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 주요명소
식장산자연생태림
대전의 동쪽에 우뚝 자리잡고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오랜 세월을 지켜온 산, 식장산은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세천동, 산내동 일원에 위치한 높이 623.6m의 산으로서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식장산은 충북 옥천군 군서면·군북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대전의 터줏산으로, 번화한 대전 시가지와 서쪽의 보문산(457.6m), 북쪽의 계족산(423.6m)을 내려다 보고 있으며 동북쪽에 자리잡은 대청호수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넣고 있다. 또한 멀리는 계룡산, 대둔산, 서대산과 대화하듯 마주하며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식장산의 높고 빼어난 산세는 신비로움마저 던져주고 그 골짜기 골짜기마다 희귀식물과 숲이 울창하고 수많은 유적과 전설이 고이 간직되어 있다. 식장산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던 산으로, 대전의 상징처럼 동쪽에 높이 솟아 있다.
그런 만큼 많은 전설과 유래가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식장산은 자락이 넓고 물이 좋아서 옛날부터
만인을 살릴 수 있는 땅이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가 되어 어떤 장군이 식장산에 많은 군량을 숨겼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식장산의 명칭에 대해서는 백제시대 성을 쌓고 군량을 많이 저장하고 신라 침공을 방어하던 요새 지역이었다는 기록에 연유하여 식장산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먹을 것이 쏟아지는 밥그릇이 묻혀 있다 하여 식기산 또는 식장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 주소 : 동구 산내,판암, 세천동 일원
보문산녹음
높이 457.6m인 보문산(寶文山)은 대전의 남쪽 중구의 중심부 즉, 대사동 외 11개 동을 품고 있어 시민들에게 친근하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대전의 대표적인 녹음공원이다. 이곳에는 보문산성과 보문사지, 야외음악당, 전망대, 유희시설, 케이블카가 있으며, 시루봉 길 등 10여 개의 등산로와 20여곳의 약수터가 골짝마다 있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보문산성은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 9호로 지난 1992년 12월 백제시대 산성 중 전국 최고로 복원되었다. 둘레가 280m인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성안에 있는 장대루에 오르면 광활한 시가지의 발전상이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보문산에서는 등산과 함께 위락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데 사정공원의 실내 롤러 스케이트장, 축구장을 비롯한 각종 레포츠 시설, 야외음악당, 케이블카, 그린랜드, 청년광장 등이 있으며, 시루봉 아래 고촉사에는 미륵상을 닮은 자연 암석이 있다.
구봉산단풍
높이 264.1m인 구봉산은 서구 관저동, 가수원동, 괴곡동, 흑석동, 봉곡동에 둘러 싸여 길게
서 있으면서 아홉 개의 봉우리가 모두 제각기 멋을 자랑한다. 또한 봉우리가 가지런히 수려한 모습으로 솟아 있어 마치 병풍에 그려진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이 산의 남쪽에는 갑천이 휘돌아 흐르고 있으며, 바위 벼랑을 이루어 가파르기는 하나 1993년에 건립한 구각정 전망대에서 보면 서구 관내가 한눈에 조망되어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 구봉산(九峯山)은 높은 봉우리가 아홉 개가 빼어나게 솟아 있다 하여 구봉산이라 표기하고 있으나, 옛날 여지도서에는 구봉산(九鳳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구봉산은 계룡산의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치달리다 진잠에서 불끈 솟아나온 아홉 봉우리가 있다 하여 구봉산(九峯山)이라 했다지만 일설에는 아홉 마리 봉새형으로 구봉산(九鳳山)으로도 불린다. 그것은 이곳에 구봉귀소형(九鳳歸巢形) (아홉 마리 봉새가 집으로 돌아오는 형)으로 명당이 있다 해서 부른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아홉 봉우리가 한 줄로 늘어서서 마치 조복 입은 대신들이 허리를 굽혀가며 신도안으로 들어가는 형국이라 하여 군신입조형(群臣入朝形) (신하들이 조정에 들어가는 형상)의 명당이 있다는 전설도 있다. 어쨌든 구봉산은 대전팔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암괴석(奇岩怪石)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특히 가을 단풍의 풍경은 더욱 일품이다.
