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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빛의 단박 禪師 우제길 |
베트남戰 포성속에 빵봉지위 손톱그림'후회같은 그리움' 스케치 매진 知人들 '귀국 종군 작품전' 마련 72년 전남도전서 '기적의 大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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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포탄 나부끼는 참호 속에서의 눈물겨운 그리움을. 정적이 머물고, 시시각각 생사의 변화를 예측할 수 없이 다가오는 미래의불안감을. 이 한정 없는 외로움을. 우제길은 참호 속에서 파월을 내내 후회했고, 후회 같은 그리움을 수첩에 스케치했고,건빵봉지 같은 곳에 손톱그림으로 새겼다.
베트남 밤하늘의 별들은 좀 어리숙해 보였고, 풍경들은 몹시 낡아보였다.생생하게 다가오리라 여겨졌던 참호 속 전투나 이동 중의 돌발사태도 영화 속의 장면처럼 남의 일처럼 흘러갈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극적인 장면들은 없었다. 실상이 아닌 거짓풍경들만 같았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틈틈이 민사심리전 일환으로 전시회를 가지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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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혼과 나트랑이라는 해변도시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러나 전장의 실상은 낯설었고, 종군화가가 돼 어떻게든 전장의 긴박감을 화폭에 옮겨야겠다는 소망은 어리숙한 꿈이었다. 그렇게 그림에의 열정을 안으로 욱이자 전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영화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매복이 끝나고 영내로 돌아오자 한통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섭 형에게서 온 편지였다. 돌고 돌아 어렵게 전선까지 닿은 그리움의 배였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사내의 삶이란 진보를 향해 몸을 내던져야 하는 것. 그대의 삶은 낭비되고 있다. 간절히 부탁하건데 몸 성히, 그리고 하루 속히 전역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라. 남도의 추상화단은 그대의 번뜩이는 솜씨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앞날을 위해 이 낡고 더딘 남도화단에 진보의 물결인 추상화의 바람을 일으키자."
제길의 머릿속에는 순식간에 남도화단의 상황과 풍경이 그려졌다. 그 즉시 전선의 포성 속에서 밤을 새워가며 답장을 썼다.
"형! 우리 창작회는 영 잃어버린 꿈이 되었습니까. 종군화가는 못되었지만 맹호의 일원으로 이렇게 컷이라도 종이에 옮길 수 있는 자유는 나의 염원이었습니다. 머지 않는 날 보(步)의 컷이 당신들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생의 종속가치는 내 엷은 심장에 파묻힌 감정일지라도 내 조국과 창작동인회 앞에 보이고 싶습니다. 포성을 자장가 삼아 하루를 푸는 밤의 낭만은 결코 포근한 잠을 이룰 수 없고, 옛 기억과 형에 대한 그리움. 화우들을 못 잊어 이 밤을 헛되이 보낼 수 없습니다. 수아 선생님은 여전히 취한 삶이온지. 제자가 못나 이 지경이옵고,
흐트러진 창작생활의 면목을 상봉하는 날 제가 어이 고개를 들까나. 그날이 차라리 없었음 좋겠습니다. 궂은 비는 쉴 사이 없고. -보(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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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 9812 B. 1998. 74×74㎝. Serigraphy. |
편지 중간과 말미에 적은 보(步)는 우보(牛步)라 하여 주위에서 붙여준 우제길의 별칭이었다. 67년 서둘러 제대했다. 전선의 포화 속에서 틈틈이 그린 드로잉과 수채화만 더블백에 담고서.최종섭은 제길의 귀국을 뛸 듯이 기뻐하며 우제길 귀국 종군 작품전을 열어주었다.
전시장이 없던 그 시절 최종섭이 작업실로 사용하던 중앙초등학교의 강당에서 귀국 기념 종군 스케치전을 가졌다. 그리고 곧바로 그해 11월 3일 학생회관 개관기념전을 치렀다. 전시회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반응은 기대할 수 없었다.
외로움이 극명해질수록 제길의 진보를 향한 칼날은 벼리워졌다. 더구나 이 지역에서 추상이란 거의 그림 취급조차 받지 못할 때였다. 이어서 남도 추상미술의 본산인 에포크에 가입했다. 그 시절은 국전의 입선이 대한민국 미술계의 판세를 가름하던 때였다. 젊은 패기로 국전에도 출품했다.
