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새해, 날아오르는 청룡의 해가 도래하였습니다.
살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몇곱이 되면, 이제 살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점점 느끼게됩니다.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갈 때가 되면 가는 것이고, 그간 잘 지내고 못 지내고가 다 자기 자신에 달린 일이었으니, 공평한 인생에 불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지구에서 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지구에 나기 전 즉 자신의 태어난 해 이전의 해에 이 지구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지구에 태어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나 없을 때 지구에선 이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면, 내가 지구에 와서 한 일은 무엇인가 돌아보게 되고, 이 지구와 이별할 때 나는 어떻게 갈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갖고 온 것이 없듯이 가져 갈 것도 없습니다.
지구란 곳에 잠시 와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나는 잘 살았나? 잘 살고 있나?
그리고 이 지구에 와서 살았던 붓다 성인 보통사람 악인 등등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이 지구에서 살다 간 것을 돌아봅니다.
이제 남은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돌아보면서 새해를 맞이하니, 이 새해를 맞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이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랄 수 있고, 이 인간 몸을 가져 지구에 난 이때, 정말 중차대한 공부를 해마치지 못한다면 또 어느 때에 법을 만나 공부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십대에 공부를 알았지만, 이제껏 세파에 시달린다는 핑계로 공부를 미루다 어느덧 흰머리만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 그냥 죽자사자 공부하였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앞으로 죽을 때가 닥쳐도, 아마 똑같이 내가 10년만 전이라면 다 제켜두고 죽자사자 공부만 했을텐데,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죽자사자 하지 않는 것이 원수와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죽자사자 왜 못할까요?
그것은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고, 할 것 다 하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이 공부를 하려고 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다 한번도 지금 당장 죽자사자 공부안해보고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지금 죽자사자하고 내일도 그렇게 죽자사자하다보면 죽을 때도 죽자사자한다면, 뭐 아쉬울 게 있을까요?
그게 제일 잘 사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더 어찌할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죽자사자하는 것 말고 더 잘사는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할 것 다하고 누릴 것 다 누려봐야 뭐가 남나요, 허망한 업만 남지....
결국 헛되이 지구에 왔다 헛되이 지구의 삶을 마감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 헛것의 놀음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천상의 지고지순한 낙도 원하지 않고, 머리에 타는 불끄듯 공부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교수님의 인도 불교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드는 마음은 참으로 죽자사자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은 쉼없이 흘러 나를 기다려주지 않아 어느덧 죽음에 이릅니다.
역사상 수많은 구도자들이 죽자사자 공부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낭떨어지에 떨어지기 전에 살 길을 찾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원치 않고 돌아보지 않고 죽자사자 생사 일대사를 이마에 붙여두고, 정진하여 남들과 달리 끝내 해냈던 것입니다. 붓다께서 그런 것처럼 말이지요.
그들은 생사를 해탈하여 나고 죽는 데서 벗어나 항상 안온하다고 합니다.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어서 아무리 나고 죽어도 나고 죽지를 않아 항상 일이 없다 합니다.
생도 그러하고 사도 그러하여 모두가 깨달음의 소식이라 하니 생사란 두 글자가 그저 글자일 뿐, 생사를 눈씻고 찾아보아도 그런 것은 본래 없더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꿈만 꾸다 가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꾸다 갈지 모를 꿈을... 죽는 순간까지... 눈 감고 꿈만 꾸다가... 눈한번 떠 보지 못하고 가는 것입니다.
혼자 살다 가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그저 자기 꿈속에서 살다가 눈 한번 못떠보고 가는 것이지요,
일생 산 것이 모두 꿈이니, 일생 홀로 꿈같은 삶을 살다 가는 것은 아닐런지요.
교수님 말씀대로 혼자 사는 줄 알면 이제 꿈 깰 일밖에 뭐가 있겠는지요?
오늘 새해를 맞이하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든 생각입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한번도 같이 사는 사람의 진면목을 본 적이 없이 살다가 가니, 역시 내가 만든 교수님만 만나다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교수님의 진면목을 본다면 나의 진면목을 보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게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요?
올 한해는 우리 모두 그런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에 넋두리를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런 넑두리를 나눌 수 있게 하여 주신 교수님께 감사합니다._()_
사족
육조스님 말씀처럼 언제 어디서나 이 공부를 한다면 내가 있는 것과 같으나 하지 않으면 같이 있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공부를 한다면 천리가 지척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항상 대하면서도 천리나 먼 것이란 말씀이겠지요.
나아가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진면목을 봄에 거리가 없어서이고, 항상 붙어있어도 먼 것은 진면목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도 우릴 갈라놓지 못하는 것이란 바로 이렇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넋두리 하나 덧붙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이것을 제 깜냥대로 이해한 불교식으로 생각하면,
복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니 지어놓은 복을 받는다는 것인데, 복 많이 받으란 소리는 지어놓은 복을 많이 쓰길 바란다는 것이겠지요,
지어놓은 복을 많이 쓰는 게 좋은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많이 받아 써버리면 뒤에 필요할 때 복이 부족하게 될 것 같습니다. 꼭 좋다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복많이 짓고 복많이 받으세요 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즉 착한 일 많이 하면 좋은 일이 많으리니, 착한 일 많이 하시고 좋은 일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이렇게 외쳐봅니다.
이곳에 오시는 모든 분들, 새해 복많이 짓고 복많이 받으세요.
항상 영상 올려주시는 상민님께 감사드리고,
글같지도 않은 하잘것 없는 넑두리를 글이라고 보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_()_
고생하셨습니다.^^
첫댓글 세월이 쏜살같아서 무서워요.
저도 50 중반 되도록
해놓은 것이 없어서 자괴감이 드네요.
이미 그런줄 아시니, 잘 될 일만 남았습니다.
사실 잘 될 일은 이 마음에 전환이 오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도 해놓은 것이 없지만 세속일이란 편안하면 그만이 아닌가 합니다.
모쪼록 일취월장 하시기를...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