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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통 제2권 목통(目通)
1. 물체와 빛깔이 눈동자에 비친다
눈은 한 몸의 들창이요 눈동자는 들창의 구경(球鏡 볼록 거울)이다.
밖에 있는 모든 빛깔과 모든 형체가 나타나는 대로 눈동자에 와 비친다. 마치 복판이 볼록한 구면경이 능히 물체의 모양을 거두어 모으듯이, 큰 것을 비추어 작게 만들므로, 비록 큰 산악(山岳)이라도 하나의 점인 동자에 거두어 모으며, 산이나 뫼ㆍ풀ㆍ나무ㆍ바위ㆍ돌까지도 이리저리 굴리어 찾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사람의 모양을 대하면, 머리ㆍ허리ㆍ손ㆍ발ㆍ귀ㆍ눈ㆍ입ㆍ코에서 눈썹ㆍ머리털 같은 섬세한 것도 이리저리 굴리어 자세히 살피면 모두 눈동자에 갖춰 보인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면 창창(蒼蒼)하게 쌓인 기(氣)와 떠도는 편운(片雲), 밝게 비치는 해ㆍ달과 별들이 모두 눈동자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물체가 보이는 것은 눈의 힘이 물체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물체의 모양과 빛깔이 눈동자에 와서 비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동자가 맑으면 비치는 것이 다 맑고, 눈동자가 흐리면 비치는 것이 다 흐리다.
그러나 안에 있으면서 전후의 경험과 이해를 추측하는 것은 곧 한 몸의 신기(神氣)가 통해서이다.
신기와 눈동자는 하나의 기(氣)인지라, 이것을 능히 통하면 눈동자에 있는 물형(物形)이 곧 신기의 물형이며, 신기의 물형이 곧 눈동자의 물형이다. 신기의 물형은 염착(染着)이 깊어 오래되어도 잊혀지지 않고, 눈동자의 물형은 염착이 얕아 지나자
마자 곧 잊어버린다. 아무리 자주 와서 비친 물체라도 신기의 통함이 없으면, 비치는 대로 곧 잊혀진다.
2. 대기를 건너와서 비춘다
눈앞을 가리고 막는 것은 물형(物形)만은 아니요, 맑은 천기(天氣 대기)도 또한 능히 가리고 막는다.
기가 쌓인 것이 멀고 두터우면 먼 곳의 물체가 능히 눈동자에 와서 비칠 수 없고, 가로막힌 기가 가깝고 얇으면 물체의
빛깔이 능히 와서 비치지만, 어떤 것은 또렷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흐리기도 하다.
또 낮이 되어 기가 밝으면 능히 멀고 가까운 물체의 빛깔이 와서 비칠 수 있으나, 밤이 되어 기가 검으면 가까운 물체도
와서 비칠 수 없다.
여기에서 기가 가리고 막는다는 것, 또 그것이 검을수록 더욱 심하다는 것을 증험할 수 있다.
만약 등불이나 촛불을 켜서 밝은 빛을 빌려 물체의 빛깔을 드러나게 하면 그 물체의 빛깔이 눈동자에 와서 비칠 수 있다.
여기에서 외기(外氣)가 밝음을 얻어 물체를 드러내어야 물체가 와서 비친다는 것을 증험할 수 있다.
범인들은 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오직 물체의 형상만이 가리고 막는 것인 줄을 알았지 기도 가린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또 눈의 힘이 물체를 비추어 형상을 나타낸다고 말하고, 물체의 형상이 눈동자의 구정(球精 수정체)에 와서 비쳐 신기에
염착(染着)되어 통하는 줄은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안통(眼通)의 이치를 그르쳐서 마침내 분분함을 이룬다.
3. 보이는 지름은 실제 지름보다 짧다
거울이 물체를 비추는 것은 눈이 물체를 비추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무릇 거울 모양에 복판이 오목한 부경(釜鏡 오목
거울)을 눈에 가까이하면 작은 영상을 넓혀서 크게 만들며, 거울 모양에 복판이 볼록한 구경(球鏡)을 눈에 가까이하면
큰 영상을 줄여서 작게 만든다.
사람의 눈 모양이 공처럼 둥글고 눈동자가 비록 작지만 역시 공처럼 둥근 모양이기 때문에, 와서 비치는 어떤 물체의 형상
도 실제보다는 작게 마련이다. 가까운 데 있는 물체는 차이가 적으나, 먼 데 있는 물체일수록 그 차이는 차츰 커진다.
이러한 이치는 경험도 있도 증거도 있어 실로 명백한데, 이러한 이치를 옛사람이 혹 논급한 적이 있었는가.
역산가(曆算家)가 멀거나 가까운 물체의 크기를 논할 적에, 눈을 가지고 각(角)을 만들어 가까운 데 있는 물체의 양쪽 끝과 선을 긋고, 또 먼 데 있는 물체의 양쪽 끝과 선을 그어 각각 하나의 각도를 만들면, 먼 데 있는 것은 형체는 비록 크지만
각도가 작아 형체 또한 작아 보이며, 가까운 것은 형체는 작지만 각도가 커서 형체 또한 크게 보인다.
이 이치는 밖에 있는 물체에 있어서는 명백히 증거할 수 있지만, 눈으로 볼 때 차이가 미세한 경우에는 부득이 그 근본을
바루지 않을 수 없다.
대개 눈의 시선을 표(表)에 의하여 한쪽 끝에 두면 별로 큰 차이는 없겠지만, 만약 표에 의하여 양쪽의 선을 취한다면 보이
는 지름은 실제의 지름보다 반드시 짧다.
모름지기 자로써 10보(步) 밖의 물체를 실험하여, 보이는 지름이 실제의 지름보다 몇 치 몇 푼이 짧으며, 20보 밖에 있는
물체는 실제의 지름보다 몇 치 몇 푼이 짧은지 조사하여 그것으로써 일정한 비율을 만들면,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물체의 보이는 지름과 실제의 지름을 추측할 수 있다.
또 눈동자의 모양은 볼록하게 둥그냐 편편하게 둥그냐의 구분이 있어 사람에 따라 같지 않으며, 또 물체와의 사이에 있는
기의 뒤섞임과 흔들림이 때에 따라 다르니 여러 번 헤아리고 자세히 살펴야만 오류를 면할 것이다.
4. 눈동자는 내외를 출입하는 관문이다
한 방 안에 틈을 남기지 않고 장막을 빙 둘러 치고, 오직 창에 작은 구멍 하나를 뚫고 유리눈을 붙이면, 밖으로부터 나타
나는 초목(草木)과 조수(鳥獸)가 모두 방안에 비치는데, 그 지나가는 햇무리와 그림자에 실내의 기가 온통 움직인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눈 안에 나타나는 빛은 능히 한 몸의 신기로 하여금 따라 응하게 하여 모두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간혹 신기가, 심상히 여겨 조금 응하거나 전혀 망매(罔昧)하여 응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나타난 빛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그 선악(善惡)과 이해(利害)를 알게 된다면, 비록 그 기미(機微)가 순간적으로 나타나더라도, 선(善)과 이(利)가 됨을 알아
신기가 기꺼이 움직이고, 악과 해가 됨을 알아 신기가 놀라 움직이며, 선악도 이해도 없음을 알아 신기가 아득하게 응하여 움직이지 않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눈동자가 영상과 빛깔을 출입하게 하는 관문과 같은 인후(咽喉)가 되는 까닭이다.
바깥에 널리 퍼져 있는 형체와 빛을 눈동자로 거두어 안으로 모아 들여 일신(一身)의 신기에 두루 습염(習染)하게 하고,
또 능히 제규 제촉(諸竅諸觸)이 얻은 경험을 거두어 모으는 것도 눈동자를 바깥과 통하게 함으로써 온갖 사물(事物)과
부합됨을 증명한다.
5. 시선(視線)을 미루어 쓰다
눈동자에 보여지는 범위는 비록 넓지만, 분명하고 자세하게 살필 수 있는 것은 한 점에 불과하다.
이 점은 물체의 모양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물체의 평면이 구면(球面)으로 된 눈동자에 비치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마치 둥근 구슬을 책상 위에 놓으면 그 접하고 있는 부분은 한 점에 불과한 것과 같다. 만약 눈동자를 굴려 물체의
변(邊)쪽을 향하면 그 변이 눈동자에 비치어 점을 이루는데, 이 점에서 물체의 변을 향하여 허선(虛線)을 이루면
이 허선이 바로 시선이다. 다시 눈동자를 굴려서 물체의 위아래ㆍ좌우변ㆍ중심을 향해도 모두가 시선을 이룰 수 있다.
사람은 한 쌍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이 한 쌍의 눈동자가 하나의 표(表)을 아울러 보면, 이 표가 한 쌍의 눈동자에 고루
비치어 각시선(角視線)을 이룬다.
또 각(角)의 뒤에는 대각시선(對角視線)을 이루어, 표의 앞뒤에 ×자의 교차 시선을 이룬다. 왼쪽 눈동자를 가리고 오른쪽
눈동자만으로 보면, 전각(前角)에는 왼쪽 시선은 나타나지 않고 오직 오른쪽 시선만 있으며, 후각에는 오른쪽 시선은 나타
나지 않고 오직 왼쪽 시선만 나타난다.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 눈만으로 보면, 전각의 왼쪽 시선과 후각의 오른쪽 시선만 보이고, 전각의 오른쪽 시선과 후각의 왼쪽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정하고 확실한 표점(表點)을 취하는 자는 한 눈은 가리고 한 눈을 떠서 시선을
정한다. 땅에서 나무 끝이나 누각의 뿔, 산의 높이, 강의 너비를 실제로 재어 징험하여 칠요(七曜 해ㆍ달ㆍ수성ㆍ화성ㆍ
목성ㆍ금성ㆍ토성)와 하늘의 도수까지 미루어 나아가는 자는, 모두 소구고(小勾股 작은 직각 삼각형을 말하는데 그 밑변
을 구, 높이를 고라 한다)의 시선으로 대구고(大勾股)의 시선을 추급(推及)하고, 소삼각(小三角)의 시선으로 대삼각의
시선을 추급한다.
무릇 천하 만사에 눈을 정밀하고 치밀하게 쓴다는 것은 시선을 정하는 것에 불과하며, 크게 쓴다는 것도 시선을 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소하면 눈의 힘이 둔하여 많이 위태롭고, 익숙하면 눈의 힘이 날카로워 빠르고 날렵하다.
공장(工匠)은 이것을 얻어 도구를 만들고, 성관(星官)은 이것을 얻어 책력을 바로잡으며, 선비는 이것을 얻어서 도상
(圖象)을 지어 모든 백성이 수용(須用)하도록 하니, 이것이 어찌 다만 눈이 비쳐주기 때문이랴.
그 실로 신기가 통한 효험이다.
6. 서적을 보아 통달한다
인정(人情)과 물리(物理)를 보아 아는 것에는, 같은 시대에 함께 살면서 같이 본 한 가지 일을 서로 비교하여 논하더라도
저절로 천심(淺深)과 주편(周偏)의 우열(優劣)이 있게 마련이니, 옛사람의 경전(經傳)이나 사책(史策) 등 허다한 저술
또한 어찌 우열이 없겠는가.
지금 사람의 견해로 옛사람의 저술을 읽는 것은, 다만 책 속에 씌여진 문자(文字)만을 대할 뿐 옛사람의 목소리나 얼굴
모양의 참모습은 대할 수 없으며, 지금의 사물(事物)을 볼 수 있을 뿐 옛날의 사물을 직접 볼 수는 없다.
또 옛사람의 저술에 나타난 소견(所見)에는 천심(淺深)과 주편(周偏)의 차이가 있고, 옛사람의 저술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지금 사람의 소견 또한 천심과 주편의 차이가 있으니, 옛사람의 저술을 연구하고 해석하여 옛사람의 소견을 얻는다면
훌륭한 연구 해석이라 할 만하다.
옛사람이 수고롭게 애써 저술한 것은 오로지 뒷사람으로 하여금 저술한 자의 소견을 보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옛사람이 인정(人情)과 물리를 얻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아서 얻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제규 제촉(諸竅諸觸)을 통해
여러 번 시험해 본 뒤에 서적에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의 사람은 오직 두 눈동자로 책을 읽어 연구 해석하니,
이를 일러 보는 것이 고금을 통하고, 눈이 제규 제촉을 겸한다는 것이다.
만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오륜(五倫)과 삼강(三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적의 공효 때문이기도
하다.
사고서적(四庫書籍) 수십만 권을 통계해 보면, 실(實)을 숭상한 책은 절반이 되지 않고, 허(虛)를 숭상한 것이 반이 넘으니, 이미 그 3분의 2는 제거된다. 그 나머지 3분의 1에서도 고금의 마땅함이 달라 현실과 맞지 않아 제거할 것이 또 3분의 2가
된다. 그 나머지 3분의 1에서도 비루하고 번쇄하여 쓸모없는 것으로 제거할 것이 또 3분의 2가 된다.
