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楽園)
고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楽園)은 도쿄도 분쿄구(文京区) 고라쿠잇쵸메(後楽一丁目)에 있는 도립정원(都立庭園)으로 에도 초기에 미토 도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의 에도(江戸) 가미야시키(上屋敷)에 조성되었던 축산천수회유식(築山泉水回遊式) 다이묘 정원(大名庭園)이며, 국가 특별사적 및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예전의 고이시카와(小石川)는, 늪과 언덕으로 기복이 심한 지형에 숲이 울창했다고 한다. 간에이(寛永) 연간(1624-1644)이전, 이 지역 주변에는, 혼묘지(本妙寺), 키치죠지(吉祥寺)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 간다가와(神田川)가 흘렀는데, 당시에는 좀 더 얕았고, 선착장이 있었다고 한다. 간다가와(神田川)는 에도시대 서민의 식수원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었는데, 상수원으로 이용되었던 간다쇼스이(神田上水)는 이노가시라 호수(井の頭池)에서 흘러나와 미타카시(三鷹市)에서 젠푸쿠지가와(善福寺川), 묘쇼지가와(妙正寺川)와 합류하여, 고이시카와(小石川)를 지나 스이도바시(水道橋)에 이르러 복개되어, 간다(神田), 니혼바시(日本橋) 방면으로 흘러갔었다.
현재의 도쿄돔, 도쿄돔 시티 어트랙션즈 등이 자리잡고 있는 땅에는 원래 미토번(水戸藩)의 저택(水戸藩邸), 도노야(殿屋)가 세워져 있었고, 고라쿠엔(後楽園)은, 그 번 저택(藩邸)에 딸린 정원이었다. 히타치 미토번(常陸水戸藩) 초대번주(初代藩主)였던 도쿠가와 요리후사(徳川頼房, 1603-1661)가 정원을 꾸리기 좋은 땅을 물색하여 쇼군에게 이 땅을 요청하여 전체 76,699평의 땅을 하사받았는데, 고이시카와(小石川) 일대가 늪과 언덕으로 기복이 심하여, 요리후사(徳川頼房)는 이를 살려 정원을 조성하였다. 1629년, 요리후사(頼房), 가신인 사카이 다다요(酒井忠世, 1572-1636), 도이 도시카츠(土井利勝, 1573-1644)에 의해 정원 조성이 시작되어 그 해 9월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요리후사(頼房)는 이에야스(家康,1543-1616)의 11자로, 1603년 교토(京都) 후시미(伏見)에서 태어나, 7세에 고산케(御三家) 중의 하나인 미토번(水戸藩)을 하사받았다. 고산케(御三家)는 이에야스(家康)의 후손 가문인 오와리(尾張) 도쿠가와 가문(徳川家), 기슈(紀州) 도쿠가와 가문(徳川家) , 미토(水戸) 도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세 가문을 말하는데, 쇼군의 후계자를 정할 수 없을 때에 세 가문 중에서 후계자를 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이들은 일본의 주요 도시인 교토 인근 오와리번(尾張藩), 오늘날의 아이치현(愛知県), 에도(오늘날의 도쿄) 근방의 미토번(水戸藩), 오늘날의 이바라키현(茨城県), 오사카 근방의 기슈번(紀州藩), 오늘날의 와카야마현(和歌山県), 을 영지로 삼아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들의 반란으로부터 막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에도 시대 당시 다이묘는 막부에 대한 충성도, 혹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의 공헌도를 놓고 구분되어, 신판 다이묘(親藩大名),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로 차별하였다. 즉, 1600년 있었던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에 들어온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혈족들이 임명된 신판 다이묘(親藩大名),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주군으로 받들던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에 비해, 직전 1인자였던 히데요시에 충성했던 전력도 있고, 대개 에도에서 떨어진 변방에 영지가 있는 다이묘들이 많았다.
미토번(水戸藩)은 상대적으로 봉토도 작았고, 관직도 낮았으나, 칸에이(寛永) 연간, 산킨코다이(参勤交代)가 실시되면서 번주(藩主)가 에도에 상주하여 쇼군의 감사역(監査役)을 맡으면서 오히려 텐카노후쿠쇼군(天下の副将軍)으로 불릴 정도로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요리후사(頼房)는 1616년까지 스루가(駿河)에서 살다가, 이에야스(家康)가 죽자 3년 후 에도로 올라왔다.
