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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
성경본문 : 잠언 22: 1-4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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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천 목사
어떻게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느 때고 우리들에게 다가온 일이었습니다.
가장 먼저는 방향과 목표가 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에 이르게 될 접근방법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치러야 될 대가와 수고가 생각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고와 애씀을 치르면서도 나는 어떤 기쁜 마음으로 그 기쁨을 누릴 것인가 하는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의,식,주 문제해결을 위해서 집중하게 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인생은 이러한 자아실현의 성취를 위하여서 각양의 방법으로 노력을 합니다.
예술적 취향을 가지기도 하고, 봉사에 눈을 돌리기도 하고, 명예를 위해서 힘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적인 관심이 생기면 우리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삶에서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았던 인생 근본의 영적문제까지 채울 삶의 실제적 모습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먹고사는 것이 최고의 일인 줄 생각했는데 이제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남들이 나에게 인사하고 박수하고, 또 더 나아가 진심으로 부러워하면 성공인줄 아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또 넘어선 새로운 지경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과연 내 자신의 길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함으로 그는 그 인생을 재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이러한 것을 깨닫고 느끼는 이들이 있고, 또 그렇지 못하고 평생을 좀 더 잘 살든지 혹은 좀 더 못 살든지, 어떠하든 삶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평생을 마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게도 주님을 알고, 구주로 고백하고, 그리고 그 주님의 은혜와 뜻을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요 은혜로 알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분당중앙교회의 온 성도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고 삶의 기쁨과 어려울 때 소망이 있는 초보신자의 수준을 넘어서서 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내 삶을 어떻게 의미있는 삶으로 살고 이 세상을 넘어 하늘나라에 임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저는 요즘 또 다른 소망을 가집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제는 다 예수를 믿어 고맙고 기쁜 수준에서 이제는 주님을 향한 영광의 꿈을 가슴에 품고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위해서 소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고자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결국 우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루고 그 이룸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뜻에 쏟아 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최종적으로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영원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이 세상에 모든 것 쌓아두고 업적이라고 생각하고 살다 세상 마치지 않고 하늘나라에 우리 아름다운 헌신과 은혜의 삶을 쌓아두고 그 나라에 기쁨으로 입성하는 주의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러한 삶의 구조가 될 때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권하는 고통만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이루는 과정이 됩니다. 이 세상의 이룸이 단순한 이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과정이요, 그것이 하나님께 올려져 아름답게 사용되므로 최고의 용도를 발휘하는 것을 깨닫고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을 아름답게 이루고 기쁘게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헌신의 삶으로 드림으로 인생 최대의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성경말씀을 근거하여 과연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아름다운 인생을 이루어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는 항상 우선적인 선택사항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장 1절>을 보니 “많은 재물보다는 명예를 택할 것이고 은, 금 보다는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우선적 선택사항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을 보니 잠시 없어질 것 보다는 오래 보존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재물보다는 명예를 택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이나 이해관계를 우선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와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의 신뢰와 신용을 우선하다보면 결국 시간이 가면 우리는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고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오래 가는 사람의 마음을 사려면 성실과 거짓 없는 진실 속에 주어진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에서는 헌신의 삶이요, 충성의 삶이요, 배려의 삶이요, 사랑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요 보물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시간이 가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감격을 줍니다. 이 세상에 영적 확신보다 우리 마음을 확신주고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요즘 우리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의 큰 기쁨과 믿음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세상과 동떨어진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 속에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기쁨이라는 것은 결국 꿈이 있기에 이룰 수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어가는 한 과정, 한 마디마디가 우리 인생에는 그 어떤 감격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삶에서 더 얻기 어려운가를 생각할 때 그것을 우선하면 결국은 다른 것까지 얻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우선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말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를 주셨고, 그 밖에 부귀, 영화, 재물 모든 것을 더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더 기쁘시게 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요 조그만 손으로 우리가 긁어모아야 무엇을 얼마나 긁어모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조그만 손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손이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큰 손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도 따라합니다.