나머지 3분의 1에서 옛사람의 저술 중의 천심 주편과 지금 사람이 읽고 터득하는 천심 주편을 서로 비교하여 취사선택하되, 옛사람이 안 것을 지금 사람이 모르거나 지금 사람이 아는 것을 옛사람이 모른 것에 대해서는, 그 아는 것은 남겨두고 모른 것을 제거하면 그 버릴 것이 다시 3분의 2가 된다. 알 수 있는 이 서적을 가려서 사색하고 연구한다면, 천하 만사를 두 눈동자를 가지고 통달할 수 있고 천고의 성현을 두 눈동자를 가지고 대면할 수 있다.
7. 소견을 가려 세운다
모든 통(通) 중에 안통(眼通)이 가장 넓고 가장 미더우니, 제규 제촉이 증험하는 것도 보고 난 뒤에야 결정되며, 제규 제촉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보면 능히 미친다. 이것은 신기가 눈에 익히 통하여 뚜렷한 표준을 가진 자가 능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대저 사람의 눈동자는 다만 색만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나, 오직 눈동자에 신기가 통하여 인정(人情)과 물리(物理)를 안으로 거두어 모으고, 그것을 밖으로 발용(發用)하여 한 가지 일을 증험하기도 하고 두 가지 일을 증험하기도 한다. 증험이 누적
되면 지각에 표준이 있게 되어 모든 형체와 빛깔은 눈에 띄자마자 곧 전달되고, 선악(善惡)과 이해(利害)는 지각을 통하지
않고서도 드러나며, 드디어는 보이지 않는 상을 헤아리거나 거칠고 험한 일을 경륜함에 이르기까지, 간격을 조리있게 계획함에 환하기가 가슴속에 품은 생각과 같고, 시종의 수미(首尾)를 밝게 살피는 것이 눈앞에 대한 듯하게 된다. 이것을 일러
견(見)이라 하니, 식견(識見)이다 의견이다 하는 것이 곧 이것이다.
견(見)이란, 눈동자가 물체를 비추는 데서 비롯하며, 헤아려 재는 준적(準的)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내외의 출입(出入)에 있어 항상 인정과 물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견은 어긋나고 잘못됨이 없지만, 조금만 소루(踈漏)한 점이 있어도 어긋나고 잘못되기 쉽다.
무릇 천하에 도를 구하는 사람의 정(正)과 부정(不正), 성(誠)과 불성은 오직 소견을 얻어 확립함에 달려 있다.
한 사람의 소견을 좇아 얻어 세운 것이 두 사람을 통해서 얻어 세운 소견만 못하고, 두 사람을 통해서 얻어 세운 소견은 백
사람을 통하고 천 사람을 통해서 얻어 세운 소견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만 사람을 통하는 것과 억조 사람을 통하는 것과는 모두 소견의 차등이 있다.
한때의 소견을 좇아서 얻어 세운 것은 1년을 통해서 얻어 세운 소견만 못하니, 따라서 1백년, 1천 년, 1만 년을 통한 것은
각각 그에 따라 소견의 차등이 생긴다. 또 한 고을 한 나라로부터 천하의 온갖 사물에 이르기까지도 각각 그에 따라 통함에 차등이 있으며 소견 또한 따라서 차등이 있다. 대개 통이 작으면 견도 작아서 스스로는 치우침과 막힘에 빠진 줄을 알지
못하여 천하의 온갖 일을 사법(死法)ㆍ사투(死套)로 보게 되니, 작게 통하는 것은 또한 통하지 못한 것이 되는 줄 어찌
알겠으랴.
만약 통한 것이 넓으면 경험이 갖추 이르러, 방(方)이 없는 가운데 방이 있음을 볼 수 있고, 방이 있는 가운데서 방이 없음을 볼 수 있으므로, 드디어 한 사람의 한때의 소견을 가지고 만 사람의 만세의 소견과 화합하며, 또 만 사람의 만세의 소견을
가지고 요령(要領)을 한데 모아, 어긋나고 거스림이 없이 우뚝하게 소견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도리이다.
8. 사람을 보고 사람을 취한다
여러 사람의 용모는 똑같지는 않아 순정(純正)한 사람도 있고, 간사스런 사람도 있으며, 추악한 이도 있고 아름답고 고운
이도 있는데, 우리는 눈동자로 비추어 그 모습을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순정한 사람은 일을 처리함도 순정하고, 간사스러운 사람은 행동이 간사스러우며, 추악한 자는 행동거지가 추악하고, 아름답고 고운 자는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곱다는 것
은 일찍이 두루 보아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전해 듣는 것이 직접 듣는 것만 못하고, 직접 듣는 것이 직접 보는 것만 못하며, 직접 보는 것이 직접 당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를 미루어 지금 상대하는 사람을 헤아려보면 대략은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그 중엔 자연 그렇지
않은 것도 있게 마련이다. 순정하고 간사스러운 것이 옛날과 지금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며, 추악함과 아름다움 또한
옛날과 지금이 일치하지 않는다.
밖에 나타난 것은 용모요, 안에서 통하는 것은 신기다. 밖으로 나타난 나의 눈동자로 밖으로 나타난 상대의 용모를 비출
때는, 언제나 관례나 공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나의 신기로 상대의 신기를 통하면, 순정하고 미려
(美麗)한 것도 때로는 취하지 않는 것이 있고, 간사스럽고 추악함도 간혹 취할 바가 있다. 취할 바는 재능이나 솜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위, 세력, 부유함까지도 모두 귀와 눈이 전달하면 보탬은 있다. 취하지 않아야 할 것은 외식(外飾)만
꾸며 이름을 빌리거나 허(虛)를 얻어 교만하게 자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관찰하는 기술이 이에 이르면 그 취사(取捨)의 기준이 정해질 만하다.
대개 어떤 일을 맡겨서 헤아린 바와 어긋나지 않거나 처자식을 맡겨도 친구의 의리를 변하지 않는 것은, 역시 지금의 소견
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만, 이 뒤에 어긋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어찌 다만 일을 맡은 사람의 일하기에만 달린
것이겠는가.
사실은 일을 맡긴 자의 말씨와 얼굴 빛의 기미(機微)가, 능히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긋남도 변함도 없이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처음과 끝이 한결같게 된 것이다. 만약 조그만 의혹 때문에 믿지 않는 말씨와 얼굴빛을 그
사람에게 나타내거나 누설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중도에서 어긋나게 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남에게 신기가 통한 자는 사이가 막히게 해서는 안 되니, 완급(緩急)과 소삭(疎數 드물게 하거나 자주하는 것)은
오직 일의 기미를 살피는 데 있다.
9. 눈으로 보는 것은 신기에 따라서 다르다
나의 눈동자로 남의 눈동자를 관찰하여 그 사람의 선악 순박(善惡純駁)과 희소 노원(嬉笑怒怨)을 알고, 상대 또한 자기의
눈동자를 가지고 나의 눈동자를 보아 나의 선악 순박과 희소 노원의 감정을 아는 것은 피차가 서로 같다.
그 관찰한 바를 가지고 이미 그러한 것과 장차 그러할 것, 성실함과 거짓됨과 얻고 잃음에 이르기까지, 그 천심(淺深)과
우열(憂劣)의 구분이 없지 않는 것은 신기의 통함이 자연 같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눈동자가 이 사람을 통하는 것은 지금의 일이고 과거의 일이 아니며, 신기의 습염(習染)은 과거에 있는 것이고 지금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지난날의 습염에 집착하여 바야흐로 지금 눈앞에 대하는 사물을 능히 변통하지 못
한다면 어긋남과 잘못됨을 어찌 면할 수 있으랴. 신기의 습염은 처음부터 심겨진 뿌리와 깊은 근원이 같지 않으니, 심하게 흐린 자취를 거두어 모으면 빠지거나 집착됨이 매우 많아 변통에 방법이 없으며, 깨끗하고 밝은 이치를 쌓아 올리면 기억
하고 풀기가 아주 쉬워 변통이 매우 넓다. 거두어 모으고 쌓아 올린 바가 없으면, 늙도록 소견이 생소하지 않은 것이 없
으며, 세상을 마치도록 쓰는 것이 다만 형질(形質)에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일 뿐이다. 만약 허망한 외도에 빠져 들면, 습염이 모두 허망하다.
이 속에 쌓인 것이 서로 다른 것을 가지고 눈동자로 통하면, 소견 또한 좇아서 같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눈동자의 허물이
겠는가. 신기의 습염이 같지 않음은 타고난 형질에 말미암지만, 그 병통의 근원을 캐어보면 모두 우주를 능히 통관(通觀)
하지 못하고 자기의 익힌 바를 고집하여 지키기 때문이다.
만약 능히 우주를 통관하고 여러 사람의 현우(賢愚)와 그 얻은 바의 우열을 비교하여, 어느 사람은 정명(精明)한 이치를
쌓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변통하여 성인도 되거나 현인도 되었으며, 어느 사람은 심하게 흐린 흔적을 거두어 모은
까닭에 이르는 곳마다 집착하여 고루하고 둔하며 고집하고 기필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누구는 아무 것도 쌓아 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일을 당하여서는 멍청하여 어리석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으며, 누구는 허망함에 버릇되고 물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을 버리고 이상한 것을 좋아해서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사람이 된 것을 환하게 안다면, 어찌 중(中)이나 하
(下)의 사람이 되기를 즐겨 배우랴.
용감하게 나아가는 방법은, 나쁜 풍습과 좋지 않은 버릇을 씻어 버리고 맑고 밝은 세계의 사람으로 변화하여,
정밀한 이치의 드나듦을 눈을 통해서 시험한다면, 눈동자와 신기가 절로 일체(一體)를 이루어, 어긋나거나 틀어지는
근심은 없고, 서로 응하고 서로 돕는 보탬이 있게 된다.
10. 눈을 치료하는 약
눈을 치료하는 약에는 안으로부터 치료하는 것과 밖으로부터 치료하는 것이 함께 있다.
인정(人情)과 물리(物理)로 삶고 달여 기름을 만들고 태화탕(太和湯)에 타서 먹는 것은 내치가 되고, 스승과 벗의 강구
연마(講究硏磨)와 서적의 연구 및 수화(水火)ㆍ금석(金石)ㆍ초목(草木)ㆍ나무 열매ㆍ풀 열매ㆍ오곡(五穀)ㆍ우모(羽毛
깃 달린 조류와 털 있는 짐승)ㆍ인개(鱗介 물고기와 패류(貝類))나 흙에서 나는 온갖 맛과 재료들로 외치(外治)를 삼는
다면, 내치의 효과는 외치에서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으며, 외치의 효과 또한 내치의 효과로 말미암아서 얻는다.
이것에 의지해서 오래 치료하면 두 눈동자로 하여금 곧 천인(天人)의 안목이 되게 할 수 있다.
만약 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병통이 발작하여 평생토록 낫게 할 수 없으니, 보아도 보이지 않고 보여도 알지 못하여,
바로 자기의 고질이 되어 눈뜬 소경을 면치 못한다.
소견(所見)이 어그러지고 통하는 바가 비뚤어져 반대쪽으로 치닫고 외부로만 향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실속 없는 허례를
즐기며 세월을 보내거나 잡된 놀이에 빠져 술내기와 밥내기를 다투기도 하는데, 이는 아무 곳에도 마음 쓸 데가 없는 자
에겐 오히려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혹은 혼탁한 관직에 연연하여 몸을 해치는 것을 돌볼 줄 모르고, 욕망의 불꽃이 치솟아 죽이고 넘어뜨리는 짓을 달게 범
하여 종족이 멸망되거나 해가 마을에까지 미치게도 하며, 또는 출세하려는 사업을 하고자 하여 윤리와 사물을 버리고
따로 공허한 문호를 열거나 경상(經常)을 버리고 허망한 일을 연설한다.
그래서 화복(禍福)으로 두루 어리석은 백성을 꾀며, 헛된 환영(幻影)으로써 경솔한 인사(人士)들을 불러 들이나 실로 본
뜨고 따를 방도는 되지 못하고 결국은 평생을 포기해 버린 한만을 남긴다.
사람을 속이고 해치는 일이 두루 허다한 것에 미치는 것이 이보다 더함이 있으랴.
이 모두가 첫소견을 치료함에 옳은 방법을 얻지 못한 데서 비롯하여, 어긋나거나 잘못되게 되는 것이니,
여기 따르는 해로움은 각각 그 종류에 따라 대소(大小)와 경중(輕重)이 달라진다.
11. 상인(相人)과 의인(醫人)의 신안(神眼)
관상서(觀相書)에서 눈을 논한 것은 길흉(吉凶)과 화복(禍福)에 빠져 있고, 의서(醫書)에서 눈을 논한 것은 풍담(風痰)과
한열(寒熱)에 관한 것뿐이다.
