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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法)이란 제법(諸法)이고 사(師)란 제법(諸法)이 곧 스승이 되는 것이며, 삼라삼천(森羅三千)의 제법(諸法)이 곧 스승이 되고 제자(弟子)가 되어야 하느니라.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법사(法師) 중(中)의 대법사(大法師)이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개각(開覺)이 나타나고 보면 지옥(地獄)의 등연맹화(燈燃猛火)·내지(乃至)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족(具足)하여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사(法師)이니라. 또 가로되, 법(法)이란 제목(題目)이고 사(師)란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신앙의 목적은 일을 비롯, 생활 상에서 어떻게 가치 있게 살고 행복의 경애를 획득해 가는가에 있습니다. 때로는 일이 너무 바빠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이유로 자신의 신심을 ‘안 된다’고 엄하게 질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바쁘더라도 시간 계획을 짜서 불법 활동에 참여해야 자신의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단월모답서檀越某答書』에 「사관(仕官)을 법화경(法華經)이라고 생각하시라.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違背)하지 않느니라’란 이것이니라.」(신편어서 p.1220)고 있습니다.
사관(仕官)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일을 말합니다. 즉 사회에 공헌하고 자신의 생활을 떠받치는 일을 하는 것은 신앙과 같다고 생각하여 소중히 해가자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활동에서 멀어져 신심이 타성에 빠진다면 그것은 패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장 일도 활동도 전부 해낸다고 마음먹고 시간을 내어 어쨌든 진지하게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력과 지혜를 짜내어 연구해 가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일과 활동의 중점을 어디에 둘지를 현명하게 판단하여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결국(結局)은 천(天)도 버리시고 제난(諸難)도 당(當)하여라, 신명(身命)을 바칠 뿐이로다. 신자(身子)가 육십겁(六十劫)의 보살(菩薩)의 행(行)을 퇴전(退轉)한 것은 걸안(乞眼)의 바라문(婆羅門)의 조름을 참지 못한 때문이고, 구원대통(久遠大通)의 자(者)가 삼오(三五)의 진(塵)을 경과(經過)함은 악지식(惡知識)을 만났기 때문이니라. 선(善)에서든 악(惡)에서든 법화경(法華經)을 버림은 지옥(地獄)의 업(業)이 되느니라, 대원(大願)을 세우리라, 일본국(日本國)의 위(位)를 물려주리라, 법화경(法華經)을 버리고 관경(觀經) 등(等)에 붙어서 후생(後生)을 기약(期約)하라, 염불(念佛)을 부르지 않으면 부모(父母)의 목을 베겠노라는 등(等)의 종종(種種)의 대난(大難)이 출래(出來)한다 할지라도 지자(智者)에게 아의(我義)가 타파(打破)되지 않는 한(限) 채용(採用)하지 않으리라, 기외(其外)의 대난(大難)은 바람 앞의 먼지와 같으니라, 나는 일본(日本)의 기둥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日本)의 안목(眼目)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日本)의 대선(大船)이 되겠노라, 이렇게 맹서(盟誓)한 원(願)은 깨뜨리지 않겠노라.
개목초(開目抄) 사도에서 51세에 술작니치렌대성인님께서는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에 법화현의(法華玄義)를 인용하시어 「강유(綱維)를 당기는데 그물코로서 움직이지 않음이 없고, 옷의 일각(一角)을 끌어당기는데 실 가닥으로서 오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신편어서 p.408)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어문은 대성인님께서 신심의 공덕을 설하신 부분인데, 그 본래 의미는 그물에 수많은 그물코가 있어도, 큰 그물줄 하나를 잡아당기면 나머지도 한꺼번에 딸려 움직이고, 옷에는 많은 실낱이 있지만 한쪽 끝을 잡아당기면 실낱으로서 딸려오지 않는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반장은 자신이 담당하는 반에서 이 큰 그물줄과 같은 존재이며 한 분 한 분이 착실하게 올바른 신심을 해나가면 그물의 코에 해당하는 신도님도 또한 반장의 뒤를 따라 제대로 올바른 신심수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장은 그 반에서 정법광포를 위하여 또 많은 동지들의 성불을 위하여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 주는 중요한 키잡이 역할을 담당한 선장입니다.