“우리 작은 손으로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의 큰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게 합시다.”
우리의 작은 손은 헌신하는 손, 하나님의 큰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게 해야 돼요.
우리 성도님들 내 힘이 제한되어 있고 내 능력이 요것밖에 안되나? 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입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삶을 살지 못할까?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두 줄을 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렇게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소원은 하지만 내 삶은 그것을 이루는 삶과 관계없는 내 욕심과 내 뜻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그 뜻대로 살고자 결심하면 ‘힘들다, 어렵다’의 개념은 없어집니다. 다만 내게 주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하여 내게 주어진 여건과 현 상태 속에서 최선을 다할까 하는 문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의 기준이 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행복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그 삶에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기에 그 믿음이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우리의 삶까지 구원하는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지혜는 오래가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을 구합니다. 생명, 진리와 진실, 사람, 명예, 그리고 물질의 순서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면 살아가는 과정 속에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가장 알맞은 시간에 따라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기쁨 주시도록 마음의 인내와 강함을 구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어떤 순간에도 기뻐할 수 있도록 그것은 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이제까지 살아와서 알 지 않습니까?
결국 행복의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 행복한 것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최선이고 최고라면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지혜와 감격을 맛봐야 합니다.
가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정말 어떤 일을 이렇게 이루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다보면 ‘이것만은 아닌데’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하나님, 어떤 일을 이렇게 이루어주십시오.”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어떤 여건이든 그 여건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래요. 어떤 여건이 주어져도, 어떤 가슴 아픔이 주어져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그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모습을 언제든지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한 번 약속해봅시다.
어떤 여건에도, 어떤 결과에도, 우리가 그 순간 주어진 상태 속에서 최고 최선의 수고와 애씀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자격을 갖출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능력 있는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허락해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격을 갖추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애써주십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볼 때 이런 생각 안 드세요?
‘저 사람은 참 능력은 좋아. 그런데 인격이 그에 따르질 못해.’라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맡길 때는 마음에 부담이 되죠.
‘저 사람은 인격은 참 훌륭해. 그런데 능력이 따라주지 못해.’
이경우도 우리는 어떤 일을 맡기기에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한 점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격을 연마시켜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연마시켜 주셔서 결국 이 두 가지가 합일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연단시켜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려움과 고통이라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는 일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은, 금 보다 은총을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입는 것을 구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초신자에서 헌신자로 변화되기 위하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진정한 축복의 길을 열기 위한 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받아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한 이 세상의 진정한 감격과 은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삶의 구체적인 장면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가, 아니면 필요한 물질이나 인정됨이나 아니면 편안함을 구했던가? 우리는 명확히 생각해 봐야 돼요.
정말 중요한 순간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가, 아니면 물질이나 편안함이나 아니면 인정됨을 구했던가, 나는 내 일생의 평안과 유익을 택하고 어려워지면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도와달라고 간구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시대는 이해타산과 나 하나 지키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는 이기적인 시대로 점차 몰려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고 사랑을 추구하고 살 때 인생의 참된 기쁨이 생깁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교회와 함께 인류애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아니 지금부터라도 시작할 때 과연 시간이 흐르면 누가 더 기쁠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비교하여 자신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 때 정말 내 인생을 후회 없이 기쁘게 마칠 수 있을까? 일정한 시간이 흘러갔을 때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이전을 반추해볼 때 어떤 것이 내게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결정해야 합니다.
삶의 일들이라는 것은 누구도 마음에 원하는 것이 모두 다 이루어지지는 않아요. 그러나 어떤 일이 이루어지건 이루어지지 않음을 벗어나서 그 상태 속에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삶의 기쁨이고 감격이고 보람일까를 생각합니다.
교회가 7주년 정도 지났어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11년 전이겠죠.
그랬더니 교인이 3,200명 정도 모였습니다. 교회가 개척해서 7년 정도 지나니까요. 그 때는 드림실 같은 보조예배실도 없었고요, 본당에서만 예배를 드리니까 예배당이 늘 꽉 찼어요.
