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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7장 9-11절.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과 위로.요약설교
9절.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1. 바울 사도가 지금 기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 목사의 중재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선동을 받고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요, 선교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디도 목사의 중재로 고린도 교인들이 이제는 과거의 잘못을 애통해하면서 회개하고 바울 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다시 바울 보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울에 대해서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2. 만일 이 때 바울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과거에 자기를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비방했던 고린도 교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처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과거에 자기를 비방했던 사람이라도 일단 회개하고 애통해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온 사람들을 기쁘게 용납했습니다.
3. 이 때 바울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끝까지 바울을 거짓 사도로 몰았다면, 바울은 더이상 목회를 못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계속 바울을 선교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으로 몰았다면, 바울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로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에서 바울 사도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에 대한 목회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1. 바울 사도가 지금 기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 목사의 중재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선동을 받고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요, 선교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디도 목사의 중재로 고린도 교인들이 이제는 과거의 잘못을 애통해하면서 회개하고 바울 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다시 바울 보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울에 대해서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2. 만일 이 때 바울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과거에 자기를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비방했던 고린도 교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처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과거에 자기를 비방했던 사람이라도 일단 회개하고 애통해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온 사람들을 기쁘게 용납했습니다.
3. 이 때 바울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끝까지 바울을 거짓 사도로 몰았다면, 바울은 더이상 목회를 못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계속 바울을 선교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으로 몰았다면, 바울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로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에서 바울 사도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에 대한 목회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4. 이때 바울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즉 전에는 고린도 교인들의 4분의 3이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배척했었는데, 이제는 디도 목사의 중재로 4분의 3이 바울 편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서 이단자가 목사를 비방해서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의 4분의 3이 목사를 반대했다면, 목사는 교회를 떠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중직자의 중재로 교인들의 4분의 3이 공동의회에서 목사를 찬성했다면, 목사는 교회에서 계속 시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선동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자의 자리를 잃었다가, 디도 목사의 중재로 다시 목회자의 자리를 되찾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바울 사도가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1. 바울 사도가 지금 기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 목사의 중재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선동을 받고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요, 선교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디도 목사의 중재로 고린도 교인들이 이제는 과거의 잘못을 애통해하면서 회개하고 바울 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다시 바울 보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울에 대해서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2. 만일 이 때 바울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과거에 자기를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비방했던 고린도 교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처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과거에 자기를 비방했던 사람이라도 일단 회개하고 애통해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온 사람들을 기쁘게 용납했습니다.
3. 이 때 바울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끝까지 바울을 거짓 사도로 몰았다면, 바울은 더이상 목회를 못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계속 바울을 선교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으로 몰았다면, 바울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로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에서 바울 사도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에 대한 목회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4. 이때 바울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즉 전에는 고린도 교인들의 4분의 3이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배척했었는데, 이제는 디도 목사의 중재로 4분의 3이 바울 편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서 이단자가 목사를 비방해서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의 4분의 3이 목사를 반대했다면, 목사는 교회를 떠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중직자의 중재로 교인들의 4분의 3이 공동의회에서 목사를 찬성했다면, 목사는 교회에서 계속 시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선동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자의 자리를 잃었다가, 디도 목사의 중재로 다시 목회자의 자리를 되찾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바울 사도가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5.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애통하고 회개하는 것을 고소해하면서 기뻐한 것이 아니고,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에서 올바른 진리로 돌아오고 이단 거짓 사도들에게서 바울 사도에게로 돌아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가 탕자의 돌아옴을 기뻐한 것과 같습니다.
즉 탕자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탕자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고,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잔치를 했습니다.
