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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집의 성결법 : 성적 성결법 (레 18장)
- 설교 : 김강호 목사
16장이 대 속죄일에 대한 규례가 있었다. 거기서는 제사장이 영광스런 옷을 벗고 세마포 옷과 그 내복을 입고 향연으로 가리우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들어가고 또 속죄의 염소의 피를 그 보좌에 뿌리고 그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성소에 들어와서는 안된다. 그리고 다 굶어야 되고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하시는 그 거처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거기 나타내셨다. 이제 17장 이하에는 거룩한 규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17장에는 피는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 하나님의 단에다가 화목제를 드리고 그리고 거기다가 모든 번제와 희생을 지내고 이스라엘의 모든 피는 절대로 먹지 말고 단에 드려라. 하는 이야기가 17장에 있다.
그것은 피의 약정 안에서 이전의 수염소를 섬긴 것이 아니라 생명이 되신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들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도 피의 약정 안에서 먹고 그런 의미로 반드시 죄를 속하도록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 그 피로 속죄된 백성으로 피로 언약된 백성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먹고 드리도록 그것이 17장에서 말씀했던 것이다.
이제 18장 이하에서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이런 저런 규례들이 나온다.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을 드리겠다.
17장에서는 성결법을 말씀하신다. 성결법은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백성처럼 살지 않고 여호와께서 속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17장부터 20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집에 성결법이 기록이 되어 있고 21-22장은 제사장의 성결법이 23-25은 절기와 안식의 성결법이 그리고 26-27에는 언약의 복과 저주에 대한 말과 함께 서원에 대한 문제가 기록이 되어 있다. 서원된 것은 하나님 앞에 무를수 없고 드린 것은 바꿀수 없다. 그렇게해서 전체로 하나님앞에 드려짐에 대한 규례가 성결법의 마지막이다.
구체적으로 17-20을 다시 보면 17장은 제사와 피에 대한 그런 성결법이 있었다. 그리고 18장은 성적 성결법이 기록이 되어 있고 그리고 19장은 그들이 지킬 거룩한 규례들이 기록이 되어 있다. 20장은 가증한 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다.
지난 시간에는 피에 대한 성결법을 말씀했고 오늘은 성적 성결법이다. 17장에서 피에 대한 성결법은 이스라엘 집에서 하나님의 단에 나와아 드리며 먹도록 죄를 속하도록 피를 허락하신 여호와께 모든 피를 드림으로 여호와께 속한 언약 백성으로 살라는 헌신을 명하셨다. 그들은 항상 생명을 속하도록 피를 주신 하나님 앞에 모든 예물을 드려야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먹고 마시는 모든 일에서 반드시 피는 하나님의 단에 드림으로 죄를 속하도록 피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먹도록 가르치셨다.
18장-20장은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신 언약적 삶의 규례인데 여호와의 백성된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족속들을 본받지 말라 하는데서 거룩함을 말한 것이 18장이고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켜야 한다 하는 것이 19장이고 그리고 만일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족속들을 따라 살면 그러한 자를 여호와께서 진노로 죽이시리라 가증한 죄를 지으면 진노로 죽이시리라 하는 경고가 20장이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집에 거룩한 규례들을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의 백성된 자들에게 언약 적인 삶을 명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는 말씀이 단락의 처음과 끝 또는 단락의 중요한 분기점에서 반복되며 출애굽에서처럼 종주 언약 구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주 언약은 왕과 그 신하들간에 언약인데 왕이 그 백성에 대해서 누구 신가를 설명하는 역사적 기술이 따르고 그 왕이 백성에게 요구하는 순종과 충성과 명령들이 있고 그리고 그것을 지킴에 대한 상과 지키지 못함에 대한 경고가 따라 있고 그것이 왕과 신하들 사이에 맺는 언약 형식이다. 나 왕은 누구누구인데 나 왕은 너희에 대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너희 백성들은 나에게 이러이러한 것은 지켜라. 지키면 이렇게 복주고 안 지키면 벌을 주겠다. 하는 그런 언약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말이다.
형식은 그래도 특성은 좀 다르다. 왜냐하면 일반 왕과 백성의 언약 형식은 동등 당사자들의 언약 형식이지만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언약 형식은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그 언약을 시행하시기 때문에 일반 왕과 신하들 언약과 똑 같은 아니고 그 형식이 유사하다 그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18-20까지 보면 핵심 되는 말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말이 단락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고 또 중요한 점에 나와서 여호와의 언약 백성으로서 살라는 요구가 전체를 이루고 있다.