1부, 2부, 3부, 4부 이렇게 예배를 드렸는데요, 말하자면 이제는 예배당을 준비하고 새로 지어야 할 때가 된 겁니다. 다른 교회 같으면 오래 걸려서 그렇게 될 텐데 저희 교회는 짧은 기간에 성도들이 많이 모였으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 교회가 참 많은데 수많은 교회 중에서 예배당 한 개를 더 크게 짓는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의미가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예배당 중에 또 하나의 예배당을 짓는 것이 될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라는 전체적인 개념에서 볼 때 무엇이 더 하나님께 유익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던 중에 안식년을 다녀와서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뭔가 더 유익한 일을 한 가지 하자.
한국교회에서 인물을 키우는 일에 그렇게 큰 힘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는 예배당을 짓는 대신에 예배당에 들어갈 비용을 가지고 인물을 키우자. 그래서 그 당시 대강 계산해 보니까 저희가 들어갈 만한 예배당을 하나 지으려면 한 200억 원 정도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앞으로 향후 20여 년 동안 200억 원을 들여서 인재를 양성하자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10년간 지급을 했는데 10년 더 지급하면 아마 200억 원은 넘게 지급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서 20년이 지난다음에 우리가 예배당 건물 하나 짓는 것과 인물을 키운 것 중 어느 것이 더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끼쳤던가? 그것을 우리가 그 때 비교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때 예배당을 지었으면 저희교회 성도들은 지금보다 숫자가 조금 더 많았을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조금 더 편안하게 예배드리고 또 예배드릴 뿐 아니라 교회활동을 조금 더 편안하게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0년이 지난 지금 저희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추구와 목적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음에 대해서 더욱 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예배당 짓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입니다. 우리도 필요할 때는 언제나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내린 결정들이 10년 정도 지난 지금 생각할 때 마음에 참 기쁘고 감사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준비해가고 있는 인류애실천기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호흡이 길다는 것과 두 번째는 한 번 결정한 것은 끝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면 우리는 눈에 띄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가 이제 여러 해 걸쳐서 겨우 인류애실천기금을 100억을 준비했어요. 이 100억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심을 다해서 준비하면 10년, 15년이 더 지나게 되면 정말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지금의 10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의 성도들을 더 축복하시면 100배도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준비한 인류애실천기금이 하나님 앞에 오병이어처럼 사용될 줄로 믿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다윗의 손에 들렸던 물맷돌처럼 이 시대 속에 반드시 꼭 필요한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를 위해서 늘 물맷돌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돼야하고 하나님께 드려질 오병이어를 준비하는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단순한 마음으로 끝나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실제적인 물맷돌과 오병이어를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마음먹고 결심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먹고 결심한 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꿈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꿈을 이루려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은 꿈이 없습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가운데 또 많은 사람은 꿈만 가지고 있지 그것을 실행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꿈을 가지고
있으되 그 꿈을 위해서 준비하고 실천하고 실행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실행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할 수 없습니다. 실행하기에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행이 없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힘이 남아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거룩하게 사용되다 주님이 부르실 때 더 이상 쓸 힘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움직일만한 에너지가 없어서, 이제는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어서 주님 품에 안기는 이와 같은 삶이 돼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삶을 소진하고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어서 주님 앞에 가는 이와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브란스병원 잘 아시죠?
세브란스병원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그리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진행되어왔습니다.
구체적으로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지게 된 것은 미국의 록펠러와 같이 석유사업을 하던 존 세브란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한국의 이런 상황을 듣고 특별히 선교사님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만 불을 쾌척을 했습니다. 지금 만 불은 별것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만 불을 쾌척을 해서 세브란스 근대식 병원을 짓게 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사람이 계속해서 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의 재물을 계속해서 보냈는데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아들 존 세브란스에게 역시 말합니다.
“너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계속해서 세브란스 병원을 도우라.”
물론 유산도 좀 물려주고 했겠지요.
