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명(종택명) |
영천이씨 간재문중(永川李氏 艮齋門中) |
대표자(주손) |
이동춘(李東春) |
종택 및 주요건물 |
건물명 |
간재종택(艮齋宗宅), 청천와(聽天窩) |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외내 |
건립연도 |
청천와: 1664년 |
기타사항 |
영천이씨간재공파종중소장문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1호(2006.06.29.) |
문중 홈페이지 |
간재종택(艮齋宗宅), 청천와(聽天窩) |
주요인물 |
이덕홍(李德弘): 1541∼1596.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예안(禮安) 출생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등용할 때 4위로 뽑혀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이 되고,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를 거쳐 영춘현감(永春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했다. 특히 주역에 밝았고, 『중용』·『심경(心經)』·『고문전후집(古文前後集)』·『가례(家禮)』등을 주석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영주의 오계서원(汚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주역질의(周易質疑)』·『사서질의(四書質疑)』·『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간재집(艮齋集)』 등이 있다.
이시(李蒔): 1569∼1636. 자는 중립(中立), 호는 선오당(善迂堂),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안동 출신으로 덕홍(德弘)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서 13, 14세에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이 때 아버지의 도(道)를 굽혀서까지 명예를 따르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할 것을 단념하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글 중, 사람이 순풍에 돛을 단다면 험한 길도 쉽게 갈 수 있지만, 출발을 잘못하여 폭풍우를 만나면 배는 뒤집히고 사공은 익사한다는 국문시조 「조주후풍가(操舟候風歌)」가 유명하다. 만년에 오천(迂川)의 하류에 오계서당(迂溪書堂)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학자들을 길러내었다. 그의 학행을 흠모하여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는데, 그것을 기록한 『오계서당동화록(迂溪書堂同話錄)』이 있다. 친상 중 집상하느라고 병을 얻어 죽었다. 뒤에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에 추증되고, 오계서원(迂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선오당일고(善迂堂逸稿)』 2권이 있다.
이영전(李榮全): 1601~1678. 자는 원길(元吉), 호는 청천와(聽天窩),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아버지는 사복시정(司僕侍正) 시(蒔)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진사 종도(宗道)의 딸이다. 노년에 수직(壽職)이 하사되었고, 죽은 후 다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으로 증직되었다. 그는 평생을 고향에서 은둔하면서 아버지 시(蒔)의 뜻을 받들어 벼슬의 길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성리학에서 영남학파계 특히 이황(李滉)·이덕홍(李德弘)으로 내려오는 학풍을 잇고, 또 청천와(聽天窩)라는 암자를 지어 그 곳에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는 홍여하(洪汝河)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학자들이 있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항상 여유를 가지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후학 양성과 지방의 미풍양속을 위해 그의 모든 정열을 다 받쳤다. 그리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청절공(淸節公)이라고 불러 사시(私諡 : 국가에서 내리지 않고 사적으로 만든 시호)가 되다시피하였다. 저서로는 『청천와집(聽天窩集)』 1책이 있다.
이강(李茳): 1573~1623. 자는 형보(馨甫). 1603년(선조 36)에 진사가 되었고 1615년(광해군 7)에 찰방으로서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1616년 대교·봉교·부교리 등을 거쳐, 1617년에 사서·정언이 되었다. 이어 수찬이 되어서는 이이첨(李爾瞻)·허균(許筠)·김개(金闓) 등과 어울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주장에 방조하는 구실을 하였다. 1616년에 허균의 역모에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이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인조 즉위 뒤에는 처형되었다. 그는 당시에 드물게 보는 명경현사(明經賢士)로서 재주가 있었다는 평을 들었다.
이점(李蒧): 1579~1627. 자는 사성(師聖), 호는 천유자(天遊子), 본관(本貫)은 영천(永川)이다. 1609년에 생원시·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관직(官職)은 한림(翰林)이다. 1616년(광해군 8),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5에 합격하였다. 부(父)는 이덕홍(李德弘), 조부(祖父)는 이충량(李忠樑), 증조부(曾祖父)는 이현우(李賢佑), 형(兄)은 이입립, 제(弟)는 이모(李慕)이다.
이영전(李榮全): 1601~1678. 자는 원길(元吉), 호는 청천와(聽天窩), 본관(本貫)은 영천(永川)이다. 아버지는 사복시정(司僕侍正) 시(蒔)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진사 종도(宗道)의 딸이다. 노년에 수직(壽職)이 하사되었고, 죽은 후 다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으로 증직되었다. 그는 평생을 고향에서 은둔하면서 아버지 시(蒔)의 뜻을 받들어 벼슬의 길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성리학에서 영남학파계 특히 이황(李滉)·이덕홍(李德弘)으로 내려오는 학풍을 잇고, 또 청천와(聽天窩)라는 암자를 지어 그 곳에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청천와집(聽天窩集)』이 있다.