반장이 뱃길을 착각하면 많은 동지들이 성불의 길에서 벗어나 버리게 되므로, 반장의 사명이 실로 중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대한 책임을 확실하게 자각하시어 정진해 주시기 바랍니다.석존(釋尊)의 인행과덕(因行果德)의 이법(二法)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에 구족(具足)하였다. 우리들이 이 오자(五字)를 수지(受持)하면 자연(自然)히 그의 인과(因果)의 공덕(功德)을 물려주시느니라. 사대성문(四大聲聞)의 영해(領解)에 가로되 「무상보취(無上寶聚)·불구자득(不求自得)」 운운(云云). 우리들의 기심(己心)의 성문계(聲聞界)니라. 「나와 여(如)히 동등(同等)케 하여 다름이 없노라. 나의 옛날의 소원(所願)과 같이 지금은 이미 만족(滿足)하였으니, 일체중생(一切衆生)을 화(化)하여 모두 불도(佛道)에 들어가게 하노라」 묘각(妙覺)의 석존(釋尊)은 우리들의 혈육(血肉)이니라. 인과(因果)의 공덕(功德)은 골수(骨髓)가 아니겠느뇨. 보탑품(寶塔品)에 가로되 「대저 능(能)히 이 경법(經法)을 호지(護持)하는 자(者)는 즉 이는 나와 그리고 다보(多寶)를 공양(供養)함이니라, 내지(乃至) 또 모든 여기에 오신 화불(化佛)의 모든 세계(世界)를 장엄(莊嚴)하고 광식(光飾)하시는 자(者)를 공양(供養)함이니라.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은 우리들의 불계(佛界)이니라. 그의 뒤를 계소(繼紹)하여 그 공덕(功德)을 수득(受得)함이니 수유(須臾)도 이를 들으면 즉(卽)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구경(究竟)할 수 있음」이란 이것이로다.
관심(觀心)의 본존초(本尊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내지(乃至) 또 모든 여기에 오신 화불(化佛)의 모든 세계(世界)를 장엄(莊嚴)하고 광식(光飾)하시는 자(者)를 공양(供養)함이니라.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은 우리들의 불계(佛界)이니라. 그의 뒤를 계소(繼紹)하여 그 공덕(功德)을 수득(受得)함이니 수유(須臾)도 이를 들으면 즉(卽)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구경(究竟)할 수 있음」이란 이것이로다.싸움에 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장(長)의 일념(一念)이며, 용기있는 신심입니다. 포교소 활동은 말할 나위도 없이 묘법(妙法) 유포를 목표로 하는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과의 엄한 투쟁입니다.
장(將)인 자가 겁이 많다거나 일념에 승리를 향한 열렬한 기백이 없다면 전군(全軍)의 사기가 흔들리고 만족한 활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자연의 도리입니다. 어떠한 조직에 있어서도 장(長)의 자세가 중요하며 장(長)이 야무지지 않다면 후배도 그것을 견습(見習)해 버립니다. 우리들의 조직활동에 있어서도 그 이치가 엄할 정도로 결과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좌담회가 밝은지 어두운지, 분위기가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는 오로지 중심자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좌담회 담당자의 일념이 강하면 참석자 전원이 ‘오늘은 참석하여 정말로 좋았다’라고 환희에 가득 차 내일부터 전진에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좌담회가 활기차지 않았다면 참석한 보람도 없어지고, 모두에게 발심의 기회를 줄 수 없게 됩니다. 중심자인 반장의 생명력, 정열, 일념은 광포추진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장(長)의 일념은 반드시 전체에 영향이 갑니다. 전력을 투입하여 좌담회를 북돋우는 기백을 갖고 전진해 가지 않겠습니까? 그 근원은 신심입니다. 어본존에 대한 강열한 기원밖에 없습니다.
제목을 열심히 불러간다면 강한 확신, 광포에 대한 대감정이 용솟음치며 용기가 오체(五體)에 맥동쳐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리더가 약할 리는 없습니다.
좌담회에서나 어디에서나 상대방의 생명의 대해원(大海原)을 열어 나타내고, 그 흉중에 정열과 발심의 등불을 켜고, 전원을 분기시킬 수 있습니다.