그래서 그 아들이 계속해서 세브란스 병원을 돕습니다. 그것이 120여년정도 된 거죠. 계속해서 세브란스병원을 도와요. 그래서 그 아들 존 세브란스가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받아서 계속 세브란스병원을 돕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 재산을 정리해서 미국 장로교 북장여고 교단에 자기 돈을 맡깁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금으로 삼아서 여기서 매년 나온 수익금을 세브란스 병원에 계속 보내주십시오 하고 교단본부에 부탁을 해요. 그래서 교단본부에서 세브란스 기금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매년 나오는 수익금을 1995년부터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보낸 총액수가 80만 불이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국가 경제가 커져서 80만 불이라는 돈이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은 해는 7,000불을 보냈고 많이 보낸 해는 수만 불을 보냈고 그래서 평균 만 8천불씩을 보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전에 일 년 총 수출한 것이 백만 불, 이백만 불, 이런 시절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는 이게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이 운영되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세브란스병원이 크게 증축하는데 존 세브란스의 3대 손녀딸이 와서 동참했지요. 그래서 그 대를 이어가며 그와 같이 기원하고 봉사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재산을 기금으로 만들어서 계속해서 보내고 있습니다. 요즘까지도 그 돈이 계속 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끝 날까지 그 기금이 존재하는 한은 그 돈이 계속해서 올 겁니다.
지금은 전체규모에 비해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돈이겠지만 그러나 이전에는 굉장한 돈이었지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하고 실행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이와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처음에 그 큰돈을 쾌척할 때 또 끝까지 후손에게도 남겨서 그리고 그 후손 그 아들이 자기의 전 재산을 들여서 기금으로 만들어서 그 이후에도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에게 보다 긴 호흡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예죠.
두 번째,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한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순행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가난한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본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때때로는 이해가 안돼요.
하나님, 왜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삽니까, 왜 어떤 사람은 부하게 삽니까, 하나님은 공평한 자라고 했는데 왜 이 차이를 두시는 겁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큰 시야에서 보면 그것이 그렇게 크지 않을 수가 있겠죠. 또 그 가운데 하나님의 우리
가 알지 못하는 뜻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가슴아파하지만 때로는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기뻐할 때 뛸 듯이 기쁘지만 그 기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의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내가 받아들이는 면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어려운 것 가운데 극복하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불평과 한탄대신 이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한탄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탄할 시간에 일어나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그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이와 같은 사람이 돼야 합니다.
저는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가수를 좋아하는데요, 물론 그 사람이 테너로 아주 미성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맹인이잖아요. 전에는 우리 교회에 어떤 분이 안드레아 보첼리 초청하는 일에 아마 에이전시로 참여하는 일을 했나본데 와서 얘기하는데 굉장히 세계적인 탑 가수니까 이 사람을 초청하는데 이런 여러 가지 세미한 사항들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요. 이런 테너가수들 초청하려면 여러 가지 준비사항이 쉽지 않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쓴 책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제 마음에 들어서 늘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불행에 적응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이 사람은 후천적 시각장애인입니다.
“나는 불행에 적응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누구든지 불행을 당할 때, 갑작스런 어려움과 재난을 당할 때나 재앙을 당할 때, 그 충격에 휘청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충격을 흡수하고 나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우리 몸을 추슬러서 다시 일어날 겁니다.
그래요. 이 보첼리 라는 사람은 “나는 불행에 적응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려움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이것이 왜 나에게 주어졌는가를 생각하면 우리 인생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는 여건과 주어진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좋은 여건과 좋은 결과를 받아야만 행복하다면 이 세상에는 행복하지 못할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행복한 결과를 받은 사람도 얼마든지 그것이 뒤집혀져 언제든지 좋지 않은 여건과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아들일 때가 있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건과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수용하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기 원하고 이루시기 원하는 것을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행복과 기쁨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합시다.