역시 추상미술은 국전에서조차 눈에 들지 못했다. 두어 번 출품했으나 번번이 낙엽신세를 면치 못했다. 낙선작품을 찾으러 서울로 가야했으나 차비초자 없어서 작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서울의 한 화랑에서 전화가 왔다. 작품을 전시보관하고 있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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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ythm 72 3h. 145.5×145.5㎝. Oil on canvas. 72년 제 8회 전남도전 대상작. |
할 수 없이 차비를 마련해 서울의 화랑으로 가보았다. 거기엔 자신의 국전 낙선작이 걸려있었다. 폐품처리 돼 고물상에 나뒹구는 것을 화랑
주인이 구해왔다는 것이었다. 눈물겨운 추상미술의 현실이었다. 진보란 외로운 것이고 사내의 길이란 험난한 것. 그러나 제길은 포기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추상미술의 칼을 갈던 그는 기어코 1972년 제 8회 전라남도 미술전람회에 출품을 했다.
구상화의 고장 전남도전에 추상미술을 내민다는 것은 세 살 아이가 봐도 웃을 일이었다. 심사위원은 모두가 전통 구상계열이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벼락치듯 기적이 일어났다. 내로라 하는 모든 구상계열의 작품들을 물리치고 제길의 난해한 추상작품이 그해의 대상을 차지한 것이었다.
72년 전남도전 심사위원은 오지호ㆍ임직순ㆍ허 건ㆍ조방원ㆍ김흥남ㆍ강용운ㆍ배동신ㆍ손 동ㆍ강봉규 등이었다. 당시 대상 상금은 10만원이었다. 감격에 겨운 제길은 가난이고 체면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사위원 전원을 초대했다. 지금의 왕자관 맞은 편에 있던 최고급 요정 겸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주흥을 벌이며 어떻게 추상을 대상으로 뽑게 됐느냐며 감격적인 질문을 했다. 그들은 모두가 고개를 내저으며 하나같이 도저히 뽑아주지 않으면 안될 예술적 기품에 압도됐다는 것이었다. 제길의 작품은 심사위원 전원일치의 가결로 단숨에 대상으로 뛰어오른 것이었다.
공모전에서 추상으로는 처음의 입상이었다. 화단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오지호가 천재의 탄생을 축하한다며 그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흥이라면 이에 뒤질 수 없는 이가 배동신이었다. 배동신이 맞춤을 추고 나서자 너도 나도 나서는 바람에 그 자리는 한바탕 춤판이 되고 말았다. 천재작가의 탄생 앞에서 구상이니 추상이니 하는 따위의 허드레는 단박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술판의 한쪽 구석에서 제길의 가슴엔 외로움의 호수가 출렁대고 있었다. 이 척박한 추상의 불모의 땅에서 어떻게 추상검객으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화려한 춤판 한구석에서 그는 외로움의 술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시인ㆍ문예비평가
그때 그 순간
"빛의 의미 그려낸 최고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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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길 선생의 작품은 오래 전부터 보아왔습니다. 아주 특이하고 최고의 화법을 구사하는 작가라는 것이 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죠. 그러나 집중적으로 눈여겨 본 것은 우제길 미술관을 방문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우제길 미술관 신청 시에 미술관을 방문하고서 부터이죠.
미술관의 규모나 그 역할에 대해선 새삼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만 광주에서 최초로 사립미술관으로 등록하신 것만 봐도 얼마나 열린 삶을 사시는 줄 알 수 있었죠. 제 200호 문광부 등록이니 전국적으로도 굉장히 빠른 등록이지요.
그때 우제길 선생이 보여준 그 동안의 작업 내역을 직접 대하고선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소년시절부터의 작업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작업현황이 어찌나 잘 정리되어 있던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작품평이나 신문에 난 보도기사 등도 정말 잘 모아놓으셨더군요. 작가는 자신의 현주소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한승원씨의 작품에 삽화하신 작품도 신문사에 가서 직접 찾아서 정리해놓으셨더군요. 하물며 중학교 때의 스케치북까지 보관하고 계시는 걸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작가는 늘 예전의 작업을 보면서 지금의 성장을 가늠하는 거지요.
특히 우제길 미술관은 우제길 개인의 아키브 미술관으로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제길씨의 작품은 이미 이경성 선생이 지적한 바 있듯이 빛과 어둠의 교향시라는 말이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칠흑과 같은 어둠의 세계이며 그것은 그의 인생관에서 나오거나, 예술관에서 표출된 색채감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수평으로 전개되는 이 어둠의 세계는 그의 작품 세계가 결정짓는 절대적 특징이다."라고 하셨는데 정확한 지적이지요.