이제 18장1-5절을 보면 언약의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성경을 보면 (레1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18: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레18:3)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레18:4)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설명하고 그들에게 요구하고 지키면 살리라 안지키면 벌을 받겠지요?
18장에 대표적으로 1-5절까지 있으면서도 이것은 20장 까지 거의 반복되는 언약 형식들이다. 주보를 보자.
왕이신 여호와는 누구로 표현하냐면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리고 그가 하신 일은 애굽에서 건지셨고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너희들은 애굽 백성이나 가나안 땅의 백성의 규례대로 살지 말고 나의 규례를 지켜라. 축복은 이를 행하면 살리라. 이런 형식이다.
설명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역사에서 행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따라서 순종하고 동행하는 것이 역사에서 함께 사는 생명 곧 구원이다. 이제 6-23에서 금하신 명령들이 쭉 나오는데 금하신 것들은 당시 이스라엘과 상관된 이방의 더러운 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규례에서 인간의 죄의 본성과 그 부패함을 알 수 있지만 성경은 신학적 죄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역사적 상황에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이다. 이제 6-23절에 보면 이러 이런 한 짓을 하지 말아라. 쭉 나온다. 그런데 그 말은 많은 죄들을 지목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읽어보고 아 사람이 더럽구나 하고 인간 죄론으로 막 읽어 들어가지 말라 그 말이다. 성경은 추상적인 신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 있는 죄들이다. 물론 그 죄들에서 인간이 얼마큼 부패한가 죄론을 개진할 수는 있다. 또 이런 규례에서 몇 촌까지는 결혼할 수 있겠구나 그런 것도 알 수는 있다.
그런데 성경은 몇 촌까지는 결혼해라 하는 결혼 규칠이나 또 사람의 죄가 본래 이렇게 더러운 것이니라 그런 것을 말하려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오래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했다. 그들의 풍속을 따라서는 안된다. 왜 이제는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그들은 들어가서 사는 그 땅 백성들을 본받아서도 안된다. 왜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대면하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죄들을 말하면서 그들을 본받지 말고 내 규례를 지켜라 하는 것이 죄들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여기 아무리 더러운 죄가 있다고 해서 사람은 이정도 죄를 지을수 있는가? 그것을 죄의 한계점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죄는 그 보다 더한다.
여기서 이를 지키라 그러면 이로 인하여 살리라. 5절의 축복 그것이 여기서 설명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역사에서 행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따라서 순종의 삶으로 동행하는 것이 역사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과 구원이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는 율법의 말씀이니라. 로마서에서 그런다. 그러나 복음은 믿으라. 율법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믿으라. 이렇게 되어서 아하! 율법은 행함 복음은 믿음 이렇게 막 구원론적으로 대립시키면 안된다고 그랬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는 말은 모세의 제도를 순종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법은 반복되는 행위의 규례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복음 안에서는 그 모세 제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면하는 것이아니라 예수 안에서 세로운 관계에서 자기 백성을 대면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 율법은 행하면 살리라 이고 복음은 믿으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대비시킨 것이 아니라 모세의 제도가 이것을 행함으로 생명되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행하지 않으면 끝나는 것이다. 그들은 행하지 않으면 언약 파괴자로 당장 벌을 받는다. 모세의 제도도 반복되는 행위로 구성이 되어 있고 그들이 지킬것도 이런 명령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는 것이 모세 제도의 삶의 질서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그런 질서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오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모든 삶을 그 믿음의 관계를 나타내는 윤리지 새로운 규칙을 준 것은 아니다. 바울이 또 예수님도 이런저런 규칙을 주고 있지만 그 규칙은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그 율법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러 왔다 했을 때 어떤 의미로 연속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모세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함으로 어떤 의미로 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항상 시내 산에 있는 법은 폐해지지 안는데 이제는 그것이 시행되는 경륜이 모세의 제도적인 시행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새로운 집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라 왔다 했는데 모세 제도를 따라서 살면 안된다. 왜 완성된 시대로 살아야 되니까.
그 완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모세 율법을 반복하는 것을 단순히 지켜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제도는 ㅁ아래서 하나님이 원하신 요구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대면하심으로 새로운 관계를 주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완성이다. 그러니까 모세 율법을 확대 해석해서 신약으로 오면안된다. 주님께서 친히 오셨다는 새로운 관계에서 구약의 율법을 해석해서 이전의 한계점을 벗겨버려야 된다. 해석을 거꾸로 해야한다. 그런 의미로 복음은 믿으라 율법은 행하라 이런 말이지 하나는 인간의 행동 하나는 하나님의 행동 인간과 하나님을 대립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 말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제도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 이 제도를 지킴으로 생명되신 하나님과 동행하고그리고 애굽과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목표를 봉사할수 있다.
