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은 하나님을 안 믿거나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진 최초의 참극은 형제간의 살인극이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믿는 가인이 하나님을 그분의 뜻대로 믿는 아벨을 죽인 비참한 참극이다. 아담의 장자 가인은 부모님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창세기 3장 15절의 복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성서적 제사와 성경 밖의 제사의 차이는 그 속에 복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된다. 가인의 제사는 정성이 부족한 제사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 밖의 제사들이 더 고급스럽고 더 많은 돈이 들고 더 정성이 들어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복음 대신 인위적이고 인본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제사는 행위 중심이다. 그러나 하나님 제사는 철저하게 행위가 아닌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의 어떤 공로나 노력이 그 제사를 열납하는 동기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다.
그 제사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가? 복음이 담긴 제사인가가 제사의 행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인은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에 대한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종교는 단 두 가지로 구분된다. 복음적인 종교와 인본적인 종교다. 같은 기독교라고 해도 그 신앙이 자기 마음대로 섬기는 가인의 신앙인지 아니면 성경의 말씀대로 섬기는 아벨의 신앙인지 구분된다.
그런데 세상에서 늘 가인의 신앙이 주류였다. 가인처럼 세상을 따르고 자신의 감정과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무리가 언제나 더 강하고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벨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탄압했다. 애굽이 그랬고 바벨론과 페르시아 그리고 헬라와 로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이들을 박해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계속 반복될 것이다.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요 16: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주셨다. 셋은 아벨을 대신하여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정당한 아들로 인정되었다. 이는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8)고 하심으로 하나님이 믿음의 계보를 셋으로 삼으셨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을 믿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벨의 길, 셋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 없는 제사를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아벨이 되게 하소서. 인간의 전통과 방법이 아니라 오직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시고 세상에서 주류가 아니라 말씀을 선택하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