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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의 追憶 #165. 동방교와 경화록 자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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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좁은길'이라고 부른다. 세칭 동방교를 말한다. 분명 다른 말인데 또한 같은 말이다. '좁은길'이란 사실 성경적 용어의 짝퉁이다. 성경에서는 '좁은길'이란 말은 없고 '좁은 문'이라는 어휘가 등장한다. 신약성경 개정 한글판에 아래의 두 구절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눅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아마도 여기에서 따와서 짝퉁으로 '좁은길'이라는 용어를 차용하지 않았을까 여겨지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좁은길, 즉 세칭 동방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었던 서울 용산의 수원정에 출입하려면 허리를 굽혀야만 지나다닐 수 있는, 대문에 붙어 있는 쪽문 하나가 있었다. 그시절 대부분 단독 주택의 대문 구조였는데 반드시 그 쪽문으로만 출입하게 되어 있었다. 대문을 활짝 열고 출입하는 자는 노광공, 노영구가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만 구원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모두들 그렇게 우기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다.
동방교의 본산이었던 서울 용산의 수원정을 잘 묘사한 글 한편이 본 카페에 올라와 있어 소개한다. 과거의 어느 열혈 신도가 남긴 글이다.
[내 영혼에 햇빛비치니①/동방교에 입교하다 - 수원정에서의 첫날]을 참고하면 좋을것 같다.
이 수원정을 외부적으로는 '제일교회'라고 불렀다.
자칭 좁은길, 세칭 동방교의 경전으로 알려진 동방교의 경화록은 교주 노광공(盧光公, 1914--1967)에 대한 신격화된 일대기를 담고 있다. 교주 노광공은 갑인년인 1914년 (陰)1월 13일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에서 출생했다. (이단의 추억 #101, 유월절과 평양 상수리 1번지 참조)
경력도 다양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경찰의 고등계 형사로서 친일행적을 남겼고, 해방 후에는 서울, 경북 안동등에서 교직에 근무했다. 6·25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도관 집회에서 북을 치며 박태선을 추종하다가, 1955년 대구 신천동에 동방교회를 설립했다. (본카페, 좁은길=세칭 동방교의 노광공, 그는 누구인가? 참조)
노광공은 본관이 경기도 파주의 교하(交河) 노(盧)씨인데 세칭 동방교에 입교한 신도들은 모두 노광공을 '이래 조부님' 또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니 전부 손자가 되는 것이고 교하노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니 노가계(盧가系)라고 억지논리를 갖다댄다. 그러므로 노광공과 그의 조상들을 받들기 위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지침을 만들어 암송하게 하고 있다.
노가계의 삼대지침”(盧家系 三大指針)
1. 우리들은 노가계의 자손으로서 가운을 영원히 창성케 하자.
2. 우리들은 어떠한 난관과 불만에도 노가계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말자.
3. 우리들은 낙원에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과 교하노씨에게 순교로서 영광만을 돌리자. 아멘 할렐루야~
세칭 동방교에서는 이 지침을 신도들로 하여금 음식을 거나하게 차려놓고 시행하는 야밤의 차례제(盧씨 가문에 드리는 제사)등에서 반복적으로 암송하게 했다. (이단의 추억 #18, 자정에 올리는 제사 참조)
하지만 노광공은 1967년 (陰)6월 19일 당뇨합병증으로 동방교의 대기처인 서울 상도동의 '큰집'에서 사망했으며, 경기도 부천시 소래면 대야리 71번지에 묻혔다.(이단의 추억 #28, 팔십대의 노인이 된 삼손목사 참조)
노광공이 사망한 후 좀 복잡한 과정을 거쳐(異端의 追憶 #117, 동방교의 사람들(Ⅰ) - (4/6) 참조) 그의 둘째 아들인 노영구가 동방교를 이끌었는데 좁은길 동방교의 열혈 신도로 말 잘듣는 꼭두각시 총회장 이일우(니고데모)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놓고 교주 행세를 하고 있었다. (異端의 追憶 #117, 동방교의 사람들 참조)
노영구는 노광공의 차남으로 교주 신분을 세습(世襲),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겨우 27세의 어줍잖은 청년으로 세칭 동방교의 2대 교주가 되어 '성자 하나님' '성신님' '아브넬 조부님' '아브넬 할아버지'라고 불렸는데 신사생 뱀띠이니 1941년생이 된다.
