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鄭 省 三
이성계(李成桂)가 1392년 7월 17일 개성(開城) 수창궁(壽昌宮)에서 만조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지국사(權知國事)라는 고려왕(高麗王)으로 즉위하고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조선(朝鮮)의 개국군주가 되어 도읍지를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조선이 유학(儒學)을 국가의 통치이념이란 것을 표방하고 출범하였으나 연이은 피비린내 나는 왕자들의 왕위계승투쟁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는 등의 반정(反正)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사회는 임금에 대한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를 지키는 것이 선비들의 최고 가치로 여기던 시대인데 반정세력들이 왕권확립이란 정치적 논리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유학이 지향하는 국가윤리기강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했던 사육신(死六臣)들이었다.
반정세력들이 1455년(단종 3년) 윤 6월 단종에게 강요하여 수양대군이 왕위를 물려 받으니 사육신들은 왕위를 찬탈한 역모로 규정하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김질(金礩)의 밀고로 실현되지 못하고 모두 삼족(三族)이 멸문(滅門)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사상 임금이 국가윤리기강을 지키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저항과 준엄한 역사의 비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현대 민주사회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단종복위를 도모했던 사람들은 집현전(集賢殿) 학사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과 무인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등이다.
사육신들의 역사적 평가는 “불사이군(不事二君)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절의(節義)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충절(忠節)의 표상(表象)이다.
사육신들이 역적모의로 처형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역적이란 죄명을 벗고 충신반열에 오르기까지는 150여년의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사회의 공론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육신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생육신(生六臣) 중에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에서이다.
중종(中宗) 때 들어와서 재야 선비들과 조정 관리들이 사육신은 난신(亂臣)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되고 숙종(肅宗) 7년(1691)에 육신묘에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들의 관직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영조(英祖) 34년(1758)에 이르러 사육신에 대한 추모와 현창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어 그들은 만고의 충신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박팽년에게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追贈)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내렸다.
지금 와서 당시 임금들이 사육신들의 복관(復官)과 명예를 회복시켜 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성리학(性理學)의 중심사상인 충절을 선양(宣揚)하여 왕권을 확립해 나가려는 왕정(王政)에 부합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육신은 우리나라 충절의 표상이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연구업적이 있으며 그의 실상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본고(本稿)에서는 박팽년의 충절과 그의 손자 박비(朴婢)가 지금 대구달성하빈묘골의 후손들이 조상의 충절정신을 계승하여 명문(名門)으로 발전해 온 연원(淵源)을 알아보고자 한다.
박팽년의 본관은 순천(順天·옛 이름은 平陽),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아버지는 단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박중림(朴仲林), 어머니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김익생(金益生)의 따님이다.
그의 유년시절은 문(文)을 숭상하는 문정(門庭)에서 가학(家學)을 익혀 경학(經學)에 밝았으며 학문, 문학, 글씨가 모두 뛰어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그를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렀다고 한다.
문중사료에 박팽년은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하며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여 종일토록 자리에서 단정하게 앉아 의관을 벗지 아니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게 했다.
박팽년의 호로 쓰고 있는 醉琴軒이 그의 사위 영풍군(永豊君)과 얽혀 전해오는 일화(逸話)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박팽년은 세종(世宗)의 후궁이 낳은 영풍군이 그의 사위였다.
사위에게 직접 쓴 초서(草書) 「천자문(千字文)」을 선물로 주었다.
그 천자문에 ‘永豊, 醉琴軒永豊’이란 두 개의 낙관이 찍혀 있다.
그 낙관을 보고 사람들이 醉琴軒이 천자문을 쓴 박팽년의 호로 잘못 알고 써 왔다.
송시열(宋時烈)도 醉琴軒이 비록 박팽년의 호가 아닐지라도 이미 후손들이 널리 그의 호로 오랫동안 사용해 왔음으로 이제 어찌할 수 없다고 하여 이를 받아 들였다. 결국 사위의 호가 장인의 호가 된 셈이다.
박팽년은 멸문의 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이 그리 많지 않으나 문중사료, 조선왕조실록, 육신전 등의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그의 충절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박팽년은 태종(太宗) 17년(1417)에 태어나 세종 16년(143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세종 29년(1447)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사가독서는 나라에서 유능한 관료들에게 일정기간 독서에 전념케 했던 일종의 문흥제도(文興制度)이다.
그는 세종의 총애를 받아 18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봉직하였다. 이 시기에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와 동국정운(東國正韻),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등의 편찬사업에 관여하여 학문과 사상체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는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刑曹叅判)이 되었다. 박팽년의 시문(詩文)과 기문 등의 글이 남아 있다.
그의 한시 한 수를 함께 보고자 한다.