그것을 저술한 사람이나 전습(傳習)한 사람이 모두 얼굴에 있는 눈만을 눈으로 삼고, 몸 안에 스스로 신기의 눈이 있음은
알지 못하였다. 길흉과 화복은 신기의 눈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져 얼굴에 있는 눈에 나타나며, 풍담과 한열은 먼저 신기의
눈부터 침범해서 얼굴에 있는 눈으로 미치니, 눈의 관상과 눈병의 근원은 모두 신기에 있다.
만약 사람의 신기를 능히 알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 진취하고 어떻게 해서 진취하지 못하는 것과 사람을 관찰하는 기술
에서나 사람의 병을 치료함에 있어 실제의 형체나 모양을 떠나서도 약을 쓸 수 있다.
사람을 상보는 자가 비록 상을 보이는 자의 신기는 알지 못하지만, 화복과 길흉를 논함에 있어 억측하여 곧잘 맞추는 까닭은, 상보는 자의 신기가 가끔 통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병을 다스림에도 또한 신기를 가지고 약을 쓰면 거의
효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풍담과 한열은 하늘과 땅에 응해서 운행하며, 사람 몸의 혈맥은 그 드나듦이 앞뒤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한을 기다리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도 있으나 다스리기 어려운 증세는 침과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이른바 신기한 관상쟁이나 신기한 의원이란, 기술상 신기함을 가르킨 것이지 신기(神氣)가 통한 신은 아니다.
그러므로 관상서에서 방위(方位)나 색태(色態)나 소년이나 장년의 운수를 간지(干支)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에
붙여서 길흉을 단정하거나, 의서에서 장부(臟腑)나 맥락(脈絡)이나 약성(藥性)이나 기미(氣味)를 모두 오행(五行)에
붙여서 보(補)와 설(洩)을 베푸는 것은, 곧 사람의 형질(形質) 밖에 거짓되고 헛된 법을 덧붙여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
이다. 이런 것은 알 수 있는 모양과 바탕을 도리어 어둡게 하는 것이니 어느 겨를에 신기를 논하겠는가.
12. 지형(地形)을 본다
산천의 풍물을 유람하다가 만약 훌륭한 경치를 만나면 안계(眼界)가 활짝 트여 신기가 화창하나, 만약 험하고 황폐한 곳
을 만나면 안계가 쓰라리고 괴로우며 신기가 우울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 대상을 접하거나 대할 때에 감응하여 일어난 잠깐 동안의 일이다. 이삼 일 지나면 안계가 화창했던
것이나 쓰라리고 우울했던 것은 차츰 소멸되며, 열흘 내지 달포가 지나면 보이는 대상이 모두 예사롭게 보이고, 온몸의
신기는 본래로 돌아간다.
이러는 사이에 경력(經歷)이 없을 수 없으므로, 무릇 천하의 산천 풍물로부터 말이나 글에 나타난 바다와 육지의 훌륭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미루어 헤아릴 수 있으니, 신기의 두루 통함과 두루 살핌은 다시 여지가 없다.
민생(民生)의 산업과 경륜도 따로 다른 능력이 없으니, 이 또한 처음으로 통할 적엔 쾌활하고 통창(洞彰)하기 짝이 없지만, 더욱 오래되면 절로 능히 버릴 수 없을 뿐더러 더욱 힘쓸 것이 있게 마련이다. 기(氣)에 소견이 있는 자도 오래되지 않으면 그 소견이 형체를 이룰 수 없고, 소견이 형체를 얻었더라도 오래되지 않으면 견고한 소견을 이룰 수 없다. 또 사물의 한
모통이나 한 귀퉁이만을 보는 자는 이미 그 전체의 수용(須用)을 통달하지 못하므로 자연 빠뜨림과 잊혀짐이 뒤따라 온다. 만약 전체의 대용(大用)을 보아 얻는다면 해야 할 사업이 없을 수 없어, 늙음이 장차 이른다는 것도 잊어버린다.
여기에서 경륜이 생기며 이로부터 사업이 정해진다. 아직 깨닫지 못한 자는 깨우쳐 주어야 하고, 벌써 그릇된 자는 밝혀
주어야 하니, 어찌 오래인가 오래지 않은가를 논할 것 있으리요.
13. 기용(器用)을 궁구한다
사람 몸의 형태는 곧 하나의 기계이니, 안으로는 신기(神氣)를 담고 밖으로는 수용(酬用)을 접한다.
이목 구비(耳目口鼻)와 수족 두체(手足頭體)가 역시 각각 접용(接用)하는 기물(器物)이 있으니, 귀에는 대롱이 있으며,
입에는 수저와 음식이 있으며, 코에는 냄새나는 물체가 있고, 손에는 잡는 그릇이 있으며, 발에는 밟고 신는 것이 있으며,
머리에는 갓과 건(巾)이 있으며, 몸에는 의복이 있지만, 오직 눈이 쓰는 기물(器物)만은, 어찌 다만 한몸을 통찰 하는 데
쓰이는 기물뿐이겠는가. 쓰이는 기물의 기계ㆍ원료나 또 그 기계ㆍ원료를 만드는 것까지 모두 눈의 기물이 된다.
무릇 천하에 물리(物理)를 궁구하는 자는 마땅히 기용(器用)으로 준적(準的)을 삼아서 기용의 기용에까지 미쳐 가고,
그 우열(優劣)과 이둔(利鈍)을 변별하는 것이 안력과 신기가 아울러 통한 뒤에야, 격치(格致)가 마땅함을 얻어 거의 착오를 면할 수 있다. 만약 기용으로써 준적을 삼지 않는다면, 이른바 격치란 것이 그 능력을 쓸 곳이 없을뿐더러 그 모착(模着)을 얻기 어렵다. 또 목력(目力)과 신기로써 참작 상량하지 않으면 그 우열과 이둔을 장차 무엇을 가지고 변별하며, 의(義)와
불의를 장차 무엇으로써 질정(質正)하랴.
여기에서 천하의 모든 물건은 기용이 아닌 것이 없어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만든 기계가 있고, 인간의 사무는
모두 기용을 가지며, 사무가 있으면 반드시 그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리하여 그 있는 것은 그것을 좇아 변통
하고, 그 없는 것을 창제(創制)하는 것은 모두 목력(目力)과 신기가 통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니 그릇을 두고도 쓰지 않거나 그릇을 이루고도 헐어 버리는 것은, 목력과 신기가 통하지 않은 데서 나오는 것이다.
신기통 제2권 이통(耳通)
1. 하늘과 땅과 사람과 물체의 소리
천도(天道)는 말이 없으나 다만 기(氣)가 움직이는 소리가 있으며, 인사(人事)는 분별이 있어 지적하고 구분하는 말을
전해 받아 익힌다.
기의 소리와 사람의 말은 귓바퀴[耳廓]를 울리고 귀청[耳筒]을 떨게 해서 신기에 통한다. 처음 들으면 의심하고 두 번
들으면 그럴 듯이 여겨 처음 들은 것을 미루어 보며, 세번 네번 들으면 헤아림이 생긴다. 이렇게 하여 점차 익숙해져서
듣는 힘이 심장(深長)하게 되면, 능히 소리와 말이 있기 전에도 들을 수 있고, 소리와 말이 있은 후를 살필 수 있다.
듣는 도구는 귀에 있어 소리가 이르자마자 통하나, 듣는 지각은 신기의 통함에 있어 점차로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저
천지와 인간과 만물의 소리까지도 비록 모두 다 듣기는 하지만 그 까닭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천둥이나 지진 및 새나 짐승의 소리는 그 기질과 소습(所習)이 각각 달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쌓은 바 기가 진취(振吹)하는 데서 발하거나 좋아함과 미워함에서 발한 것인데, 옛사람은 음양(陰陽)이
서로 어우른다는 이론이나 조수(鳥獸)의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학설을 힘을 소비해가며 억측했지만, 한갓 뒷사람의
의혹만을 키웠을 뿐이다.
오직 사람의 언어는 습관이 서로 비슷하고 형질(形質)이 서로 비슷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간혹 뜻에 미진한 점이 있더라도, 먼저 일의 기틀을 헤아려서 말을 들으면 그 말이 쉽게 살펴지고, 말부터 먼저
듣고 일의 기틀을 미루어 살피면 일의 기틀이 쉽게 드러난다.
2. 소리무리[聲暈]의 멀고 가까움
소리가 물체에서 발하였을 때에 가까이서 들으면 소리가 크고 멀리서 들으면 소리가 작으며, 더욱 멀리서 들으면 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는다. 이는 가로막은 기가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두텁고 얇아지기 때문이니, 기가 두터우면 소리의
진동이 뚫기 어렵고 기가 얇으면 소리의 진동이 뚫기 쉽다.
그러나 비록 거리가 가깝더라도 담벽이나 휘장이 가려 막으면, 소리가 더디게 굽어 도는 것은 물체가 귀를 막기 때문이며, 산만히 흩어지면 소리가 작고 팽팽해지면 귀가 울리는 것은 모두 기의 가로막음 때문이니, 소리가 능히 이것을 뚫으면
통하고, 능히 이것을 뚫지 못하면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개 기(氣)와 물(物)은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나고 불어서 소리를 이루는데, 진동이 생기면 곁에 있는 기에서부터 점차
충격이 사방에 미쳐 겹겹의 둥근 무리[暈]를 이룬다. 소리가 크면 무리가 크고 소리가 작으면 무리가 작다.
가까운 소리는 급하고 빨라서 무겁고 탁하며, 먼 소리는 더디고 늘어져서 가볍고 맑은 까닭은, 진동한 기가 가까우면
힘이 있어 파동(波動)이 용솟음치고, 멀면 힘이 작아 파동이 고요하기 때문이다.
소리를 내는 물체로써 중심을 삼고 소리에 진동되는 기로써 둘레를 만들면 사면의 둘레 중 어느 곳이라도 귀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주위에 둥근 무리가 바람이 고요할 때는 둘레와 중심의 거리가 고루 일정하지만, 만약 서풍(西風)이 불면 서쪽
둘레는 중심과 거리가 가깝고, 동쪽 둘레는 중심과 거리가 멀어져 중심이 치우친 타원을 이루게 된다. 동풍이나 남풍ㆍ
북풍도 각각 이처럼 타원을 이루는데, 바람의 강약(强弱)에 따라 작은 타원이냐 긴 타원이냐 하는 진퇴(進退)에 기준이
생긴다.
소리의 윤곽은 소리무리를 따라 모양을 바꾼다. 만약 바람의 힘이 급하고 빠르면, 무리는 찢어지고 소리는 나부껴 둥근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급기야 소리가 멈추면 소리무리도 소멸되나 바람은 그대로이다.
빛무리[色暈]ㆍ냄새무리[臭暈]는 모두 마땅히 이 소리무리[聲暈]에 의하여 추측 증명해야 한다.
3. 온갖 소리를 미루어 통한다
무릇 소리는 귀에 쓰여지는 바이며, 귀는 소리를 통하는 그릇이 된다. 귀가 능히 소리를 통하지 못하면 귀는 족히 귀라
할 수 없고, 소리가 귀의 쓰이는 바가 되지 않으면 소리는 그 소리됨을 통하지 못한다.
천하 만물은 제각기 소리를 가져 기를 빌려 전달하는데, 바다와 육지의 지면에 두루 가득하고 사시(四時)와 밤낮없이
시끄러움이 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귀가 듣는 것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섬세한 소리를 구별하며, 십리 풍편
에서는 잘 들어야 큰 종소리만 들을 수 있으며, 수십 리 바깥에서는 천둥과 대포 소리가 겨우 귀에 들릴 뿐이다.
가까운 소리는 능히 먼 소리를 빼앗고 큰 소리는 능히 작은 소리를 누른다. 또 간혹 신기가 얽매이면 소리가 와도 듣지
못하며 설령 듣더라도 능히 깨달을 수 없다. 능히 준행(遵行)치 못하는 것과 들을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없으니, 들을 것을
계산하면 실로 얼마 안 되며, 들을 수 있는 것을 가려도 또한 많지 않다.
그러면 잡다한 모든 소리는 다 쓸모없는 소리인가? 아니면 장차 여러 곳의 여러 사람에게 소용이 되는 것인가?
넓고 큰 세계에 많은 뭇 생명들이 제각기 그 기를 불어 소리내는 것이, 한갓 스스로 생기고 사라지게 하는 수고로움뿐
인가? 알지 못하는 자는 시들하게 여겨 내던져 버리나, 잘 듣는 자는 추측(推測)을 인하여 활용한다.
대저 만물이 스스로 숨쉬고 스스로 우는 것은 반드시 말미암은 바가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스스로 얻은 것을 드러내고,
어떤 것은 자품(資稟)을 토로하며, 어떤 것은 가리워진 자취를 나타내고, 어떤 것은 가린 것을 열며, 어떤 것은 물(物)을
만나면 좋아함과 미워함을 나타내며,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화를 이룬다. 이는 모두 스스로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이 때에 따라 발한 것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면 그것을 남김없이 알게 되어 내가 되풀이해서 연구하고 탐색하는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
내가 듣는 것으로써 나의 신기를 통하고 그 듣지 못한 것까지 통달하게 되면, 천하 만물의 온갖 소리들이 모두 나의 귀에
쓰이는 바가 된다.
