 세속주의나 인본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 인생은 성령 받지 않으면 언제든지 죄인의 속성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은혜받았다가 은혜를 쏟아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2.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 사람들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이나 인생의 안목이나 이생의 자랑으로 인하여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며 또 성경을 통해서도 불 수 있습니다.
(1) 사울 왕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입고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선망과 존경을 받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1절은 “그 때에 사무엘이 기름 한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입을 맞추며 이르되 주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자신의 상속백성을 다스릴 대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이 아니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용감한 투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에 쳐들어오는 암몬족속을 멸하고 해방을 갖다 준 위대한 장군이요, 초대 임금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어떻게 하여 타락했습니까?
그에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푹 빠져 버려서 세상이 들어오자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만 것입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들어오매 악령에 몹시 시달렸고 자기 신하 겸 사위인 다윗을 죽이고자 10년 동안이나 골몰하였으며 결국에는 블레셋 전투에 나가서 사울은 적이 쏜 화살에 중상당한 후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그 날에 함께 죽었다고 하니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울이 너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 사람이 바로 사울 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가룟 유다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가룟유다는 지혜있는 제자로 예수님은 12제자 중 가룟 유다에게 돈 궤를 맡겼는데 가룟 유다는 점점 마귀가 주는 탐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맡은 돈주머에서 돈을 훔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5-6에 보면 “5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므로 가방을 맡아 그 안에 든 것을 가져갔기 때문이더라”고 했습니다.
돈과 명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배신하였고 그는 또 안목의 정욕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으며 그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예수님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이 독립하면 영웅이 되고 싶은 불순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안목과 정욕의 시험에 빠져서 그는 하늘나라보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그 가운데서 자기가 영웅이 되는 것을 더 기대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세상 탐욕의 노예가 되면서 세상 부귀영화를 꿈꾸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겠다고 하니 분노했고 그 분노가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해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했습니다. 정말 돈때문에 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욕하기 위해서 종을 사고 파는 금액인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니 가룟 유다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가매 그가 예수님을 팔았던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야말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육체로 마친 대표적인 신약의 인물입니다.
(3) 바울의 제자 데마도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한때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선교사역의 동역자였던 데마(Demas)의 이름이 골로새서(4:14)와 디모데후서(4:10)에 기록되어 있다. 데마는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데마는 사도 바울의 세계 선교 사역을 위한 조력자였고,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했던 인물로 그는 주를 위해 기꺼이 순교하려는 마음까지도 소유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사도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진리의 말씀, 권면 및 훈계를 들으며 지냈으며 스승 바울은 데마가 자신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교회에 끝까지 남아있을 것으로 신뢰했다. 하나님은 바울을 수많은 사역지로 보내면서 필요 적절한 조력자를 만나게 했다.
유럽 최초의 빌립보교회에서는 자주색 고급 염료를 제조해서 옷감을 만드는 신실한 여류 사업가 루디아를 기도 처소에서 만나게 하면서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바울의 사역에 적극 협력했다. 루스드라에서는 사랑하는 제자요 후계자인 디모데를 만나서 이방인 선교 사역에 효율성을 크게 높이셨다.
최고 율법 전문가 아볼로를 사도 바울에게 보내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수월하게 전파되도록 했으며, 천막 제조업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동역자로 만나게 해 바울에게 큰 힘이 되도록 했다.
한때는 데마 역시 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한 탁월한 조력자로 활동했다. 데마는 사도 바울과 함께 로마에 선교사역차 머물고 있었을 때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번째로 투옥되어 있을 때 데마는 하나님의 교회보다 타락한 세상을 더욱 사랑하여, 늙고 병든 스승 사도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향했다(딤후4:10).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한 것은 단순히 지역적인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타락까지 동시에 말한다. 세상을 사랑한 데마는 영적인 스승 사도 바울을 떠나고 싶었지만, 제자로서 마지막 남은 양심과 의리 때문에 얼마간 멈칫하고 있었다가 사도 바울의 죽음(순교)이 다가오자 데마는 즉시 결단을 내리고 세상을 향해 떠났다. 사울은 34년 회심하고 68년 순교할 때까지 굶고 헐벗고 투옥되는 등 엄청난 고통을 당했던 바울의 노년은 더욱 쓸쓸하고 고독했다. 세상에 눈이 어두워 영적 간음을 하고 있던 데마에게 사도 바울의 곤경은 큰 부담이요, 짐이었다. 스승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이 고난에 처한 바울과 동역할 수는 없었다. 