자! 각자가 묘법광포의 주체자이며 장(長)이라는 책임감에 불타서 전진하지 않으시렵니까?석존(釋尊)의 인행과덕(因行果德)의 이법(二法)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에 구족(具足)하였다. 우리들이 이 오자(五字)를 수지(受持)하면 자연(自然)히 그의 인과(因果)의 공덕(功德)을 물려주시느니라. 사대성문(四大聲聞)의 영해(領解)에 가로되 「무상보취(無上寶聚)·불구자득(不求自得)」 운운(云云). 우리들의 기심(己心)의 성문계(聲聞界)니라. 「나와 여(如)히 동등(同等)케 하여 다름이 없노라. 나의 옛날의 소원(所願)과 같이 지금은 이미 만족(滿足)하였으니, 일체중생(一切衆生)을 화(化)하여 모두 불도(佛道)에 들어가게 하노라」 《묘각(妙覺)의 석존(釋尊)은 우리들의 혈육(血肉)이니라. 인과(因果)의 공덕(功德)은 골수(骨髓)가 아니겠느뇨.》
관심(觀心)의 본존초(本尊抄) 246쪽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본의(本意)는 무상(無上)이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무상중(無上中)의 극무상(極無上)이니라. 이 묘법(妙法)을 가리켜 무상보취(無上寶聚)라고 설(說)하셨느니라, 보취(寶聚)란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만행만선(萬行萬善)의 제바라밀(諸波羅蜜)의 보(寶)를 모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무상보취(無上寶聚)를 신로(辛勞)도 없고 행공(行功)도 없이 일언(一言)으로 수취(受取)하는 신심(信心)이며, 불구자득(不求自得)이란 이것이니라, 자(自)의 자(字)는 십계(十界)이며, 십계(十界) 각각(各各)이 득(得)하느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 이것이니라, 그러한 까닭으로 이 문(文)은 《묘각(妙覺)의 석존(釋尊)은 우리들 중생(衆生)의 골육(骨肉)이니 깊이 깊이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운운(云云).》
어의구전권상(御義口傳卷上) 727쪽
그런데 재가(在家)의 몸은 다만 여념(餘念)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고 승(僧)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 간심(肝心)이외다. 그것도 경문(經文)대로라면 수력연설(隨力演說)도 있어야 할 것이로다. 세상(世上)살이가 힘겨울 때도 금생(今生)의 괴로움조차 슬프니 하물며 내세(來世)의 고(苦)에 있어서랴고 생각해서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라. 기쁠 때도 금생(今生)의 기쁨은 꿈속의 꿈이며 영산정토(靈山淨土)의 기쁨이야말로 진실(眞實)한 기쁨이라고 생각하시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퇴전(退轉)없이 수행(修行)하여 최후(最後) 임종(臨終)의 때를 기다려 보시라, 《묘각(妙覺)의 산(山)에 달려 올라가 사방(四方)을 쫙 바라보니 아아, 유쾌하도다, 법계(法界)는 적광토(寂光土)로서 유리(瑠璃)를 가지고 땅으로 하고 금의 밧줄로써 팔(八)의 길에 경계(境界)를 했으며, 천(天)으로 부터 사종(四種)의 꽃이 내리고 허공(虛空)에서 음악(音樂)이 들리며,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바람에 산들거리고 오락(娛樂) 쾌락(快樂)하시느니라. 우리들도 그 수(數)에 들어가서 유희(遊戱)하고 즐기게 될 것은 벌써 다가왔도다. 신심(信心)이 약(弱)해서는 이와 같이 가장 좋은 곳에는 갈 수 없다, 갈 수 없느니라.》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 1386~7쪽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는 남녀(男女) 공(共)히 여래(如來)이고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니라.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여여래공숙(與如來共宿)의 자(者)이니라, 부대사(傅大士)의 석(釋)에 가로되 「조조(朝朝)·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석석(夕夕) 부처와 함께 눕고 시시(時時)로 성도(成道)하며 시시(時時)로 현본(顯本)함이라」라고 운운(云云).》