만일에 그들이 애굽에 복종해 버리면 또 가나안 땅 백성에게 복종해 버리면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과 동행도 못할뿐만 아니라 그 목표를 봉사하지 못한다.그러면 그들은 그 언약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소위 구원론적으로 읽지 말라 그 말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지킬 법이 무엇인가? 6절부터 보면 근친 상간에 대한 금지 명령이 18절 까지 있고 그리고 19절부터 23절에는 가나안 백성의 더러운 행위들을 언급하고 그것을 따라 살지 말아라고 이야기 하고 24절 이하에는 만일에 따라 살면 너희들도 죽으리라는 경고가 따라 있다. 그런데 18장은 강조점이 성적 성결법인데 가나안 백성과 애굽 백성을 본 받지 말아라. 하는 것이 가조점이다.
읽겠다. 16절부터 성경을 보면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이 6절 이하에서 주제적인 서론이다. 무슨 말이냐?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지 말아라. 나는 여호와다. 그러면 골육지친이 누구냐? 7절부터 설명을 해주고 있다. 어미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아비의 하체가 아니냐? 또 계모의 하체를 범치말아라 그는 아비의 하체가 아니냐? 이런 말로 쭉 설명이 되어 있다. 이런 말은 전부 성적 결합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그것이 결혼이든지 그렇지 않던지 성적인 결합을 표현하는 말이다.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적인 관계를 금하신 것이다. 가나안 족속의 이러한 죄와 심판은 그 조상 함이 노아로부터 받은 저주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함은 그 아비 노아의 하체를 본죄로 저주되었다. 여기서 하체를 본다는 말은 성적 언어이다. 하체를 본다 벌거벗다. 또는 수치를 드러낸다 하는 모든 말은 성적인 언어 표현이다. 함이 자기 아비 하체를 보고 형제들한테 말했다. 봤을 때 단순히 보고 조롱한 정도가 아니다. 바로 이 아비의 정신 아비의 사고가 후손에게서 열매를 맺는 것이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함에 대한 이야기도 창세기의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함을 언급하고 있다. 함 족속은 저주될 족속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저주가 어디 있는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서 정복할 백성의 저주다. 그러면 그 기원이 무엇이냐? 조상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자기 아버지를 성적으로 희롱한 죄가 후손에게서는 완벽하게 열매를 맺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들을 토해 내시고 싸우시는 것이다.
거기 구체적인 언급들은 여러분이 읽어보면 될 것이다. 보니까 이런 저런 촌수가 많이 있다. 촌수를 보면 서양식으로 하면 사촌까지는 여기서는 정죄가 안되겠다. 그래서 삼촌까지는 성적인 관계가 있으면 전부 걸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 의미로는 서양식이 더욱 기독교인의 토대가 될 것이다. 어떻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방 풍속을 본 받지 말라고 저주하면서 이것은 사악한 죄라고 언급했을 때 이런 죄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든 여기 까지는 결혼이 금지된 한계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돈에 팔촌까지 결혼하지 못하도록 하니까 나쁘다고 싸울 것인가? 싸울 이유는 없다. 단지 이 촌수 이상으로 결혼을 요구하면 그것은 싸워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 백성의 풍속을 저주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나라의 고유한 도덕적인 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16촌까지만 결혼한다 해도 이것은 비 성경 적이다 하고 열심히 싸울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성품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촌 끼리도 하자 그러면 싸워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죄라고 정죄하고 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어디까지가 결혼이 합법 한가? 하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결혼제도를 말하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방의 사악한 풍속을 본 받지 말라는데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가령 아비의 하체가 아니냐? 나중에 또 어머니하고 연결할 수 있다. 또 일단 아비의 하체가 아니냐 이렇게 했을 때 한 마디로 자기 아버지를 조롱했던 장면들을 그냥 연상할 수 있다. 그런 언어 개념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23절을 보면 가나안 족속들의 더러운 행위들을 말하고 있다. 18절까지는 전부 골육지친에 대한 성적인 금지다. 19절을 보면 너는 여인이 경도로 불결할 동안 가까이 하지 말라.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지 말라. 자녀를 몰랙에게 주지 말아라. 그리고 이런 저런 더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고 또 지금 지금이 문화가 제일 개화된 시대라고 말을 하지만 지금이 짐승처럼 타락한 시대다. 가나안 땅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기독교 국가에 그대로 있다. 그러니까 할말이 없다. 이런 것을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이방의 상황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죄론을 말하려는 더러움이 아니라 그 당시 구체적인 죄들을 지목함으로 죄의 사악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도 남자가 남자끼리 여자가 여자끼리 못된일을 행한다. 왜 그러는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 하면서 이런 저런 죄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의 죄를 근친상간의 죄로 이야기하고 그것은 함에게서 나타난 열매들이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를 의의 조상으로 시인하지 않고 그리고 성적인 대상으로 조롱해버렸다. 그런 문제들이 이스라엘이 정복할 가나안 족속에게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의미로 저주받은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으로부터 선택된것처럼 가나안 백성은 조상으로부터 저주되어 있고 그 저주가 완전히 열매를 맺어서 땅이 그들을 토해 내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그들과 싸워야 되고 그들을 없애야 되지 그들을 조금도 본 받아서는 안된다. 그 문제가 지금 성결법의 핵심이다.