또 "비행기를 타고 북극권에 접근하면 눈 아래 전개되는 무서운 암흑과 그 암흑사이로 날카롭게 펼쳐지는 오렌지색 또는 푸른색을 볼 수가 있다. 그 어둠이란 분명 검정색으로 보여지긴 하지만 보통의 검정색이 아니라 지옥의 무서운 저주가 담긴 듯한 강렬한 감각을 담고 있는 신비스러운 검정색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 우제길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북극권에서 느낄 수 있었던 빛과 어둠의 교향시, 그 찬란하면서도 중후한 감동이 보는 이의 피부에 와 닿는다."라고 쓰셨더군요.
빛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제길씨의 작품만큼 빛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룬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빛이 더욱 강렬한 것으로 반영되는 것은 어둠과의 극적인 대비로 인한 것이란 점에서 빛의 정확한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2) 빛의 단박禪師 우 제 길 |
'블랙+직선' 오묘한 광채 日ㆍ유럽 '경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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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제 7회 인도비엔날레에서 우제길에게 전시요청이 왔다. 미술협회에서 추천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가장 세계성에 근접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제길은 참가는 하지 않고 작품만 보냈다. 학교에 근무할 때였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행상황은 늘 궁금했다. 77년도면 흑백 TV 시절이었고, 인터넷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인도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참가하고 돌아온 전영화 교수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 선생의 작품이 인도비엔날레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아 카탈로그의 표지그림으로 선정됐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우제길의 머릿속에는 반짝 전등불이 하나 켜졌다. '해외로 눈을 돌리자'는 생각이었다. 한국의 우수한 정신과 감각을 해외에 알리자는 생각이 감격에 겨운 가슴을 뚫고 불쑥 솟구쳤던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흰색이고 흰색은 빛이다.' 그는 마침내 블랙과 직선만을 사용해 '빛의 작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고흐가 그림을 위해 단 한 번 귀를 잘랐다면 제길은 날마다 귀를 자르는 심정이었다. 치열하게 피를 흘리지 않으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작품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일본 도쿄 다마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후배 오이량이 작업실로 찾아왔다.
그때 일본화단에 '우제길의 미술세계'를 알려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도쿄 긴자의 아트 뮤지엄으로부터 초대전 제의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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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긴자에는 수없이 좋은 화랑들이 있으나 아트 뮤지엄은 그중 최고의 화랑이었다. 흥분으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전시장은 지하 1층이었지만 매우 넓은 공간이었다. 그곳에 날마다 귀를 자르며 그려온 그림들을 가득 채워주었다. 그러자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라며 탄성을 연발했다. 그러나 정작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작품들이 하나같이 거대하고 오묘해 살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전시가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아, 이 커다란 작품들을 그대로 다시 광주까지 가져가야 되는구나."생각하니 앞이 깜깜해져왔다. 그렇게 전시 5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과 젊은 사람 둘이서 오전에 다녀갔는데도 오후에 또다시 전시장에 들른 것이었다. 다시 전시 마지막 날에 그들은 들렀다. 이번에는 직접 찾아와 저녁식사에 초대하겠다는 것이었다. 식사자리에서 그들은 구라이 화랑 및 시노다 아트와 전속 계약을 맺을 것을 제의해왔다.
구라이 화랑의 미츠다케 사장은 평생을 긴자의 화랑가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화상이었다. 또 한 사람인 시노다 사장은 시노다 아트의 젊고 패기 찬 화상이었다. 두 화상은 한국에서 온 젊은 작가의 특이한 작품을 보고 그들 나름대로 상품이 될 수 있는가를 타진해왔던 것이다.
그들이 우제길과 전속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년 후에 긴자 아트 뮤지엄(Art Musume Ginza)에서 대규모의 전시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1층의 넓은 공간을 메울만한 작가가 일본에는 귀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직접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는 1년 뒤 1층의 넓은 공간에서 300호 이상의 대작들을 광주에서 직접 공수해 본격적인 개인전을 가졌다. 일본사람들의 탄성을 이끌어내며 그 전시는 대단한 성황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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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이 화랑을 만남으로 해서 우제길은 제3회 'Tokyo Art Expo 1992'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일본 화단을 단숨에 압도해버렸다. 블랙과 직선의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광휘에 그들은 눈 멀어버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제길은 30여년의 교단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매달 구라이 화랑에서는 통장으로 돈이 송금됐다. 물론 일본으로 보낸 작품들은 앞 다퉈 팔려나갔다. 그때부터 우제길의 해외침공은 시작되었다.