구봉산은 높이 264.1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으리만큼 경관이 아름답고 산세가 수려한 곳이다. 또한 구봉산 남쪽에는 갑천이 휘돌아 흐르고 있으며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 산에는 유난히 산벚나무가 많아서 봄에는 하얀 꽃이 산비탈 숲에 점점이 수를 놓고, 그 위에 바위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아 경관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처럼 경관이 좋고 기이한 바위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기 때문에 호남고속도로에서나 가수원, 진잠 일대에서 구봉산은 쉽게 눈에 띈다. 밖에서 볼 때 이 산의 바위 봉우리들이 우뚝하고 험해서 오르기가 어려울 듯 하지만 그 봉우리들에 붙어보면 묘하게 길이 잘 나 있어 가파르기는 하나 그리 어렵지 않다.
전북 진안군 주천면 운장산 옆의 구봉산도 경관이 좋기로 유명해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구봉산 이름을 가진 산들의 봉우리는 꼭 아홉 개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팔각산, 팔봉산, 팔영산처럼 여덟이나 아홉은 좀 많은 수를 뜻할 때가 많다. 여기 구봉산도 대고개에서 비재까지의 큰 봉우리가 아홉 개로 셀 수도 있지만 애매한 점이 있다.
구봉산은 원래 산이 아름답고 골이 깊었기 때문에 산에 얽힌 이야기가 많고 산제나 부락제 등 이와 관계된 민속이 많이 전해진다.
▣ 주소 : 서구 관저동, 흑석동, 괴곡동 일원 ▣ 문의처 : 서구 도시개발과 : (042)611-6244
장태산휴양림
장태산은 서구 장안동과 금산군 복수면 신대리 경계의 안평산(470.2m) 옆에 있는 산으로
높이 186m의 나지막한 산이다.이 장태산 일대는 대둔산에 뿌리를 둔 산줄기가 장엄하고 아름답게 뻗친 곳에 마을이 생겨서 장안동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전하며, 임진왜란 때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난을 피해 장군종 아래 베틀굴에 숨어서 3년 동안 베를 짜며 살다가 지금의 원장안에 터를 잡아 편안히 살기 시작하였다하여 장안동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전설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 천혜의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진 장태산 휴양림은 1991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해서 지금의 거의 그 기틀을 갖추었으며 현재까지도 활발한 개발을 하고 있다. 그림 같은 호수, 괴암괴석 등 주변 경관이 절경이며 질서있게 조성되어진 나무들이 많고 길 또한 잘 다듬어져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장안동 산 46번지에 있는 장태산 휴양림은 지난 1991년 자연휴양림 조성계획을 승인 받아 1992년부터 1994년 사이에 시설한 산막(통나무집), 야영장, 정자, 어린이 놀이터, 체육시설, 사계절 썰매장, 삼림욕장, 조수 사육장, 산책로 등 각종 시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즐거움을 준다.
이곳의 삼림욕장은 녹색공간이 부족한 현대인에게 푸르름과 신선함을 듬뿍 주고 있어 대전 시민들은 물론 사계절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장태산은 대전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형제바위 위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붉은 낙조는 산 아래 용태울 저수지와 어우러져 가히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을 이루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장태산 일대의 울창한 침엽수와 활엽수림 17만여 평은 바쁜 도시 생활로 심신이 피로해진 우리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인공으로 조성된 일만여 주가 넘는 메타세키이아나무는 이국적인 풍치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뭇 올곧은 자태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장태산은 지금은 휴양지로 개발되어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예전에는 아주 깊은 산골이었다. 우선 휴양림에 들어서면 노산 이은상의 '나무마을' 이라는 시가 삼림욕장에 들어선 사람
들의 마음을 안온하게 잡아 둔다.
▣ 주 소 : 대전광역시 서구 장안동 259번지 ▣ 문의처 : 장태산자연휴양림관리소 : 042-585-8061,8062
유성온천
유성 온천휴양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봉명동이다. 유성은 뜨거운 온천수로 인해 역사가 생긴 곳으로 전설에 의하면 백제시대에 상처를 입은 학과 백제의 병사가
온천수로 아픈 상처를 치료했다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근년에는 역대 대통령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휴양지이다. 유성의 면모는 날이 갈수록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충남대학교 캠퍼스 등을 비롯한 교육기관이 들어서서 학문의 고장으로 불리울만 하고 대덕연구단지가 자리잡아 한국 과학의 요람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에 과학산업단지와 전자관련 첨단 산업들이 들어서는 중이어서 명실상부하게 산·학이 조화를 이루는 과학기술의 메카가 되었다.