4. 천성적인 귀머거리와 신기의 귀머거리
모태(母胎)에서 태어날 때부터의 천성적인 귀머거리는 사람의 말도 물체의 소리도 들을 수 없으니, 적막한 천지요 들리는
것 없는 세계이다. 다른 사람편에서 보면,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는 불치의 병신이라 하여 푸대접하나, 사랑과 동정이 있는 이는 불쌍하게 여기고 그를 위해 답답해 하며 이르기를 ‘부모 형제의 말을 어떻게 들으며 물명(物名)이나 글자를
무엇으로써 배우느냐?’고 한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도 사람의 행동을 못하고, 모든 감각 기관을 갖고도 그 때문에 모두
쓰지 못하게 된다.
귀머거리 쪽에서 보면 ‘사람은 원래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 먹고 마시며, 대소변을 배설하고, 손으로
잡으며, 발로 다니니,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것이 나보다 많은 줄을,
내가 갖춘 것이 남보다 작은 줄을 알지 못한다.
한 동작 한 동작이 남의 손과 턱의 지시에 의지하며, 온갖 사물을 망매(罔昧)와 오유(烏有 사물이 아무것도 없이 됨)에
맡김으로써 평생을 지내고, 말을 듣고 소리를 듣는 것이 인생의 대용(大用)이 된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
더욱이 말을 배우지 못하면 아무리 절박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으니, 이는 곧 두 구멍이 아직
혼돈(混沌)의 상태로 남아 있는 자의 답답함이다.
무릇 듣는 것이 있으면서도 알고 깨닫는 것이 없는 자가 바로 신기의 귀머거리이다. 이는 천생의 귀머거리에 비교하면,
비록 배를 찾고 대추를 찾는 말을 하고, 닭울음과 개짖음은 들을 수 있지만, 사람을 대(待)함에 즐거운 느낌인지 성난
느낌인지 생각지 않으며, 일을 처리함에 전도(顚倒)된 행동이 허다하다.
그리하여 누구 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 없고 평생토록 헤매는 부끄러움만 있으니, 도리어 천생의 귀머거리가 되어
남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남에게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만도 못하다.
5. 말을 듣는 조리(條理)
벗들이 원근을 열력(閱歷)한 경험을 모아, 내가 아직 듣고 보지 못한 사물에까지 넓히거나 내가 이미 듣고 본 사물을
증험하는 일은, 오직 말을 잘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신기의 힘을 힘껏 쏟아 말하는 이의 얼굴빛을 조용히
살피고 타물(他物)에 동요되지 말 것이며, 먼저 명목(名目)을 조별(條別)하여 자세히 살피고, 다음으로 일의 주선(周旋)
을 차례로 풀어나간다.
명목(名目)이란 연대ㆍ지방ㆍ인물의 이름 및 수목(數目)이다. 말을 들을 적에 만약 명목과 조별을 소홀하게 한다면,
일의 내력을 비록 자세히 듣고 싶어도 맥락이 문란하고 두서가 혼돈되어 마침내 대의와 요령을 얻기 어렵다.
그러나 명목을 처음 말할 때 정신을 모아 나타나는 대로 빠뜨리지 말고, 어느 연대 어느 지방 누가 어떤 물건을 얼마만큼
주고 받았는지 분명히 기억한다면, 대체가 이미 갖추어져 총령(總領)이 자못 쉽다. 그리하여 사기(事機)를 주선함에 비록
홀략(忽略)함이 있더라도 마침내 대지(大旨)를 잃지는 않는다.
두루 통하며 그래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 귀추를 미리 헤아려서 궁극의 말이 부합됨을 기다리거나, 혹은 따로 다른 조치
를 강구하여 피차간의 낫고 못함을 비교하기도 한다.
일의 기틀이란 경륜(經綸)과 계략의 설립이 때에 따라 사물과 만나는 기회이다. 이것도 역시 명목과 조별의 차례를 따라
시행하는 것은, 옷깃[領]을 들면 옷자락[裾]이 따르고, 벼리[綱]를 들면 그물코[目]가 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을 전달하는 자도 그 얻은 바의 심천(深淺)이 다르니, 어떤 이는 줄여서 말해도 이치가 뚜렷하고, 어떤 이는 말을 많이
하여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한다. 어떤 이는 듣는 자가 통했는지 통하지 못했는지를 알아서 그 통달하지 못한 것을 통달
하게 하며, 어떤 이는 듣는 자가 통했는지의 여부도 헤아리지 않고 오직 자기의 말만을 한다.
말을 듣는 자 또한 얻는 바의 심천이 다르니, 어떤 이는 말한 자의 미진한 곳까지 보완하며, 어떤 이는 말하는 자의 말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심하게 현혹된다. 또 어떤 이는 선과 악을 아울러 취해서 권징(勸懲 선은 권장하고 악은 징계함)으로
삼고, 어떤 이는 제가 익힌 바를 따라 선만을 취하기도 하고 악만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먼저 조리가 있어야 참작하고 취사(取捨)하는 데 피차간 실수가 거의 없다.
6. 성률(聲律)과 언어
성음(聲音)에 대한 학문은 오직 청탁(淸濁)과 장단(長短)을 구별하여, 사람의 소리와 잘 어울리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팔음(八音) 가운데 관(管)과 현(絃)이 으뜸이다. 관악기의 소리는 관 가운데의 기(氣)에서 나는데, 쌓인 기가 많으면
소리가 탁하고, 쌓인 기가 적으면 소리가 맑다. 현악기의 소리는 현 옆의 기가 떨려서 나는데, 현이 가늘면 소리가 맑고,
현이 굵으면 소리가 탁하다. 가장 탁한 것으로부터 가장 맑은 것까지 차례로 등분하여, 10으로 나누든지 12로 나누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같이 고르게 해야 한다. 쇠붙이나 돌로 된 악기의 두께나 바가지ㆍ흙ㆍ가죽ㆍ나무로 된 악기의
용기(容氣)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다. 이것을 크게 하고 싶다면 배를 더하거나 2배 3배를 더하며, 줄이고 싶으면 절반
으로 줄이거나 갑절로 줄이되 차례대로 차등을 두어 고른 분수를 어기지 말아야 한다.
학습하는 자는 가장 탁한 것으로써 첫째 소리로 삼고, 다음 탁한 것으로 둘째 소리로 삼으며, 또 그 다음 탁한 소리로
셋째 소리로 삼으며, 가장 맑은 것으로 열두째 소리로 삼을 때까지 불고 두드리어 소리를 들으며, 첫째ㆍ둘째ㆍ셋째……
열두째 소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차등이 있는 일정한 수가 있도록 한다.
그리하여 과한 것은 덜고 못미친 것은 더하여, 성조가 어긋나고 넘침이 없도록 한다.
또 하나의 소리가 시작해서 끝나는 동안을, 그 동안에 사람의 호흡하는 수로써 장단(長短)의 마디로 삼는데, 익숙한
사람은 소리가 귀에 젖고 힘이 손에서 일어나, 스스로 불고 스스로 치든지 남이 불고 치는 것을 듣든지, 어느 율(律),
어느 조(調)의 장단과 청탁인가를 대뜸 기억한다.
일찍이 배워 익히지 못한 사람은 안으로는 분개(分開)가 없고 밖으로는 조별(條別)이 없어 귀가 둔하여 이 소리가 저
소리 같고 저 소리가 이 소리 같다. 그러나 어찌 이것만이 생소함과 익숙함의 구별이 되겠는가. 언어의 운치나 독서의
절조에 있어서도 소리의 힘은 저절로 드러난다. 서사(序事)하는 곳에서는 평순(平順)하게 하고, 기두(起頭)하는 곳에
서는 진작(振作)하며, 물체의 모양은 잘 형용하고, 기미(機微)는 감춰진 것이 드러나기를 기다려, 듣는 이로 하여금
신기가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한다. 언어나 독서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문리(文理)를 능히 이어 붙이지 못하고 음향이
자연 껄끄러워 듣는 자로 하여금 신기가 혼미하도록 한다.
7. 신기의 들음
말은 마쳤는데 오히려 들을 것이 있고 소리는 끝났는데 오히려 여운이 남으니 이것이 바로 신기의 잠청(潛聽)이다.
막상 말을 듣고 소리를 들을 때는, 자연 기회를 자세히 살피고 차서(次序)도 미루어 찾아야 하므로 실로 다른 여가가 없다. 그러나 말을 마치고 소리가 끝나면 이미 그 시종(始終)을 통활했으므로 비로소 조용히 정신을 차려 그 귀추를 풀 수 있고,
혹 다른 방법을 찾아 우열을 비교하기도 하고, 필경의 이해를 생각하여 권장과 징계를 만들 수도 있다. 비단 말과 소리가
끝남으로써만 이러한 숙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기의 들음을 머물러 둠으로 해서, 세월이 지난 뒤에 사물을 만나 발하
기도 하고, 혹 한가로움을 인하여 미루기도 한다. 신기를 깨우쳐서 멀고 희미한 옛날의 모습에 대해, 어두워지는 등불을
다시 돋우고 얇은 때가 끼인 거울을 다시 씻기를 세번 네번 하듯이 하면,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신기의 염착(染着)은 퇴색하지 않아 한 가지 일에 이미 철저했으면 나머지 일엔 힘이 덜 들고 또 따라서 곡창방통(曲暢
傍通)한 기술이 생긴다. 만약 들을 적에 잠깐 신기를 딴 곳에 허비하면 지나자마자 곧 잊어버리게 된다.
일마다 이와 같으면, 비록 40~50이 되어도 신기는 밝게 닦아질 날이 없어 평생토록 멍청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8. 언통(言通)에는 천심(淺深)의 차이가 있다
다 듣고 난 뒤에, 나의 신기가 남을 알아 통하는 데에도 천심의 차이가 있다. 그것이 겨우 남의 피부에 미치는 자도 있고,
남의 살[肌肉]에 미치는 자도 있고, 남의 골수에 통하는 자도 있고, 남의 신기에 통하는 자도 있다.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이르고, 희미함에서 시작하여 뚜렷함에 이르고, 작은 것이
쌓여서 큰 것을 이루는 것은, 신기의 본성(本性)이고 공부의 당연한 길이다. 비단 남의 신기를 알게 되는 것만이 오래되
어야 점차 통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신기를 알게 되는 것도 역시 오래되어야 차츰차츰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단계적으로 지나는 순서가 있고 두루 전전하여 들어가는 동부(洞府)가 있다.
무릇 청문(聽聞)하는 도는, 정일하게 힘쓰지 않으면 밝게 살필 수 없고, 차츰차츰 쌓이지 않으면 깊이 이를 수 없다.
사람과 더불어 접대함에 있어, 잠시 동안의 대화만 있은 뒤 다시는 자리를 마주하는 일이 없었다면 나의 신기가 통한
것은 겨우 그 사람의 피부에만 미치게 되어 쉽게 잊어 버린다.
만약 남과 더불어 오랫동안 살아 피차에 말이 서로 통하고 사사로운 정을 숨기지 않고 좋은 일 궂은 일을 서로 돌보면서
오랜 세월을 지냈다면, 나의 신기는 그에게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의 신기도 또한 나에게 통한다.
그리하여 내가 통하지 못한 것을 혹 그가 먼저 통하면 그로써 내가 통하지 못한 것을 통해 주기도 하고, 그가 통하지
못한 것을 혹 내가 먼저 통하면 그로써 그가 통하지 못한 것을 통하기도 하니, 그 꼭 들어맞음이 금란(金蘭)과 같고
아교와 옻처럼 화합한다.
살갗의 통함과 골수의 통함에도 각각 사귄 시간과 아는 정도에 따라 다르나 분수 바깥은 깊이 통할 수 없고, 공부의 한계
에도 저절로 그칠 곳이 있다.
그러나 피부를 겨우 통하는 사람은 많이 보았지만, 신기가 서로 통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차라리 천 년 전이나 넓은 천하에는 통할지언정 옛날 책의 글자나 통하여, 구두(句讀) 사이에서 수작을 펼 수야 있겠느냐.
견통(見通)에도 역시 천심이 있다.
9. 그 통색(通塞)을 보아서 말을 취사 선택한다
사람이 사업을 경영함에 각각 주장하는 바가 있지마는, 취사(取捨)는 청문(聽聞)에 달려 있고 우열(優劣)은 통색(通塞)에
따라 결정된다.