교주 자리를 이어받은 노광공의 차남 2대 교주 노영구는 동방교가 위장 개업했다고 할 수 있는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를 이끌었으나 1970년대 중반 숨어 지내던 동거녀와 결합 이후 수사당국의 추적을 피해 처가의 도움으로 미국땅에서 숨어 지내고 있으면서 국내의 동방교 조직을 배후에서 철저히 조종하고 있었다. (異端의 追憶 #124, ‘부남 노영구’ 에 대한 小考 참조)
파독간호원 사건을 일으킨바 있는 동방교는 그 철저하게 세뇌된 잔존인원이 남아 있는 독일을 중심으로 세칭 동방교가 재건을 시도하며 국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고도 하는데, 동방교에 세뇌되었던 파독 간호원들과 국내의 열혈 남자 신도들을 서로 나이 불문 결혼시켜 독일로 보내 체재경비를 부담시키고 신학공부를 했다는 자들이 돌아와 국내의 동방교 조직안에서 우쭐대며 분란을 일으켰고,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최근 동방교 일부 세력의 활동이 온라인상에서 감지되면서 이들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이단의 추억 #53, 파독 간호원 사건 참조)
자칭 좁은길, 세칭 동방교의 노광공에 대한 신격화는 거침이 없다. 동방교의 교리와 행동지침은 노광공에 대한 신격화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방교는 '창조주요 재림주요 심판주'인 노광공을 '여호와 이래(二來)'라고 주장한다. 예수 다음으로 두번째 왔다는 뜻이다.
또한 노광공과 그의 두 아들 노영도와 노영구, 세 사람을 삼위일체로 믿고 섬긴다. 노광공은 성부이고, 노영도는 성자이며, 노영구는 성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노광공을 '이래 조부님', 노영도를 '아바 조부님', 노영구를 "아브넬 조부님'이라고 불렀다.(이단의 추억#2, 세칭 동방교의 주요 용어설명 참조)
자칭 좁은길, 세칭 동방교, 과거의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 현재의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 교단에서는 지금은 노광공을 창조주 재림주 심판주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속내는 옛날과 동일한 그대로이고 밖으로는 노목사님~ 노목사님~ 하면서 겉으로는 교단의 설립자라고 내세우지만 노목사(노광공)라는 소리만 들어도 껌벅 죽는 시늉을 하고 있는 세뇌된 신도들의 불가해한 모습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이단의 추억 #72, 인연깊은 친구 D 참조)
위 사진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교단에 소속된 교회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세칭 동방교의 경전이라고 알려진 경화록은 장과 절로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고, 교주 노광공의 출생으로부터 일어난 신비한 사건들, 국내에서 집회를 할 때 일어난 일들, 여러건의 치병과 이적, 장래에 언젠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를 밑도 끝도 없는 예언 비슷한 기록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사의 기록에 따르면 노광공의 아버지 군청(君淸)은 안창호, 김구, 조만식, 이광수, 이승만 등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인재들을 제자로 양성했고, 평양의 오산, 숭실, 광성, 숭의 등 미션스쿨들의 실질적인 설립자요 주도자였으며, 그의 지도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다.
盧君淸의 3남 1녀중 차남으로 태어난 노광공에 대한 황당한 내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일본 게이오(慶應)대학에서 수학할 때는 야구, 등산, 요트 등에서도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황실의 동궁(東宮)에 거주하며 일본의 황족을 비롯한 많은 저명인사들이 사귀려고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성 비구니 일엽과 당대의 여류시인 모윤숙 여사가 노광공을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열렬히 구애했으나 뿌리쳤다는 허풍은 애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이단의 추억 #152, 사이비종교의 거짓말 허언증 참조)
27세에 황해도 곡산 군수가 되어 해방을 위해 애썼고, 해방 전에는 만주, 중국, 몽골 등을 방문해 지도자를 만나 조국 광복 계획을 수립하던 중 해방을 맞았으며, 해방 후에는 이승만과 김구를 도와 정치를 했다고 한다. 다재다능하다 못해 만사형통의 인물로 그려 놓았다.