또한 서남부에는 시민들의 주거지역이 조성되고 있어 휴양과 주거 그리고 학문, 과학, 산업이 함께 발전하는 전원적인 과학기술 도시가 되고 있다.유성은 온천수가 쏟아져 나오는 탕거리를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너른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끝으로 명산이 둘러 싸여 있어 아늑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계룡산 줄기인 갑하산과 우산봉이 둘러싸고 북쪽으로는 금병산과 적오산이 북풍을 막아 주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도덕봉과 금수봉이 자태를 뽐내며, 갑천 너머 동쪽으로는 계족산 줄기가 감싸고 있다.유성이라 함은 넓게는 유성구 일원을, 좁게는 온천수가 나오는 봉명동 일대를 일컫는다. 엑스포과학공원 엑스포 과학공원이 자리잡은 곳은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가 열렸던 유성구 도룡동 일원이다.
공원 앞으로는 물 맑은 갑천이 흐르고 있다. 갑천을 사이에 두고는 둔산 신시가지가 마주하고 있다. 과학공원의 범위는 연구단지로 들어가는 대덕대교와 엑스포 아파트로 들어가는 둔산대교 사이이다. 이 두 대교 사이에 태극을 상징화한 엑스포 다리가 과학공원의 중심지 한빛탑과 남문 입구를 연결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과학공원과 갑천 맞은편 둔산 신시가지를 이 세 개의 다리가 끈끈하게 묶어주고 있는 셈이다.
관할행정기관은 유성구와 서구로서 서로 다르지만 두 지역은 뗄 수 없는 지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갑천이란 물길이 갈라놓고 있으나 두 지역은 이와 입술처럼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엑스포 과학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도룡동은 본래 여흥 민씨 4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우성이산 줄기가 감싸고 있어 아늑한 터전이다. 도룡동은 북쪽으로는 가정동과 서쪽으로는 구성동, 동쪽으로는 원촌동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갑천과 둔산 신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햇볕 잘 들고 물좋은 명당터이다. 도룡동의 엑스포 과학공원과 마주한 둔산동은 서구에 속해 있다.
엑스포 과학공원의 남문은 둔산동에 있기 때문에 남문으로 들어가려면 둔산 지역을 거쳐야 한다. 도룡동 일대와 둔산동 일대는 현대뿐만 아니라 고대에서부터 줄곧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그 이유는 갑천 유역이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갑천 유역은 대전에서 가장 먼저 인간이 정착해 살았던 곳이다. 이 일대는 삼천동(三川洞)이란 지명이 있듯이 세 개의 하천이 흐르다 합류하는 곳이다. 대전천(大田川), 유등천(柳等川), 갑천(甲川)이 제각기 발원지를 출발해 한밭이란 넓은 들을 적셔주면서 구비구비 흐르다 이곳 신시가지 일대로 모여 든다.
대청호
대청호는 1980년 대전광역시 대덕구 미호동과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덕유리 사이의 금강 본류를 가로막는 대청댐의 담수로 인하여 생긴 인공호수이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 관내의 갈전동, 미호동, 부수동, 삼정동, 황호동, 이현동 등 6개 법정동과 대전광역시 동구 관내의 추동, 세천동, 신상동, 신하동, 사성동, 주촌동, 오동 등 14개 법정동이 대청호와 인접하여 있고, 충청북도 관내의 청원군, 옥천군, 보은군 등 200여 리까지 그 물줄기가 닿아 있다.
2개 시·도, 5개 군·구의 4,134 ㎢의 광활한 유역에 조성되어 있는 대청호는 14억 9천만 톤의 저수용량을 가짐으로써 금강 유역의 홍수 피해를 크게 줄이는 한편, 도수로(導水路)를 통하여 청주지구, 금강하류지구, 만경지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또 대전, 청주, 공주, 부여, 논산, 천안, 아산, 장항, 군산, 전주, 이리 등에 전력 및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여 우리 나라 중부권의 젖줄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대청호는 이와 같은 경제적인 혜택 못지 않게 금강 유역민의 크고도 맑은 마음을 담아 보는 이로 하여금 속세의 사리사욕을 잊고, 마음을 정화케 하는 명경지수로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다. 대청호로 인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농사를 지어 오던 생명과도 같은 농토를 잃고, 애환이 담긴 집과 마을이 물에 잠긴 고향을 바라보며 인고의 세월을 삭혀가는 수몰지역 인근민의 애절한 향수와 그 주변 지역의 숱한 전설은 아직도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대청호 안의 여러 섬들과 주변의 수려한 경치는 해상공원 한려수도를 방불케 한다.