왕정(王政)과 사도(師道)는 군자가 강구(講求)해서 물음을 기다리는 것이, 도량이 크고 두루 통하여 가함도 가하지 않은
것도 없이 의(義)로운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이요, 혼자 고상한 체하거나 교격(撟激)하거나 심각하거나 기교만
승(勝)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대체(大體)를 들어서 세밀한 것을 거느리며, 세밀한 것을 모아서 대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역상(曆象)과 수학, 전례(典禮)와 형률(刑律), 지인(知人)과 용기(用氣), 농공 상고(農工商賈)의 일은, 학자(學者)들이
강구하여 그 증험을 기다릴 것들이다. 통달한 자는 궤도를 따라 순행(順行)하고, 치우치고 막힌 자는 버릇을 인연하여
두찬(杜撰)하되, 하늘과 사람의 마땅한 바는 받들어 섬기고 잃지 말아야 한다.
심학(心學)ㆍ이학(理學)ㆍ문장(文章)ㆍ사조(詞藻)ㆍ서화(書畫)ㆍ기예(技藝) 등 일체의 술업(術業)에도 각각 통색(通塞)과 이해의 구별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장할 사업을 골라 정하는 것은 언론의 취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고, 통달(通達)과 편체(偏滯) 또한 언론의 취사에 따라 생기며 성패와 이둔(利鈍)도 또한 언론의 취사(取捨)에 따라 생긴다.
그 취사가 신기(神氣)로 말미암아서 취하고 버리는 자도 있고, 주장하는 일로 말미암아 취하고 버리는 자도 있다.
그러나 신기를 우선하고 주장하는 일을 뒤로 하면 스스로 편체에 빠지기 쉽다.
언론을 골라 취하고 아울러 편체한 것을 버리고 두루하고 통한 것을 취하라.
천착이 더욱 깊어지고 조예(造詣)가 점점 좁아지면, 비록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얻은 것이라도 다만 한 몸을 위해서 말하는 자료가 될 뿐이다. 통달한 자는 언론에서 취하되 쓸모없는 것에서 쓸모있음을 취하며, 쓸모없는 것으로 쓸모있는 것의 자료를 삼으며, 허망함을 좇아 진실을 취하고, 허망함으로써 진실의 외환(外患)을 삼는다. 쓸모있고 진실한 것으로 말을 하고
일을 행하면 물(物)에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말을 듣고 행실을 관찰하면 다 남을 통할 수 있다.
10. 남의 말을 들을 때의 순역(順逆)
남의 말이 나의 신기(神氣)에 순하면 그 말이 쉽게 들어오나, 나의 신기를 거스르면 그 말을 헤아려 볼 만하다.
스스로를 탁마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는 이익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꼭 그와 쟁탈할 필요도 없고 또한 나를 고수(固守)해도 옳지 않다. 요는 통할 바의 신기와 주장하는 일의 준적
(準的)에 어긋남이 없도록 할 뿐이니, 이것이 나의 신기가 따르는 바다.
다른 사람이 혹 이 뜻을 알지 못하거나 소견이 같지 않아서, 처음부터 부드러운 말로 깨우쳐 주지 않고, 세력을 끌어서
만회하려고 급한 말투와 성난 얼굴로 세차게 몰아쳐 흔들며, 선도(善導)할 의사는 조금도 없고 분명히 저훼(沮毁)할
자취만을 가지면, 이것이 나의 신기를 거스르는 것이다.
나의 신기의 순역(順逆)으로 남의 신기의 순역을 통하고, 나의 일을 주장하는 준적(準的)으로 남의 일을 주장하는 준적을
헤아리며, 언설(言說)을 발하여서도 또한 남의 들음을 헤아린다. 희로 애락과 시비와 선악이 모두 청문(聽聞)으로 말미
암아 일어나며 또한 청문으로 말미암아 사라지는 것은 남이나 내가 같은 바이다.
바야흐로 일이 없을 때는 사리(事理)를 범연히 논한 것은 들을 만한 것이 적고 개발되는 것도 없는 경우가 많지만, 일을
처리할 때를 당해서는 들을 만한 것을 듣지 않으면 일을 해치고,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으면 비단 일을 해칠 뿐 아니라
뿌리 없는 희로(喜怒)와 등한(等閒)한 풍파가 부질없이 허랑(虛浪)한 사람으로 만든다.
11. 속임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
기만하는 말은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잠시 실적(實蹟)을 빌려 속에 있는 재화를 유인하거나 귀와 눈을 현혹하여
그릇된 길로 끌어들이는 일은, 진실로 창졸간에 나온 속임수이니, 보통 사람이 범하기 쉬운 것인 동시에 또한 쉽게 깨달
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속임을 당한 것을 깨달으면 돌이키는 길이 어렵지 않고 또한 복철지계(覆轍之戒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뒷 수레는 이것을 보고 경계하는 것이니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음을 말한다)로 삼기에 족하다.
그러나 잘못된 문학을 널리 말함으로써 남의 자제를 해롭게 하거나, 백성을 괴롭히는 정령(政令)을 가지고 임금의 도타운
부탁을 저버리는 것은 크나큰 기만이다.
그런데 몸소 행하고 있는 자는 스스로 크게 기만당하고 있는 줄 알지 못하고, 곁에서 듣는 자는 혹 끝난 뒤에 짐작하며,
처음 발언할 적에 알아차리는 이는 별로 없다. 기만이 커지는 것이 실로 이에 기인한다.
무릇 기만하는 방법은 예와 이제가 판이하며, 어리석은 자와 똑똑한 자에 따라 다르다.
옛적에 속은 일을 가지고 후세 사람에게 그대로 실행할 수 없고, 어두운 자가 속은 일을 가지고 밝은 자 앞에서 꾸며 베풀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속이는 자는 모름지기 속을 만한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끌어서 그 틈을 엿보고 기회를
타며, 또 말씨와 얼굴을 좋게 하여 이르거나 아니면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서 돕게 한다.
이것을 듣고 속는 자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 먼저 얼굴빛을 살펴본 뒤에 그의 말을 듣고, 말과 의논을 다 듣고
나서는 피차간에 일의 기미를 참증(參證)하면, 묻지 않았는데 스스로 떠벌인 단서가 있거나 또는 지극히 작은 단서가
잡히는 바 있거든 반복해서 힐문하라. 반드시 탄로가 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가 속임을 당하는 것은 족히 수치스러울 것이 없고 속임을 당하고도 속은 줄을 깨닫지 못하는 이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평생토록 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는 자는 어떻게 한정(限定)하리요마는, 젊을 적부터
탐관 오리가 되어서 늙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부귀를 누리니, 이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전하는 자는 속임을 당하는 줄 알지 못하며, 그것을 받는
자도 또한 속임을 당하는 줄 알지 못하니, 천하에 이럴 수가 있겠는가. 오직 어긋나고 잘못된 문학일 뿐이다.
기(氣)를 통하지 못하고 오직 이(理)만을 말하면 흔히 기를 착오하여 물(物)을 얻음이 없고, 다만 심(心)만을 논하면 흔히
물을 착오하여 고문(古文)을 이끌어 금문(今文)을 꾸밈으로써 전수(傳授)하는 자료로 삼는다.
12. 서로 반대되는 말은 가려 듣는다
양쪽 다 옳은 말은 가려서 취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필경의 이둔(利鈍)이 서로 그리 멀지 않다.
서로 반대되는 말의 취사 선택이 진실로 어려우니, 필경의 사세(事勢)가 동쪽을 가리키면 마땅히 갑의 말을 좇고, 필경의
사세가 서쪽을 가리키면 마땅히 을의 말을 좇아야 하지만, 일의 기틀을 동서(東西)로 지휘하는 것은 사람의 전이(轉移)
하는 사이에 있으니, 탐지하는 기미와 짐작하는 성기(聲氣)가 없으면, 곁에 있는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라는 사세로써
권하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라는 사세로써 권한다.
허실(虛實)이 여기서부터 갈라지고 성패가 여기서 정해진다. 여기에 신기(神氣)의 추측이 갖추어진 경우에는, 어떤 것은
양쪽 설을 참화(參和)하여 절충을 얻기도 하고, 어떤 것은 양쪽 설을 떠나서 동서로 갈라지기 이전에서 주선을 얻기도
하며, 혹은 양쪽 설을 아울러 취해서 그 구처(區處)하는 바가 동쪽을 가리키면 동쪽으로 응하고 서쪽을 가리키면 서쪽
으로 응하며, 동서를 아울러 가리키면 동서로 아울러 응하기도 한다.
다만 그 가운데엔 절로 정대(正大)와 편사(偏邪)의 나눔이 있기 마련이니, 편사를 좇아서 성공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정대
(正大)함을 좇다가 실패하는 것이 낫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지난 역사의 시비(是非)의 단서가 옛사람에 있어서는 상반
(相反)되는 말을 가려서 취하는 일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후세 사람은 다만 결말의 묵은 자취를 보고 사필(史筆)의 유풍
(遺風)을 말할 뿐이니, 이것이 가히 후세 사람이 옛사람의 처사(處事)에서 시비를 아울러 봄으로써 감계(鑑戒)를 삼을
뿐이요, 함부로 시비를 덧붙여 뒷사람의 비방을 받아서는 아니된다.
또 예론(禮論)의 이동(異同)에 대해서는 자연, 정(情)ㆍ의(義)ㆍ속(俗)을 참작하여 택정했을 터이니, 다시 정ㆍ의ㆍ속에
가릴 만한 단서가 없다면 모름지기 만난 기회와 일의 형편으로써 청종(聽從)해야 한다.
13. 송사를 들을 때의 참증(參證)
송사를 듣는 방법은 모름지기 참작과 증거로써 해야 한다. 윤상(倫常)으로 참작하고 인정(人情)으로 참작하고 일의
형편으로 참작하며, 가족으로 증거하고 이웃과 마을 사람으로 증거하고 물상(物象)으로 증거한다.
비의(比擬)의 경중(輕重)은 한결같이 당시의 전율(典律)에 의지하되, 큰 옥송(獄訟)이든 작은 옥송이든 모두 참고와
증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밝은 판단 신기한 판결[明斷神決]이란 모두 이 참작과 증거에 의하여 감춰진
것을 탐지하고 흔적을 끌어내는 것이니, 신기(神氣)에서 발(發)하여 언사(言辭)에 나타나며 형적(形跡)에서 마친다.
혹 몰래 기색을 살피거나 반복하여 힐문함으로써 절로 탄로되기를 기다리며, 나의 신기를 가지고 치우치게 붙들거나
눌러서는 아니된다. 갑의 말을 들을 때엔 신기가 갑에게 통하고, 을의 말을 들을 때엔 신기가 을에 통하여, 다 듣고 난
뒤엔 갑의 장단점으로 을을 일깨우고, 을의 장단점으로 갑을 일깨운다. 다만 법의 취지를 분명히 알려서 율(律)에 의해
감단(勘斷)
죄를 심리해서 처단함)할 일이며, 어찌 그 사이에 내가 관여하랴.
대변(對辨)하는 사람은 스스로 죄줄 단서를 가지고 있고, 법전[金石之典]엔 본시 그에 맞는 율이 정해져 있으니, 나는
오직 그 죄를 드러내고 그 율을 증거할 뿐이다. 또 귀천(貴賤)ㆍ빈부(貧富)ㆍ노소(老少)ㆍ강약(彊弱)에 반드시 구애되지
않아야 하며, 살펴야 할 것은 오직 기질(氣質)과 사색(辭色) 및 지난날에 마음을 쓰고 일을 처리한 것이 선했느냐 악했
느냐 하는 것이다. 이 어찌 관장(官長)이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는 것만을 위함이겠느냐.
무릇 학문을 강론함에 같은 무리를 편들고 다른 편을 칠 때나, 시비와 장단을 겨루고 다툴 때, 마땅히 하늘과 사람이
통하는 성실을 봉행하는 법전으로 삼고, 사의(私意)의 천착과 편견의 고집을 판결의 죄과로 삼아야 한다.
신기통 제2권 비통(鼻通)
1. 몸의 기를 풀무질한다
코는 기를 통하는 구멍이다. 한몸의 풀무로 천기(天氣)를 빨아들여 혈맥을 고동시키고, 항상 성명(性命 생명과 같은 말)의
근원을 잇고, 품부(稟賦)받은 도를 끊지 아니하여 사지(四肢)의 기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고, 이목(耳目)의 기로 하여금
총명하게 한다. 이러한 공은 오로지 코의 통함이 밤낮 그치지 않고 평생을 한결같아서 잠깐 동안이라도 쉬거나 끊어지지
않는 데 있다.
내쉬고 들이쉬는 기가, 나오는 것이 많고 들어가는 것이 적은지, 아니면 나오는 것이 적고 들어가는 것이 많은지는 비록
단정하여 말은 못하지만, 언젠가 보니 독한 연기를 마신 사람은 호흡으로 인하여 어지럼증을 일으켰고, 악취에 취한
사람은 호흡으로 인하여 거꾸러졌다. 그러니 들이쉰 기는 차츰 신기를 적시고, 내쉰 기는 나쁜 독을 다 토할 수는 없다.