맹종이 아니라 그 가운데 더 나아가 이루어야 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를 생각하며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면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을 생각하며 내게 어려움을 주셨을진대 이 어려움을 통하여 이룰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는 것은 이루어지지도 않고 이루어질 수도 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재앙을 보면 슬기로운 자는 숨어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빳빳이 고개 들고 나가다가 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지혜와 용기는 하나님의 뜻을 순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단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속히 파악하는 영적인 습관이 있어야 돼요.
어떤 일이 있을 때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파악하는 영적인 습관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부족한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어떤 경우도 낙심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고통을 느끼기 전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내 감정과 선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 되면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저는 불행해질 것 같은데요. 사람들의 요구가 다 틀려요. 그러므로 모든 욕구들이 충돌될 것입니다.
우리 잘 알잖아요.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온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면 세상은 평화의 낙원이 되겠다.
그런데 나이 들어 보니까 무슨 생각이 들죠?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면 세상은 충돌로 말미암아 다 망할 거예요.
사람의 욕구가 다르고 사람의 취향이 달라요. 그리고 내 기호와 선호도 시간 지나면 다 달라져요. 그 때는 그렇게 그것을 원했는데 시간 지나니까 그것이 싫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 이루어지면 어떻게 돼요. 이루어지지 않아서 감사한 것도 있잖아요.
결국 우리는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마음이 아파도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 이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시오.”하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왜 이 어려움을 주셨을까하는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를 깊이 있게 들어드리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나에게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림도 필요합니다. 어려움당하면 어려움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이유가 있겠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여 서는 것은 인생의 어리석음이요 반항입니다.
이제 오늘 세 번째 말씀드립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여호와를 경외할 때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탁월함과 겸손함을 동시에 지닌 성도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타고난 탁월함이 있습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탁월함과 겸손함을 동시에 지닌 성도가 됩시다.”
우리 성도들은 탁월하셔야 됩니다. 탁월해지기 위해서 최소한 노력은 하셔야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노력도 성령충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요. 탁월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런데 그 탁월함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탁월함과 동시에 또 한 손에는 겸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되죠.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탁월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은사를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은 주셨어요. 그것을 깨닫고 발견하고 갈고 닦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세상에 나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나의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까?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같이 보일지 몰라도 결국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면모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못하다면 불평하고 낙심하고 한탄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은혜의 면모를 찾아서 누려야 됩니다.
자연을 보면 장대한 수목만이 자연의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땅을 기는 덩굴식물도, 그리고 땅에 깔려져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풀잎들도, 연약한 꽃나무도, 그리고 키 작은 관목들도, 벌레 먹어 썩어져 있는 둥지까지도 자연의 모든 부분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이 어우러져 자연의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자연의 수려함이란 다양함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탁월함을 어떻게 발견하여 그 일을 이루는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일, 나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보람을 느끼며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상대비교가 아니라 절대적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불행을 느끼는 것보다 어떤 일이든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탁월함을 이루게 하셨다면 우리는 동시에 겸손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탁월함과 겸손함을 동시에 이루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자꾸 옳은 것 같고 다른 사람 하는 일이 자꾸 눈에 거슬리면 내 자신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훌륭해 보이고 내 자신이 부족해 보일 때 내가 더 노력해서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본받아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면 정말 겸손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 있는 자들이 가지는 축복의 은혜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자,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잘 되도 교만하지 말고 안 되도 낙심하지 맙시다.
사람은 칭찬과 시련에 날라 갑니다.
칭찬 몇 마디에 날라 가는 사람 되지 말기를 소원합니다.
시련의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 성도들 되길 바랍니다.
칭찬으로 연단 받고 시련으로 연단 받습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넘어서 저 끝에 있는 목표를 향해 나 자신을 돌이키며 언제나 초심의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가고 또 가는 삶의 여정에서 마음 쓰이는 것들을 넘어서서 또 가야 합니다.
더욱이 여호와를 경외함이 그 삶의 근본인 성도가 돼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이유가 여호와를 바라보고 그 뜻을 이루기 원하며 그 뜻대로 살아갈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어느 날 정서적 평안이 오는 때는 언제입니까?