이같은 대청호는 인근의 유성온천, 대덕연구단지, 엑스포 과학공원, 정부대전청사, 계룡산
국립공원, 그리고 공주, 부여의 백제문화권 등과 연계되는 관광코스로서의 이점과 개발가능성이 커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계족산노을
높이 423.6m인 계족산은 봉황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서 산줄기가 닭 발처럼 퍼져나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에서부터 일제에 의해 격하되어 불려진 이름이라는 설, 중요하거나 귀한 이름은 원래 감춰 불렀다는 설에 이르기까지 이름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다.
계족산 줄기는 세천고개 너머 식장산과 맥이 이어지지만 남쪽으로는 용운동에서 북쪽으로
신탄진 석봉동, 대청댐 인근 미호동까지 16km 정도의 작은 산줄기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숲과 골짜기, 역사적인 문화재 등이 많이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계족산은 정상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으며 산자락의 맑은 공기는 자연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다.
산에 오르다 보면 숲 사이로 펼쳐지는 대청호가 파랗게 와 닿아 시원함을 더해 준다. 또 정상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장관을 이룬다. 계족산에는 계족산성 이외에도 고분군, 절터, 가마터 등이 분포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의 사찰인 비래사가 남아 있다. 계족산은 장동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대덕구와 동구에 걸쳐 있는 이 산은 높은 봉우리가 특이하다.
예로부터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전하여 비수리, 백달산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또 이 산의 모습이 봉황처럼 생겨서 봉황산이라 불렀었는데, 조선시대 때 송씨 문중의 어느 어진이가 보배로운 이름은 감추어야 한다고 하여 굳이 계족산이라 바꿔 부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산 위에는 백제 때 돌로 쌓은 계족산성이 있는데 계족산성은 대전에 있는 30여 개 백제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된 산성이다. 큰 테뫼식 석축으로 축조되었으며 둘레가 1,037m나 되며, 높이가 7~10.5m, 폭이 3.7m로 성 안에는 큰 우물이 있다.
▣ 주소 : 대덕구 비래동ㆍ장동ㆍ연축동 일원 ▣ 문의처 : 대덕구 도시개발과 : (042) 620-6256
계룡산 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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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가 자리 틀고 있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하여 계룡산(鷄龍山)이라 부른다고 한다.(2004. 3.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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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가 맺어준 두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게 되니 바로 "남매탑"이다. 앞에 보이는 7층 석탑이 오라비 탑이며 뒤로 보이는 5층 석탑이 오누이 탑이다.(2003.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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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왕 23년(724)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지어 상원사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동학사는 명산 계룡산 동쪽에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절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어 절 이름을 동학사라 했다는 설과, 고려말 충신이자 동방 성리학의 원조인 정몽주를 제사 지내므로 동학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동학사가 있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 하여 계룡산(鷄龍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계룡산은 전국의 웬만한 도인들의 수도 경력엔 빠짐없이 등장하고 태조 이성계가 왕도의 진산으로 정했을 정도로 기혈 왕성한 명산이다.
계룡산은 논산과 공주의 영산(靈山)으로 한국의 오악 중 하나로 꼽힌다. 계룡산서 발기한 정기가 신도안으로 뻗었으니 신도안이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이성계가 왕도로 정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616년 전인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한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지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탐문한 끝에 지금의 신도안으로 천도를 결정한다.
고려 때부터 신도안이 도읍지로 더 없이 좋다는 이른바 '도참설'도 있었지만, 이성계 자신도 직접 둘러본 결과 적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도할 도읍지가 결정되자 대궐을 세우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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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볕에 드러난 동학사 전경이 아늑해 보이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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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의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만사를 호령하던 절대적 왕권이 있었기에 모든 일은 거칠 것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도읍을 천도하고 대궐을 짓는 일이란 게 원체 대사이기에 이성계는 계룡산 사연봉(四連峰)에 제단을 차려놓고 국운왕성과 무탈천도를 천신께 빌고 있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사가 진행되어 터가 다듬어지고 주춧돌이 놓여질 즈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고 있던 이성계에게 백발의 할머니 한분이 현몽하여 다짜고짜 "나는 계룡산 신령인데 여기는 정도령의 도읍지니 공사를 중지하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을 하였다.
