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오 엄청난 힘이여!
천만 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침묵을 닮은 소란 속에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가 다시 닫고,
포말로 부서진 파도는 바위에서 용솟음친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부숴 버려라 네 희열의 물살로
삼각돛배들 모이 쪼던 저 조용한 지붕을!
(시의 일부분 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시다.
지중해 인근 남프랑스에서 성장한 발레리에게 바다는 시의 원천이었다.
그는 바다가 보여주는 격정을 시에 종종 담아냈다. 이 작품은 그중 대표작이다.
시를 읽으면 일렁거리는 파도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내가 그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의 백미는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는 외침이다.
매일경제 | 기사입력 2008.05.21 18:20
Le vent se lève! . . . il faut tenter de vivre!
폴 발레리 [1871.10.30~1945.7.20]
20세기 전반 프랑스의 시인·비평가·사상가.
말라르메의 전통을 확립하고 재건, 상징시의 정점을 이뤘다.
20세기 최대 산문가의 하나로 꼽힌다.
저서는《매혹》,《구시장》,《잡기장》,《영혼과 무용》,《외팔리노스》등이다.
원어명 : Ambroise-Paul-Toussaint-Jules Valéry
국 적 : 프랑스
출생지 : 프랑스 세트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 《영혼과 무용》(1921), 《나무에 관한 대화》(1943)
남프랑스의 항구도시 세트에서 출생하였다. 세관 검사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코르시카 출신이고 어머니는 제노바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지중해는 그의 전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3세경부터 시를 짓고, 문학서적을 탐독하였다. 18세부터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이듬해에 우연히 파리 사람 피에르 루이스를 알게 되어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가졌으며,
또 필생의 친구 앙드레 지드와 스승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소개되어,
유망한 시인으로서의 기대 속에 순탄한 문학생활이 시작되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20세에 지적(知的) 혁명을 경험하여 지성(知性)의 우상을 숭배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시작(詩作)의 포기와 함께 추상적 탐구에 몰두하여, 20년 동안의 침묵시기를 가졌다.
죽을 때까지 새벽에 일어나, 자신을 위하여 습관적으로 쓴 전서(全書)
《잡기장(雜記帳)》 270책은 1894년부터 시작되는데,
그가 죽은 후 29권의 사진판으로 간행되었다.
3만 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책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지목되어 지금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파리에서 일정한 직업 없이 지내면서, 논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에 관한 서설》(1895)
《테스트씨와의 하룻밤 La Soirée avec Monsieur Teste》
(1896, 30년 후에 다른 산문작품을 덧붙여 《테스트氏》로 간행)
《독일의 제패(制覇)》 등을 발표하였다.
발레리의 후일의 모든 작품은 이들 논문의 충실화와 발전이며,
그 초석 위에 이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육군부의 관리가 되었으며, 1900년에 결혼한 후로는 한가롭게 개인비서로 일하면서,
주로 사색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4년간의 퇴고(推敲) 끝에 장시(長詩) 《젊은 파르크 La Jeune parque》(1917)를 발표하였다.
이어 전통적 작시법(作詩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으며,
《해변의 묘지》 《나르시스 단장(斷章)》 등을 비롯한 20여 편의 작품은
《매혹 Charmes》(1922)에 수록되고,
청년시대의 시들은 《구시장(舊詩帳)》(1920)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들 작품은 말라르메의 전통을 확립하고 재건한 상징시(象徵詩)의 한 정점(頂點)이요,
프랑스 시(詩)의 한 궁극이라고 인정되어, 일약 대시인의 이름을 얻었다.
그 후로 문필생활에 전념하여 거의 산문작품으로 활동을 계속해 나갔으며,
20세기 최대의 산문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산문작품은 다방면에 걸치며 평론이 가장 많다.
논제(論題)는 지적 사상(知的事象) 전반에 이르며,
문학 ·예술 ·철학 ·과학 등에 관한 논고(論考)와 현대문명에 관한 고찰이 주요부분을 이루는데,
《바리에테 Variété》(5권, 1924∼1944)를 대표작으로 하여,
《예술론집》 《현대세계의 고찰》 등이 있다. 《영혼과 무용》(1921)
《외팔리노스 Eupalinos》(1923) 《나무에 관한 대화》(1943)의 3부작은
19세기에 두절된 대화형식을 부활 ·완성시킨, 사상과 언어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이 높다.
유일한 극작인 《나의 파우스트 Mon Faust》는
1940년에 자발적으로 시작한 미완성 작품이며, 만년의 사상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밖에 악극 ·산문시 ·소편(小編) 이야기가 있으며, 경묘하고 예리한 서간문도 주목된다.
1925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그 후로 프랑스의 공식적인 지적(知的) 대표로 추앙되었다.
유럽 각지에서 강연하고, 각종 단체와 학회 ·회의 등의 회장 ·의장을 맡아보았다.
