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여행이었다.
모름지기 전라남도 여수란 곳은 바다가 백미인데, 때마침 격상하는 태풍으로 여행 출발 전부터 불안한 조짐이었다. 많은 이들이 <여수 밤바다>노래에 취해 여수로 향했을 테고 나 또한 낭만 가득한 바다를 보기 위해 여수 여행을 준비했었는데.
다음으로 여행을 미루자 싶어 예약한 호텔을 보니, 지금 취소하면 한 푼도 환불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답변 뿐.
'에라 모르겠다, 그냥 떠나자'
하긴 날씨 안좋은 날 여행한 게 한 두번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운좋게 일기 예보가 빗나갈 수도 있고, 혹시 태풍이 오더라도 설마 3일 내내 비가 오진 않겠지라는 희망을 가지며 여수여행은 시작됐다.
비오는 여수엑스포역. 역앞에는 거북선 모형이 있다. 여수에는 이순신 장군 유적지가 많다.
하지만 여수엑스포역에 도착하니 이미 장대비가 시작되고 있었고 여수에 머문 내내 비는 계속 쏟아졌다. 여행에서 날씨란 누구랑 여행 가는지 못지 않게 중요한데 모처럼 떠나온 여행 내내 비만 봐야하다니, 하늘이 얄밉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여수 바다를 하루 종일 보기 위해(특히 밤 바다를) 큰 맘먹고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라운지가 있는 호텔도 예약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가장 저렴한 숙소를 예약할 걸 그랬나보다.
여수에서 꼭 봐야하는 향일암, 동백섬 등 관광지는 물론 좋았지만 그럴 때마다 한쪽으로는 계속 불만이 쌓여갔다. 시도 때도 없이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해야 하는 불편함이야 감수할 수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먹구름 잔뜩 낀 하늘과 우중중한 바다색깔 뿐이라는 사실은 짜증 그 자체였다.
'차라리 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빗소리나 들을걸!'
여수 어딜 가나 <여수 밤바다> 노래가 흘러나오지만 정작 가사처럼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는 낭만은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빨리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고만 싶었다.
여수의 마지막 날. 일찌감치 체크아웃을 하니 기차 출발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어디를 더 가볼까?
맘 같아선 빗속을 첨벙첨벙 뛰어다니느니 기차역 휴게실에 앉아 편하게 인터넷이나 하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수에 앞으로 안 오려고 생각했기에 아쉬우니 한군데라도 더 다녀오자 싶었다.
그렇게 가게 된 곳이 장도였다.
장도는 웅천동에 있는 육지와 연결된 섬인데 엑스포역이나 숙소에서는 좀 먼 곳이라 이번 여행 방문지 목록에서는 세모로 표시해 놨던 곳이다. 시간이 남으면 가고, 안되면 안가도 되는 여행지.
하지만 장도는 이번 여수여행에서 가장 잊지 못할 낭만적인 여행지가 됐다.
애꿎은 날씨만 탓하다 하마터면 떠나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아쉬웠을지.
장도 입구에 놓인 달팽이 조각상
장도는 2019년 GS칼텍스에서 지역사회공헌의 일환으로 만든 복합문화예술공원이다. 웅천친수공원이라는 시민공원과 다리가 연결되어 있지만 24시간 갈 수 곳이 아니다. 밀물 썰물에 따라서 개방시간이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밀물이 되면 다리가 물에 잠기다가 썰물이 되면 다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개방시간은 날씨에 따라 달라 예울나루 홈페이지에서 사전에 확인하고 가야한다.(예울나루는 문화공연장이다)
장도에 도착하니 운좋게 섬이 폐쇄될 때까지 한시간 가량 남아있었다. 장도 입구에 서있는 느릿느릿 달팽이의 조각과 예술의 섬 장도라는 표지판 너머로 아담한 섬이 보였다. 때마침 여행 내내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했던 비도 그치고 하늘이 조금이나마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잿빛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수줍은 여인의 모습처럼 살짝 살짝 드러나는 하늘과 바다의 색깔. 왜 하필 여수를 떠나려고 하니 날씨가 좋아지는건지.
다리 입구 초소에 있는 아저씨는 투박한 글씨로 섬 폐쇄시간을 붙여놓고 여행자들에게 몇 시까지 꼭 나오라고 일러준다.
예정시간보다 20분이나 앞선 시간이다.
"아저씨! 오늘 홈페이지에서 공지한 시간보다 더 일찍 다리가 잠긴다고 적혀있네요?"
“"뭐든지 미리 미리 하면 나쁠 거 없지 않겠수?"
물론 다리가 물에 잠기면 섬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음 썰물 시간에 맞춰 나오면 된다. 섬에는 카페, 전시관이 있어 시간을 보내기 어렵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난 기차 시간이 있기에 다음 썰물 때 까지 기다릴수가 없어 그 시간까지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장도 개방시간은 미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가야한다
장도 곳곳에 설치된 앙증맞은 조각상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스튜디오
전시관 및 카페
장도와 연결된 다리는 일반 다리와 달리 교각이 보이지 않아 마치 바다속 길을 따라 걷는 느낌이다. 상쾌하고 기분좋다. 언제 투덜댔는지 생각도 안날만큼 금새 여수가 사랑스럽고 낭만적이다. 여행에서는 기분도 참 변덕을 부린다.
예술의 섬인 만큼 섬 내에는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스튜디오와 아트카페, 전시관 등이 갖춰져있다. 일반 여행자들은 언제든지 카페와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다. 걷다보면 앙증맞은 조각상을 중간 중간 발견할 수 있는데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게 장도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장도는 나무와 숲이 잘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다. 그래서 여행자들 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도 많이 온다.
'동네에 이런 멋진 곳이 있다면 맨날 운동하러 나올텐데'
운동 안하는 사람들의 뻔한 핑계지만, 10분만 걸으면 이렇게 고즈넉한 풍경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운동이 즐겁지 않으랴.
폐쇄시간에 맞춰 섬을 나왔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야 만다.
그때 휴대폰 문자가 울린다. '태풍으로 인해 기차 운행 취소' 철도청의 안내 문자다.
이런! 10분만 일찍 문자가 올것이지. 그럼 장도에서 더 시간을 보냈을 텐데!
장도의 멋진 숲길
장도앞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