경도 하는 여인과 성적 관계를 가지는 일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는 일 자녀를 몰렉에게 주는 일 동성애 짐승과 교접하는 일들은 더러운 일들이며 여호와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성적 더러움을 말씀하시는 문맥에서 몰렉 제사를 저주하시는 이유는 우상 숭배와 성적 더러움이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19-23절은 전부 잘못된 성적 관계가 핵심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 그 말이 끼어져 있다. 전부 성적인 이야기만 하다가 느닷없이 끼어져 있다. 왜 그런가? 그 우상 숭배와 성적인 타락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당시 성적인 타락이 종교적인 의례다. 그런 의미로 가나안 땅의 바알신은 풍요의 신이니까 그 풍요를 위해서 음행 하는 것처럼 전부 그런 것이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가나안 땅 백성은 수 염소를 섬겼다. 이제는 수염소에게 드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드려라. 그렇게 레위기에 나와있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 짐승과 교접하는 일까지 나와있는 것이다. 전부 종교와 연결이 되어 있다. 그것이 선지서에서도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문맥들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더러움이 있고 특별히 롬1장에서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모든 더러운 음행이 탁월하게 나타나고 나머지 모든 죄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그 당시 그들의 우상 숭배와 우상 숭배를 따른 더러운 성적인 죄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전부 생산과 축복과 관계된 일이다.
그리고 24- 끝절 까지는 언약 파괴자에 대한 저주와 그 경고가 따라 있다. 몇 가지로 반복되어서 나타나는데 주보를 읽겠다. 가나안 족속의 더러움과 그에 대한 심판인데 가나안 족속이 이러한 죄를 지어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악을 인하여 그들을 벌하셨고 그 땅도 그들을 토해 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 중에 우거하는 자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 그렇게 말하고 있고 그 다음 동일한 죄를 범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그 다음에 있다.
먼저 가나안 족속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그 다음 동일한 죄를 짓는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데 그들도 이전 족속과 같은 죄를 지으면 같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민족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런 죄를 범하면 누구든지 가증한 일을 범하는 자는 언약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러므로 가증한 일을 하나도 행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는 이방 백성의 저주에서 경고하고 있고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이 동일한 지를 지으면 동일하게 벌받을 것을 경고하고 있고 만일에 개인들이 범죄 하면 개인들을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30절에 총 결론이다.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풍속을 하나라도 행함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해서 마무리 되고 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속한 생명의 교제를 교회에 주셨다. 교회는 세상에 속한 것과 음행한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고 그들을 부르신 자처럼 거룩한 자로 살아야 한다고 신약에서 말씀하신다. 우리들은 이 악한 세대에서 부름을 입었다. 이제는 여호와께 속한자가 되었다. 구약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원수들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심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멸망시키고 하나님이 싸우신 자들을 따라 살면 안된다. 그들이 그들을 싸워서 죽여야 되지 그들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된다. 왜 하나님은 여호와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으니까. 그런데 이제 우리 하나님은 애굽에서 건져내고 가나안 땅을 정복시킴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어둠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제는 악한 자의 권세가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정복되었다. 그는 하늘 보좌에 계신 왕으로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보좌에 앉히셨다. 가나안 땅에 앉힌 정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은 그런 권세로 그리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백성으로 그런 거룩함을 나타내야 한다. 왜 그런 관계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세상을 본받아서는 안되고 악한 것은 모양이라고 보지 말고 음행은 그 이름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그렇게 에베소서와 베드로서 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여전히 여러분이 결혼하고 똑 같이 먹고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내서는 안된다. 왜 하나님이 그들과 싸우셨으니까. 하나님은 그 아들의 죽으심에서 이 싸움을 영원히 승리하셨다. 그냥 권세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아들이 저주받은 죽으심을 통해서 이 싸움을 완결시키셨다. 그렇게 함으로 한 성령으로 그의 몸의 지체로 지으셨다. 그러니까 우리를 부르신 자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렇게 요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구약 적인 거룩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함께 앉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새로운 인류로서 주님의 몸의 지체로 거룩함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믿음으로 깨어 있으면. 