6·25전쟁 때는 이승만이 노광공에게 위기 타개를 위한 도움을 요청해서 헌병대장으로 치안활동을 하고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흥남에서의 선박을 이용한 철수도 자신이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미군정 고문관으로 근무할때는 그에게 온갖 청탁을 하던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정처 없이 걷던 중, 뚝섬에서 굶어 죽은 어린아이를 우연히 발견한 후 충격을 받아, 대구에서 산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대구 팔공산에서 산기도 도중에 그를 유혹하던 절세 미녀를 단호히 뿌리치고, 표범의 공격을 맨주먹으로 물리쳤으며, 구렁이에게 몸이 감겨 있다가 풀려나는 등의 신비 체험을 하던 중 주님을 만났다고 한다.(이단의 추억 #106, 노광공과 결혼했던 김정선의 통한 참조)
경화록에는 노광공이 전국 각지를 돌며 행한 집회에서 나타난 이적들에 관한 기록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믿거나 말거나식의 그런 이야기들까지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노광공은 스스로도 심각한 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늘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고 말한다. 일차(一次) 십자가라는 내용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후, 십자가 지시기 전 조부님과 후는 달라지셨으며 성품과 모습까지 달라지시며 그 시(時)로부터 좁은길로 좁은길로 깊이 깊이 우리들을 이끌고 들어가시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십자가라는 말은 '고난을 짊어졌다'는 뜻으로 세칭 동방교의 노광공에게는 세번의 십자가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차(一次)십자기, 이차(二次)십자가, 삼차(三次)십자가라고 말하는데 노광공 교주가 마분선, 마개선등의 여신도 간음사건으로 투옥된 것도 동방교에서는 십자가라고 말하고 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노목사라 하셨지만 그 이후는 이래(二來)조부님으로 변화하시여 역사하시기 시작하셨다 라는 등 노광공이 생로병사와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적 존재임을 경화록 곳곳에서 보여준다. 노광공은 목사 안수를 받은 사실 자체가 없으나 늘 자칭 목사로 행세했었다.
온갖 방법으로 신도들을 갈취하고 연단선님이라고 부르는 껌팔이들을 동원하여 거두어들인 돈으로 동방교가 사들여 관리하고 있는 부동산(異端의 追憶 #115, 동방교의 대기처들 참조)중에서 여러곳을 지정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대기자들이 기다리는 곳'이라고 하여 '대기처'라고도 불렸다. 노광공의 사망 직전에도 전국에는 수십곳의 대기처(가출한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머무는 합동숙식소)가 있었고 그후에는 더 많이 증가했다.
그리고 1973년 문화공보부의 재단법인 인가 취소 직전에는 신도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신도들중의 대부분은 어린 남녀 학생들이 많았다. 신도들은 동방교에 입교한 후 신심을 확인받으면 명명이라고 하면서 교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이단의 추억 #4, 명명을 받고 참조) 노광공 사후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동방교 조직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일부는 노출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는 등 사회의 사각지대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세칭 동방교는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라는 이름으로 위장 탈바꿈하면서 '청해' 라는 월간지를 발간하고, '주간 기독교' 라는 다블로이드판 주간지를 발행하고, 청림농림학원(靑林農林學院), 고등성경통신학교, 기독교통신대학, 성봉신학교(聖奉神學校), 밀알복음전도선교회를 운영했다.(이단의 추억 #32, 주간기독교 신문기자 참조)
자칭 좁은길, 세칭 동방교는 1969년 10월 8일 서울의 영등포에서 발생한 일가족 음독자살 사건의 원인 제공자로 알려지면서 강력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동방교에 세뇌된 아내와 자녀가,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동방교 간부의 설교를 믿고 독약을 먹은 후, 동방교를 반대하던 남편을 두고 사망한 사건이었다.(이단의 추억 # 33, 거액 도난사건, 일가족 음독사건 참조)