내가 한 결과에 대해서 초조해하지 않고 내가 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으니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니 나는 받아들일 뿐이다 하고 마음먹을 때 우리 마음은 평안해지지 않을까요?
세상에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과정이 옳으면 비교적 결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과정이 옳고 결과에 순순히 승복할만한 마음의 가짐이 되어진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겸손함으로 우리의 삶을 수용적 태도로 품어갈 수 있을 때 결국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자체를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다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예뻐하면 모든 것이 고와보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면 결국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한시도 평안할 날은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 성경에 나온 대로입니다.
밤에 사단이 와서 몰래 가라지를 뿌린다고 했습니다. 좀 편안하게 지내는데 밤에 사단이 와서 그냥 안두고 몰래 가라지를 뿌립니다. 또 그러면 그 가라지가 자라면 그것으로 더 불편해져요. 그럼 그 가라지를 뽑고 그것을 헤쳐 낸다고 또 수고를 해요. 그럼 조금 또 편해져요. 그럼 또 밤에 와서 몰래 가라지를 뿌립니다.
이게 우리 삶 아닙니까?
10년 동안 행복한 사람 있습니까?
10년 동안 아무 일 없이 평안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지나가다보면 또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고, 지나가다보면 또 예기치 않은 몸의 불편, 또 경제적인 문제, 자녀들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하다못해 별의 별 예기치도 못했던 일들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우리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올까요?문제가 없어서 평안이 올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동안 평안할 수 없어요. 우리의 삶에 평안이라는 것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의 긍정적인 면으로 바라보고 의연하게 그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자, 따라서 합시다.
“또 한 번의 어려움일 뿐이구나!”
다시 한 번.
“또 한 번의 어려움일 뿐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해결해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해주시려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참지 못해 괴로워한다면 우리 삶이 어떻게 오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면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사람들에 대해 내 마음에도 기뻐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행복하려면 정말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인간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인류애적 사랑이 아닙니까?
정말 인간들을 싫어하고 인간들을 사랑하지 못하고는 우리는 근본적으로 행복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신 그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심어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축복의 보상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까 정말 너무나 기쁜 소식이 있잖아요.
겸손함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 들으니까 좀 기쁘죠?
하나도 안 기뻐한 것 같은데 그러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리고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재물을 축복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재물의 축복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헌금봉투에 기도제목 적잖아요.
저도 꼭 적거든요. 저는 거기에 꼭 10가지씩 적습니다. 그 10가지 적으려면 얼마나 조그맣게 써야 돼요. 그래서 칸밖에도 쓰고는 하는데 꼭 10가지를 씁니다.
거기 제가 한 가지 쓰는 게 있는데 3,300/30하고 쓰는 곳이 있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죠?
당연히 모르죠. 알 리가 없죠.
그게 뭐냐면 제가 오래전부터 썼는데 제가 참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있어요. 그 기도제목 누가 보냐면 제가 봅니다. 저만 봅니다. 그런데 제가 볼 것을 왜 제가 써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제가 오래전부터 마음에 생각을 하고 우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쓴 건데 십일조 하는 가정이 3,000가정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겁니다. 목사가 이런 기도하면 안 되나요?
우리 성도들이 십일조 하는 가정이 3,000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제가 기도했습니다. 벌써 그것도 오래 전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가 여기 또 불편해서 언젠가 예배당을 짓게 되겠죠? 그런데 요즘 저희 교회에서 십일조 하는 가정이 보통 2,000가정 정도 됩니다. 예배당을 새로 짓는 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할 수 있는 가정이 3,000가정이 안 돼서는 저희 예배당 규모를 운영하거나 유지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적어도 3,000가정정도가 십일조를 해야 규모에 맞는 예배당을 유지하고 모든 것들을 운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3,000가정이 십일조를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300은 뭐냐 하면 100만 원 이상 매월 십일조 하는 가정이 300가정이상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겁니다.