여러분은 죄를 지어서 울지 그냥 의를 행하려고 힘들어서 우는 사람은 드물다. 한마디로 신자들은 죄를 많이 지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괴롭고 나쁜 것이라고 울고 있지 아 의를 행하기는 너무 힘들구나 실은 그래서 울지는 않는다. 그것은 소원이고 자랑이다. 그러니까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믿음으로 깨어 있지를 못하고 세상 사람과 같이 그대로 한다. 더구나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도 할 수 있는 농담도 한다. 농담이라는 것은 어른이 나이 어린 사람한테 하는 것인데 그러면 어린 사람은 씩 웃으면 그 만인데 맞받아서 한마디 싹 하면 말귀가 통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새는 나이 차이가 없는 시대라서 그런지 그렇게 된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내지 말고 음행한 것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왜 주님께서 자기 몸을 주셔서 우리를 향기로운 생축으로 드리도록 했다.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려라 신약은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 왜 그런 새로운 구원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다. 하나님이 애굽과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싸워서 죽인 자를 또 따라 살면 안된다. 만일이 그들을 따라서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도 죽일 것이다.
조상들의 죄가 그들에게서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이 심판하고 계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싸워서 심판하는 하나님의 군대로 부름을 입었기 때문에 절대로 이방 백성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것을 성적 타락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그 당시와 바울 당시만 사실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연합 개념이 하나님이 지으신 부부 질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아니면 바르게 취할 수가 없다. 그것은 최고로 발달한 문화가 그것을 증거 한다. 지금도 신문도 국회의원이 어떻고 하는 성적 비리들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 공개화 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면 모를수록 인간의 권세는 거룩해 진 것이 아니라 더욱 저급하게 타락한다. 그것은 자기 몸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다른 죄는 다 몸밖에 있어도 음행은 몸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타락을 시키는 것이다. 지금 모든 문화가 전부 성적인 타락이다. 그러니까 본받지 말아라. 부부끼리도 거룩함으로 서로 취함으로 사랑해야지 그것이 합법을 빙자해서 타락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모른 거룩한 연합이라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믿음으로 깨어 있지를 않고 거룩한 연합은 없는 것이다. 단순히 합법적으로 바람을 안 피웠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니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셨으니까. 구약 때는 싸워서 정복시킴으로 하나님이 되셨는데 이제는 자기 몸의 죽음에서 이제는 우리로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 받게 하셨다.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지체로 살도록 새롭게 지으셨다. 그 관계에서 세상과 싸워 이기고 봉사하도록 하셨다. 그것이 우리 믿는 신자가 가져야 할 윤리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적당히 농담을 해야 스트레스 해소가 되지... 그런데 농담이 희롱의 말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위트가 있는 것하고 천한 농담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것을 구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비천하게 농담하는 것은 그냥 알아 버린다. 열 내버리고 그런데 자기는 똑 같은 피해를 남에게 주고도 탱하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지식상 모른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 모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이해하면 그냥 알아 버린다. 그런데 그렇지를 않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믿음으로 깨어 사시라 그 말이다. 그러면 안다. 거기는 거짓말도 있을 수 없다. 왜 자기가 자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거기는 거짓된 윤리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항상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관계로 항상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누리고 깨어 있으면 여러분의 삶을 그런 의미로 새로운 피조물로 신적인 삶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윤리다. 천사처럼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람을 섬기는 관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렇게 서야 한다. 그 말이다. 국가 대통령보다도 부모들이 계획이 훨씬 뛰어나다. 대통령을 자기 임기 동안만 계획할란가 몰라도 부모들은 아이 낳기 전부터 늙을 때까지 염려한다. 그러면 다른 것을 계획하라고 하면 하냐? 못한다. 그런데 자식을 위한 궁리속은 환하다. 왜냐하면 사랑이거든. 그렇게 좋은 박사가 없다.
그러니까 성경이 사랑이 윤리의 완성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랑이 아니면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렇게 살아라 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