이세강(李世鋼): 1846~1917. 자는 치련(穉鍊), 호 침산(枕山), 본관(本貫)은 영천(永川)이다. 인규(寅奎)의 아들이며, 류주목(柳疇睦), 이휘재(李彙載)의 문인이다. 이만도(李晩燾) 등 당시 영남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경술합방 때 왜적이 자신들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하면서 돈을 주자 거절하였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늘 애송하여 ‘주서옹(朱書翁)’이란 별호를 얻었다. 저서는 『침산집(枕山集)』이 있다. |
문중소개 |
‘외내(汚川,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에 있는 마을이름)’의 ‘외(汚)’는 ‘우뚝한’· ‘두드러진’이란 뜻이고, ‘내(川)’는 ‘시내’란 뜻이다. 원당천(元塘川, 토일천:吐日川)과 구천(龜川)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외내는 영천이씨 습독공파(永川李氏 習讀公派, 대부분 간재 후손임)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습독공(習讀公) 현우(賢佑)는 강호문학의 창도자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동생으로 부내(汾川)에서 내살미(川沙)로 분가하였고, 아들인 흥해교수(興海敎授) 충량(忠樑)이 1520년 경에 다시 이 마을로 옮겨 산 이래 그의 자손들이 약 480년 간 代를 이어 살아 왔다. 외내는 풍수지리학상으로 금계(金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예로부터 ‘영천(榮川, 현 영주) 제일향(第一鄕)’이라 불려 왔다.
이충량의 아들인 곤재(坤齋) 이명홍(李命弘)·노운(蘆雲) 이복홍(李福弘)·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의 3형제가 퇴계 이황에게 급문하여 학업을 닦았고, 이덕홍의 아들인 선오당(善汚堂) 이시(李蒔)·금학당(琴鶴堂) 이립(李苙)·천유자(天遊子) 이잠(李蒧)·소백(小白) 이모(李慕)의 4형제가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급문하여 학업을 닦았다. 특히 간재 이덕홍은 퇴계 이황이 이름·字·號 3가지를 모두 지어주신 유일한 제자로 평소 독실히 학문을 닦아 스승으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고, 임종시엔 命으로 서적을 관리하였고, 많은 성리학적 저술을 남겨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임란시에 거북선의 원형설계도로 추측되는 『귀갑선도(龜甲船圖)』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오당 이시는 오계서당에서 29회의 강(講)을 열고 많은 제자(118명)를 가르쳐서, 스승인 정술(鄭逑)로부터 ‘대(代)를 이은 가학(家學)’이라는 칭찬을 들었고, 시조로 「조주후풍가(操舟候風歌)」 3장과 「오로가(烏鷺歌)」 1장을 남겼다. 그 뒤를 이어 청천와(聽天窩) 이영전(李榮全)·이경태(李慶泰)·지암(芝巖) 이상규(李祥奎)·송라(松羅) 이긍연(李兢淵)·침산(枕山) 이세강(李世鋼)·해악(海嶽) 이유곤(李裕昆)·내산(奈山) 이운연(李運淵)·서정(西汀) 이기연(李起淵)·심소(心巢) 이철연(李喆淵)·인당(忍堂) 이희욱(李羲頊)·고선(古善) 이희익(李羲益)·산운(山雲) 이희복(李羲復)·심재(心齋) 이유춘(李有春) 등 많은 문인·학자를 배출했다.
또 금학당(琴鶴堂) 이립(李苙)·이강(李茳)·천유자(天遊子) 이점(李蒧)·소백(小白) 이모(李慕)·남산(南山) 이영구(李榮久)·우송(友松) 이장태(李長泰) 등 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특히 간재 이덕홍의 세 아들인 립(苙)·강(茳)·모(慕)가 광해군 7년(1615)에 실시한 식년시에서 동시에 급제하여 조선조 과거역사상 ‘3형제 동방급제’라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겼다.
외내에는 간재선생 종택(당호는 선오당, 건립연대 미상)과 사당, 청천와(聽天窩, 1664년 이영전 건립)·읍춘정(揖春亭, 1901년 이세갑(李世鉀) 건립)·침산정(沈山亭, 1926년 이운연(李運淵) 등 건립) 등의 정자가 남아 있고, 녹전면 원천리 우곡(愚谷)에는 간재선생 재사인 영모암(永慕庵, 1883년 중건)이, 매정리(梅井里)에는 간재선생에 처음 발견한 신암폭포(新巖瀑布)가 있다. 가까이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부곡(釜谷)에는 간재 이덕홍과 선오당 이시를 배향한 오계서원(汚溪書院, 1691년 오계서당에서 승격)과 군자정(君子亭, 1570년 이덕홍 건립, 경북무형문화재 제276호)이, 장수면 녹동(鹿洞)에는 간재선생강생유지비(艮齋先生降生遺址碑, 1933년 세움)가 있다. 또 도산서원 옥진각에는 퇴계의 명으로 간재 이덕홍이 제작한 혼천의(渾天儀, 혼상)이 보관되어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