늙고 병든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 데마 때문에 큰 실망에 빠지게 되었고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사도 바울의 순교 직전에 제자 데마는 스승을 위로하고 고통을 공유해야 했었는데 데마에게 세상을 향한 유혹이 물밀듯 밀어 닥치자 그는 초심을 버리고, 스승 바울과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향했으니 데마는 배신자로 낙인 됐다. 어렵고 힘들 때를 피해 떠나는 배신자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4) 이단의 교주들도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한 때는 병고치는 은사로 수많은 사람들을 병마로부터 자유게 하였다가 나중에는 마귀의 종이 된 비참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이단들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인데 통일교 전도관 영생교 신천지 등은 토생적인 이단들인데 오늘은 그중에서 전도관 창시자 박태선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 온 국민이 전쟁의 고통에 시달릴 때 서울에 혜성처럼 등장한 박태선 장로는 1955년 서울 남산집회, 영등포 집회, 한강 백사장집회 등 전국적인 대형 집회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거기서 질병을 고쳤다는 사람들이 알려지면서 종교계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기독교계 신흥 종교 교주였다. 당시 집회에 참석했던 대다수의 교인들은 그 당시 한국의 기성교인 중에 한 번이라도 박태선장로 천막집회에 참석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기성교회의 목사들 2000여 명이 박태선 장로에게 안찰을 받았다고 증언도 했다. 이어서 한국기독교연합회(N.C.C.)는 박태선 장로의 새로운 신앙운동이 사이비 종교운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1956년 3월 15일 경기노회에서도 박태선 장로를 이단으로 규정해 버렸다. 박 장로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흩어지고, 단 80명이 남아서 원효로에 있는 박 장로 자택에서 ‘전도관’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전도관수는 전국적으로 300여개나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 박태선 장로는 자신이 "성경 호세아 14장에 근거하여 이슬성신을 처음 내리는 ‘감람나무’이고, 이사서 41장에 동방,땅 끝, 땅 모퉁이로 묘사된 것을 인용해 자신이 동방의 의인으로 이 세상에 온 감람나무 하나님임을 발표하면서 전도관이라는 명칭도 천부교로 개칭하였다.
한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고치는 은사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사람이 어느날부터 자신이 재림예수 하나님아버지라는 말이다. 천부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다. 천부교는 개신교와 별개의 종교임을 표방하면서 교회당의 종탑에도 십자가가 아닌 비둘기 형상을 단 것이 특징이다. 그는 1990년 2월 7일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세운 신앙촌은 천부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마을이다. 2000년 이후 제1, 제2신앙촌이 재개발되면서 현재는 부산 기장신앙촌이 남아있다. 한국의 천부교 교인들을 향해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 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봤다. 마침 오늘 말씀이 떠올랐다. (갈3;3)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5) 대도 조세형의 인생굴곡
현대판 홍길동이라 불리기도 했던 대도 조세형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부유층과 고위권력층 저택만을 대상으로 수억원대 금품을 털어서 일부 금품을 불쌍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해 현대판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 경찰에 체포되었고 1983년 4월14일 오후 3시 조세형은 서울 서소문 법원에서 열린 자신의 구형공판에 출석한 직후 화장실 다녀 오겠다고 한 후 구치소 환기통을 뜯어내고 법원 담을 넘어 유유히 사라지면서 그의 탈주가 몇 시간만에 온나라가 발칵 뒤집혔고 이 사건으로 인해 1983.4.18 조세형은 희대의 탈주범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는 결국 1년 뒤에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게 형을 마친 후 1998년 11월에 출소할 때 당시 당담 검사였던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그에게 성경책을 주면서 전도하였기 때문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결혼도 취직도 하고 새 삶을 시작하는 등 착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조세형이 잠시나마 회심하게 되어서 신학을 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아 2000년에는 신앙간증을 하는 등 변화된 삶을 살았다. 또 범죄관련 특강도 하며 '범죄예방 전도사' 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던 조 씨는 2000년 11월 신앙 간증 차 일본에 갔다가 빈집에 들어가 금품을 털다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3년 6개월의 복역한 후 2004년 3월 귀국했지만 대도 조세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며 귀국한지 1년후 다시 모 치과의사집에 침입하여 절도행각을 벌였다가 경찰에 검거되는 등 2013년 나이 75세가 된 대도 조세형이 또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털다가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한 때 개과천선하여 참 그리스도인이 된 줄 알고 기뻐했는데 이렇게 된 조세형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3. 우리 주위를 항상 맴돌고 있는 마귀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성경은 우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 사람들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누가 너희를 꾀더냐는 말씀은 누군가 우리를 꾀는 자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1) 세상의 정욕을 떨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유명한 부흥사 로렌드 힐이 어느 날 길 가다가 돼지 떼가 한 사람을 따라가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호기심에 그 뒤를 따라가 보았는데 돼지떼가 모두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힐 목사님은 돼지를 이끌고 온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콩이 담긴 바구니를 가지고 걸으면서 콩을 조금씩 떨어뜨리면 돼지들이 그 콩을 주워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자신도 모르게 도살장으로 얌전하게 들어온다는 것이다. 마귀의 수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성도들 주위를 맴돌면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콩을 떨어뜨면 경계하지 않고 주워 먹는 사람은 지옥으로 끌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정욕은 가장 완전하게 인간을 파멸시키는 마귀의 전략임을 알 수 있다. 마귀는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그렇다면 마귀의 제일의 무기는?