이는 맑은 공기를 들여마심으로써 신기를 적시고 피와 살을 만들며 영위(營衛)를 고동하게 한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닌가.
2. 모든 냄새 가운데 맑은 것이 가장 좋다
시냇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항상 맑은 물을 마시고 맑은 냄새를 맡다가, 장마에 물이 몹시 불어 흙과 모래가 섞여 흐르면, 물고기는 흐린 물을 마시고 흐린 냄새를 맡는다. 상류에서 생선과 고기를 씻으면 물고기는 비린내 나는 물을 마시고
비린내를 맡으며, 상류에서 썩은 여뀌잎을 풀면 물고기는 더러운 물을 마시고 나쁜 냄새를 맡는다.
사람이 코로 통하는 기(氣)도 또한 이와 같다. 깨끗한 공기를 코에 통하면 깨끗한 냄새를 맡고, 회매(晦霾 흙비)가 기를
타고 코로 통하면 흙비의 냄새를 맡으며, 향기로운 연기가 실오리처럼 코에 닿으면 그 향기를 맡는다.
더러움이 기(氣)에 섞여 코를 지나면 냄새를 맡자마자 찡그리게 되는데, 대개 냄새가 신기에 맞으면 좋고 나쁨을 기억
하지 않고 그것을 잊어버리며, 냄새가 신기를 거스르면 생각할 것도 없이 코에 스치자마자 곧 메스꺼워진다.
만약 오래 들여마시면 반드시 상해(傷害)가 되니, 비록 향기가 더러움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오래 맡으면 반드시 손해가
있다. 더러운 냄새에 병이든 자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기를 즐겨하며, 냄새에 병이 든 적이 없는 자는 언제나 깨끗한 냄새
가 알맞으며 향기나 구린내에 치우침이 없다. 이것으로 보면 제규 제촉(諸竅諸觸) 가운데 가장 빠르고 거짓됨이 없는
것은 오직 코로 냄새맡는 것이다.
3. 모든 냄새의 분별은 근본이 있다
모든 냄새의 이름은 옛사람이 상세히 구별한 것이 없으므로, 지적하기가 매우 어렵고 형용(形容)이 한결같지 않다.
설사 나로 하여금 구별하라고 해도 이름지어 여러 사람에게 알도록 하기가 어렵다.
물물물물명(物名)에 따라서 냄새를 이름지으면 생흙 냄새ㆍ썩은 흙 냄새ㆍ바닷물 냄새ㆍ시냇물 냄새ㆍ자른 나무의
냄새ㆍ벤 풀의 냄새ㆍ땀과 때 냄새ㆍ썩는 냄새로부터 고기ㆍ초ㆍ장 및 온갖 약재에 이르기까지 다 냄새를 가진다.
또 그 가운데는 날 것과 익은 것, 묵은 것 과 썩은 것의 차이가 있다. 냄새는 반드시 날씨의 추위ㆍ더위ㆍ건조함ㆍ습함
으로 말미암아 그 기(氣)와 맛이 변하며, 따라서 냄새의 발산 또한 이에 따라 다르다. 이를 능히 분별하는 것이 비통
(鼻通)의 신기이다.
신기의 청탁(淸濁)은 비록 분별함에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지만, 사는 곳과 평생토록 젖어 물듦이 절로 같지 않다.
갯벌에서 생장한 자는 바다의 짠맛이 물들어 젖었으므로, 조금 짠 바람에서는 그 짠맛을 알지 못하며, 산장(山莊)에서
생장한 자는 맑은 아지랑이 기운에 젖어 있으므로 조금 흐린 바람이라도 그 흐림을 쉽게 깨닫는다.
어물 가게나 난초 있는 방에 오래 있으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니, 염착(染着)됨의 치우치고 막힘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사람의 공부는 오직 모든 냄새를 쓸어 없애는 데 있다. 맑고 깨끗한 공기를 익히 맡으면 바람결에 오고 가는 모든 냄새를
쉽게 분별할 수 있으며, 또 몸에 있는 신기도 본래 품부받은 자연의 냄새를 바꾸지 않는다.
4. 향기가 순담(純澹)한 것만 못하다
옛적에 몸에서 아름답지 못한 냄새가 나는 자는 용취(容臭)를 차고서 이를 가리었는데, 후세에 와서는 몸에 냄새가 있든
없든 용취를 몸의 장식으로 쓰고 있다. 옛날에는 제사에 피와 기름과 울창주를 썼는데, 후세에 대ㆍ중ㆍ소의 제사(祭祀)에 분향을 함으로써 더러움을 물리치고 신과 통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향을 쓰는 풍속이 성하여져, 외국 선박에
향을 전래하는 장사가 있고 서점엔 인향보(印香譜)가 있으며 도관(道觀 도교의 절)과 불우(佛宇 불교 사찰)에 항상 향
연기가 나부끼고, 조회(朝會)와 연회석엔 멀리서까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문장과 시가(詩歌)에서 그 글자를 많이
쓰고, 화원과 과원(果園)에 그 나무를 많이 심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모두 향기가 귀한 줄만 알고 순담한 천연(天然)의
신기(神氣)는 자연을 좋아하고 잡됨을 미워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대개 향기의 무리는 향기를 내는 물체로 중심을 삼고 그 주위로 외곽을 삼는데, 바람이 빠르냐 느리냐에 따라 긴 타원
짧은 타원이 되는 것은 소리무리 이통(耳通)에 보였다 와 같다. 향물(香物)의 중심으로부터 향위(香圍)의 외곽까지는
불과 한 길 남짓하여 그것을 맡을 수 있는 자는 다만 한방 안에 있는 이뿐이요, 그것도 오래지 아니하여 바람에 흩어져
소멸되고 만다.
깨끗하고 맑은 냄새로 말하면 천하의 인물(人物)이 함께 맡는 바요, 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같은 기미를 미루어 헤아리면,스치는 모든 냄새를 쉽게 분별할 수 있다.
5. 냄새의 뱀
모든 냄새는 바람이 불면 쉽게 흩어지고, 멈추어 쌓이면 물체에 밴다. 닭의 홰나 돼지 우리엔 닭과 돼지의 냄새가 있고,
용과 뱀의 굴에는 용과 뱀의 냄새가 나며, 어진 사람이 사는 방엔 난초와 지초의 냄새가 있고, 어둡고 어리석은 이가 사는
방엔 혼탁한 냄새가 있다. 궤나 책상, 병풍이나 장막이 사실은 사람이 어지냐 어리석으냐에 관계가 없는데도, 그 배는
냄새는 주인이 어지냐 어리석으냐에 따라 다르다. 탐관 폭리(貪官暴吏)가 맡고 있는 고을은 더럽고 나쁜 냄새가 오랜
세월 그치지 않으며, 인정(仁政)과 선교(善敎)가 널리 퍼진 땅엔 좋은 명성의 냄새가 자못 유전(流傳)한다.
사람의 소문과 냄새는 물체의 소문과 냄새와 달라 능히 남에게 전파하여 멀리에까지 통하며, 또 물체에 흘러 물들여 산천
초목에까지 미친다. 만약 흩어지고 남은 냄새에서 남은 자취를 추구하거나 장차 피어날 즈음에서 그 미세한 냄새를 찾는
것은, 사람이 도리어 사냥개가 짐승이 남긴 냄새를 찾는 것만 못하다.
6. 냄새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있다
사람이 음식을 아직 맛보기 전에 먼저 냄새를 맛보게 된다. 물크러진 물고기나 썩은 고기를 냄새 맡고 반드시 싫어하는
것은 생기(生氣)를 상할까 두려운 때문이요, 조화(調和 맛을 고루 맞추는 것)의 향기롭고 달콤한 것을 맡으면 곧 기쁨이
있는 것은 생기에 보탬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기를 보호하는 데 있어 어찌 냄새에만 이러한 성실(誠實)함이 있겠
는가. 제규 제촉(諸竅諸觸)이 다 그러하다.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모든 물체 또한 그러하다.
현저(顯著)한 냄새는 그 이해(利害)가 쉽게 분별되지만, 은미(隱微)한 냄새는 분별하기 어렵다. 맑고 깨끗한 가운데 잡란
(雜亂)한 냄새가 조금 있어 가끔 바람결에 한번 마시는 냄새나, 눈엔 냄새의 발동이 보이는데 코는 아직 맡지 못한 냄새나, 귀에는 냄새가 난다는 말이 들리는데 코는 직접 맡지 못한 냄새 따위가 모두 분별하기 어려운 냄새들이다. 그러므로 냄새를 잘 분별하는 자는 전에 맡았던 냄새를 증험함으로써 뒤에 맡은 냄새의 좋고 나쁨을 정하여, 저 냄새를 견주어서 이 냄새의 맑고 흐림을 분별한다. 뿐만 아니라 장차 발생할 냄새를 능히 맡고 이미 없어진 냄새의 남은 냄새를 맡으며, 그 선악 이해
(善惡利害)를 마치 음식을 삼키고 토하듯, 그 청탁 장단(淸濁長短)을 음률을 분별하듯 가려낸다.
냄새는 물기(物氣)에서 나서 거짓이 없고, 후각은 생기(生氣)에서 나서 성실(誠實)함이 있으므로, 억지로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게 마련이다. 옛사람은 냄새에 대해서 상세히 연구한 의논이 없고, 지금 사람은 냄새에 대
해서 소홀함이 많다. 사람과 물건에 있어서는, 다만 향내와 구린내의 구별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자기를 감촉시키는 것이
생기(生氣)의 이해(利害)가 되는 줄을 연구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있어서는 말이나 행실이 냄새를 발하여 사람과 물건을
감촉시키면 도리어 자기의 이해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신기통 제2권 구통(口通)
1. 말하고 먹는 것은 서로 응한다
말은 입에서 나오고 음식은 입으로 들어간다. 나오는 것과 들어가는 것이 서로 응하고 서로 부합되는 것과 굽이돌아 서로
만나는 것과 나를 미루어 남을 은혜롭게 하는 것은 성실한 말이며, 서로 등지고 서로 해치는 것과 분주하고 어긋나는 것과 나로 말미암아 남을 해치는 것은 허망한 말이다.
곧장 음식을 청하는 것은 비렁뱅이의 일이요, 공을 들여 만들고 교역(交易)함은 경직(耕織)과 공상(工商)의 일이니, 이것이 바로 말과 음식이 서로 응하고 서로 부합하는 것들이다. 평소에 남에게 충직과 신의를 쌓아 남에게 사양함으로써 남이 나에게 사양하며, 남에게 주면 남이 나에게 주는 것이니, 이것이 곧 말과 음식이 굽이돌아 서로 만나는 것이다.
정사(政事)는 인(仁)에서 발하고 교문(敎文)은 그 선악을 밝혀,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각각 생산 작업에 편안하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말과 음식이 나를 미루어 남을 은혜롭게 하는 것이다.
남에게 구하는 것이 있어도 남이 굳이 나를 거절하고, 남에게 작은 것을 빼앗으면 나의 큰 것을 잃는 것이니, 이것이 곧
말과 음식이 서로 등지고 서로 해치는 것이다. 구할 바는 여기에 있는데 행할 바는 저쪽으로 달리고 거처를 편안히 하고
싶은데 도리어 소요를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말과 음식이 분주하고 어긋나는 것이다.
탐욕하여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여 정치는 돌아보지 않고, 사견으로 어긋나고 괴탄한 가르침을 만들어 온 백성
으로 하여금 떠돌고 굶주리며 떨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말과 음식이 나로 말미암아 남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이 성실하냐 허망하냐 하는 것은 음식의 의불의(義不義)ㆍ이불리(利不利)ㆍ해불해(害不害)로 결정되는 것임
을 알 수 있다. 천하의 모든 일은 혹 하루 이틀 빠뜨릴 수 있고, 한두 달 멈출 수도 있으며, 2~3년 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오직 음식 한 가지만은 비록 반나절이라도 갑자기 중단할 수 없으니, 어느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또 말의 발생을 안으로부터 말하면, 음식이 말 기운을 보급하여 말이 추출(推出) 발양되는 것이며, 밖으로부터 말하면
추기(樞機)와 주선(周旋)이 음식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나의 입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 반드시 서로 응하는 것이
어찌 사람뿐이랴. 새나 짐승의 소리도 흔히 먹이를 위해서 내는 수가 많다.
2. 혀는 순담(純澹)한 맛을 좋아한다
혀는 입 안에 있는데, 그 형질(形質)은 뾰족하고 얇으며, 혈육(血肉)은 부드러워 바깥에 있는 무딘 피부와 같지 않다.
맛을 아는 감촉 또한 빨라서 신맛ㆍ쓴맛ㆍ짠맛ㆍ단맛ㆍ담담한 맛 따위는 닿자마자 곧 알며, 또 출납하는 기를 능히 선고
(扇叩)하므로, 말이 이로 말미암아 조절되고 음식이 이로 말미암아 삼키고 뱉어진다. 순수하고 깨끗한 맛은 음식의 근본
이므로 오래도록 싫증남이 없이 화순(和順)함을 취할 수 있다.
