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한 남편이 수상쩍다.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나 시쳇말로 코드가 맞지 않다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툭 던진다. 앞뒤를 알고 보니 여자 동창생이 회사로 불쑥 찾아와서 골프장에서 머리를 올렸다며 자기 자랑만 떠벌리다가 갔다고 덧붙였다. 필드에 처음 나가는 걸 말하는 모양이다. 더군다나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로 돌싱(돌아온 싱글)이라며 귀찮아 죽겠다는 사설을 풀어놓는다.
“동창인데 잘 대해주지. 싫다고 표 낸 건 아니지.”
“당신이 더 수상해”하고 탱자 가시 같은 일침을 주려다 속 다른 말을 낭창하게 해주었다. 어깃장을 놓으며 실낱같은 변화 하나마저 놓치지 않을 태세로 그의 얼굴을 살펴본다. 눈길을 외면한 채 여자들은 나이 들면 하나같이 주책없다며 할 일이 생각난 듯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나이는 왜 들먹이며 모든 여자를 한통속으로 만드는 심보가 무엇인지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삼십여 년 만의 중학교 동창 모임을 연락받은 후 남편은 설레면서도, 객적은 마음으로 한 달여를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당일이 다다랐다. 그에게 깨끗한 양복에 화려한 넥타이도 갖추어 주며 몇 십만 원의 용돈까지 찔러 주었다. 평소에는 현관문 앞 인사가 고작인데 승강기 앞까지 나가서 잘 다녀오라며 벌꿀처럼 끈끈한 웃음도 얹어주었다. 승강기 문이 닫히자 난 꽤 괜찮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타향에서 지내는 외로움과 내세울 만큼 성공하지 못했다는 그의 자괴감을 평소에 읽어온 터이라 코끝이 찡해왔다.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이 지나가고 조강지처의 후덕함이 밀려오면서 스스로 도취해 버린 것이다.
내 고향 울진에는 유난히 폭설이 잦았다. 눈이 허리춤까지 쌓이는 날이 며칠간 이어지기도 했다.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할 무렵이었다. 안방과 부엌 사이로 낸 봉창에는 호롱불이 시집온 새색시처럼 앉아있고 호롱 심지에서는 그을음이 소록소록 피어올랐다. 지나간 달력 뒷면에 아버지가 적어주신 가, 갸, 거, 겨……, 나, 냐, 너, 녀……를 남매들은 대단한 고문(古文)인 듯 양반다리를 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가며 열심히 외웠다. 옆에서는 부모님께서 모처럼 다정하게 실을 감고 계셨다. 아버지는 연리지처럼 꼬인 실타래를 돌려 두 팔에 둥둥 걸고 어머니는 실패에 동동 감으셨다. 굵은 실타래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외할머니께서 부부의 정이 실처럼 오래도록 변함없기를 바라면서 반짇고리에 챙겨 넣어 주신 것이다. 이불 홑청에 수 놓인 목단꽃이 녹진한 훈기에 활짝 피면서 밤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때 인기척이 밖에서 들렸다. 눈이 이렇게 쌓이는 밤에 누가 찾아와 부르는 걸까. 벌컥 열린 문 앞에는 낯선 여자가 온통 흰 눈으로 덮인 채 부엌문을 흔들고 있었다. 부모님은 여자를 들어오라 하여 윗목에 앉혔다. 아랫목이 자글대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갑자기 뜨거운 곳에 오면 큰일 난다며 다독였다. 얼어버린 거무튀튀한 그녀의 몸을 수건으로 비벼주면서 어머니께 뜨거운 물을 준비하게 시켰다. 깔끔하고 까다로운 아버지 성격에 딱 어울리는 주문이었다. 그녀는 목욕을 안 하겠다고 우겼지만, 목욕을 해야만 재워 주고 밥도 준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난 그때 아버지의 눈웃음을 보았다. 그 눈빛은 기분이 좋거나 우리에게 짓궂은 장난을 할 때의 눈길과 닮았다. 우리 남매들은 잠자코 있었으나 눈동자는 호기심 가득 그녀를 쫓았다. 더운 김이 가득한 어둠으로 몸을 감춘 그녀를 어머니는 부엌에서 정성껏 씻긴 후 장롱 속에 개어둔 옷 한 벌을 내어 주셨다.