또한 국제연맹에도 관계하여, 지적 협력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937년 니스에 지중해 중앙연구소가 창설되자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37년부터 생애를 마칠 때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시학(詩學) 강좌를 하였다.
그가 죽자 드골 정부는 국장(國葬)으로 그를 예우하였으며,
고향의 ‘해변의 묘지’에 안장하였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세트에서 태어나 몽펠리에 대학을 졸업했다.
홀로 습작을 하던 중 1890년 몽펠리에 대학 개교 기념 축제에 우연히 만난
피에르 루이스를 통해 지드를 알게 되었고 말라르메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뒤에 파리로 이주하여「테스트 선생과의 저녁」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방법론 입문」등의 글을 통해 깊이 있는 사고와 필력을 과시했으나,
절필하고 무려 20여 년간 문학활동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뒤에 프랑스 시에서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장시
「젊은 파르카 여신」을 발표하고, 대표작「해변의 묘지」와「나르시스단장」등을 담은
시집「매혹」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밖에도 유럽정신의 회복을 주장한 일련의 문명 비평과 철학적 성찰,
시학의 새로운 개념 정립을 시도한 시론, 문학비평 등도 발표했는데,
이런 글들은 「바리에테」「요즘의 세상을 바라봄」등에 실렸다.
또한 플라톤의 대화 형식을 부활시킨
「외팔리노스 또는 건축가」「나무에 대한 대화」「고정관념」등도 발표했다.
발레리의 전체적인 사상은 말년의 미완성작「나의 파우스트」와
평생에 걸친 성찰의 결실인 작업 공책 모음 「카이에」등에 담겨 있다.
1945년 세상을 떠난 발레리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세트 해변의 묘지 묻혔고
드골 정부는 국장으로 그를 예우했다.
----------
폴 발레리 Paul Valery (1871-1945)는
신앙적 절대주의자인 폴 클로델과는 대조적인 위치에서
20세기 프랑스 전반의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난프랑스 지중해안 세트에서 출생했는데
아버지는 코르시카,어머니는 이탈리아의 제노아 출신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 황혼의 땅인 북방 유럽인과는 다른
지중해 정신을 타고났고 그 속에서 자라났다.
지중해 정신이란 모호하고 신비하고 격정적인 정신에 비하여
명쾌하고 지성적이며 정적인 정신을 말한다.
그는 몽펠리에 법과 대학에서 수학했는데
이 동안에 우연히 피에르 루이스를 만나 사귀게 되고
그의 주선으로 앙드레 지드, 말라르메 등을 알게 된 일은 그의 생애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때 이미 시를 쓰고 있었고 이 시들은 당시 전위적인 문예지에 발표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의 교우 관계로 보나 타고난 재질로 보아
그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한 듯했다. 즉 문학 특히 시의 길이었다.
그러나 1892년 10월의 어느 날 밤, 그는 이상한 거의 계시와 같은 심적 동기로
일체의 문학이나 시작을 버리고 지적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정서적인 예술 활동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지적 활동이나 엄격한 사고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든 문학이나 시작에서 손을 떼고 사색과 성찰의 생활로 들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사고에 대한 훈련 및 과학적 연구에 몰두한다.
이때에 그는 파리에서 처음에는 육군성, 후에는 아바스 통신사 사장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매일 새벽 5시부터 출근시까지, 그리고 시간만 있으며 자기 방에 칩거하여
논리와 추상적 과학 방법의 연구와 훈련에 정력을 쏟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17년 동안 문학이나 창작 방면에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추상적인 과학적 연구 방법에 전념했는데 이 동안에 얻은 지적 작품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 서론>, <테스트 씨와의 저녁 시간> 등이다.
그가 문학 창작을 중단했다고 해서 예술계와 접촉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말라르메가 죽기까지 그는 그의 가장 충실한 제자였고,
루이스, 지드, 에레디아 등의 작가들과 자주 만났으며,
또한 유명한 화가 드가, 르누아르 등과도 교분이 있었다.
또한 자주 음악 특히 글룩이나 바그너의 오페라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폭넓은 취미와 접촉이 후일 그의 탁월한 미학이나 예술론의 바탕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의 속에서 잠자고 있던 시인이 다시 깨어난 것은
그 후 20년이 지난 1913년 그것도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즉 '지드'와 '갈리마르' 출판사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발레리는
드디어 젊은 시절에 써두었던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출판하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 첫 시집을 완성하기 위해 단시 한 편을 더 쓰기로 했다.
이 단시가 유명한 <젊은 여인 파르크>이며,
이 시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512행의 장시가 되었으며,
이 시를 깎고 다듬는 데 발레리는 5년이란 긴 세월을 바쳤다.
결국 이 시는 단독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난해한 것이었으나 그 성공은 그만큼 경이적이었다.