(2) 이번 한 번만
중세기 유럽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악마의 두목이 작은 악마들에게 '인간을 파괴하는 무기'에 대한 현상 공모를 냈는데 1등으로 당선된 묘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번 한 번만 하고 절대 안 할 자신이 있다.'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여기에 대하여 자신이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한 번의 선만 무너뜨리면 조만간 자멸의 길을 걷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한번만으로 마귀가 당신을 유혹할 때 하나님께서 마귀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여러 말씀들을 만나보자.
(3) 마귀를 대적하는 말씀
(벧전5:8-9) 8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9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도, 가룟 유다도 마귀가 유혹할 때 사단아 물러가라고 대적을 안했다. 마귀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따라간 것이 문제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근신(말이나 행동을 조심하는 것)하는 것이다. 마귀는 항상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약함을 이용해 넘어뜨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마귀는 끈질긴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깨어 있어서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깨어 믿음을 지켜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마귀는 물러갈 것이다.
(시44: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이 말씀은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는 물러간다는 것이다.
(약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는 말씀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 당신이 그분을 의지하고 믿는 한 그분은 당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마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주변에 방패를 두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이 우리 삶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무기가 되게 하고, 당신 안에서 끊임없이 싸울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마귀가 우리를 잡고 있는 무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값으로 잡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죄를 지면 죽음이라는 사망으로 우리를 잡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 이 두 가지 무기로 마귀는 사람을 묶을 수 있는데 어느 누구도 스스로 마귀에게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죽지 않을 사람도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우리의 죄와 사망을 없애 주어야 합니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마귀의 사슬이 끊어지고 우리에게는 사망 대신 영생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단의 속성인 거짓과 탐심과 교만과 정욕과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마귀는 틈만 보이면 여지없이 굶주린 사자같이 나를 삼키려고 달려든다. 전쟁은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으며 당신이 중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라. 마귀에게 영혼을 바치면 세상 부귀, 영화, 공명을 주되 영원히 불타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마귀가 공짜로 세상 부귀, 영화, 공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시험한 것도 그것입니다. 네 영혼을 내게 맡겨라! 나에게 엎드려 절하라! 그러면 부귀, 영화, 공명을 주겠다는 것인데 사울도 거기에 굴복했고, 가룟 유다도 굴복했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대적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대도 조 씨가 당한 시험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과 다른 것은 조 씨는 마귀를 대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조 씨에게 육신의 정욕으로 다가와서‘야∼ 쉽게 돈 버는 것 알지 않느냐. 네가 담만 뛰어 넘으면 수억씩 손에 쥐지 않았느냐? 지금도 돈이 필요하지? 그가 마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했으면 마귀는 물러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 씨는 대적하지 않고 마귀의 말을 듣고서 담을 뛰어 넘은 것입니다. 그는 또 안목의 정욕에 빠졌습니다.“너는 절도 전문가 아니냐?”야∼ 너는 사람들이 홍길동 같은 사람 아닌가! 너는 영웅이야,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마귀의 속삭임에 우쭐했고 그런 착각에 빠져서 그는 그만 죄를 짓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씨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냐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패배하면 마귀의 종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는 것은 너무나 비극적인 것입니다.
4.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산길에 위태로운 절벽에는 철책을 쳐놓았는데 만약 철책을 넘어가면 낭떨어지기에 떨어져 죽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철책을 무시하거나 뛰어 넘으면 안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보호받기 위해서 율법과 계명이란 철책을 주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계명의 철책을 무시하거나 뛰어 넘으면 우리는 크게 상처를 입거나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동산의 모든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계명의 철책을 주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이 철책을 뛰어넘어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육신의 정욕의 소리, 안목의 정욕의 소리, 이생의 자랑의 소리로 속삭입니다. 내말 들으면 너는 쾌락을 얻을 수 있고 재미를 볼 수 있다는 소리가 들릴 때 우리가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외우면 그 마귀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인간은 시험에 안 드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라.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조 씨와 같이 그런 시험에 다 들 수 있습니다. 나도 언젠가 한순간에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경계하지 않으면 똑같은 마귀의 시험에 빠져 죄짓게 됩니다. 더구나 과거 깊은 죄악의 늪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꼭 그 마귀가 약점을 알고 찾아 유혹합니다. 옛날에 도박하던 사람, 주먹쓰며 싸움하던 사람, 도둑질하던 사람, 음란한 사람이 그것을 씻고 나왔으나 마귀는 그 약점을 알기 때문에 마귀는 두 번 세 번 꼭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계명의 철책을 쳐야 마귀가 뛰어넘지 못하고 나도 뛰어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면 단호하게 이 철책에 서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면 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간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항상 믿음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