어의구전권상(御義口傳卷上) 737쪽
과거(過去)의 숙연(宿緣)이 뒤쫓아와서 이번에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가 되셨음인가. 《석가(釋迦) 다보(多寶)만은 알고 계시리라. 「재재제불토(在在諸佛土) 상여사구생(常與師俱生)」이란 설마 허사(虛事)는 아닐 것이로다.》
생사일대사혈맥초(生死一大事血脈抄) 1338쪽
묘(妙)란 법성(法性)이고 호(法)란 무명(無明)이며 무명(無明) 법성(法性)이 일체(一體)임을 묘호(妙法)라 하느니라. 렌게(蓮華)란 인과(因果)의 이법(二法)이고, 이것 또한 인과일체(因果一體)이니라. 쿄(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언어(言語) 음성(音聲)을 쿄(經)라고 하느니라. 석(釋)에 가로되, 성불사(聲佛事)를 함을 이름하여 쿄(經)라 한다고, 《혹(或)은 삼세상항(三世常恒)임을 쿄(經)라고 하느니라. 법계(法界)는 묘호(妙法)이고 법계(法界)는 렌게(蓮華)이며 법계(法界)는 쿄(經)니라. 렌게(蓮華)란 팔엽구존(八葉九尊)의 불체(佛體)이니라, 차근차근히 이를 생각할지어다.》
어의구전권상(御義口傳卷上) 708
《생(生)의 기(記)가 있으면 반드시 사망(死亡)하는 것이며 사(死)의 기(記)가 있으면 또 생(生)하느니라, 삼세상항(三世常恒)의 수기(授記)이니라.》
어의구전권상(御義口傳卷上) 730쪽
《일념삼천(一念三千)은 구계즉불계(九界卽佛界)·불계즉구계(佛界卽九界)라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 경(經)의 일자(一字)는 여의보주(如意寶珠)이며 일구(一句)는 제불(諸佛)의 종자(種子)가 됨이니, 이것들은 기근(機根)의 숙(熟) 불숙(不熟)은 차치(且置)하고 때가 이르른 까닭이라. 경(經)에 가로되 「지금이 바로 이는 그 때로다. 틀림없이 대승(大乘)을 설(說)하리라」 등(等)운운(云云).
선시초(撰時抄) 256쪽
어찌 기원(祈願)의 성취(成就)가 늦으리요. 대지(大地)를 가리켜서 빗나갈지라도 허공(虛空)을 동여매는 자(者)는 있을지라도·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없는 일은 있을지라도, 해는 서(西)쪽에서 돋을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모든 보살(菩薩)·인천(人天)·팔부(八部) 등(等)·이성(二聖)·이천(二天)·십나찰(十羅刹) 등(等)이 천(千)에 하나라도 와서 수호(守護)하시지 않는 일이 있다면 위로는 석가제불(釋迦諸佛)을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구계(九界)를 속이는 죄가 되리라. 《행자(行者)는 확실히 부실(不實)할지라도 지혜(智慧)는 어리석을지라도 몸은 부정(不淨)할지라도, 계덕(戒德)은 갖추지 않았을지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수호(守護)하시리라.》 주머니가 더럽다고 하여 금(金)을 버리지 말지니라. 이란(伊蘭)을 미워하면 전단(栴檀)은 있을 수 없느니라. 계곡(溪谷)의 연못을 부정(不淨)하다고 싫어 한다면 연(蓮)꽃은 취(取)하지 못할 것이며 행자(行者)를 퇴박 하신다면 서원(誓願)을 깨뜨리심이라. 정상(正像)이 이미 지나 버렸으니 지계(持戒)는 시중(市中)의 호랑이와 같고 지자(智者)는 인각(麟角)보다도 희귀(稀貴)하리라. 달이 뜨기 전(前)에는 등(燈)불을 의지할 것이며 보주(寶珠)가 없는 곳에는 금은(金銀)도 보배(寶貝)로다. 백오(白烏)의 은(恩)을 흑오(黑烏)에게 갚고 성승(聖僧)의 은(恩)을 범승(凡僧)에게 갚을지니라. 속히 속히 이생(利生)을 주십사 하고 강성(强盛)히 기원(祈願)한다면 어찌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으리요.