91년 그해, 독일의 김희일이라는 한국화상에게서 연락이 왔다. 독일 쾰른의 우허화랑에서 초대전을 갖자는 것이었다. 김희일씨는 화순 출신으로 독일광부로 지원해 간 사람이었다. 그는 간호사로 근무하던 한국여인과 결혼해 한국과 독일의 문화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제길의 일본전시 그림을 보고 반한 그는 자신의 집에서 체류하며 한 달간 작업을 한 뒤 쾰른의 우허화랑에서 전시를 갖자는 것이었다.
우제길은 다시 독일로 건너가 치열하게 작업했다. 전시 당일 날 김희일씨는 전시장에 독일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두 사람을 불러 연주를 시켰다. 그림보다는 그 연주 들으러 왔다가 전시된 한국인 화가의 그림을 보고는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지금껏 전설로만 듣고 있던 동양의 선적(禪的) 광휘가 거대한 화판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묘한 빛의 중첩은 엑스타시의 리듬을 타고 들어와 단박에 그들의 폐부를 찔러버렸던 것이다.
쾰른 초대전에 이어 다시 92년에는 프랑스의 마르셀 베르네힘으로 초대전은 옮겨갔다. 미술의 본거지 프랑스에서도 빛과 직선으로만 교직되는 한국의 단박 선법(禪法)은 황홀감으로 그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소문이 퍼져나가자 파리 근교의 그 수많은 화랑에서도 초대전 제의가 물밀듯 밀려왔다.
동양의 선적 광휘에 아우성치는 불란서인들을 박정하게 물리칠 수 없어서 파리 근교 시골 마을까지 찾아가 전시회를 가지는 신세가 되었다. 트럭 위에서 그림을 붙들고 파리의 시골길을 내달리던 그때가 우제길의 나이 사십대 후반 무렵이었다. 그는 인도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일본의 긴자와 후쿠오카, 프랑스, 독일, 뉴욕, 헝가리, 뉴멕시코 등을 숨 가쁘게 내달리며 오직 빛과 직선으로만 교접하는 한국의 정신세계를 세계에 뿌려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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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ㆍ문예비평가
그때 그 순간 / 미술 향한 집념 후배들 '귀감'
채 종 기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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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우제길 미술관에서 3년 정도 학예사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본 바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진정한 전업작가입니다. 정말 늘 식을 줄 모르는 창작열을 불태우십니다, 아침부터 일몰시까지. 그리고 밤에도 작품에 몰두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작품발표에도 적극적이시지요. 사람들에게 작품을 많이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정말 긍정적인 삶을 사시는 거지요. 또 그 만큼 전시회도 자주하십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언제나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전통 구상의 고장 남도의 극렬한 추상의 몰이해속에서도 오직 추상으로 일관해오신 것은 정말 눈물겨운 일입니다. 그 어렵고 외로운 시기를 오직 열정으로 버티어 온 겁니다. 정말 예전에는 추상을 전혀 그림 취급하지 않았어요. 그런 조건 속에서도 전업작가로 살아남으셨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지요. 그 만큼 추상작업에의 신념이 철저하셨기 때문이지요.
또 작업에 열정적이신 만큼 작품 관리도 정말 잘하십니다. 작품평이나 신문에 난 보도기사 등도 정말 잘 모아놓으셨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현주소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물며 중학교 때의 스케치북까지 보관하고 계십니다. 그때의 작업을 보시면서 지금의 성장을 가늠하시는 거지요.
전문적인 작업에만 몰두하시는 것이 아니라 문화상품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미술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증거지요. 예술만이 최고인 양 여기는 게 아니라 예술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시는 거지요. 즉 문화상품은 보통 사람과의 소통의 일환인 겁니다. 그렇게 생활 속의 미술을 추구하시는 거지요. 광주에서 최초로 사립미술관으로 등록하신 것만 봐도 얼마나 열린 삶을 사시는 줄 알 수 있죠. 전혀 개인적인 삶을 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가 이렇게 열린 삶을 살 수 있겠어요. 여상고에 교사로 재직하시던 시절의 별명이 우잠바 좌보증이랍니다. 그만큼 털털하게 잠바만 걸치고 다니신다고 해서 우잠바고, 주위 사람들의 어려움을 못보고 꼭 나서서 도와준다고 해서 우보증인 거지요. 정말 주위의 어려움을 못 참는 성격이십니다.