이처럼 천국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99명보다 죄인 하나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6.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사람보다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날마다 한 가지라도 고쳐나가는 사람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대개 오래 믿은 중직자들은 회개하면서 고쳐나가는 것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중직이 되지 않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라도 고쳐나가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처럼 오래 믿어서 완악해진 돌짝밭 같은 마음은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옥토밭 같이 부드러운 마음은 말씀을 받아들여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3:7-8.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근심하게 해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유대인들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비판적으로 들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 세리와 죄인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와 성령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큰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근심하고 회개함으로써,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더 이상 처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 듣고 순종하여 회개하고 고쳐나가는 사람은 아무런 해와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회개하지 않고, 고쳐나가려고 하지 않고 완고하게 고집하고 대항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징계와 처벌을 받고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다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 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복을 받지 않았다면, 혹시 하나님 말씀을 어긴 것은 없는지, 특별히 목사에게 대항하고 속상하게 한 일은 없는지 잘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목사를 축복해주는 제사장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축도를 할 때, 민수기 6장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처럼 목사가 축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민수기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래서 복을 가장 받지 못하는 사람은 축복 기도를 해주는 <제사장과 다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4:4.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
2. 한편 주님께서는 주의 종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떠주는 사람은 다 기억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 그러나 하나님의 종을 괴롭히면 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애굽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았을 때, 하나님이 애굽 왕실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창세기 12:17).
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았을 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창세기 20:14-18)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를 젊은 깡패들이 조롱하다가 암곰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열왕기하 2:23-24)
엘리사 선지자를 왕의 오십 부장이 체포하러 갔다가 두 번이나 불에 타 죽었습니다. (열왕기하 1:10-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종에게 협력하시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지역적으로도 순진하고 참 좋은 사람이리고, 특히 우리 성도님들은 정이 많아서 목사를 넘치도록 사랑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하나님의 종을 괴롭혀서 해를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님들이 항상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생업과 자녀들이 큰 복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Godly sorrow)과 세상 근심(worldly sorrow)
(1)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이라는 두 종류의 근심과 그 결과들을 대조시켜 설명하면서, 앞 절 내용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2)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판단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여, 자기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심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이 근심을 죄에 대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행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하여 “신령한 근심”(godly sorrow)이라고 말합니다. (Barnes' Notes)
설교를 듣다가, 기도를 하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혹은 세상을 바라보다가도, “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세상이 더러운 것은 내 책임이구나. 우리 가정이 잘못되고 있는 것은 내 책임이구나”
이렇게 자기의 책임임을 느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에 비해 “세상 근심”(κόσμου λύπη: worldly sorrow)은 분노하고 사람에게 원한을 품으면서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근심을 가리킵니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하고 좌절에 빠져, 자기를 파괴하는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후회만 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낙망에 빠져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했는데, 세상 근심을 계속하면 절망에 빠져서, ‘살아서 무엇 하랴’ 하다가 결국은 멸망에 이르고 맙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세계적으로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술을 마시다가 도가 지나치면, 마약에 손을 댑니다.
술이나 마약은 마취시켜서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실한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기분이 좋다고 마시기도 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더 많이 마십니다.
술장사를 해서 부자 되고자 하는 사상은 잘못된 것인데도,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만 세상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 근심”을 하기 마련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성도를 돌봐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늘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봐도 마음에 만족이 없고, 나쁜 짓을 많이 해봐도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고자 술을 마셔대는 것입니다.
마귀는 탐욕에 사로잡히도록 했다가, 만족하지 못하자 자기의 불만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여 술을 마시게 하고, 마약에 손을 대도록 합니다.
이것이 다 세상 근심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이 아무리 해봐도 기쁨이 없고, 성취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의 약속 없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만족이 없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봐도 만족이 없고, 세상적인 성공을 해도,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근심은 사망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근심에 빠지지 마시십시오.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회개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근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3) 이와 같은 두 종류의 근심에 대한 성경의 사례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에서와 다윗의 경우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판 이후에도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히 12: 16,17).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시 51:1-19)
둘째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죽음의 길로 간 반면에(마 26:24),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에도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마26 :75).
(4) 본문의 고린도 교인들은 회개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였으며 거짓 사도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사랑과 “혹독한 편지”에 긍정적으로 응한 고린도 교인들은 결과적으로 “영적 사망”에 이르는 죄의 길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1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겪은 근심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임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구체적 증거들은 다음 7가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서 돌아온 디도를 통해서 보고 받고, 이런 평가를 했습니다.
