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전설 - 도선과 왕인의 고향 — 영암 성천과 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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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0.04. 18:01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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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전설
도선과 왕인의 고향 — 영암 성천과 구정
월출산 도갑사로 가는 길목에 구림리(鳩林里)란 옛마을이 있다. 비둘기가 깃든 숲이란 지명답게 전체가 온통 숲으로 뒤덮인 평화스런 마을이다. 달래골이라 부르던, 영암 땅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구림리는 백제 때 한자와 유학을 일본에 전한 왕인(王仁)박사와 풍수설의 비조 도선(道詵)국사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영암 월출산 원경
넓은 들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이 무척 인상적이다. 달이라도 뜨는 밤이면 더욱 아름답다.
풍수설의 시조로 숭상되는 도선은 워낙 전설적인 인물이라 그의 출생 또한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다. 도선의 어머니 최씨 부인은 처녀의 몸으로 길이 한 자가 넘는 오이를 먹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최씨 부인은 구림리 냇가 빨래터에서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도선을 잉태했다는 것인데, 물이나 과일의 씨앗이 생명을 상징함은 성인의 탄생신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어떻든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기에 집안에서는 이를 수치로 여겨 아이를 숲 속에 내다 버린다. 그런데 버린 지 며칠이 지난 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당연히 죽었어야 할 아이가 비둘기떼의 보살핌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많은 비둘기떼가 아이에게 먹이를 날라다 먹이고 한낮이면 새의 날개로 햇볕을 가려 주고 밤이면 새깃으로 포근히 품어 주어 아이를 정성껏 키우고 있었다.
비록 내다 버린 자식이지만 결코 범상치 않음을 안 최씨 집안에서는 이 아이를 문수사(文殊寺)란 절에 맡긴다. 절에서 자란 도선은 후일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돌아와 자신을 키워 준 문수사 터에 새로 절을 지으니 이를 도갑사(道岬寺)라 하고, 그가 태어난 마을을 비둘기의 숲, 곧 구림리(鳩林里)라 이름하게 되었다.
신승(神僧) 도선에 대해서는 출생설뿐만 아니라 이후의 행적이나 죽음에 대해서도 갖가지 이설이 분분하다. 풍수설을 수학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그가 당나라에서 밀교 승려에게 배웠다는 설이 있고, 또 지리산 도사에게 전수받고 여우 여인에게서 구슬을 얻은 뒤 지리설에 통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월출산 정상 부근에 구정봉(九井峰)이라는 높은 봉우리가 있다. 이 봉우리에는 아홉 개의 웅덩이가 패어 있는데 이것 역시 도선의 풍수설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도선이 밀교 승려로부터 풍수설을 전수받고 귀국했을 때의 이야기다. 도선의 귀국을 꺼린 중국인들이 그의 활동을 막고자 월출산의 혈을 끊으려 했다. 중국인들의 속셈을 안 도선은 선수를 쳐서 이 산 정상에서 디딜방아로 찧음으로 해서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해악을 끼쳤다는 것이다.
월출산 정상 부근에 있는 구정봉
이 땅의 혈(穴)을 끊으려는 중국인들의 음모를 알고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디딜방아를 찧은 흔적이라 한다. 겨울이라 물이 얼어 있다.
도선이 디딜방아를 찧은 흔적이라는 구정(九井)은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 구정봉 앞에 세워 놓은 안내판에는 이 웅덩이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흔적, 혹은 하늘을 능멸한 무뢰한을 응징하기 위해 아홉 번 벼락을 친 흔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월출산이 본래 명당산으로서 도선의 출생지였다는 연고를 감안하면 그의 방아찧기 전설로 새김이 좋을 듯하다. 일제가 이 땅의 맥을 끊고자 명산 도처에 쇠말뚝을 박았고 그것을 찾아 제거해 나가고 있다는 요즘, 그저 전설 속의 인물로만 여겼던 도선국사의 유적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영암 구정봉 영암 월출산 정상의 구정봉이라는 봉우리에는 아홉 개의 웅덩이가 패어 있다. 풍수설을 전수받은 도선이 귀국하려 하자 이를 꺼린 중국인들이 월출산의 혈을 끊으려 했지만 도선이 미리 알고 산 정상에서 디딜방아를 찧어 오히려 중국인들을 혼내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이 웅덩이가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흔적, 혹은 무뢰한을 응징하기 위해 아홉 번 벼락을 친 흔적이라고 적혀 있다. |
영암에 있는 왕인박사 기념관
월출산 기슭에 있는 왕인박사의 출생지. 간혹 일본인 관광객들이 다녀갈 뿐 비교적 한산하다.
구림리에서는 또 한 분의 전설적인 인물,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널리 알려진 왕인박사의 유적을 만난다. 백제 근초고왕 때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 나라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일왕의 요청으로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던 인물, 우리가 왕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이 정도가 고작이다.
출생지에 대해 이설도 없지 않으나 이곳 구림리 성기동에는 박사의 유적지를 조성하여 성역화해 놓았다. 덩그렇게 선 기념관에는 우리측 기록보다는 일본측 기록을 인용한 것이 더 많고, 찾는 사람도 한국인보다는 바다 건너 온 일본인 참배객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박사가 태어났다는 성기동(聖基洞)은 월출산 줄기 문필봉(文筆峰) 아래에 있다. 문필봉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성천(聖川)이라 하고, 박사가 어릴 때 즐겨 마셨다는 성천의 샘을 성천(聖泉)이라 부른다. 그가 태어난 집은 찾아볼 수 없으나 성인을 탄생시킨 생명의 물만은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흐른다. 이 성스러운 샘이 마르지 않는 한 언젠가 다시 또 다른 성인이 이곳에서 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성천’과 같은, 지명 속에 살아 있는 박사의 흔적은 구림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된다. 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제자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몇 차례 뒤를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 당시에는 규모를 갖춘 국제항이었던, 그가 배를 타고 출항했던 상대포(上臺浦)도 지금은 썰렁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성천 백제 근초고왕 때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군신들에게 경사를 가르쳤던 인물,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더 알려진 왕인박사가 태어났다는 성기동이 월출산 줄기 문필봉 아래에 있다. 이곳에는 문필봉에서 흘러내리는 성천(聖川)이라는 계곡과 함께 왕인박사가 어릴 때 즐겨 마셨다는 성천(聖泉)이 있다. |
문필봉 쪽으로 오르면 그가 책을 읽었다는 책굴이며, 그 앞에 제자들이 스승의 모습을 바위에 새겼다는 왕인석굴도 여전히 건재하다. 그런데 그 옛날 선비들이 글공부하던 양사재(養士齋)와 문산재(文山齋)가 최근 새로 단장되었다. 이 두 글방은 대학자 왕인박사의 맥을 잇고자 세운 글방일 텐데 지금은 고시 공부하는 수험생들의 공부방이 되고 있다. 시대의 변천은 양사(養士)의 ‘선비 사(士)’가 판사·검사의 ‘일 사(事)’로 인식하게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