계룡산 신령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언젠가 계룡산 정기를 타고 태어날 정도령이란 신인(神人)이 왕이 되어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8백년간 태평성세를 펼칠 그의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계는 갑작스레 나타난 백발 할머니상의 산신령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던 이성계였지만 할머니의 위풍당당함에 눌려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지금 주춧돌까지 놓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며 그냥 천도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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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앞에서면 계룡산 주봉인 삼불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고 빙 둘러선 산들이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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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할머니는 일언지하에 "만약 공사를 계속하면 앞으로 큰 화가 미쳐 국위의 존립 여부는 물론 생명까지 위태로울 것"이라 말하였다. 할머니의 태도가 워낙 냉랭하고 단호한지라 할 수 없이 이성계는 "이곳을 떠날 테니 어느 곳에 도읍을 정해야 할지 그 곳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할머니는 "여기서 5백리 북쪽으로 올라가 그곳에 가서 도읍을 정하라" 일러주니 그곳이 조선 5백년 도읍지인 현재의 서울, 한양이다.
기도 삼매에 빠졌던 이성계가 정신차려 주변을 살폈으나 계룡산 할머니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신도안으로 천도를 포기하며 "흙 한줌이라도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할머니의 뜻을 따라 수많은 일꾼들이 신에 묻었던 흙을 한곳에 털어 대니 그 흙이 모여 지금의 신털봉이 되었다 한다.
입으로 전해지는 한낱 설화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어쩌면 당시의 민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성계는 막강한 권력으로 추진하던 천도에 따른 민심 이반과 원성이 발생하자 산신령을 등장시켜 민심을 수습하는 기지를 발휘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이런 명산의 길지에 자리잡고 있는 동학사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일주문을 지나 동학사 직전, 계곡에 걸린 정자 앞에서 오른쪽 산길로 1시간쯤 오르면 만날 수 있는 남매탑부터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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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엘 가면 대웅전 오른쪽에 세 개의 사당이 보인다. 사진의 왼쪽이 고려말 삼은을 모신 삼은각이며 오른쪽이 동계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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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탑(男妹塔)은 계룡산 동쪽에 있는 동학사와 서쪽에 있는 갑사의 중간 지점인 삼불봉 아래, 옛 청량사 터에 세워진 두개의 탑이다. 오누이 탑인 5층탑과 오라비 탑인 7층 석탑은 각각 보물 제 1284호와 1285호로 지정되었으며 청량사지쌍탑(淸凉寺地雙塔)이라고도 불린다.
남매탑에도 애틋한 전설이 유래한다. 통일신라시대 한 스님이 계룡산에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울부짖으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입을 크게 벌리는 일이 있었다. 갑작스런 맹수의 포효에 혼비백산했던 스님이 정신차려 호랑이 입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박혀있기에 이를 뽑아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호랑이는 아리따운 처녀 한명을 입에 물고 와 수도승 앞에 놓고 갔다. 목에 걸린 가시를 빼준 은혜를 보답하는 뜻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와 정신을 잃었던 처녀는 스님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다음날 정신을 차렸다. 처녀는 상주 사람으로 혼인을 치른 날, 초야의 신방도 차리기 전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눈도 너무 많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한 겨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둘은 토굴에서 겨울을 넘기게 되었다. 드디어 봄이 되어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낼 수도 없고 인연이 그러하니 부부의 예를 갖추어 둘이 함께 살아달라고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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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에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다. 선방은 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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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불심 깊은 수도승은 남녀가 인연을 맺는 파계는 있을 수 없기에 고심 끝에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는다. 그렇게 맺어진 두 남매는 비구와 비구니로 불도에 힘쓰다 한날 한시에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두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게 되니 바로 '남매탑'이라 한다.
이 남매탑의 주인공은 동학사를 창건한 회의의 은사스님이 되는, 신라 성덕왕 15년(716)에 당나라에서 입국한 상원화상이라고도 하니 동학사의 뿌리는 이곳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하다. 32번 국도를 따르다 박정자삼거리에서 시작되는 넓은 진입로는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동학사 관문이다. 멀리 닭 벼슬을 닮은 계룡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속이 후련하도록 넓고 반듯하게 만들어진 길에는 속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훨씬 넘었을 노령의 벚나무들이 가로수로 온몸 벌려 길손을 맞아들인다.