1. 간절하게 하며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열심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5장 2절에서는 계모를 데리고 산 범죄자에 대해서 방관하고 자랑하였으나, 디도가 방문했을 때는 후회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처벌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기는 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범죄행위를 중단하고, 되돌아서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이때 고린도 교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교회를 깨끗하게 했고, 범죄자도 간절한 마음으로 죄를 정리했습니다.
2. 변명하게 하며
이 단어(ἀπολογία: apology)는 원래 법정에서 변호하는 것을 가리키는데(행 22:1-2, 딤후 4:16), 여기서는 고린도 교회의 건전한 신자들이 바울에 대해 범죄한 자들이나 고린도전서 5장 1-5절의 범죄자(계모를 데리고 산 범죄자)에 대해서 처벌하고, 교회를 비난으로부터 깨끗하게 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Barnes' Notes
3. 분하게 하며
이것은 바울 사도를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대자들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의분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과거에 고린도 교인들은 이 대적자들에게 동조하거나, 그들의 행위를 방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린도 교인들은 대적자들에 대해 의분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5장 5절에서 계모를 데리고 산 죄인에 대해서 분개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범죄자들이 자신들이 바울을 비난한 죄와 계모와 범죄한 자가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면서 회개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범죄에 대해서 스스로 분하게 생각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Barnes' Notes)
3. 두렵게 하며
이것은 바울 사도를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또한 바울을 비난한 범죄와 계모와의 범죄가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하는 것과 혹시 그런 범죄가 아직도 잔재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Barnes' Notes)
4. 사모하게 하며
7절에서처럼, 복음을 심어준 바울 사도를 진정한 사도로 받아들이며, 예전처럼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5. 열심있게 하며
이는 회개와 성결을 실천하려는 열심,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고자 하는 열심( reformation in great earnest)이었습니다.
6. 벌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범죄자를 신속하게 처벌하는 것(inflicting punishment on the offender)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공격한 자들과 중한 범죄자와 계모와 범죄한 자(고전 5“1-5)를 공의에 입각하여 처벌하였음을 말해줍니다.
7.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본래적인 무죄를 가리키고, 또한 잘못이 용서된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2) “나타내었느니라”는 “입증하였느니라”를 뜻합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깨끗함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9절과 10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눈물의 편지”(고후 2:4)를 쓰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가슴 아픈 방문” (고후 2:1: 중간방문)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문이 가슴 아픈 방문이 되었던 것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 사도를 공격할 때 고린도 교인들이 보여준 서운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는지, 아니면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어떤 경우이든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바울 사도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때 보여준 서운한 행동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자체도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근심 중의 위로”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환난을 당하여 근심 중에 있는 성도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환난과 근심에 쌓여 있습니까?
이 시간 환난을 당하여 근심 중에 있는 성도님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동일한 근심 중에 빠져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해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 한 가지 예를 들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광주 동*교회에 어떤 여집사가 아들이 통 사고를 당해서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집사님이 시험에 들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구역장이 심방하고, 여전도사님이 심방하고, 심지어 목사님이 심방을 했어도 그 집사님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김마리아 권사님이 그 집사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여집사님을 위로하기보다는 큰 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나는 전쟁 때 자녀들을 모두 잃고 남편도 잃고도 지금까지 평생을 주님을 섬겨왔는데, 아이가 사고를 당했다고 교회에 안 나오나?”
그러면서 위로하기보다는 막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여집사님이 가만 생각해보니, 다른 교역자들은 자기 같은 고통을 당해보지 않아서 위로가 되지 않았는데, 이 마리아 권사님은 자기 보다 몇 배나 더 큰 고통을 당하고도 신앙생활 한 것이 마음에 크게 와닿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그 이틀날부터 교회에 나왔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은 그런 환난을 믿음으로 이겨낸 경험자가 그 환난 당한 자를 공감적으로 위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환난 중에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과 근심 많은 세상에서 주님의 위로를 많이 체험하시고, 환난과 근심중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로해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