기도초(祈禱抄) 1351~2쪽
대저 이 법화경(法華經)을 펴서 배견(拜見)하노라면 「여래(如來)는 즉 그를 위해 의복(衣服)으로써 이를 덮어 주시고 또한 타방(他方) 현재(現在)의 제불(諸佛)이 호념(護念)하는 바가 되리라」 등(等) 운운(云云). 경문(經文)의 뜻은 동서남북(東西南北)·팔방(八方)·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외(外)·사백만억나유타(四百萬億那由佗)의 국토(國土)에 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잇따라와서 충만(充滿)하시었다, 하늘에는 별과 같이·땅에는 도마(稻麻)와 같이 열(列)지어 계시며,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시는 것을 비유하면 대왕(大王)의 태자(太子)를 모든 신하(臣下)가 수호(守護)하는것과 같다. 단(但) 사천왕(四天王)의 동류(同類)가 수호(守護)하여 주시는 것도 황송한 일인데, 일체(一切)의 사천왕(四天王)·일체(一切)의 성수(星宿)·일체(一切)의 일월(日月)·제석(帝釋)·범천(梵天) 등(等)이 수호(守護)하시니 만족(滿足)해야 할 일이니라. 게다가 일체(一切)의 이승(二乘)·일체(一切)의 보살(菩薩)·도솔내원(兜卒內院)의 미륵보살(彌勒菩薩)·가라타산(伽羅陀山)의 지장(地藏)·보타락산(補陀落山)의 관세음(觀世音)·청량산(淸凉山)의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등(等)·각각(各各) 권속(眷屬)을 구족(具足)하여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해 주심으로써 만족(滿足)해야 할 것인데·또한 《황송하게도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친(親)히 자진(自進)해서 내림(來臨)하시어·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동안 수호(守護)해 주심에 대한 황송함은 말로 다하지 못하노라.》
우에노전모친답서(上野殿母親答書) 1570쪽우리들이 신심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단 한 사람만으로 올바른 신심의 자세를 터득하여 강한 신심을 향상하여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내 집 안에서 신심을 하고 싶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사는 집 안에 틀어박혀서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학문을 터득하려고 한다면 학교에 가고, 일을 하려고 한다면 회사나 일하는 장소에 가야만 하고 교사, 선배로 부터 가르침을 받아야만 하며 급우 및 동료들과 협력하여야 학업, 일들이 성취되는 것이 실제입니다.
그와 같이 불도수행도 회합 또는 좌담회 장소에 참가하여 간부 및 많은 선배들로 부터 가르침을 받고 동지들도 격려해가면 신심도 향상되고 지식도 깊어 가게 됩니다.
대성인은 「신심(信心)이 있는 제인(諸人)은 한 자리에 모여서 청문(聽聞)하시라.」(신편어서 p.484) 『오토님모어서(乙님母御書)』에 「길이 먼 곳에 뜻이 나타난다.」(신편어서 p.689)라고 말씀하시고 만약에 정말로 신심하여 행복을 누리려고 한다면 한 장소에 집합하여 불법을 청문하고 또 먼 곳이라 하여도 가서 배우고자 마음이 있어야 그 사람의 신심이 올바르고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역시 어떠한 시대에도 각종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불도수행의 자세입니다. 우리들이 참가하여야 할 행사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다 많이 행사에 참가하도록 힘써 갑시다.
행사 날에 잔업이 되지 않도록 전전일부터 보다 열심히 노력할 것과 행사에 기필코 참가 할 수 있도록 본존님에게 기원하고 작업을 능률적으로 하며 행사에 참가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평상시부터 저축하는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그와 같이 꾸준히 노력한다고 하면 기필코 행사에 참가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아무리 하여서도 참가할 수가 없게 될 때에는 사전에 선배 간부에게 연락하고 또 사후에 행사의 내용을 듣고 지도를 받도록 합시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는 기필코 참가하도록 노력하고 본존님에게 기원합시다.대성인은 「신심(信心)이 있는 제인(諸人)은 한 자리에 모여서 청문(聽聞)하시라.」(신편어서 p.484) 『오토님모어서(乙님母御書)』에 「길이 먼 곳에 뜻이 나타난다.」(신편어서 p.689)라고 말씀하시고 만약에 정말로 신심하여 행복을 누리려고 한다면 한 장소에 집합하여 불법을 청문하고 또 먼 곳이라 하여도 가서 배우고자 마음이 있어야 그 사람의 신심이 올바르고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역시 어떠한 시대에도 각종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불도수행의 자세입니다. 우리들이 참가하여야 할 행사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다 많이 행사에 참가하도록 힘써 갑시다.
