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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누가 진정한 역사의 주인인가?/단 4:10-18
우리는 다니엘서를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공(승리)할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앙의 지조를 지킬 것인가?를 1, 2, 3장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4장에서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역사의 주인이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이국만리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도전과 핍박 속에서도 성공할 수 있고, 신앙의 절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의 가장 중요한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학입니다. 대표적인 묵시문학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미티안과 네로가 역사의 주인 같이 보여지는 시대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에 의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에게 찢기기도 했고, 불에 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한번쯤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라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사도 요한은 환상을 보고 기록하게 되는데, 그 환상의 주요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기독교인이 당하는 핍박과 고통은 하나님이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아니 그 엄청난 박해들까지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심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이 하셨고, 역사의 마지막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작과 마지막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대표적 묵시문학서인 다니엘서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은 망했습니다. 성전은 허물어졌습니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생존이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다니엘서는 그것에 답을 주는데, 그 답 가운데 하나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느부갓네살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국 만리에서도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장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여섯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3절 느부갓네살의 찬양, 4-9절 다니엘이 등장하게 된 동기, 10-18절 느부갓네살이 꾼 꿈의 내용, 19-27절은 그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 28-33절 다니엘의 해석대로 그 꿈이 이루어지는 모습, 34-37절 느부갓네살의 찬양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결론이 무엇일까요?
결론은 느부갓네살의 찬양에 있습니다. 4장은 느부갓네살의 찬양에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런 구조를 문법에서 '수미쌍관형식'의 구조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 그분의 통치를 반복적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누구입니까?
그는 무력으로 세계를 통일한 왕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권세가 느부갓네살에게 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왕중 왕입니다.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통치자요, 영원한 권세자이시다.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하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4장 마지막 절, 37절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마지막 고백이 결론입니다.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교만하게 행하는 자가 느부갓네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세상의 주인처럼 생각했던 것이 교만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서 그리고 그 꿈의 해석과 그 꿈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자 왕이 주인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이다. 이 세상은 그분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렇게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4장 전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표현입니다. 2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17절 "지극히 높으신 이가…", 24절 "지극히 높으신 이가…", 25절 "지극히 높으신 이가…", 32절 "지극히 높으신 이…", 34절 "지극히 높으신 이…". 이 표현이 모두 여섯 번 나왔습니다.
이 땅에 왕권이 가장 높지 않습니다. 왕권보다도 더 높고 위대한 권세가 있는데, 그것은 하늘의 권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요, 다스리심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함이라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슬픔까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시대 역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의심받는 시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인간들이 이룩한 문명을 보십시오. 인간들이 만든 과학문명, 생명공학, 유전공학, 우주개발, 정보통신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마치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며 인간은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을 쌓는 일입니다.
인간이 과학적으로 할 수 있다고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낙태를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함부로 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 이제는 복제인간까지도 만들 수 있는 수준에까지 과학이 발전했습니다 - 마구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후에 초래될 엄청난 혼란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70 - 80년대 우리는 산업화, 공업화를 통해서 무분별하게 개발했습니다. 산도 깎아 버리고, 강도 땜으로 막기도 했고, 구불구불하던 곳을 똑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든 중장비로 가능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자는 소리가 더 높습니다. 인간이 기술적으로 할 수 있다고 다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할 수 있다고 다해서는 안됩니다.
느부갓네살이 꾼 꿈과 다니엘의 해석, 그리고 그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교만한 느부갓네살"을 길들이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어떻게 교만했느냐?
그것은 3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이 왕궁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자기 왕국을 보았습니다. 세계 각국을 정복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거기에 다 갖다 놓았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0절입니다.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했습니다. 이 한 절에서 '나'라는 말이 네 번 등장합니다. 자화자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신격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끌고 와서 튼튼한 성을 쌓았습니다. 수문을 만들어 유프라데스 강물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모는 것을 자기가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기에게 권력이 있다고 자기 맘대로 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돈이 있다고 자기 맘대로 써서되겠습니까? 어떤 분은 그럽니다. "내 돈 갖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 내 것이라고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내 것이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이 나라가 왕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통치자가 있는데, 그분을 인정할 때, 나라가 튼튼해진다는 말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내 맘대로 다 했다. 이것은 내 능력이고 내 권세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31-32절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누구에게 나라를 맡기고 안 맡기고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이다 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재능을 주시고, 재물을 주시고, 권세를 주시고 하는 모든 것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는 줄 믿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주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 형들을 만났을 때,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5-8).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꾸미시고 계획하신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이제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그 동안은 늙으신 아버지를 생각해서 용서하는 척했지만, 이제는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보복하지 않겠느냐'고 걱정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창세기 50장 19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여러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정죄하고, 스스로 잘 낫다고 자랑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척하지만, 실제적인 삶 속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욥이 고난을 만났을 때 고백한 말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에 모자를 꼭 쓰고 다닙니다. 모자가 없는 사람은 수건이라도 써야 회당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자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머리 위에 항상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머리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 나보다 높으신 분이 있다. 나보다 위에 있는 분이 있다.' 그런 의식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항상 나보다 높고 위대하신 분을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나보다 높으신 분이 나를 보고 있다. 그분이 나를 장차 심판(판단)하실 분이시다. 나보다 높으신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느부갓네살 왕의 꿈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꿈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길조고 하나는 흉조였습니다. 그는 땅 중앙에 서 있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계속 자라서 땅 끝에서 보였습니다. 그 잎사귀는 아름다웠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이 먹을만했습니다. 거기에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 쉬었습니다.
또 하나의 꿈은 한 순찰자에게서 시작됩니다. 그 순찰자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가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나뭇잎을 떨어버리고, 열매를 헤칩니다. 거기서 짐승들을 쫓아버립니다.
이 나무는 느부갓네살 자신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는 세계를 정복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영향력, 그의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사람들에게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권세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될 것이다"(25절)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계를 다스리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착각이 교정되는 순간 그의 나라가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꿈을 해석하면서 왕에 대한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27절입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이 충고는 이국만리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을 핍박하던 권력자들에게 하고자 하는 충고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죄를 사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던 일을 그만 두라"는 말입니다. 하던 일을 그만 두라. 즉 악한 행실을 그만두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만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까?
포기해야할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어떤 일을 벌렸다면, 그것은 그만두어야할 일입니다.
워치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긴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에 지루하고 따분하니 사람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워치만에게 "지루한데 함께 합시다" 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워치만은 "나는 손이 없어서 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니 선생님 농담도 잘 하시네요. 그 손은 무슨 손입니까? 손이 있으면서 무슨 손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워치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손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쓸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기뻐하지 않을 일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재능, 능력, 권세, 재물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출처 한서노회(http://cafe.daum.net/har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