“아멘” 한 사람을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100만 원 이상 십일조 하는 가정이 300가정 이상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아멘”
제가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는 20가정~30가정정도 됐는데 제가 또 설교를 하려면 정확한 근거 자료를 가지고 설교를 해야 되니까 어제 자료를 부탁해서 통계를 받았더니 작년 2009년도 1월~12월까지 100만 원 이상 십일조를 한 가정이 열두 달 통계를 내보니까 월 별 평균 75가정정도 되더라고요. 많은 달은 100가정 넘는 가정도 있고 적은 달은 한 60가정정도 되는 것 더해서 평균적으로 75가정이 됩니다.
한 2,30가정정도 됐을 때 기도로 출발했는데 75가정정도 되었으니까 좀 많겠죠?
앞으로 225가정이 채워져서 그 기도제목이 없어질 줄로 믿습니다.
제가 느끼는 건데요, 기도제목을 쓸 때 시간이 지나면 늘 기도제목에서 빠져요. 이게 뭐죠?
이루어져서 그 기도는 안해야 되는 거예요. 이해가 잘 안되시죠?
그 기도는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어요.
또 다른 제목을 거기다 넣어야 돼요.
제가 거기다 기도하면 꼭 그렇더라고요.
목사가 성도들이 축복받아 하나님 앞에 십일조헌금을 많이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나쁜 것 아니죠?
여러분 제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30은 그러면 뭐냐?
3,330. 30은 매월 십일조를 천만 원 이상씩 하는 사람. 일 년 내내.
그러면 지금은 몇 명이냐?
없습니다.
앞으로는 30명이상 생기게 돼서 그 기도제목 없어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재물의 축복도 받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져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아서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목사가 그렇게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성도들도 그렇게 기도했는데 적어도 그런 사람들이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천명을 돕는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많아요.
물질로도 더 올 수 있고, 또 가르침으로도 더 올 수 있고, 섬김으로도 올 수 있고, 모든 면이 다 있습니다.
그 다음 재물과 영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은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복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들에게 따름을 만인이 보는 사람이 돼야 해요.
가끔 가다 혹시 기회가 있어서 텔레비전을 볼 때 강의를 잘하거나 이런 분들이 있단 말입니다. 굉장히 어떤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데 잘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목사는 꼭 텔레비전을 봐도 그런 생각뿐이 안 나더라고요.
‘저분은 우리 교회 모셔다가 한 번 특강이나 어떤 간증을 하게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 첫째는 “저 분 교회 다니는 분이냐?”하고 물어본다고요. 그런데 또 이렇게 보면 어떤 분은 교회 다니는 분이라고 해요. 그러면 그런 분은 “우리 한 번 모셔오자.”하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교회에서 초청하면 대부분 다 오세요. 대부분 다 오셔서 참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입는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봤을 때 결국 그 뒤에 주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으로서 인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 이 세상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해요.
마지막으로 생명의 능력입니다.
저는 생명의 능력을 이렇게 생각해요.
생명의 능력이 무엇일까?
호흡하는 능력일까요?
저는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호흡을 해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고 있지 못하면 생명의 능력이 힘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호흡이 멈춰져도 우리가 살아온 삶의 과업, 삶의 업적, 삶의 모든 결과물로 끊임없이 끊임없이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유용한 결과를 줄 수 있다면 그의 생명은 살아서 역사하고 있는 거죠. 그의 영향력은 역사하고 있는 거죠.
아까 제가 존 세브란스에 대해서 얘기를 드렸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도, 내가 어떤 일을 해도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여하고 공헌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해요.
저는 우리 성도들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성도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나는 나 하나 유지하기도 힘들고 내 가족 하나 유지하기에도 힘듭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 스스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탓할 필요 없어요. 어떤 순간에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정말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가 물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들의 입술에 회자되며 주의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 되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명을 느끼고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느끼고 우리 마음에 또 출발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리라고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겸손함과 여호와를 경외하심으로 말미암아 재물과 생명과 영광을 얻는 주의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