마을이 나오고 삼거리가 나오니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고개를 넘으면 그곳이 이성계가 도읍지로 정하였던 신도안이며 육군본부가 들어선 계룡대가 있다. 벚나무 터널을 지나 주차를 하면 그곳부터 계곡에 늘어트린 산 그림자가 절 찾는 발길을 안내한다. 호객하는 상인들의 애교 섞인 부름이 속세의 끈끈한 연 만큼이나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매표소를 지나 오리쯤 걷게되는 진입로는 한마디로 혼자 걷기엔 너무 아까운 그럴싸한 데이트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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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을 맞은 비구니 학승들이 울력으로 경내를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봄빛에 드러난 빡빡 머리에 고깔모자라도 씌워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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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산 그림자 따라 뚜벅뚜벅 걷다보면 계곡에 걸린 육모정인 세진정을 지나게 된다. 세진이란 '마음속에 있는 번뇌의 티끌과 온갖 더러움을 맑은 계곡에 씻어 내듯 깨끗이 씻어내고 정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향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육모정에 올라 마음만 펼치면 일부러 염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속세의 온갖 번뇌와 오욕칠정이 씻길 듯하다.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은 혼탁한 마음을 씻어주고 졸졸거리는 청아한 물소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설법으로 목탁소리로 다가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을 따르면 남매탑으로 가게 된다.
세진정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절집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풍광이 일품이어서 언뜻 동학사가 아닌가 싶지만 그곳은 동학사 산내 암자인 관음암과 길상암이다. 두 암자를 오른쪽에 두고 계곡을 따라 몇 발자국 더 들어가야 비로소 동학사에 이르게 된다.
동학사가면 대웅전 오른쪽에 세 개의 사당이 보인다. 고려말 삼은을 모신 삼은각,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동계사, 단종과 사육신 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원통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키 위해 초혼제를 지내는 숙모전으로 이런 전각은 어느 절에서도 보기 힘든 전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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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동학사에 봄은 이렇게 오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단청을 배경으로 한 단색의 목련 몽우리가 잘 어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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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학자인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음에도 동학사엔 그들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세워져있으니 바로 삼은각이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조선 500년 동안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배불의 근간이 되었다. 자신을 핍박하고 곤경에 일조한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세웠고 지금껏 제를 지내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와 보시를 실행으로 옮긴 실천불교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웅전에서는 계룡산의 삼불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고 빙 둘러선 산들이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다. 재잘대듯 흐르는 물소리는 무료함을 달래주고 간간이 스치듯 불어주는 바람은 흩어진 마음을 모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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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물오른 나무에만 오는 게 아니고 양지쪽 빨랫줄에도 와 있었다. 봄볕에 드러낸 빨래들이 해바라기를 하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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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뿌리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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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등천 물결이 은비늘처럼 반짝이며 봄을 재촉한다. 그러고보니 벌써 입춘이 다 됐다.
물결은 느린 걸음으로 흐르다 고무로 만든 장수보에서 잠시 휴식 을 취한다.
장수보는 말 그대로 오래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부 모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었다. 장수보를 따라 상단으로 길게 뻗은 것은 만성교다. 현수교 양식의 만성교는 길이 110m. 출렁거리는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뿌리공원 에 이른다. 만성교라는 이름도 꽤 흥미롭다.
'만 가지의 성을 모 아놓은 뿌리공원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전한다. 하지만 실제 모셔진 성씨는 72개. 그것도 본관을 기준으로 한다. 같은 김씨라도 본관이 다르면 다른 성씨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2000년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성씨는 2 86성 4천179본관. 뿌리공원에 입주할 성씨가 그만큼 많다. 뿌리공원이 건립된 것은 지난 97년 11월. 대전 중구 침산동 일대 6만2천여평의 부지 위에 첫 조성됐다.
다리를 건너 커다란 바윗돌 의 '뿌리공원 비'에 이르니 세계 최초로 성씨 테마공원이 조성된 이유가 아로새겨져 있다. '자신의 뿌리를 알게 하여 경로효친 사 상을 함양시키고…'. 성과 본관은 가문을 나타내고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 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로 이뤄지며 한 집안의 뿌리는 족보에 담 겨진다는 글귀도 눈길을 끈다. 부르기 편하게 짓는 요즘의 작명과 는 조금 차이가 나지만 '가문'이라는 단어가 꽤 중압감을 준다. 바윗돌 뒷면은 우리나라 전체 성씨를 가지런히 새겨 놓았다.
