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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 체홉, <벚꽃동산>(안톤체홉극장), 2019, 7, 25.
출연—남명지, 정인범, 정창옥, 조환, 이동규, 가득희, 김병춘, 이유청, 김린, 박혜주, 이주환 외.
방학특강으로 드라마를 읽고 있는데 [벚꽃동산]도 목록에 있다. 마침 공연 일정과 맞아 드라마 수업을 듣는 분들과 함께 연극을 봤다. 지난 화요일에 이어 두 번 연속 체홉의 극. [벚꽃동산]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체홉이 1860년 출생해서 1904년 세상을 떠났으니 1903년에 초연된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극의 얼개는 간단하지가 않다. 파리에 가 있던 <벚꽃동산>의 여주인 라녭스까야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아냐와 바라다. 바라는 수양딸로 <벚꽃동산> 저택의 살림살이를 맡아 하고 있었고, 아냐는 엄마와 함께 파리에서 돌아왔다. 라녭스까야 부인은 파리의 정부로부터 배반당하고 재산을 탕진한 채 거의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오는 길이다. <벚꽃동산> 사정도 마찬가지라 부채가 많아 청산하지 않으면 곧 경매에 처해질 위험에 있다. 집안 살림을 관리하는 바라는 그 사실 때문에 심한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부인은 현실 감각도 떨어질 뿐 아니라 낭비벽은 고칠 줄을 모른 채 여전히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흥청망청 쓰고 있다. 집 식구들에게는 음식이 떨어져 가는데 낯선 걸인에게 금화를 주고, 자기 기분에 따라 감당도 안 되는 파티를 여는 라녭스까야 부인을 보는 바라의 시선은 불안하다. 아냐는 착하고 어린 딸이며 철은 없어 보이지만 바라와의 사이는 좋다.
등장하는 주변 인물 가운데, 먼저 부인의 오빠 가예프. 점잖은 신사이기는 하나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말을 장황하게 하면서 실수하는 경향이 있다.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 시대 귀족을 대변하는 듯한 인물. 악하지는 않지만 현실 적응력이 부족해서 <벚꽃동산>이 넘어갈 위기 임에도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삐쉭. 빚더미에 시달리는 이웃 지주다. 늘 부인에게 돈을 부탁하여 부인을 곤란하게 하지만 역시 악인은 아니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라는 유형을 상징하는 인물.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땅에서 “흰 찰흙”이 나와 영국 신사들에게 높은 가격에 채굴권을 임대해서 재정란을 벗어난다.
이 집의 여자 하인 두냐샤, 두냐샤가 사랑에 빠진 프랑스에서 부인의 하인 역할을 했던 야샤, 그리고 두냐샤를 짝사랑하는 사무원 베빼호도르. 그는 특히 잦은 실수로 인해 야샤로 부터 “스물두 가지 재앙”이란 별명을 얻었다. 극의 비중은 적지만 마지막에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상징적 인물인 늙은 하인 피르스. 그리고 부인의 죽은 아들의 가정교사였던 만년 대학생 빼쨔. 빼쨔는 극에서 이상적 사회와 인간을 꿈꾸고 역설하는 이상주의자 역을 맡고 있으며, 그런 그의 모습을 아냐가 동경한다. 빼쨔와 아냐의 관계는 순진 혹은 순수함에 가까운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아냐의 가정교사 샤를로따. 현재도 미래도 불안정해보이며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
그리고 로빠인. 조부 때부터 라녭스까야 가문의 농노였으나 농노 해방 이후 자유인 신분이 되어 부를 축적한 상인. 이 극의 한 축에 몰락하는 귀족 라녭스까야 가족이 있다면 그 반대편 부상하는 부르주아 계층을 상징하는 인물. 농노 출신이라는 점이, 그리고 마침내 <벚꽃동산>의 주인이 된다는 극적 변화를 통해 당시 일어나고 있던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 신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모든 이들은 <벚꽃동산>의 재정적 위기 상황을 모르쇠 하거나 알아도 아무런 현실적 대책을 제시하거나 실행할 능력이 없는 반면, 유일하게 계속 대안을 제시하는 인물은 로빠인이다. 그는 백과사전에도 올라갈 정도로 유명한 풍광을 자랑하는 <벚꽃동산>을 별장 부지로 제공하면 부채 탕감은 물론 상당한 이익을 남기는 사업이 될 것이라며 부인에게 권하지만 소용없는 일. <벚꽃동산>에 담긴 과거의 화려함과 추억에 큰 의지를 하고 있는 부인은 그럴 생각이 없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낭비한다. 그 절정이 집시 악단을 불러 연 파티였다.