물은 평담(平澹)한 샘물을 취하고, 불은 그 기(氣)가 마르지도 습하지도 않는 것을 취하며, 곡식은 그 맛이 정순(精順)한
것을 취하고, 때는 배고프지도 배부르지도 않는 때를 취하며, 물고기와 고기ㆍ야채ㆍ과일ㆍ오이 따위까지도 다 평담(平澹)한 것을 취하여 화평한 기를 북돋아 기른다면, 기(氣)로 말미암아 하는 말이나 동작이 거의 화평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의 모든 재료는 다 있는 그곳의 지기(地氣)를 품부받아 생성되므로, 사람이 먹고 마시며 씹는 것은 모두 이
지기를 마시는 셈이 된다. 바닷가와 산모퉁이나 메마른 곳과 비옥한 곳에서는 각각 성질과 맛을 달리 하는 것이니, 바닷가
에 사는 사람은 유독 깊은 산의 물건을 즐기며, 비옥한 땅에 사는 사람은 메마른 땅의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기서 사람의 식성(食性)은 연하고 부드러운 것과 순수하고 맑은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기름진 음식을 싫어
하는 이는 채소를 즐겨 먹으며, 맵고 뜨거운 맛에 취한 이는 차고 서늘한 것을 조급히 마시니, 이것이 편식으로 병을 얻고
그 해결을 구하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3. 청렴을 향하고 탐오를 등진다
극히 청렴하고 맑은 사람은, 자기의 손으로 먹고 마실 자료를 준비하는 적이 없지만, 평생토록 먹을 것이 끊어지지 않으며, 먹을 것은 남에게서 취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한 몸의 기갈(飢渴)을 면하면 그만이다. 지극히 탐하는 사람은 백성의 고택
(膏澤)을 벗기지만, 화패(禍敗)가 쉽게 이르고 골경(骨硬)이 가슴을 막는다.
창고가 비록 가득하지만 자기가 먹는 것은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으며, 친속들이 하루 먹는 것은 쌀 한 말과 한 되박
장에 불과하며, 그 나머지는 다 패출(悖出 재물이 정당하지 못하게 소비됨)의 밑천이 되고 말 것이니, 도둑이 훔쳐 가지
않으면 날치기를 당하게 된다.
밥 한 술 주고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먹는 사람은 은혜롭게 여기지 않으며, 한 잔의 술을 주고서 요청하거나 시키는 일이
있다면 사람은 즐겨 받아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전형(銓衡)하는 사람이 이러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직책을 주어 벼슬을 살게 한다면, 공평하지 못한 사람은 혹 사정에 끌리고 안면에 걸려서 청렴한 사람을 버리고 탐하는 사람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민생(民生)의 공론(公論)이 온통 불안한 뜻을 품어, 장차 백성들이 이산(離散)할 조짐이 있게 된다.
청렴한 자라 해서 어찌 사람마다 먹을 것을 주랴. 다만 아껴 쓰고 백성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탐하는 자라고 해서 어찌
집집마다 벗기랴. 먼저 소문이 백성을 소요시킨다.
대개 인심의 향배(向背)는 청렴하다 탐욕하다는 소문에 말미암고, 청렴하다 탐욕하다는 일컬음은 식화(食貨)의 취사(取捨)에 달려 있다. 청렴한 사람은 남에게서 취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 무엇을 줄 때 자랑하거나 인색한 빛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탐도(貪饕)하는 사람은 남에게서 취하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남에게 주어야 할 것을 즐겨 주려
하지 않을뿐더러, 꾸짖는 말씨와 얼굴빛까지 더한다. 역사(役事)하는 공부(工夫)들까지도 모두 빠져나갈 명분을 남겨 먹을 바 이해(利害)를 택한다.
4. 선천적 염탐(廉貪) 및 음식의 염탐
하루에 두 번 먹는 것은 청렴한 이나 탐욕한 이나 면하기 어려운 바이니, 생기(生氣)에 물대는 일을 절로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청렴이다 탐욕이다 하고 이름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경영하는 일이 없는데도 절로 청렴한 기색이나
탐욕의 기색을 나타내는 것은, 이것이 바로 본래의 품질에서 오는 청렴이고 탐욕이다.
품질이 청렴한 자는 조석의 끼니로 자족(自足)하며 빈부(貧富)나 궁달(窮達) 때문에 지조를 고치지 않고, 진수 성찬 보기를 거친 나물밥처럼 심상하게 보며, 선물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오직 사리에 마땅한가 마땅하지 않은가에 따른다.
선천적으로 탐도(貪饕)한 자는 자기에게 없으면 언제나 남에게서 취할 것을 생각하며, 자기에게 있으면 다시 더 나은 물건
을 생각한다. 오직 안다는 것은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함이거늘, 어찌 스스로 만족함을 알겠는가. 실제 경영하는 일
에서 청렴과 탐욕의 뿌리를 논할 수 있는 것이 곧 음식에 대한 청렴과 탐욕이다. 사람이 능히 먹는 것에 청렴할 수 있다면
그 나머지 한만(汗漫)하고 무용(無用)한 일엔 거의 완전하게 청렴할 수 있으며, 먹고 마시는 일에 능히 청렴할 수 없다면
그 나머지 대소(大小)ㆍ긴만(緊謾)하고 유용무용(有用無用)한 모든 사물에 대해 탐도를 부리게 되어, 능히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려고 하고 얻을 수 없는 것은 얻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 까닭을 궁구해 보면 선천적인 청렴과 탐욕은 이룬 그릇의 차이며, 음식상의 청렴과 탐욕은 발용(發用)의 차이다.
이뤄진 그릇의 바탕은 변통할 수 없으나, 발용하는 음식은 조종할 수 있다. 음식은 신기(神氣)를 물대는 것이니, 탐도로써
물을 대면 발용하는 것이 모두 탐도하지 않은 일이 없고 청렴으로써 물을 대면 발용하는 것이 모두 청렴하다.
5. 음식의 훈증(薰蒸)
음식을 자주 먹으면 먼저 먹은 것이 채 소화(消化)되지 않았으므로 뒤에 삼킨 것이 가슴에 가득하여 신기가 노곤해지며,
만약 음식을 때를 거르면 먼저 먹은 것이 이미 대장으로 들어갔으므로 장부(臟腑)가 고갈되어 신기가 피곤해지니,
이것은 공급되던 훈증의 기운[薰蒸之氣]이 멈추면 신기의 통함이 저절로 막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홍국(紅麴 누룩의 일종)을 쪄서 만드는 것과 청채(靑菜)를 쌓아 썩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열기가 마치 안개가
피어 오르듯 올라갔으며, 손으로 만졌더니 썩은 듯하였고 얼굴을 쪼였더니 취하는 것 같았다.
음식이 지라와 위에서 그렇게 물크러지면, 반드시 훈증의 기가 가운데로부터 밖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신기가 이로 말미암아 활동하고 모든 감각 기관도 이로 말미암아 통달하니, 음식은 먹는 간격, 씹는 속도, 음식의 양과
내용을 알맞게 절충하여, 신기가 화창하기에 맞도록 할 것이다. 순수하고 맑은 다탕(茶湯)이 가장 좋으니, 입과 이와
가슴속의 찌꺼기를 세척하고 피부나 힘줄의 한액(汗液)을 쫙 통하게 하면, 정신이 활발하고 생각이 느긋해진다.
6. 주림과 배부름은 남들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시는 일을 하며, 또 누구나 먹고 마실 욕망을 갖고 있다. 천만 사람이 있으면 천만 사람의 음식이
있으며, 억조의 백성이 있으면 억조 백성의 음식이 있으니, 내 홀로 음식을 취하고 남의 음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남의 음식을 돌보아 그로 하여금 편안하게 누리도록 해주면, 그 사람도 또한 반드시 나로 하여금 편안히 음식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남의 밥을 빼앗아 나의 밥을 풍성하게 함이랴. 반드시 원한을 갚고 분함을 씻을 것
이다.
빼앗는 방법은, 비록 포학함과 잔인함의 정도에 따라 몰래 훔쳐서 가지는 것, 속여서 가지는 것, 위협하여 가지는 것의
차이가 있지만, 탐욕한 관리가 취하는 것은 어찌 그 사람만을 깊이 꾸짖겠는가. 사실은 정치의 교화가 그 바른 도를 다하지 못한 때문이다. 선왕(先王)이 민산(民産)을 제정하여 반드시 각자의 직분을 지키고 각자의 누림을 편안히 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혹 다투어 빼앗거나 침노하여 시끄럽게 할까 두려워, 상(庠)ㆍ서(序)ㆍ학(學)ㆍ교(校)의 제도를 설치하여 염치(廉恥)와 예양(禮讓)을 가르쳤고, 어질고 능하며 청렴하고 공평한 벼슬아치를 선택하여 한계를 벗어나 남을 침해하는 버릇을
막게 하였다. 그러므로 후세의 정치와 교육은 마땅히 이 옛법을 밝게 닦고 약간의 교정을 첨가하는 방법을 쓸 뿐이요,
따로 특별한 것을 만들거나 설치해서는 아니 된다.
탐욕한 관리가 백성의 밥을 빼앗는 것은, 곧 조정이 탐욕스럽고 포학한 사람을 뽑아서 백성의 재산을 빼앗고 개인을 살찌
우며 나라를 좀먹게 하는 것이다. 또 서로 침노하고 빼앗으며 약육 강식하는 것은, 곧 조정의 교법이 밝지 못하여 백성이
따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능히 이에 미치면 으레 따라 지키는 바가 있게 되어, 내가 배고프면 남의 배고픔을 생각하고 내가 배부르면 남이
배부름을 생각하게 된다. 가장(家長)이 되어 집안에 배고픈 이가 있는 것은 가장의 책임이며, 관장(官長)이 되어 관할하는
구역 안에 배고픈 자가 있는 것은 곧 관장의 책임이다. 나라나 천하에 있어서도 음식의 도는 다 그러하여, 두루 통함으로써 선(善)을 삼는다.
7. 내외(內外)의 조화
씹어 삼켰는데 편안하게 소화되지 않으면 먹지 않는 것만 못하여, 설령 편안하게 소화되었더라도 먹은 음식물을 가지고
시비(是非)하여 불안하면 역시 먹지 않는 것만 못하다. 음식의 편미(偏味 한 가지의 맛)를 네댓 차례 삼키면 반드시 가슴에 모아 엉기어 즉시 소화되지 아니 하므로, 밥에 염매(鹽梅간을 알맞게 맞춤)와 침채(沈菜 김치)를 곁들여서 밥맛의 단순함
을 조화시키면 엉겼던 것이 환연히 내려가니, 조화의 처방이 이 때문에 생겼다.
의서에 오미(五味)의 화제(和劑)가 있고 주방엔 여러 가지 조미제가 있어, 비위(脾胃)로 하여금 편안히 받게 하고 장부
(臟腑)로 하여금 쾌적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배 안 음식의 조화(調和)이다.
처음부터 의롭지 못한 물건을 취하지 말고 받아서 당연한 음식만을 택하며, 기회에 다달아서는 모름지기 송사의 길을
피하며, 즐거움을 교환하는 손님을 함께 맞이하여 조금도 불안한 뜻을 남기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곧 몸 밖의 음식의
조화이다. 만약 안팎이 조화를 얻는다면 농즙(濃汁)이 정액(精液)에 물대고 정액은 혈육(血肉)에 물대어, 기(氣)가 화하고
몸이 살찐다.
그러나 내외가 조화를 얻지 못하면 안에는 경색 비통(硬塞痞痛)의 걱정이 있고, 밖에는 얕으면 분쟁과 시비의 송사가 있고, 깊으면 구수(仇讐)ㆍ짐독(鴆毒)의 화가 있다. 음식에 대한 탐욕이 과도하여 염치가 없는 자는 바깥 조화는 물론 안의 조화
도 그 마땅함을 잃는다. 비단 몸에만 추잡한 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의 모욕을 받게 되니, 조금만 지각이
있는 이는 즐겨하지 않는다.
검소함으로부터 사치함에 들어가는 것과, 장년을 지나 노년에 이르는 것과, 맛없는 음식을 피해 맛나는 음식으로 나아가는 것과, 나물밥을 싫어하고 고량진미를 취하는 것은 경계할 바다. 이상은 음식이다.
8. 말은 소리에 의해서 나온다
안에 있는 기를 밖으로 내는 것이 소리요, 얻은 바 형상을 형용하는 것이 말이다.
소리의 발생은 장부에 뿌리박고 목구멍과 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그 기의 바탕에 의하여 그 청탁 강약(淸濁强弱)이
나뉘고 지속(遲速)이 달라지니, 마치 피리의 소리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기에서 나되, 소리의 청탁과 강약은 쌓인 기에
말미암으며, 장단과 대소와 지속은 구멍뚫림의 치밀함과 부는 데 따라 다른 것과 같다.
