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대답
욥기 4장 1-21절
우리는 각자의 틀로 사물과 사람을 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결과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안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하고 완벽한 시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크고 지혜로우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욥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논쟁(4-31장)이 시작됩니다. 세 친구들 중에서 엘리바스가 할 수 있습니다. 4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3장의 욥의 발언 중 엘리바스로 하여금 침묵을 깨도록 만든 것이 무엇이냐를 가장 먼저 말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두 친구들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점에서 엘리바스가 세 친구들의 대표격이라 파악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지키고 변호하고 싶은 지혜(신학적 입장)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난의 원인에 대한 엘리바스의 추론(1-6)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삶이 여러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이나 삶을 쉽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과 지적이 답이 아니라, 고난 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답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런 평가와 판단이야말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1-6)
욥의 말이 끝나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처음으로 욥의 말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4-5장에 언급된 엘리바스의 말속에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전개될 모든 종류의 주제, 논쟁이 들어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첫 발언인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2)을 욥을 꾸짖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욥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한 말을 하면 과연 자네가 견딜 수 있을까?’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욥의 지나온 삶에 대해 칭찬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방식(3-4)은 한편으로는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대화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법이기도 합니다.
3-6절에서 엘리바스가 사용하는 언어는 철저하게 규범적 지혜의 언어입니다. 연약한 자들(“손이 늘어진 자”), “넘어지는 자”와 “무릎이 약한 자”(4)는 규범적 지혜에서 ‘지혜가 부족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훈계”가 필요하고 “강하게” 해 줄 지혜자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욥이 훌륭히 해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따르는 지혜자/의인의 특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리고 이와 동의어로서 “온전한 길”을 “소망”하는 것입니다(6). 엘리바스가 평가하는 욥은 ‘규범적 지혜의 화신’이며, 이는 1-2장에서 언급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8; 2:3)라는 평가와 일치합니다. 5절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와 “이 일이 네게 닥치매”라는 ‘비인칭 주어’라 할 수 있습니다. 문맥상 욥에게 닥친 고난을 의미하고, 앞 문장의 표현으로는 ‘손이 늘어짐’, ‘넘어짐’, ‘무릎이 약해짐’을 의미합니다.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 이러한 일은 지혜가 없는 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은 악인에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근간: 인과응보(7-1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와 선택에 대한 결과를 보상하거나 징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잉과응보는 일반적으로 행위와 결과 사이의 상호작용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 보상과 벌을 포함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잉과응보와는 별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동시에, 우리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7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7-11)
하나님의 세상 통치 원리는 신상필벌, 인과응보라는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욥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한마디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욥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정직”)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도덕적 공종 통치 원리를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7).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8절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여기서, 죄 없이 망한 자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산 사람(“정직한 자”)에게는 끊어짐이 없다는 엘리바스의 말(7)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이 나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이 나온다는 극히 ‘당연한’ 원리(규범)는 성경 말씀(특수 계시)과 자연 현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일반 계시)을 통해 지극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잠언 22:8; 호세아 10:12; 시편 126:5-6 등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 말씀들로 우리는 삶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죄없이 망한 자는 없다는 엘리바스의 단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경우를 직접 관찰해서 도출된 결론이 아닙니다. ‘이론적인 추론’일 따름입니다. ‘나쁜 것을 뿌리면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말을 뒤집어, ‘나쁜 결과를 맺은 것을 보니 나쁜 것을 심은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결과론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징벌이 찾아온다’는 말과 ‘고난이 오는 사람은 모두 악인이다’라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둘째, 욥이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한다는 엘리바스의 추론은 욥이 죄를 짓는 장면을 목격한 뒤에 나온 분석이 아닙니다. 1-2장을 읽은 욥기의 독자는 욥에게 닥친 고난이 욥의 죄 때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욥뿐만 아니라 엘리바스도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욥기는 엘리바스의 ‘신학적 추론’이 천상의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설사 욥의 잘못을 지적하는 엘리바스의 말이 욥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를 바로잡기 위해 건네는 조언일지라도, 독자는 엘리바스의 말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말’일 뿐입니다. 진실이 아닌 말은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 ‘넘어짐’(4)과 ‘끊어짐’(7)이 죄인과 악인,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아둔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규범적 지혜의 일반적 진술에 대해 반성적 지혜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100퍼센트 예외 없이 항상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고, 욥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 원리는 많은 경우에 해당되는 근본적인 원리이긴 하지만, 그 원리 하나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규범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반면에, 전도서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반성적 지혜를 보여줍니다. 전도서 4:10의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와 전도서 4:12의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은, 넘어짐과 끊어짐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서 악인/무지자에게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므로 거기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반성적) 지혜라는 뜻입니다.
계시와 지혜의 내용(12-21)
성도들에게도 인과응보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 항상 인과법칙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선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오로지 형벌만 받는다면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는 이러한 법칙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17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21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12-21)
욥기 4장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진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해석가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진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8절의 “내가 보건대”라는 표현과 13절의 “환상”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습니다. 엘리바스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진술하고 있다거나, ‘직통 계시’의 신비적 체험을 기반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은 특정한 표현들에 집착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보건대”라는 문장의 목적절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8)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이 원리가 엘리바스 개인에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주장입니까? 동일한 주장을 빌닷도 하고 소발도 합니다. 잠언과 신명기 등의 규범적 지혜도 같은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의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 눈앞을 지나가는 특이하고 신비한 체험이 엘리바스에게 알려준 내용의 결론은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21)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는 죽음과 멸망을 초래한다는 ‘규범’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나도 특이하고 신비할 것 없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환상”은 계시의 정당한 한 방법입니다. 그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목소리의 내용이 17-21절입니다. 그 핵심은 허무하고 연약한 인간 자체가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불결한 존재라는 것입니다(17). 그래서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않고 천사라도 미련하다고 하신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욥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1:8). 그는 지금 하나님의 평가를 부정하는 거짓 증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부각하였지만, 인간을 지나치게 격하시킴으로써 도리어 하나님의 명예와 성품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믿지 않는 분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21절은 인간에 대한 엘리바스의 경멸의 시각을 계속 보여줍니다. 천사도 미련하다고 책망하시는 하나님께서 흙 집(진토에 사는 육신)에 사는 티끌로 지어진 존재이며, 하루살이 앞에서 부셔 뜨려지는 자를 믿어주시겠느냐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를 부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3장에서의 욥의 진술이 선악 이분법을 기반으로 한 인과응보의 원리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바로잡으려는 것이 엘리바스의 첫 번째 진술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삶의 원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이 원리가 늘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잉과 응보의 법칙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판단과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평가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