1630년 미토번 저택(水戸藩邸)이 화재로 소실되어 1631년 복구되었는데,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明暦の大火)에 다시 피해를 입으면서, 이후 이 곳을 가미야시키(上屋敷)로 삼았다. 고이시카와(小石川) 가미야시키(上屋敷) 시절 여기서 5대 번주 도쿠가와 무네모토(徳川宗翰, 1728-1766), 6대 번주 도쿠가와 하루모리(徳川治保, 1751-1805)가 태어나기도 했고, 많은 정치가 및 학자가 드나드는 정치 무대였고, 정원은 교류의 중심이었다.
고라쿠엔(後楽園)이 만들어지던 때,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 1604-1651)는 고보리도오토우미노카미 마사카즈(小堀遠江守政一), 즉 고보리엔슈(小堀遠州, 1579-1647)로 하여금, 에도성에 정원과 다실을 짓게 하여 1629년 완성되었는데, 요리후사(頼房)는 에도성(江戸城)에 초대받아 정원을 둘러보면서 훗날 고이시카와 번 저택(小石川藩邸)의 정원 조성에 크게 참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엔슈(遠州)는 조경의 행사봉행(行事奉行)을 맡아 공사를 지휘하는 것 뿐 만 아니라, 핵심 요소인 의장(意匠)을 정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실력있는 정원사를 물색하고, 공사 진척상황까지 확인하였다.
요리후사(頼房)는 인품과 문무에 발군이었던 인재로, 학문을 좋아하여 학자를 초대하여 유교, 신도를 배우거나 예능, 다도 등을 즐겨했다고 하며, 한달에 몇번씩 에도성에 들어가 이에미츠(家光)와 함께 노(能), 사루가쿠(猿楽) 연극을 감상하거나, 다회에 참여하거나 했으며, 그 둘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던 이즈(伊豆)의 정원석 등을 하사받거나, 정원 연못에 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고라쿠엔(後楽園)은 고우오쿠( 高屋) 가문 출신 도쿠다이지 사베에(徳大寺左兵衛)가 정원의 풍경을 조성하고, 나카지마(中島)에 정원석을 세웠다고 한다. 고우오쿠(高屋) 가문은 쇼군가에 종사했던 신분으로 오직 쇼군가에서만 일을 맡길 수 있었다고 하고, 이에미츠(家光)는 고라쿠엔(後楽園) 조경을 사베에(左兵衛)에게 맡겼다. 사베에(左兵衛)는 미야하라 요시테루(宮原義照, 1576-1602)의 사촌으로 교양이 높으면서 우수한 인재를 곁에 둘 수 있는 지위이기도 했으며, 고이시카와(小石川)의 지형을 살려 경관을 구성하였는데, 엔슈(遠州)의 경우와 다르게 현장 근처에 머물며 조경을 지휘하였다.
고심끝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나카지마(中島)의 거석은, 요리후사(頼房)에 의해 도쿠다이지세키(徳大寺石)로 명명되었으며, 현재 원래 위치 그대로 남아 있다. 고라쿠엔(後楽園)은 정원의 주인인 요리후사(頼房)의 심미안 뿐 만 아니라, 사베에(左兵衛)를 비롯한 정원사들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에미츠(家光)가 고라쿠엔(後楽園)을 찾을 때는 배를 타고 오오아라이제키(大洗堰)를 통해 왔는데, 당시 미토번(水戸藩)의 정문은 간다가와(神田川)로 나있어, 옆으로 간다가와(神田川)와 정원 간에 흐르는 수로가 흐르고 있어, 거기에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쇼군은 여기서 배를 갈아타고 정원으로 들어갔는데, 이에미츠(家光)는 정원 조성을 도와줬을 뿐 만 아니라, 이후에도 매사냥 때 몇번이고 고이시카와 번 저택(小石川藩邸)을 들러 정원에서 소요하곤 했다. 정원 곳곳에는 쇼군의 의장과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고, 정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에도 시민의 상수원을 조절하는 조정지 역할도 동시에 맡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661년 요리후사(頼房)가 죽고, 미츠쿠니(光圀, 1628-1701)이 2대 번주가 되어 정원을 상속받았다. 요리후사(頼房)의 3남으로 6세 무렵 에도로 이사와서 58년간 고이시카와 저택(小石川邸)에 살았는데, 요리후사(頼房)는 고산케(御三家) 중에서는 가장 일찍 후사를 얻었기 때문에 장남 요리시게(頼重, 1622-1695)를 친자로 삼지 않고, 나중에 얻은 미츠쿠니를 후사로 삼았으며, 대신 형인 요리시게(頼重)의 자식을 그 후계로 삼았다. 미츠쿠니(光圀)는 유교를 비롯한 학문에 힘써 미토번에는 영고관(影考館)을 비롯, 역학, 천문학, 의학 등 실증적인 학문이 성행했다. 또한 미츠쿠니(光圀)는 부친 대부터 미토 번(水戸藩)에 종사해온 중국 명나라 유신(遺臣) 주순수(朱舜水, 1600-1682)를 고이시카와 저택(小石川邸)으로 종종 초대했다.