그녀는 생각보다 젊은 나이였다. 서른도 되지 못한 어머니보다 고작 두서너 살이 많은 나이였다. 방의 열기와 목욕물의 온기로 발그레해진 뺨은 오뉴월의 복숭앗빛이었다. 어머니는 양푼이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그녀에게 연방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 반찬 한 조각 남기지 않고 해치운 뒤에야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 사연을 풀어냈다. 그녀의 슬픈 듯 가라앉은 목소리는 무심한 듯 투박한 어머니의 목소리와 느낌이 달랐다. 잠시 후 아버지는 도시에서 대학까지 나온 그녀가 공부를 지나치게 한 나머지 정신이 살짝 나간 상태라고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다.
“우리 아이들 공부나 봐주다가 눈 녹는 봄에나 떠나소.”
아버지가 느닷없이 한마디를 툭 던지자 내 가슴은 미모사처럼 반응을 보였다. 평상시와는 다른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수초 사이로 숨어드는 피라미처럼 지나갔다.
다음날 눈발이 그쳤다. 찬바람은 여전히 뒤란에서 아우성을 쳤다. 실랑이 소리에 잠을 깼다. 윗방에서 어머니는 여자를 빗자루로 쫓고 그녀는 안 가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아침밥도 먹이지 않고 험한 길을 보낼 어머니가 아니었다. 찐 감자 몇 알을 보자기에 싸서 쥐여주며 야박하게도 그녀를 내모는 어머니는 내가 보지 못한 전혀 낯선 사람이었다. 그녀를 이모삼아 이것저것 배우며 노는 상상에 빠졌는데 다 망쳐질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낄낄거리기만 하셨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날 아침, 그녀는 결국 집을 떠났다. 하얗게 싸인 눈길 속으로 발자국이 하나둘 찍혀나갔다. 그녀를 보낸 며칠 후 장날이었다. 어머니는 왠지 불안해 보였고 장터를 다녀온 동네 어른께 이렇게 저렇게 생긴 떠돌이 여자를 혹 보았느냐고 물으셨다. 다음 장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모른다고 할 때마다 어머니의 표정은 진눈깨비를 맞은 암탉을 닮아갔다. 그런 어느 장날 누군가가 그녀를 보았다고 전해주자 그제야 겸연쩍음과 안도감이 교차하면서 이른 봄날처럼 환해지셨다.
오늘 내가 그런 마음이 된다. 여자 동창생에게 똑 부러지게 대하지 못하는 남편의 행동을 보니 못마땅하기만 하다. 내 발등을 내가 찍은 꼴에 은근히 심통이 나면서 기분 나쁜 징후가 불안하게 감지된다. 어머니도 그녀를 목욕시키면서 뽀얗게 드러난 그녀의 등을 보고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딱히 말하기 어렵지만, 마음 같으면 ‘혹 화사(花蛇)한 여자 아니야’ 하고 무식한 소리라도 내뱉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남편은 내가 오해의 그물에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처럼 잘 맞아떨어진 상황을 내심 즐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뜬눈으로 어머니가 보낸 밤은 아득히 멀어져 있다. 털끝만 한 실오라기도 엮이고 꼬이면 끝내 실타래가 된다. 떠돌이 여인을 보내면서 어머니는 잿빛 의심을 바람에 날리셨지만 난 지금 어정쩡하니 내가 꼬는 불안의 타래 속에 갇혀있다.
내 안의 여자를 가만히 다독이며 남편의 넥타이를 옷장에 건다.
첫댓글
추석 명절 즐겁게 보내셨나요? 이제 아침 저녁으론 찬기가 스며듭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