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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일 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8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은 시23:1-6절(구819쪽)입니다.
제목: 나의 목자와 주되신 예수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 창립 8주년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물도 갖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우리는 복음으로 주님께 연합되고, 주님께 양육 받고 주님이 열매 맺는 믿음의 공동체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목회)’와 복음을 강조하였습니다(롬15:18-19). 하나님 선교(목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여 ‘믿음의 목회’를 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 교회 이름이 의미하는 선한 목자(주님)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나)의 목자와 주님이 되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시23편을 통해서 답을 찾고자 합니다.
시2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어떤 이들은 평화로운 분위기 때문에 다윗이 평화로운 시기에 시23편을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5절에서 원수라는 표현과 6절에서 여호와의 집(성전)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염원으로 보아, 다윗이 고난에 처할 때, 특히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급히 떠나 광야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시23편에는 여호와에 대한 두 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는 자기의 양(다윗)을 돌보시는 목자라는 이미지이며, 다른 하나는 여호와는 다윗을 위하여 승리의 잔치를 준비하시는 주인(호스트)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이와 같은 이미지들에 따라 시23편의 구조는 1. 여호와는 나의 목자(1-4), 2. 여호와는 나의 주인(5-6)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 여호와는 나(양)를 돌보시는 나의 목자이십니다(1-4).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송아지 우상 숭배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출34:5-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이는 아브라함 언약이 창세 전의 구속 언약에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창조(행위, 율법) 언약을 다 이루실 사실에 근거한 은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과거의 목자 경험(삼상16:11)을 통해서 목자와 양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잘 알았습니다. 양들은 목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매우 연약한 동물입니다. 눈이 심한 난시이고, 방향 감각도 없기에 다른 동물과 달리 자기 집을 다시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기에 양들은 목자를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목자가 없는 양이 존재할 수 없듯이 다윗 자신도 여호와 하나님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다윗은 자신과 여호와 하나님의 친밀한 언약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비유하여 고백하였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물론 여호와는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목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즉 자기 개인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각각 개인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출3:6절입니다.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도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 즉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목자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라는 다윗의 고백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추론적인 결론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양과 같은 다윗에게 목자의 역할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나)의 주와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은 예수님이 나의 목자요, 주님이시라는 또 다른 고백입니다.
이제 다윗은 어떻게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을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2-4).
첫째로 2a절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복잡하고 분주한 생활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안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창조(행위) 언약의 목적입니다(창2:2-3).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우리가 이것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의 장소는 ‘푸른 풀밭’입니다. 강제로 쉬는 것이 아니라, 푸른 풀밭에서 연하고 싱싱한 풀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며 만족하며 안식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인 산상 수훈(미5-7장)에서 첫 번째 단어가 ‘행복하여라(마카리오스)’입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2b절입니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서 ‘쉴만한 물가’는 잔잔한 물가입니다. 잔잔한 물가는 양들이 자유롭게 물을 마실 수 있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목자가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신의 양들인 우리를 인도하십니다(요21:19). 우리 교회는 주님 앞서 먼저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서 다윗은 ‘내 영혼’은 이라는 용어를 통해 2절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한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직접 적용합니다. 목자가 양을 안식과 양식과 물로 먹이고 쉬게 하는 것(2)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슈브)’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신다, 즉 회개케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곧, 이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렇게 하신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43:7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개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25절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48:8-11절입니다.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구속되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허물과 죄악을 범하였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지난 8년 동안 우리 교회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인도하여 오신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앞으로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새 언약입니다.
넷째로 4절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왜냐하면) 주(당신)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매우 깊은 어두움, 즉 죽음의 그늘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처한 최악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4b절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 여호와를 지칭하는 3인칭(그가)이 주어로 사용되었습니다. 4절과 5절에서는 우리말 성경은 ‘주께서’로 번역하였지만, 원문은 2인칭인 ‘당신께서’가 주어로 사용되어 다윗과 여호와의 더욱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당신(주님)이 당신의 양과 함께하셔서 당신의 양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항상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항상 의의 길로 인도하시지만, 의의 길이 만사형통의 길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십니다. 그때도 우리와 함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믿고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모든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길에서도 보호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여호와는 잔치를 베푸시고(5) 베푸실(6) 나의 주님(호스트)이십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을 다룰 때, 여호와의 목자 이미지에서 여호와의 주인(아버지)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먼저, 5절입니다. “주(당신)께서 내 원수(들)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서 당신(주님)께서 다윗을 위한 잔치에 주인(호스트)이 되십니다. 잔치를 배설하시는 당신(주님)은 다윗을 위하여 상, 즉 잔칫상을 차리십니다. 그런데 그 잔칫상은 다윗 앞에 차려질 뿐만 아니라 그의 원수들의 목전에서 차려 주십니다. 다윗은 아직 승리를 거둔 상태가 아닙니다. 아직 원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수들로 인해 절대로 패하지 않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주님)께서 앞으로 거둘 완전한 승리를 미리 축하하듯이 원수들의 목적에 다윗을 위하여 잔칫상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이 보기만 할 뿐입니다. 어떠한 원수들과 어떠한 위험들 당신(주님)이 그의 손님인 다윗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주님)께서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십니다. 기름을 그의 머리에 부으신다는 것은 그를 매우 존귀한 자로 대접한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당시에 귀한 손님의 머리에 값비싼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45:7, 133:2, 눅7:46). 이는 보통 그 집의 종들이 이것을 하는데, 여기서는 잔치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친히 발라 주신 것으로 주인의 극진한 대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당신(주님)께서 그의 잔이 넘치게 하십니다. ‘내 잔’은 다윗이 받은 축복을 의미합니다. 원수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축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도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10: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를 위하여 승리의 잔칫상을 베푸시고, 우리 머리에 친히 기름을 발라 주시며, 우리의 잔이 넘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신 주님의 선하심, 그의 풍성한 축복을 감사함과 믿음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신 축복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6절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지금(5절)까지 자신에게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계속해서 선하심을 반드시 나타내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인자하심(헤세드, 언약적 사랑)’ 때문입니다.
원래 ‘따른다(라다프)’는 동사는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종종 누군가를 뒤쫓는 원수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원수들에 의하여 추격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하여 추격을 당할 것입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의 평생에, 그리고 반드시 다윗을 따를 것을 강조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6b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살리로다(웨샤브티)’는 ‘영원히’와 결합하여 미래를 의미하지만,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미래이기 때문에, 과거를 나타내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다윗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의 언약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윗과 같이 선한 목자의 새 언약에 근거하여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며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위하여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요10:11).
성도 여러분, 시23펀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며 주님이시라는 것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셨습니까?
시23편에서 다윗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가 부족하지 않은 것(1b),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4), 그리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6b)에 대하여 믿고 소망하는 것뿐입니다. 시23편의 나머지는 목자이시며 주님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양이며 손님인 다윗을 위하여서 하신 일들입니다. 다만 다윗은 은혜 언약에 근거한 여호와의 선하심을 즐기며 누리게 하는 믿음과 소망을 가질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새 언약대로 역사하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선하심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믿음과 소망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를 통한 오직 하나님의 선교(목회)입니다. 오직 복음(새 언약)입니다. 오직 믿음의 목회입니다. 그리고 엡1:19절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 여러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믿음과 소망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찬송 570장을 부르시고 다 같이 기도하신 후에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