동방교 신도들은 동방교가 사회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갖가지 협박과 강요를 당하고 '초달'이라는 매를 맞아가며 당국에 나가 허위 증언을 해야 했고, 동방교의 실체를 폭로했던 이들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으며, 기독교란 간판을 걸고서도 야밤에 제사를 지내는 등의 기괴한 모습을 보였다.(이단의 추억 #18, 자정에 올리는 제사 참조)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의 전신은 사교 집단인 세칭 동방교이고, 1969년 10월 8일에 발생한 일가족 집단자살의 원인을 제공했고, 어린 남녀학생들과 부녀자들을 신도로 포섭 가출시켜 소위 연단선님이라는 이름으로 껌팔이 등 행상을 시켜 금품을 갈취(이단의 추억 #46, 그리운 선님들 참조)하고 있으며,
청소년 선도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고 또한 신도들로부터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고 공갈 협박하여 재산을 사취, 막대한 재산을 치부하고 있으며, 어린 청소년 학생들로 하여금 학업을 중단케 하고 가출시켰으며, 농장등에 집단 수용시켜 강제노역이나 행상을 시키고 있으며 병역을 기피시키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51, 안타까운 3형제 참조)
동방교는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으나 실패하자, 신도들의 정성이 부족해서 연기되었다고 변명했다. 동방교는 구원의 조건으로 지성금(至誠金)을 내세워 착취했는데, 신도들을 성민(聖民)이라고 부르면서, 막대한 지성금을 바쳐야 한다고 강요했다. 지성금의 종류는 수십종에 이르렀는데, 내부 계급의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그리고 각종 절기마다 온갖 종류의 지성금을 바쳐야 했다.(이단의 추억 #119, 동방교의 은어들 참조)
동방교는 동방, 즉 한국에서 재림주가 나타났으며, 그가 바로 노광공이라고 주장했다. 경화록은 노광공의 허무맹랑한 행적을 담고 있으며, 동방교는 노광공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고, 세상이 불바다가 될때 동방교 신도들만이 휴거될 것이며, 이후 새천지에서 살게 되고 껌팔이 했던 연단선님들은 왕노릇 하게 될 것이라는, 전형적인 한국 기독교 사이비 이단들의 주장을 계속 주입하며 세뇌시켰다.
동방교의 소위 '성민의 3대 지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희생적 정신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하자. 둘째, 난관과 불만은 인내로서 이기자.
셋째, 사랑과 자비로서 천심을 일으키자.
그러나 이러한 지침과는 무관하게 기독교와는 하등의 관계없이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 사이비 사교집단이었다. 세칭 동방교 교주 노광공에 의해 가산을 탕진 당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학업을 중단당하고 정조를 유린당한 수많은 피해자는 한 맺힌 원한을 풀지 못하고 응어리를 품은 채 지금도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교주 노광공의 간음 사건을 비롯하여 린치(이단의 추억 #26, 마태목사 탈출사건 참조), 폭력, 살인 등 갖가지 사건으로 사회를 떠들썩케 했던 세칭 동방교는 그 재단법인이 대법원으로부터 해산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실로 가공할 사교집단으로서의 범죄행각을 벌였다. (이단의 추억 #76, 차마 기록하지 못한 이야기들에 대하여... 참조)
세칭 동방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또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로 변신한 동방교는 기독교 간판으로 위장한 이단 사이비 종교집단이다. 이제는 다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교단에 속해 있다고 위장하고 있으나 오늘날 새천지라는 이단 사이비 종교집단이 창궐하고 있다면, 반세기 이전에는 자칭 좁은길이라는 세칭 동방교가 활개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반기독교 이단 사이비 종교집단 중 하나로 알려진 세칭 동방교는 법원의 판결, 사회적 논란과 함께 지하로 잠적한 듯했지만, 해외로 나가거나(이단의 추억 #75, 새로운 변화에 거는 기대 참조) 국내에 숨어 있던 얼마 되지도 않는 일부 잔존 세력들이 최근에는 그것마저 구총회와 신총회로 분열되어 상호간에 서로 피터지게 싸우면서 구총회 소속 세력들은 그들 신총회에 속한 신도들을 '불법연대'라고 부르고 있기도 하다.(異端의 追憶 #127, ‘베니께’ 이바구 한토막 참조)
이들은 최근 예수교 장로회에 소속된 기성 종교단체인양 위장하여 본체를 철저히 감춘체 조직을 운영하며 재기를 노리고 있다. 또한 온라인상에 만연한 세칭 동방교에 대한 공개된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모든 이단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행하는것 처럼 신도들에게 인터넷 사용을 금지시키고 있다. 현대사회의 선악과는 인터넷이라고 가르치면서 따먹으면 죽는다는 논리다. 그러나 아무리 차단시키려 해도 보는 사람은 다 본다. 참으로 희한한 확정편향적 인지부조화의 이단 사이비 사교집단이다.
기억하라,
꼭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주의 진리는 분명하다.
악의 뿌리에서는 선의 열매는 맺을 수 없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