화평함과 우울함, 희로와 애락은 소리에 말미암아 고동되면, 그 소리를 듣고 먼저 그 청탁과 희로 따위가 각각 감촉되는
바가 있어서 발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소리로 인하여 꾸미고 절주(節奏)하여 명목을 형용하는 것이 곧 말이다.
말을 자세히 듣고 조리를 잘 풀어서 맥락을 추측하면, 그 사람의 품질과 얻은 바에 비해 거의 그 요령을 얻을 수 있으며,
내가 한 말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하면, 남도 역시 나의 품질과 경험에서 얻은 것임을 알 수 있다.
9. 말이 통함을 얻다
먼저 일의 기회를 살피고 다음에 사람의 기색을 살펴 말은 골라서 하되, 일의 기미를 어기지 말며 기색(氣色)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사리(事理)를 순조롭게 풀며 일의 형편을 잘 통찰하기를, 마치 시내를 흐르는 물이 지세(地勢)를 따라 흐르
듯 해야 한다. 장(章)을 이룬 글에는 시종과 조리가 있다. 소리에는 운치가 있고 말은 기력을 낳으므로 듣는 자로 하여금
귀를 기울여 쉽게 깨닫고 쉽게 기억하도록 한다. 이를 일러 말이 통함을 얻었다고 한다.
자기의 언어가 통함을 얻으면 반드시 점점 쌓이는 소득이 있음은 신기가 갖는 소득의 이치다. 말로써 형용하여 그 진상
(眞像)을 다 얻기 어려우니, 다언(多言)이 그 진상을 반드시 다 얻게 할 수는 없고, 소략한 말은 차분하지 못하기 쉽다.
다언과 소략한 말을 절충하여, 나의 신기의 이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신기에 그윽이 통하도록 해야 한다.
또 전에 남의 말을 들을 때, 내가 청납(聽納)하는 조리를 얻고 또 형용의 우열을 증험하면, 내가 발언할 때를 당해 먼저 그
사람의 조예가 얕은지 깊은지 청납이 어려운지 쉬운지를 헤아리고, 다음으로 가슴속에 있는 이수(理數)와 상기(象器)를
발하여 순서대로 출래(出來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옴)하되, 그 선후와 상략(詳略)의 마땅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신기의 발함은 스스로 밀려오는 조수 같은 세력이 있으니, 만약 먼저 발할 것을 뒤에 하고 뒤에 발할 것을 앞에 한다면
듣는 자가 미란(迷亂)하여 추심(推尋)할 실마리를 얻기 어려우며, 자세히 해야 할 곳을 줄이고 줄여야 할 곳을 도리어
자세히 한다면 듣는 자가 지리멸렬하여 신기가 나태하고 어두워진다.
10.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
시비(是非)의 질정은 신기가 통한 바 실답고 바른 근거로 표준을 삼아야 하고, 옳다는 자가 많은 것이나 또는 그르다는
자가 많은 것이나 내가 주장하는 것이나 그가 주장하는 것의 한쪽에 치우쳐 집착되어서는 안 된다.
시비의 분쟁에 걸림이 없으면 저절로 신기가 통해져서, 말은 절로 가려져 힘을 내고 이치 또한 변설(辨說)로 인하여 점점
드러난다. 그리하여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왜 그르며 옳은 것은 왜 옳은가가 뚜렷해
진다.
또 능히 옳고 그름을 떠나서 옳고 그름의 숨은 뿌리를 드러내며, 옳고 그름을 뒤로 하여 옳고 그름의 귀숙(歸宿)을 결정
한다면, 시비는 한갓 사람의 입에서만 생기고 없어질 뿐이다. 그러나 실다운 이치는 완연(完然)히 자재(自在)하여,
일찍이 옳다고 하여 불어나거나, 그르다고 하여 준 적이 없다.
오직 사람이 공(功)을 삼고 업(業)을 삼는 바가 성실(誠實)의 통한 바를 좇으면 사세(事勢)가 순조로워 효험을 보기 쉽고
시비가 밝아져서 분별하기 쉬우며, 만약 성실의 통한 바를 능히 좇을 수 없다면 반드시 허망(虛妄)함을 일삼아 끝내 그
실효를 얻기 어렵게 될 것이다.
또 시비가 이미 허망한 시비이거늘, 어떻게 참옳음과 참그름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견백(堅白)의 궤변은 혀가 닳도록
그치지 않았고 종횡(縱橫)의 유세(遊說)는 예부터 쉬지 않았는데, 이는 기(氣)에 대한 견(見)이 없고 기에 대해 얻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허망한 말을 하고도 스스로 그른 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11.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다
갖가지 단서를 끌어붙여도 좋은 말은 될 수 없고, 아무리 문장을 빨리 짓는다 해도 반드시 좋은 말은 아니다.
어리석은 이를 깨우쳐서 그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며, 기상(氣象)을 설명하되 간략하면서도 해박하게 하는 것이 곧
좋은 말이다.
무릇 말의 우열과 선악은 신기의 통한 바에 말미암아 득실(得失)과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다.
신기의 통함을 얻은 자는 허위를 버리고 성실을 취하며, 무용(無用)을 버리고 유용을 취하며, 통하는 바가 독실하고
말하는 바가 명백하나, 그 가운데도 자연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다.
만약 신기의 통함을 잃은 자는 허위로 성실을 삼고 무용으로 유용을 삼으며, 통한 바가 허망하고 말한 바가 부잡(浮雜)
하나, 그 중에도 역시 심천의 차이가 있다. 통한 바 허위가 얕은 자와 성실이 얕은 자는 언론의 차이가 서로 그렇게 멀지
않으며, 허위가 깊은 자와 성실이 깊은 자는 언론이 서로 맞서고 추진(推進)함이 점점 멀어진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약 신기의 통함으로써 개유(開諭)코자 한다면, 성실을 얻은 자는, 그 심천을 막론하고, 설사 종전에
신기의 설을 얻어 들은 적이 없더라도 통한 바 진실이 근거가 있음을 자세하게 들으면, 공용(功用)은 쉽게 효험을 볼 수
있고, 또 잘못 심력(心力)만을 허비하는 일이 없이 반드시 은연중에 계합하고 환연(渙然)히 풀릴 것이다.
만약 거짓된 자를 대하면, 그 깊고 얕음을 막론하고, 그 사람이 한번도 스스로 거짓된 줄을 안 적이 없는 자라면 먼저
거짓됨 가운데서 성실한 도에 나아가, 허위와 성실 중 어느 것이 나은가를 비교하여 스스로 택하게끔 함으로써 근본의
자루를 돌이키게 할 것이며, 어거지로 당겨 부러뜨리는 갑작스런 결정을 해서는 아니 된다.
이미 근본의 자루를 돌이키는 조짐을 얻으면 뒤이어 채찍으로 길들여 나아가라.
대개 어리석은 이를 깨우치는 일이, 어찌 귀를 끌어당기고 얼굴을 대해 직접 가르쳐서 오랜 세월을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겠는가. 사실은 타고난 천품의 총명 여부와 습염(習染)의 선악(善惡)ㆍ심천(深淺)에 달려 있다.
12. 문자의 언어
문자를 늘어놓고 언어를 기록함으로써 사물의 당연한 법칙과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것을 구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히 문자의 언어를 듣고 선각(先覺)의 뜻을 환히 깨닫게 해야, 양공(良工)의 고심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기의 통함이 가슴을 환하게 다스려서 언어로 발표한다 하여도 오히려 미진한 탄식이 있거든, 하물며 통한 바
신기를 미처 드러내지 못한데다가 언어의 전달이 어긋나게 됨에랴.
또 문자의 배찬(排撰)은 또한 전역(傳譯)의 한 관(關)이 되는 것이니, 문자가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면 사연(辭緣)이
경색(梗塞)하며, 글이 자세하지 못하면 이세(理勢)가 서로 어긋난다.
설사 문자의 언어를 들었더라도 글뜻을 깨닫기 어렵거든, 어느 겨를에 글로 인해 깨달음을 논하랴.
설령 글자의 뜻과 이치가 그 마땅함을 다 얻었더라도, 신기가 구두(句讀) 사이에 활동함에 있어 보는 자가 능히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고, 그 사람의 신기가 통하느냐 통하지 못하느냐가 또한 전역의 한 관이다.
문자(文字)에 실린 언어는 두 관을 뚫을 수 있어야 비로소 언어의 전달이 문자에 미쳐, 전사자(傳寫者)는 손으로써 말을
발하고 전수자(傳受者)는 눈으로써 말을 들어, 천만 년에 길이 운치를 남기고 억조 백성의 질정하는 바가 됨을 자임
(自任)할 수가 있다.
13. 요령의 허실(虛實)
말에는 반드시 한 절(節)의 가장 중요한 요령이 있고, 거기에 앞뒤 순서를 배포(排布)하고 조응(助應)하는 것은, 작으면
4~5절, 많으면 10절, 1백 절에 이르른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볼 때는 한 절의 요령이면 족하다. 10절 1백절의 조응은 문구(文具)가 되지만, 근본과 결과가 저절로
머리와 꼬리를 이루면, 완비된 요령을 해롭히지 않는다. 간혹 호언장담하는 사람은 치달림이 광활하고, 호변지사(好辯
之士)는 부회(附會 견강부회)함이 광박(廣博)하여, 도리어 요령을 혼란시킨다. 바람이 혀 끝의 신기루에서 일어나고,
그림자가 가슴 속 신기루에서 움직이니, 이것이 바로 실용성이 없는 문담(文談)이다.
대저 말의 번거로움과 간략함은 오직 통한 바의 정밀하고 추솔함과 순수하고 박잡함에 달렸으니, 추솔하여 순수치 못하면 번문회설(繁文薈說)에 흐르기 쉽고, 정밀하고 순수하면 물아(物我 물은 대상, 아는 주체)를 참작하여 오직 사달(辭達 말은 요령을 전달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을 기할 뿐, 헛되고 잡됨으로써 실(實)을 해치거나 간략함 때문에 실을 빠뜨리는 일이 없다. 또 상ㆍ중ㆍ하 세 등급의 사람을 대하여 수작할 때는 각각 차이를 두어 알맞게 하며,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서로 응
하는 기틀과 얽힌 맥락이 차례를 잃지 않아야 받아들이면 개득(開得)의 이익이 있고, 말을 실천함에 따르기 쉬운 방도가
생긴다.
14. 인사(人事)의 통하고 막힘
천기(天氣)의 유행은 세(勢)를 타서 주선(周旋)할 수 있으나 위월(違越)하여 변통할 수 없으며, 인사의 통함과 막힘은,
말로써 그 막힌 것을 통할 수도 있고, 또한 말로써 그 통한 것을 막을 수도 있다.
말은 공연히 홀로 행해질 수 없으니, 모름지기 때와 형세를 인연하고 사물의 이치에 의탁해야만 비로소 행해질 수 있다.
말을 듣는 자도 또한 참작해서 헤아릴 사물의 이치와 때와 형세가 있으니, 말을 하는 자는 먼저 듣는 자의 참작과 헤아림을 탐지해서 변통의 술(術)을 베풀 수 있다.
치우침에 통한 자에게는 치우친 바 끝을 말하며 그것을 막고, 두루하고 넓은 도를 말하며 통하게 한다. 허(虛)에 통한 자
에게는 허로 나아가는 폐단을 말하여 그것을 막고, 성실한 도를 말하여 통하게 한다. 통한 바가 없는 자에게는 막힘을
제거하는 방도를 먼저 말해 주고, 통할 수 있는 길은 뒤에 말하며, 통함과 막힘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는 늘 자기가 통한
바로써 통함을 삼고, 인물(人物)에 대하여 통하지 못함이 있음이 곧 자기의 막힘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먼저 그 사람이 통한 바의 그릇됨을 말해주어 그것을 막고서 인물의 마땅히 통해야 할 것을 말하여 통하게 한다.
그러나 혹 한마디의 말을 듣고 통함을 얻거나, 5~6, 8~9마디의 말을 듣고 통하거나, 혹 한 사람의 말을 좇아서 통함을
얻거나, 혹 네댓 사람이 잇달아 나아가 깨우쳐서 통함을 얻거나, 겨우 아는 것만으로는 아직 통했다고 할 수 없으며,
그것을 행함에 어긋남이 없어야 비로소 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남에게 말하여 통하기 어려운 것을 통하고 막기 어려운 것을 막는 자는, 먼저 겹겹이 가려진 관문부터 제거하고 허다한 공력을 써야만 효험을 보게 되는 것이다. 범부(凡夫)에게 있어서 말의 뚫림은 대부분 스스로 한계를 정한 것으로, 당연히
쉽게 통할 터인데도 힘써 달성하기를 기약하지 않거늘, 하물며 장애가 있음에랴! 병된 근원을 논하건대 편급(偏急 소견이
좁고 성질이 급함)함이 아니면 노둔함이다. 이상은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