이 시는 박팽년이 단종 때 영의정(領議政)이 된 수양대군이 배푼 경회루(慶會樓) 자축연에 참석하여 지은 것이다.
『조정 깊은 곳에서 슬픈 음악소리 들리고
(廟堂深處動哀絲)
만사를, 모두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하니
(萬事如今摠不知)
버들가지는 동풍이 불어 살랑거리고
(柳綠東風吹細細)
꽃이 만발한 봄날 정말 길고도 길구나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대업을 금궤에서 빼내어
(先王大業抽金櫃)
성주의 큰 은혜는 옥잔에 넘어뜨렸네
(聖主鴻恩倒玉巵)
즐겁지 않지만 어찌 즐겁다 하지 않으랴
(不樂何爲長不樂)
태평성대가 되면 먹고 취하여 노래 부르리라
(賡歌飽醉太平時)』
이 시에는 거문고 소리에 투영되어 있는 태평성대의 안락함이 앞으로 일어날 슬픔과 어둠의 시대가 닥칠까 걱정이 된다는 박팽년의 우국충정이 담겨 있다.
조정을 향해 질타하는 박팽년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는 같다.
특히 그의 유작(遺作)으로는 천자문 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 박팽년과 도원(桃園)에서 산책을 했다는 내용을 안견(安堅)이 그린 산수화인데 서문인 몽유도원서(夢遊桃園序)를 직접 썼다.
현재 이 그림은 일본 천리대학교(天理大學校) 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이 1939년 일본국보였으나 지금은 법 개정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단종이 세손(世孫)일 때 「논어(論語)」를 가르친 적이 있다.
단종이 그에게 “사무사(思無邪)의 뜻을 물었다.
사무사는 생각하는데 간사함이 없고, 이는 마음이 바르면 하는 일이 모두 바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박팽년의 후손인 대보사(大譜社) 박도규(朴道圭) 사장이 족보출판문화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의 사무실에‘집집마다 충절과 효심을 내림받고 대를 이어 순결하고 깨끗함을 물려준다.’는 가전충효 세수청백(家傳忠孝 世守淸白)이란 가훈과 「思無邪」액자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숭조정신(崇祖精神)을 경영마인드로 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을 생각도 했다.
단종복위계획이 발각되어 국문(鞠問)을 받을 때 박팽년이 남긴 언행(言行) 등을 보면 그의 충절과 선비의 지조를 알 수 있다.
세조(世祖)가 형(刑)을 가하기 전에 사람을 시켜 이방원(李芳遠)의 하여가(何如歌)로 그를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 있으랴』라는 시조로 응답했다.
이 시조는 세상이 모두 어두운 밤과 같지만 달이 언제나 밝은 빛을 내는 것처럼 나 자신도 상왕(上王) 단종을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선비적 양심과 굳은 그의 절개를 읊은 것이다.
이 시조 하나만 보아도 그의 충절을 엿볼 수 있다.
또 세조 원년(1455)에 그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는 관찰사의 서명에 신(臣)자 대신 거(巨)자를 쓰고, 받은 녹봉도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세조가 박팽년의 의젓한 태도를 보고 그는 박팽년 등을 가리켜 “당대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이다.”고 했다.
결국 박팽년은 동료들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다,
사육신 가운데 처형당한 가족이 가장 많다고 한다.
아버지, 본인, 형제와 아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의 부인과 형제와 아들 가족들도 노비로 보냈다.
마침 대구관아(大邱官衙)로 간 박팽년의 둘째며느리 성주(星州) 이씨(李氏) 부인이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아이는 노비로 삼게 하였다.
아들을 낳은 이씨 부인은 친정여종이 딸을 낳아 서로 아기를 바꿔 외할아버지 이철근(李鐵根)의 손에 의해 박비(朴婢)란 이름으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 여종이 박비를 데리고 경산(慶山) 남천(南川) 생기골에서 키웠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경북마을지)
어쨌든 박비가 17세 되었을 때 그의 이모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인 이극균(李克均)의 권유로 성종(成宗)에게 자신이 박팽년의 손자임을 자수하고 사면을 받았다.
성종은 그동안 박비의 사정을 듣고 박일산(朴壹珊)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이름은 사육신이 모두 삼족이 멸문의 화를 입었는데 박팽년의 혈손이 살아나게 된 것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있는 산호섬과 같이 아주 귀한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박일산은 신분을 회복한 후 자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고 묘골에서 99칸 종택(宗宅)을 짓고 삶의 터전을 잡음으로써 박팽년을 시조로 하는 순천박씨충정공파(順天朴氏忠正公派) 종중(宗中)을 이룬다.
그래서 박팽년은 손자의 손에 의해 다시 묘골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 묘골종택이 자손들은 순천박씨충정공파의 상징적인 고향이요, 정신적 안식처로 인식하고 있다.