메인 플롯이 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부채 탕감 기한 일까지 빚을 갚지 못한 부인의 <벚꽃동산>은 경매에 처해진다. 경매 당일, 친척에게 빌린 돈으로 <벚꽃동산>을 낙찰받기 위해 경매에 참석한 가예프가 좋은 결과를 안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가족에게 돌아온 소식은 다른 이에게 낙찰되었다는 것. 그 소식을 전한 이는 다름 아닌 로빠인이었으며, 경매를 통해 <벚꽃동산>을 낙찰 받은 이 또한 로빠인 바로 그였다. 자신의 조부와 부친이 농노였던 <벚꽃동산>을 사들인 로빠인의 미칠 듯 기뻐하는 모습과 침통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는 라녭스까야 부인의 가족과 하인들. 세계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모두가 <벚꽃동산>을 떠나는 날 아침, 부인은 다시 파리의 정부에게로, 바라는 다른 집 하녀로, 빼쨔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대학으로, 아냐는 엄마를 따르지 않고 공부를 하기 위해 기숙학교 같은 곳으로 떠난다. 베빼호도르는 <벚꽃동산> 관리자가 되고 가예프는 은행에 취직이 되었으며, 샤를로따에게는 불분명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삐쉭이다. 그는 영국인들에게 자기 땅의 백점토를 채굴하는 조건으로 임대를 놓음으로써 재정난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모두들 불안정하지만 자신의 길을 나설 준비를 하면서 몸이 불편한 늙은 하인 피르스를 병원에 데리고 간 줄 착각하지만 실은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고 문을 닫은 채 떠나버린다. 로빠인은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벚꽃동산>의 벚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별장사업을 할 생각으로 벚나무 벌목을 지시한 상태. 모두가 떠난 뒤 아무 것도 모르고 겨우 몸을 이끌고 내려온 피르스는 의자에 기댄 채 마지막을 맞이한다. 마지막까지 그가 걱정하는 것은 가예프가 외투를 걸치지 않고 나갔을 것이라는 하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상기, 그리고 그의 마지막 대사. “마치 내가 살지도 않을 것처럼 삶이 흘러가버렸어. 이젠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망할!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밖에서는 벚꽃동산의 벚나무를 베는 도끼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다른 장면도 그랬지만 특히 이 마지막 장면, 피르스를 연기한 정창옥 배우님의 연기는 숨을 멎게 할 정도로 훌륭했다.
이야기에서 보이듯 [벚꽃동산]은 변화하는 시대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몰락하는 러시아의 토지귀족(라녭스까야 가족)과 사회적 주체들의 신분, 재산, 계층 변동의 과정에 대한 리얼한 묘사가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농노의 아들이 자신의 가계가 하인으로 있던 바로 그 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상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금전, 즉 자본의 소유관계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 자연스러운 몰락과 상승이었다. 구시대 귀족은 자본을 관리할 줄도 축적할 줄도 소비할 줄도 몰랐다. 그(녀)들에게는 땅이라는 친숙한 공간에 대한 향수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반면, 로빠인이 상징하는 (프로레터리아트에서) 부상하는 신흥 부르주아 주체는 달랐다. 그는 철저하게 이에 밝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형성했고 마침내 완전한 반전을 이루어 냈다.