그는 모든 지적 엘리트로부터 세기적 시인으로 인정되었고,
여기 자극되어 그는 다시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신중하며 작품에 완벽을 기하는 그는 결코 다작이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그의 걸작이라고 하는 '해변의 묘지'도
<젊은 여인 파르크>가 발표된 지 3년 후에야 발표되었다.
발레리는 이 시를 비롯하여 20세 전후의 젊은 시절 그가 써 발표했던 시들
약 20편을 합쳐 같은 해 첫 시집 <옛 시의 앨범>을 출판했다.
이 시들은 약 30년 후에 빛을 본 것이나
이 가운데는 이미 발레리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시들이 들어 있으며
그 중 많은 시가 아직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다시 1922년 그가 <젊은 여인 파르크> 이후에 쓴 시들을 모아
<매혹>이란 표제로 그로서는 최후의 시집을 출판했다.
이 두 권의 시집으로 그는 모든 사람이 공인하는 '현대 시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된 것이다.
시집 <매혹>을 계기로 시인으로서의 그의 창작 활동은 끝나고
이후부터 발레리는 지성인의 대표, 현대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유명한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의 논문과 수기를 다투어 싣고
프랑스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의 저명한 학회나 단체듥로부터 초청을 받아
많은 강연과 주제 발표를 했다. 이러한 논문과 수기와 강연이 편집되고 출판되어
20세기 전반의 사상계와 정신계에 깊은 통찰과 많은 시사를 남겼다.
중요한 작품으로 <바리에테> 5권, <있는 그대로> 2권,
<현세계에 대한 고찰>, <예술론> 등이 있다.
만년에 그는 프랑스의 국가적 시인이며 국제적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다.
1925년에는 아나톨 프랑스의 뒤를 이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고,
1924년에서 1934년까지 10년 동안 펜 클럽 회장이었다.
1935년에는 의장으로 국제 연합 제5차 예술 학문 회의를 주재했고
1939년부터 죽기까지 콜르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되어 시학 강좌를 맡았다.
이는 시인에게는 처음 있는 영예였다.
제2차 세걔 대전 독일군 점령 시절 그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국민 작가 위원회에 소속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최후의 작품이며 독일 점령군 치하의 어두운 심경을 쓴 것이
<나쁜 생각, 기타>라는 작품이다.
심신이 극도로 쇠잔한 발레리는 해방된 다음 해인 1945년 병을 얻어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정부에서는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거행했으며
그의 유해는 그의 소망대로 세트의 해변 묘지에 묻혔다.
시인으로서의 발레리는 보들레르, 말라르메를 잇는 심미적 상징주의 계보에 속하나,
시의 창작도 지적 작업의 소산이며 엄밀한 방법에 의해 제작된다는 그의 주장대로
주지적이며 기교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그에 따르면 시는 산문과 달라서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 감흥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시는 언어가 가진 모든 능력을 구사하여
독자의 마음 속에 어썯 미의 감각, 조화의 세계를 낳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시인은 말의 모든 힘
(음, 리듬, 음률, 낱말과 낱말의 접근과 대조, 이미지, 상징, 비유 등등)을 구사하여
이러한 미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기하학자, 건축가, 지성인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영감이나 정열이 아니라
맑은 의식과 각고면려하는 노력이라고 했다.
"나는 무아 상태에서 번갯불을 기다리느니보다
맑은 정신, 의식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의 마음대로 반짝거리는 불꽃을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시론은 말라르메의 시혼과 더불어
세계 제2차 대전 후의 프랑스 시단에 중요하고 깊은 영향을 주었고
주지적 심미파에 속하는 많은 시인들은 그들의 시적 창작 활동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이 두 스승에게서 배우고 있는 형편이다.
죽을 때까지 새벽에 일어나, 자신을 위하여 습관적으로 쓴 전서(全書)
《잡기장(雜記帳)》 270책은 1894년부터 시작되는데,
그가 죽은 후 29권의 사진판으로 간행되었다.
3만 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책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지목되어 지금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파리에서 일정한 직업 없이 지내면서, 논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에 관한 서설》(1895) 《테스트씨와의 하룻밤 La Soirée avec Monsieur Teste》(1896, 30년 후에 다른 산문작품을 덧붙여 《테스트氏》로 간행) 《독일의 제패(制覇)》 등을 발표하였다.
발레리의 후일의 모든 작품은 이들 논문의 충실화와 발전이며, 그 초석 위에 이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육군부의 관리가 되었으며, 1900년에 결혼한 후로는 한가롭게 개인비서로 일하면서, 주로 사색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4년간의 퇴고(推敲) 끝에 장시(長詩) 《젊은 파르크 La Jeune parque》(1917)를 발표하였다. 이어 전통적 작시법(作詩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으며, 《해변의 묘지》 《나르시스 단장(斷章)》 등을 비롯한 20여 편의 작품은 《매혹 Charmes》(1922)에 수록되고, 청년시대의 시들은 《구시장(舊詩帳)》(1920)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들 작품은 말라르메의 전통을 확립하고 재건한 상징시(象徵詩)의 한 정점(頂點)이요, 프랑스 시(詩)의 한 궁극이라고 인정되어, 일약 대시인의 이름을 얻었다.