기념비에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각 성씨의 개별 기념비와 조각 품을 하나씩 만난다.
각각의 조각은 예술품에 다름아니다. 공원 측이 일괄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각 성씨의 종중이 개성을 살 려 제작한 뒤 기증했기 때문이라고 공원 측은 설명한다. 어떤 것은 태양을 본뜨고,또 어떤 것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날개를 닮았다. 뿌리처럼 굳고 넓게 번창하라며 나무 뿌리를 형상화한 것도 눈에 띈다.
조각 아래의 표지석은 해당 성씨의 유래와 역사 를 담고 있다. 시조와 가문을 빛낸 인물에 대한 설명이 꽤 상세하다. 비석은 한글로 새겨져 있어 읽는데 큰 불편이 없다.
해당 성씨를 좀 더 쉽게 찾고 싶다면 공원 입구와 수변무대 주변에서 위치도를 살펴보자. 걸음을 옮겨 멧부리에 오르면 영·호남과 충청의 화합 과 상부상조를 기원한 삼남기념탑도 만난다.
뿌리공원만으로 대전을 찾기가 쉽지 않다면 과학 여행을 겸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엑스포과학공원과 화폐박물관,국립중앙과학 관,지질박물관 등 자녀와 함께 찾을만한 과학 명승지가 대전에는 수두룩하다. 여유가 있다면 뿌리공원 근처의 대전동물원도 둘러볼 일이다.
대 전시가 지난 2002년 설립한 대전동물원은 규모 면에서 전국 두 번 째로 132종 600여마리의 동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사자와 곰 을 주제로 한 아프리카 사파리와 산양,사슴,몽고 야생말을 중심으 로 조성한 마운틴 사파리가 특히 이채롭다. 엑스포과학공원은 지난 93년 대전세계박람회를 개최할 때 조성한 테마공원이다.
최근 1/3 가량의 부지를 다른 용도로 바꿨지만 여 전히 볼거리가 많다.
자연생명관과 아이맥스영상관,돔영상관,입체 영상관 등의 체험관을 모두 구경하는데만도 반나절이 걸린다. 한국조폐공사의 화폐박물관은 엑스포과학공원 근처다. 실물 화폐 만도 무려 12만여점을 보유한 테마 전시관으로 국내·외 화폐 문 화의 변천사를 전해준다. 그리스·로마시대 주화와 대한제국 화폐 ,그리고 훈장과 우표,크리스마스 실이 눈길을 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가족이 함께 찾기에 좋은 과학 명소다. 기초과 학과 자연과학,산업기술,천체관 등 주제별 배치가 짜임새있고 볼 거리와 즐길거리도 다양하다.
이 중 지난 2003년 러시아에서 직접 가져온 실물 매머드 골격과 길이 15m의 보리새우 뼈는 특히 볼만 하다. 과학도구를 직접 만지고 조작할 수 있는 상설관은 호기심 많은 어린이 고객들이 즐겨 찾는다. 각 테마관의 시설과 도구에 대한 사용법을 알고 싶다면 3층 입구에서 PDA를 주문(무료)해 가 지고 다니는 것이 유용하다. |
[뿌리공원 여행수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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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시내를 중심으로 여행하는 만큼 먹거리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대전만의 음식 맛을 보고 싶다면 구즉 묵마을을 찾아보자. 마을 전체가 묵 천지나 다름없을 만큼 묵집이 즐비한데 이 중 원조는 할머니묵집(042-935-5842)이라고 한다.
무려 50년의 전통을 가진 묵 전문집으로 도토리묵과 메밀묵이 제대로 맛을 전해준다.
보리밥과 순두부도 추천 메뉴다.
대덕연구단지에서 북쪽 으로 신탄진·조치원 방향으로 나서면 자동차로 20여분만에 묵마을에 닿는다. 뿌리공원에서는 멀다. 엑스포과학공원 주변에서 점심을 겸한 이색 맛집을 찾는다면 퓨전 중국음식점인 원태조(042-862-8887)도 괜찮다. 중국집 답지않게 깔끔한 인테리어와 이색 메뉴가 시선을 끈다. 가격은 3천원대부터 다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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