제가 우제길 미술관에 근무하면서 느꼈던 최고의 보람이라면 소외계층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였어요. 우제길 미술관에서는 1년에 꼭 한 번씩은 소외계층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장애인들을 초청해 무료 관람시키고 그들의 공예작품도 전시해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국제 판화 워크숍도 해마다 개최합니다. 국제적으로 역량 있는 작가들을 초청해 그들로 하여금 직접 비법을 공개하게 하는 것이지요. 미술관에서 작품 제작과정을 직접 시연해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들을 초청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노하우를 전수하게 하는 거지요. 이건 정말 지역미술발전을 위한 대단한 일입니다. 미술계의 어른으로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지요.
국제 워크숍은 서울이며 부산 등지에서 몰려올 정도로 정말 인기가 좋습니다. 그만큼 공헌도가 높은 거지요. 중국·일본·프랑스 유럽의 작가들 모두 초청해서 시연을 하게 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아예 단체로 관람을 올 정돕니다. 문광부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한다지만 어차피 사비가 많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지역의 어른으로서 행하는 굉장한 문화운동인 거지요. 국제적으로 특이하고 중요한 전시도 자주 하는데 저도 그룹전 할 때 작가로서 한번 참여한 적이 있지요. 정말 대단한 문화운동가며 세계적인 작가십니다. 세계성이란 이런 열정과 넓은 안목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안목으로 작업을 해나가시는 분이지요.
가질 때였다. 후배가 전시장에 찾아와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작품 스타일을 바꾼 건 아니지. 캄캄한 화면 속에 갇혀있는 것들을 조금 더 쏟아냈을 뿐이지."
모든 감동의 기반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감동으로 지나치더라도 자신에게만은 감동을 주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워낙 대작들이어서 전시장의 디스플레이는 하루 반나절이 걸렸다. 그 드넓은 '워커힐 미술관'에 채워진 자신의 작품 앞에서 제길은 기도했다.
자신의 감동이 관객들에게도 온전히 여울지기를. 그리고 전시가 끝나고 몇 개월이 지날 때까지 제길은 일체의 전시반응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보라매공원 내의 '한국 이동 통신' 대형 건물에 제길의 작품을 걸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가 받은 전시의 최초 반응이었다. 그렇게 보라매공원 이동통신 현관 양쪽에 7.5× 2.8m 대형 작품이 내걸리게 되었다. 자신의 감동이 그대로 전달된 것이었다. 워커힐 미술관의 초대전은 대성공을 거뒀고, 제길은 그때부터 국내의 대형 전시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진실과 감동은 언제나 가장 세계적인 것이었다. 그는 인류가 공유한 자산을 더욱 더 확대시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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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빛의 단박禪師 우 제 길 | |||||||||||||
평생 일군 작품세계 '우제길 미술관' 으로 승화 50년이상 추상미술 고행길로
우제길은 "예술에의 골몰,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재능이다."라는 생각을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전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작품에 매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좀 더 빨리 전업작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 의도된 창작물들을 좀 더 많이 탄생시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작가적 욕심에 내내 사로잡혀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보면 그 작은 틀 속에 어느 누구보다 커다란 우주를 품는 일을 평생 해왔으니 남자로서 꽤 괜찮은 일에 매달렸다는 생각도 든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모두는 하느님께서 준비해주신 인연의 결과물들이니 아무런 후회도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진보의 가장 선두에 서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조그만 보탬이 됐으면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바람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한 것, 캔버스는 작고 추상은 가장 큰 우주다.
선생님이 83년 '광주상고'에 근무하실 때 찾아갔습니다. 제가 82년까지의 서울생활을 마치고 조선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던 시절입니다. 당시 광주에서의 유일한 추상화가이셨고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작품에 매료됐기 때문입니다. 아주 친절하게 맞아주셨고, 그때부터 늘 가까이에서 모시게 됐습니다. 둘 사이에는 학연 등의 연고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단지 선생님의 추상작업이 좋아서 경외심이 일었고, 저 역시 추상작업을 하니 동질감이 일었던 겁니다. 가득 채웠는데 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영렬ㆍ박서보 등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모두 찾아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광주의 미술역량을 단판에 보여준 것이죠. 이런 뛰어난 실력과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지켜보면 그것은 부지런함과 집중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넘치면 주위를 적시는 것이다." 끊임없이 실행하는 가운데서 재능이 드러난다는 뜻이지요. 선생님은 판화도 조각도 설치와 영상작업도 아트상품도 하시는 분입니다. 미술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면서 자기세계를 구축한 유일한 분이라고 보면 맞을 겁니다. 선생님이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제가 옆에서 도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작업실 벽에 늘 이런 글귀를 붙여두십니다.
출처 - 전남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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