미츠쿠니(光圀)는, 선대인 요리후사(頼房)로부터 물려받은 고라쿠엔(後楽園) 내에 조성되어 있는 벤자이텐(弁財天), 오오이가와(大堰川), 가라사키(辛崎) 등, 와카(和歌)에 나오는 긴키 일대의 명소에서 이름을 딴 경물에 더해 문창당(文昌堂), 득인당(得仁堂) 등의 건물을 더 지었다. 문창당(文昌堂)에는 어릴 때 이에미츠(家光)로부터 하사받은 학문의 신 문창성(文昌星)의 상을, 득인당(得仁堂)에는 학문에 뜻을 둔 주인공의 상을 안치한 건물이다. 또, 미츠쿠니(光圀)는 중국의 명소 서호(西湖), 원월교(円月橋)를 따와 정원에 경물을 만들었는데, 고라쿠엔(後楽園) 이름 자체도 정원을 자주 들렀던 유학자 순수(舜水)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선비는 모름지기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겨야 한다'고 하는 군주의 정치에 대한 훈계를 의미하며, 이는 유교에 기반한 미츠쿠니(光圀)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다.
미츠쿠니(光圀)가 상속받았던 1661년부터 1690년 은거할 때까지 30년간 정원이 크게 정비되었고, 미츠쿠니(光圀)는 정원을 꾸미는 데 유교사상을 불어넣어, 가신(家臣) 들과 교양, 친목을 높이기 위한 장소로 정원을 활용하였다. 따라서, 사실상 정원은 개인 소유물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계급의 다양한 사람들이 초대되어 모임을 갖는 장소로 이용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정치 외교의 장으로 사용된 사례는 특기할 만한데, 순수(舜水)를 초대하여 연회를 가졌을 뿐 만 아니라, 달빛이나 화톳불 가에서는 시회가 열려 시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정원은 번사(藩士)들과의 연회에도 사용되어, 같이 배를 저어 연못을 돌기도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이는 막말인, 1800년대까지 계승되었다.
3대 츠나에다(綱条, 1656-1718) 대에 이르러서는 크게 두번의 변화가 찾아왔는데, 1702년에는 쇼군 츠나요시(綱吉, 1646-1709)의 생모 케이쇼우인 미츠코(桂昌院光子, 1627-1705)가 고라쿠엔을 편안히 돌아볼 수 있도록 큰돌과 정원석을 다수 없애는 바람에 정원의 풍광이 크게 바뀌었으며, 1703년에는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정원도 피해를 입어 대대적으로 수리되었다. 이로써 모모야마(桃山) 시대 취향의 힘있는 석조나 기법 등이 사라져버렸다.
1718년 4대 도쿠가와 무네타카(徳川宗尭, 1705-1730)가 14세의 나이로 사누키다카마츠번(讃岐高松藩)을 이어받는 탓에 상당기간 친부 마츠다이라 요리토요(松平頼豊, 1680-1735)의 도움을 받았고, 이에 따라 사누키마츠다이라 가문(讃岐松平家)의 가미야시키(上屋敷)도 고이시카와바시(小石川橋) 건너 미토 저택(水戸邸)에 면해 있었다. 이 무렵, 무네타카(宗尭)는 요리토요(頼豊)의 조언에 따라 정원을 크게 개수했는데, 특히 대천수의 흐름을 바꿔 원래 동쪽에서 물길을 끌어들여 북쪽으로 냈던 수로에, 동남쪽에는 새로 만든 연못과 연결하고 서남쪽으로는 오오이가와(大井川)로 물길이 흘러나가도록 하였는데, 현재 타츠타가와(龍田川) 인근에 해당한다. 연못과 기소타니(木曾谷) 간의 낙차를 이용한 만든 나루토노우즈(鳴門の渦)도 이 즈음 만들어졌다. 또한, 북쪽의 논과 하츠바시(八橋), 소정원(小庭園)은 자취를 감추고, 요리후사(頼房)가 지었던 비이도로차야(びいどろ茶屋)는 칸토쿠테이(涵徳亭)로 새로 지어졌다.
2019년부터 도쿄도 주관으로 2차대전으로 소실된 카라몬(唐門) 등 계속해서 정원을 복원해오고 있으며, 옛 지도와 사진을 근거로 란마(欄間), 츠마카베(妻壁) 6매를 포함 카라몬(唐門)이 복원완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