한편,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라녭스까야 부인은 과거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책임을 회피하거나 혹은 가정교사인 빼쨔에게 돌리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파리의 정부 혹은 연인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오빠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딸아이를 두고 사랑의 도피를 한 과거 까지 부정하려는 듯한 태도도 보인다. 그리고 <벚꽃동산>을 잃은 지금 다시 파리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렇게 보면 그녀는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지금도 어느 곳에서도 확실하게 정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로빠이는 처음부터 문제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그 해결책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흔들림이 없었다. 토지에 기반한 구시대와 자본에 뿌리를 둔 부상하는 부르주아 계층의 차이는 그렇게 모든 면에서 나타났다.
로빠인이 바나에게 청혼하지 않은 것은 작가 체홉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구시대의 주체와 새로운 세대의 주체는 하나 될 수 없다는. 비록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딸 아냐의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엄마를 따라 파리로 가지 않고 공부를 해서 새로운 길을 택하려는 그녀의 결심은 몰락하는 귀족 계급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에 대한 체홉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 <벚꽃동산>이 경매에서 팔린 뒤 엄마를 위로하며 “벚꽃동산이 팔렸으니 이제 모든 게 다 잘 될거야.”라고 위로하는 그녀의 말은 옛 시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뒷 세대 주체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런 아냐의 태도에 빼쨔의 생각 혹은 사상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빼쨔는 구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반대하는 지식인의 모습과 사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와 사상에 비례할 만큼 오롯이 믿음이 가는 인물 같지는 않다. 그는 사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인물 아닌가. 서른이 넘도록 대학도 졸업 못하고, 남의 집에 빌붙어 살면서 아무리 무엇을 외쳐댄다 한들 얼마나 큰 울림이 있을까. 빼쨔를 통해 체홉은 지식인의 양면성에 대해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완전히 비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 그가 로빠인이 주는 돈을 끝내 받지 않는 모습은 그래서 의미하는 바 있다. 그는 말이 앞서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전형적인 이상주의 지식인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위선자는 아닌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이 아냐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래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아울러 구시대와 새로운 다음 시대는 혁명에 의한 변화와 교체는 아니었다. 봉건시대의 주체 가운데 부인처럼 몰락한 주체가 있는 반면, 가예프와 아냐처럼 적응하면서 변해가는 주체도 있다. 로빠인과 부인의 관계는 주인과 전노비의 관계었지만 그들 사이의 자리바꿈은 혁명도 폭력도 아니었다. 봉건귀족에서 부르주아로, 그 연착륙의 보고서를 체홉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대해서 체홉은 말하지 못했다.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으므로.
<벚꽃동산> 대학원 과정에서 읽은 뒤 언젠가 방학특강에서 한 번 읽고 몇 년 만에 텍스트로 다시 읽게 된다. 그 전에 연극을 본 것인데 사실, “벚꽃동산이 팔리는 것의 상징성과 당시 러시아 사회의 사회적 계층적 이동에 대한 리얼리즘적 드라마”라는 틀에 박힌 한 줌의 지식, 그리고 몇몇 장면들과 큰 이야기 줄거리 말고는 세부사항들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본 극이 더 재미있었다.
극을 대단히 집중해서 보았고, (텔레비전에서 종종 보는) 몇몇 연기자와 모든 출연진들이 보여주는 안정된 연기도 훌륭했다. 그러나 보고 나오는데 마음이 우울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스무 명 가까운 배우들이 교차하며 움직이기엔 좁은 무대, 마지막에 모두 나와 인사를 할 때는 정말 무대가 비좁아 보일 정도였고, 객석의 좌석도 불편해서 그 불편함이 배우들에게 전달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비해 100명 남짓한 객석(만석이라고 했다)은 작아 보였고,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현실적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팀 8명과 함께 본 내가 속한 소모임 식구들은 저가로 나온 티켓을 구해서 관람을 했다. 다른 관객들도 아마 그런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여러가지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른 연극을 다 그렇게 보았으면서 오늘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벚꽃동산>의 모든 면이,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그만큼 마음에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훌륭한 연기로 좋은 무대를 꾸며주신 배우분들과 연출자 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