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인 조광진의 ‘부벽루 浮碧樓’
석야 신 웅 순
눌인 조광진의 평양 ‘부벽루’ 현판
조광진(1772-1840)은 자가 정보, 평양에서 살았다. 말이 어눌하여 눌인이라 자호했다. 부벽루 연광정의 현판을 쓴 당대의 명필이다.
이항견문록은 조광진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집이 가난하여 사방을 떠돌며 배웠는데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를 익혔고 만년에는 크 게 깨달아 깊이 안진경 필법의 정수를 체득하였다.전서와 예서에 금석기가 있었으며 옛 글씨를 임 모하는 데에 더욱 특장이 있었다. 행서와 초서는 유석암을 닮았고 지예는 장수옥에게 비길만하였 다. 그 글씨가 쇠를 굽히고 금을 녹인 듯하여 세상 사람의 글씨 같이가 않아, 천전운뢰 天篆雲雷 도 이보다 나을 수 없었다.(유재건,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이항견문록,568쪽)
쾌재정은 평양 대동강변의 대동관변 안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다. 그 현판은 그의 예서 글씨인데 중국 사신이 그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동국에 이런 대가가 있었던가?” 하고 한번 만나기를 요청했다. 어떤 이가 “그이 집은 천리 밖에 있고 그가 이미 죽었다”고 핑계를 대자 사신은 몹시 애석해하며 탁본을 100부나 해갔다고 한다.
어느날 평양 감사 의석 김응근이 눌인의 큰 글씨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에 연관정의 정자 크기만큼, 두어 묶음 종이를 이어 붙였는데 그 정자의 넓이가 삼십칸이나 되었다. 큰 붓을 만드는데 절굿공이로 관을 삼아 그것을 먹에 적시니 굵기가 소의 허리만 하였다. 눌인이 두루마기를 벗고 굵은 줄을 가져다 붓을 어깨 위에 메었다. 성큼성큼 발을 옮기며 붓을 놀리는 것이 마치 개미가 쟁반 위를 다니는 것 같았다. ‘익翼’ 자 한 자를 쓰고 ‘전戰’자를 썼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 난간의 목책 위에 있었을 때는 바로 눈 앞에서 보고 있어 잘 쓰고 못 쓴 것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오십여 걸음 밖에 걸어놓자 비로소 그 신묘한 결구에 놀랐다. 김판서는 “전자는 짧고 익자는 길어 성기고 조밀함이 서로 균일하게 되었으니 이는 손재주와 눈썰미로만 이뤄진 게 아니다” 라고 하여 크게 상을 내렸다.(이향견문록,569,7쪽)
추사는 평양에 와서 그 곳의 유명한 서예가 눌인 조광진을 만났다. 이후 그들은 글씨에 대해 의견도 나누고 마음도 서로 나누면서 친밀하게 지냈다.
1838년 조광진의 편지에 대한 추사의 답장이다. 당시 추사는 부친상을 당했고 추사 자신도 건강이 좋지 못했다. 추사는 편지를 통해 마음을 토로하고 글씨도 스스럼 없이 나누었다. 둘 사이의 친밀도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올립니다. 작년 섣달에 보내신 편지는 그대로 새해의 위문으로 여겨집니다. 이제 새해의 건강이 더욱 좋으실 듯 멀리서 축하드립니다. 죄인은 새해를 맞이하여 슬픈 심정은 곧 살고싶지 않은 생 각뿐 입니다. 근래에 감기에 걸려서 팔을 놀리기가 매우 어려워져서 스스로 딱합니다. 새해들어 또 석암(石庵)체의 글씨와 한대의 예서체를 몇장이나 쓰셨는지요? 보낸 글씨를 보니, 더욱 힘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바라건대 새해들어 쓰신 것 몇장을 방군 편에 보내주십시오. 봄날이 화창하거든 곧 서울에 올라오도록 하십시오. 기대하겠습니다. 팔이 매우 아파서 이만 줄입니다. 무 술(1838) 정월 칠일 죄인 정희올림. 조눌인(曹訥人) 앞. 장동에서 답장 올림.(문화관광부 이뮤지엄)
이번엔 조광진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소개한다.『완당선생전집』은 조광진에게 보낸 편지가 8통이나 실려있다고 한다.
10월이 하마 지나고 이 해도 역시 그럭저럭 다 되어가니 금석의 언약은 이제 이미 변해버렸 소.……
바로 쪽지를 본 바 임서한 글자가 비록 많지는 않으나 평정하고 타당하여 차근차근 신묘의 경 지로 들어가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로는 추측할 바가 아니요, 오직 그대와 내가 알 뿐인데, 한스러 운 것은 자리를 마주하여 등불을 돋우고 한바탕 극론을 벌링 수가 없으니 말이외다.
추신: 필체가 이와 같이 괴괴하여 남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우니 곧 찢어 없애는 게 좋을 거요. …… (조광진에게 제 1 신)
추사는 눌인의 글씨를 “창아기발 蒼雅奇拔하고 괴위정특 怪僞挺特하여 압록강 이동에 일찍이 이만한 명필이 없었다.”고 높이 평가하고 칭찬 또한 아끼지 않았다. 칭찬에 인색했고 오만했던 추사이고 보면 당시 눌인의 글씨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둘의 만남은 그들의 글씨를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놓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홍도의 '부벽루 연회도'
주간 한국문학신문,2016.1.27.
첫댓글 감사하는마음 전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