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 김동출 수필
홍시와 단감
겨울의 찬 기운이 스며들며 침잠하는 계절이다. 위쪽 지방에는 벌써 함박눈이 내리고 차가운 겨울 날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지만 따뜻한 남쪽 바다 가고파의 고장 이곳은 아직도 늦은 가을 풍경이 을씨년스레 남아있다. 옷깃을 세우고 과일 가게를 지날 때면 맨 앞줄로 내어 전시한 대봉감 홍시가 외진 산골 마을에서 자라난 내 발걸음을 불러세운다. 집집이 자연에서 거둬들인 먹거리가 가득한 초겨울 이맘때면 동네 사람들이 ‘감나무 집’이라 부르던 고향 집이 떠오른다.
고향 집 뒤란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5대조 할아버지께서 함양 고을 지리산에서 구해 와 심어 놓으신 ‘오래 감나무’였다. 소 두엄 밭에 뿌리를 박고 있어 해거리를 모르고 해마다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던 명품 감나무였다. 들판에 벼가 고개를 숙이며 누렇게 익어갈 때 감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도 주황색 고운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숨을 헐떡이며 산동네 집으로 달려와 감나무 가지에 걸어둔 장대로 홍시를 골라 먹는 재미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잘 익은 홍시를 골라서 먹고 나면 배가 불러 다시 학교를 향해 신작로 길을 달려가 공부하였던 추억의 그 날이 나이 들어갈수록 새롭기만 하다.
그 시절 재 너머 외갓집에는 우리 집에 없는 단감나무가 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일본에서 묘목으로 가져와 심은 것으로 감이 익으면 아이들 주먹만 한 크기의 골 단감이었다. 요즘 김해 진영에서 생산되는 단감과 같은 종이었다. 추수가 끝난 가을이 오면 동생과 함께 단감 먹을 욕심으로 외갓집을 자주 오갔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외손자인 우리 형제를 살갑게 맞아주셨다. 우리가 외갓집 사립문을 들어서며 “외할아버지”하고 부르면 곰방대를 손에 든 외할아버지께서는 버선발로 섬돌에 내려서며 어린 우리 꼬마 형제를 반겨주셨다. 담배 내를 풍기는 할아버지께서는 어머니가 선물로 보자기에 싸주신 ‘풍년초’ 담배를 받으시며 껄껄껄 웃으셨다. 우리 꼬마 형제가 외갓집을 찾은 까닭을 알아챈 외할아버지께서는 곧바로 단감나무 아래로 가셔서 대나무 장대로 단감을 따서 손에 쥐여주신 것은 씻을 것 없이 깨끗하였다.
우리 외갓집 단감은 고향 집 마을 김 영감님이 보물처럼 감시하며 우리 형제들을 침 흘리게 만든 씨알 작은 그 집 떫은 단감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크고 맛도 좋았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향과 촉촉한 과즙이 혀끝을 감미롭게 하였다. 살은 부드럽고 육즙이 풍부하여 씹을 때마다 달콤한 풍미가 입안에 넘쳐났다. 그 달콤한 맛은 험한 산길을 고생하며 넘어온 우리 형제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남음이 있었다. 철없는 시절 그때 나는, 외갓집 단감나무를 통째 파서 우리 집으로 옮기고 싶은 욕심이 꿈틀거렸다. 그렇게 단감이 익는 가을이면 우리 형제는 자주 외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 단감 먹을 욕심이었지만 인자하신 의령 옥(玉)씨가 외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곁에 두신 친손주보다 자주 못 보는 외손주인 우리를 더 반겨주셨다.
어린 시절 늦가을 내 고향 집에서는 ‘오래 감’을 따서 홍시로 만들어 겨우내 어른들의 간식으로 먹었다. 해거리를 모르는 우리 집 ‘오래 감나무’는 해마다 네다섯 접이 넘는 알 굵은 감을 주렁주렁 안겨주었다. 유독 감을 좋아하셨던 할머니께서는 ‘오래 감’이 저녁 노을빛으로 곱게 익으면 아랫동네 막내 삼촌을 불러서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으로 서너 개 남겨두고 죄다 따서 대청마루 광 속 큰 오지단지에 넣어 홍시로 만들었다. 먹거리가 귀했던 그 시절에 우리 집 ‘오래 감’ 홍시는 귀한 손님 접대용 음식이었다. 삼촌과 고모님이 결혼할 때 사돈댁에 보내는 이바지 음식에도 넣어 보내기도 하였다. 고향 집 먹거리 창고인 광은 열쇠로 잠겨 좀처럼 열기 힘들었다. 할머니가 열쇠를 속바지 속 주머니에 차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꾀돌이였던 나는 생쥐처럼 수시로 드나들면서 한 개씩 꺼내 먹곤 하였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그러는 줄 ‘알고도 모르는 체하셨다’라는 것을 두 자매의 할아버지 되고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손주 사랑 넉넉한 할머니 마음이었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에 섰다. 지인이 보내준 대봉감 선물을 받고 철없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한참 동안 눈감고 의령 玉 씨 외할아버지와 진양 鄭 씨 마리아 할머니께서 보여주신 따뜻한 사랑과 배려를 담담히 떠올려 보았다. 인자하신 외할아버지께서 외손주인 우리 형제를 귀하게 여기시고 단감나무 아래에서 커다란 단감을 따 주시며 껄껄 웃으시던 인자하신 모습과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 외할아버지의 따뜻한 품에서 느꼈던 사랑과 환대는 나의 인성 발달과 성장 과정에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 한평생 사랑을 품고 교육자로 봉사할 수 있었다.
어릴 적 광 속에 꼭꼭 숨겨두신 홍시를 몰래 꺼내 먹는 걸 아시면서도 모르는 채 눈감아 주셨던 할머니의 너그러움은 생가의 감나무 꼭대기에 남겨두었던 까치밥 같은 베풂과 나눔의 사랑으로 자라는 동안 나의 정서를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이제는 먼 하늘나라에서 자손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계실 나의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진실한 사랑. 그 깊은 뜻을 묵상하며 고등학교 고문(古文) 시간에 배운 조선 조 시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시조 ‘조홍시가(早紅柹歌)를 조용히 읊어본다. “반중(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은 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노라.”
2024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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