그 후로 문필생활에 전념하여 거의 산문작품으로 활동을 계속해 나갔으며, 20세기 최대의 산문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산문작품은 다방면에 걸치며 평론이 가장 많다. 논제(論題)는 지적 사상(知的事象) 전반에 이르며, 문학 ·예술 ·철학 ·과학 등에 관한 논고(論考)와 현대문명에 관한 고찰이 주요부분을 이루는데, 《바리에테 Variété》(5권, 1924∼1944)를 대표작으로 하여, 《예술론집》 《현대세계의 고찰》 등이 있다. 《영혼과 무용》(1921) 《외팔리노스 Eupalinos》(1923) 《나무에 관한 대화》(1943)의 3부작은 19세기에 두절된 대화형식을 부활 ·완성시킨, 사상과 언어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이 높다.
유일한 극작인 《나의 파우스트 Mon Faust》는 1940년에 자발적으로 시작한 미완성 작품이며, 만년의 사상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밖에 악극 ·산문시 ·소편(小編) 이야기가 있으며, 경묘하고 예리한 서간문도 주목된다. 1925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그 후로 프랑스의 공식적인 지적(知的) 대표로 추앙되었다. 유럽 각지에서 강연하고, 각종 단체와 학회 ·회의 등의 회장 ·의장을 맡아보았다. 또한 국제연맹에도 관계하여, 지적 협력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937년 니스에 지중해 중앙연구소가 창설되자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37년부터 생애를 마칠 때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시학(詩學) 강좌를 하였다. 그가 죽자 드골 정부는 국장(國葬)으로 그를 예우하였으며, 고향의 ‘해변의 묘지’에 안장하였다.
[출처] 폴 발레리 [1871.10.30~1945.7.20]는 누구인가? |작성자 시인광장
[출처] <해변의 묘지> _ 폴 발레리|작성자 에스더뱅큇
폴 발레리 - 해변의 묘지(전문)
Paul Valéry - Le Cimetière Marin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정오는 여기에서 불길로 바다를 짠다.
언제나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상이여!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지식이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단순한 사원,
고요의 덩어리,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 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그 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눈,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건축,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이여!
단 한번의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사원,
이렇게도 순수한 데까지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지극한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쾌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하늘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나약한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고(至高)의 횃불에 몸을 맡긴 영혼이여,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너를 가장 순수한 자리에 올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맥없는 그림자의 절반을 전제한다.
오 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공허와 순수한 사건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드높은 저수조의 메아리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不在)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광명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충실한 바다는 여기 내 무덤들 위에 잠든다!
빛나는 암캐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쫓아내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띠고 쓸쓸히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헛된 꿈을, 호기심 많은 천사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태만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모든 것은 불타고 흩어져,
어느 가혹한 본질을 가진 대기 속에 흡수된다
부재에 도취하는 인생은 드넓게 펼쳐지고
고초는 감미로워지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린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움직이지 않는 정오는
자신 속에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동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너의 내부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나의 뉘우침도, 나의 의혹도, 나의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망령들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 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영혼들은 어디 있는가?
눈물이 솟아나는 곳에 유충들이 기어간다.
간지럼 타는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장난하는 어여쁜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번들거리는 피,
마지막 공물, 그것을 지키려는 두 손,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유희(遊戱)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빛깔도 없는 덧없는 꿈을?
그대 노래하려는가 그대 한줄기 연기로 사라질 때에도?
가거라!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 나고,
성스러운 초조함도 이렇게 죽어간다!
검게 빛나며 깡마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허위 그리고 경건한 책략이여!
그 누가 모르랴, 그 누가 거절하지 않으랴,
이 텅 빈 두개골, 이 영원한 웃음을!
땅 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인 없는 머리들이여,
삽으로 퍼 올린 하 많은 흙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네 발걸음을 휘청거리게 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구더기들은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는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날고 또 날지 않는 날개 돋힌 그 화살로!
너는 나를 꿰뚫었구나!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다!…… 곧추 일어서라! 연속되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태어나는 바람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짜디짠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그 영혼을 다시 용솟음치게 하라!
그렇다! 본디 착란하는 대해(大海)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그리스 병사들의 외투여,
이 같은 고요 속의 소동에
반짝이는 네 꼬리를 물어뜯는,
스스로의 푸른 육체에 취한 절대적인 히드라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 또 다시 닫는다.
가루가 된 파도는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단배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이 잠잠한 지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