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 진리를 왜 苦聖諦라면서 성스럽다고 할까?>
불교에서는 고(苦), 고의 원인, 고의 소멸,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진리를 말합니다. 이를 각각 ‘고제’, ‘집제’, ‘멸제’, ‘도제’라 하여 통틀어 ‘사성제(四聖諦)’로 부르지요. 그런데 ‘사성제’에는 ‘성스러울 성(聖)’ 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성제’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풀이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고통이나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가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가? 더구나 우리가 느끼는 즐거운 경험까지도 ‘고’라 하여 이를 ‘고제’ 또는 ‘고성제’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러한 의문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관점을 바꾸어 사성제의 ‘성스러울 성(聖)’자를 ‘성자(聖者)의 성(聖)’으로 이해하면, 쉽게 그 의문이 풀립니다. ‘사성제’를 ‘성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네 가지 진리’로 풀이할 수 있단 말이지요. 이런 비유를 들어보지요.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놓여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가면 우리는 고통을 느끼겠죠. 머리카락은 무상한 현상입니다. 손은 범부이고, 눈은 성자입니다. 성자만이 무상한 현상을 보고 고통을 느끼지, 범부는 손바닥과 같아서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비유입니다. 이걸 보면 ‘사성제’란 말은 범부의 관점과 성자의 관점이 다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가 관점을 바꾸면 해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당신이 진정 삶과 죽음이란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세상을 보는 눈(관점)을 바꿀 것이 요청됩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지닌 세속적 관점을 출세간적 관점으로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세간의 희로애락애오욕은 모두 무상하며 필경 변하고 사라질 것이기에 거기에 집착하면 결국 괴롭게 되는 것으로 볼 것을 요청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세속이 주는 작은 즐거움에 빠져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비록 세속에 젖어 있지만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세속을 벗어나리라는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고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 드리기에 그 마음이 聖(즉 출세간)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고성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고성제라고 합니다.
*이종철 교수의 불교강의에서 문장 일부를 조금 수정하여 실었습니다.
이종철 교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도 Mysore대학 연구원과 중국 북경대 교환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중이며, 전공은 불교철학(구사, 유식)이고 ‘인도불교와 동아시아불교의 비교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원담스님과 불교학생회 활동을 함께 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