후손들은 충정공의 충절가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여 명문(名門)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묘골의 지명유래(地名由來)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다.
일반적으로 마을 어귀에 비석이나 서당이 있으면 십중팔구 비석골이나 서당골로 부른다.
이 마을도 충정공의 사당(祠堂)이 생기면서 마을 명칭이 묘곡(廟谷)으로 표기 하였을 것으로 보지만 현재 한자의 어원은 竗谷으로 쓰고 있는 것은 와룡산(臥龍山)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의 생김새가 묘하여 마을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보지 아니 하고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는 것을 알 수 없는 묘한 곳이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지명으로 추정된다.
지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명은 땅의 형상과 역사적인 전통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박일산이 지은 99칸의 종택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많이 소실되었으나 충정공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사당은 무사하였다.
이 사당이 무사했던 이야기는 문중사료에 나온다.
당시는 박팽년의 5세손 박충후(朴忠後), 박충윤(朴忠胤), 박충서(朴忠緖)가 살던 시대이다. 이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박충서가 묘골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쫓겨 사당으로 급히 몸을 피하자 박충서를 잡으려고 도끼로 사당기둥을 찍는다는 것이 자기 병사들의 다리를 찍어 다치게 하자 이번에는 사당에 불을 질렀다.
곧 하늘에서 뇌성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져 불을 껐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자 왜적들은 겁에 질려 모두 물러났다.
이 틈을 타서 박충서는 사당에서 나와 병사들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치니 다시는 묘골에 범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양란(兩亂)이 평정된 후 윤두수(尹斗壽)가 묘골을 방문하고 사당기둥에 남아있는 도끼자국을 보고 감회를 읊은 시가 있다
『임란 후 인가는 백에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亂後人家百不在)
두어 칸의 사당이 산기슭에 있네
(數間祠宇倚山根)
신명도 감동하여 하늘도 도우시니
(神明自是蒼天佑)
왜적의 무리들이 어찌 사당의 혼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虜火何能震廟魂)』
여기서 묘골 육신사(六臣祠)가 세워진 경위를 알아보자.
박일산의 큰아들 박계창(朴繼昌)이 충정공의 제사를 지낸 후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사당 밖에서 몰골이 초췌한 다섯 분의 선비가 서성거리고 있어서 다가가 누구시냐고 물으니, 성삼문, 이개, 하위지 , 유성원, 유응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들은 “박팽년 저 친구는 손자를 남긴 탓에 제삿날 밥이라도 챙겨 먹는데 우리는 배가 너무 고프다.”고 했다.
박계창은 그 이후로 충정공을 비롯한 다섯 분을 사가(私家)에서 제향(祭享)을 올렸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당시 유림(儒林)의 지도자 정구(鄭逑)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사가의 사당에서 여섯 분의 신위(神位)를 모두 모시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사가에서 여섯 분의 제사를 지내고 싶으면 별묘(別廟)를 하나 세워 함께 모시는 것이 예의에 옳을 것 같다.”고 하였다.
정구의 의견이 반영되어 묘골파회마을에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그곳에서 봉행(奉行)했다.
그 후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의 신원(伸寃)이 복관(復官)됨으로써 하빈사 앞에 낙빈사(洛濱祠)를 건립하여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렸다.
숙종20년(1694)에 낙빈서원(洛濱書院)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나 고종(高宗) 6년(1869)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4년 왜정(倭政)때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복원하지 아니하고 강당만 복원하였다.
사육신의 향사는 끊이지 아니하고 계속이어 왔다. 그러던 중 1982년 5월 육신사정화사업으로 현재의 육신사(六臣祠)가 건립되었다.
이 사업은 사육신의 충절과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선비문화의 가치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장으로 개발한 것이다.
조선의 오백년 역사를 미루어 보면 수양대군이 조카 왕위를 찬탈하기 전 단종 원년(1453)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 피살사건과 단종복위사건으로 멸문의 화를 입은 사람은 무려 280명이나 된다.
그런데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박팽년은 손자 박일손이 살아남아 조상의 혈손을 이어 일가(一家)를 이룬 것이 묘골박씨, 곧 순천박씨충정공 박팽년의 후손이다.
묘골마을에서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 받드는 향사는 일반인들에게도 역사의식(歷史意識)을 갖게 하는 교육적 기능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임란 때 묘골 주변 곳곳에서 마치 들불처럼 의병(義兵)들이 일어나 왜적을 무찌른 것은 우연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충절의 표상인 박팽년의 절의사상(節義思想)과 대구묘골의 역사적 스토리는 정신문화(精神文化)의 상징이었다.
말하자면 충절의 묘골사당이 교육적 기능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육신의 절의정신을 이 시대에 재조명하여 현대인 교육의 길잡이로 삼을 것을 제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