지금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또한 이와 같다.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 남녀(男女)의 모습 이외(以外)에 보탑(寶塔)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貴賤上下)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자신(自身)이 보탑(寶塔)이고 자신(自身)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외(以外)에 보탑(寶塔)은 없으며,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이 보탑(寶塔)이고 보탑(寶塔)이 또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행자(行者)는 확실히 부실(不實)할지라도 지혜(智慧)는 어리석을지라도 몸은 부정(不淨)할지라도, 계덕(戒德)은 갖추지 않았을지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수호(守護)하시리라.어찌 기원(祈願)의 성취(成就)가 늦으리요. 대지(大地)를 가리켜서 빗나갈지라도 허공(虛空)을 동여매는 자(者)는 있을지라도·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없는 일은 있을지라도, 해는 서(西)쪽에서 돋을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본존(本尊)이란 ‘근본 존경’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근본으로서 존경하는 대상입니다. 종교가 없다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마음속으로 가장 존경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장 소중히 하고 있는 것, 그것이 본존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본존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가 본존이 되고, 어떤 사람은 ‘애인’이나 ‘가족’이 본존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막연한 신이나 하늘, 진리를 본존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요.
무엇을 근본으로 존경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즉 본존에 의해 인생이 바뀝니다.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에서는 부처의 생명을 본존으로 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을 본존으로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본존이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도 추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이 어본존(御本尊)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흉중(胸中)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신편어서 p.1388)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어본존은 전혀 다른 곳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들 범부가 어본존을 믿고 수지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흉중의 육단 속에 계시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 속에도 영원한 대 생명이 있습니다. 흉중에 어본존이 있습니다. 최고의 인간 존경, 생명 존중의 사상입니다. 그 흉중의 어본존을 불러서 나타내기 위해 대성인께서 당신의 생명을 한 폭의 어본존으로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근행창제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간단한 수행입니다. 폭포의 세찬 물줄기를 얻어맞는 식의 특별한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성인의 불법이 최고로 뛰어나기 때문에 최고로 간단한 수행으로 불계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계라고 해도 기술이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조작은 간단해집니다. 한편, 자신의 생활의 장에서 행하는 수행이므로 타성에 젖기 쉽고 지속하기에 이 만큼 어려운 수행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매일 조금씩이라도 계속하자’고 도전해 가면 자연히 자기의 생명 속에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불행한 방향으로 휩쓸리지 않게 하는 생명의 방파제가 생기는 것입니다.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나무(南無)란 범어(梵語)이며 여기서는 귀명(歸命)이라 하느니라. 인법(人法)이 있으니 인(人)이란 석존(釋尊)을 받들어 귀명(歸命)하고 법(法)이란 법화경(法華經)을 받들어 귀명(歸命)함이라. 또 귀(歸)라 함은 적문불변진여(迹門不變眞如)의 이(理)에 귀의(歸依)함이며 명(命)이란 본문수연진여(本門隨緣眞如)의 지(智)에 의거(依據)함이라. 귀명(歸命)이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석(釋)에 가로되, 수연불변(隨緣不變)·일념적조(一念寂照)라고, 또 귀(歸)란 우리들의 색법(色法)이고 명(命)이란 우리들의 심법(心法)이며 색심불이(色心不二)임을 일극(一極)이라고 하느니라. 석(釋)에 가로되 일극(一極)에 귀(歸)하게 하는 고(故)로 불승(佛乘)이라 한다라고. 또 가로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나무(南無)란 범어(梵語)이고·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한어(漢語)이며, 범한(梵漢) 공시(共時)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느니라. 또 가로되 범어(梵語)로는 살달마(薩達磨)·분다리가(芬陀梨伽)·소다람(蘇多覽)이라 하며, 여기서는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 하느니라, 살(薩)은 묘(妙)이고 달마(達磨)는 호(法)이며 분다리가(芬陀梨伽)는 렌게(蓮華)이고 소다람(蘇多覽)은 쿄(經)이니라. 구자(九字)는 구존(九尊)의 불체(佛體)이며, 구계즉불계(九界卽佛界)의 표시(表示)이니라. 묘(妙)란 법성(法性)이고 호(法)란 무명(無明)이며 무명(無明) 법성(法性)이 일체(一體)임을 묘호(妙法)라 하느니라. 렌게(蓮華)란 인과(因果)의 이법(二法)이고, 이것 또한 인과일체(因果一體)이니라. 쿄(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언어(言語) 음성(音聲)을 쿄(經)라고 하느니라. 석(釋)에 가로되, 성불사(聲佛事)를 함을 이름하여 쿄(經)라 한다고, 혹(或)은 삼세상항(三世常恒)임을 쿄(經)라고 하느니라. 법계(法界)는 묘호(妙法)이고 법계(法界)는 렌게(蓮華)이며 법계(法界)는 쿄(經)니라. 렌게(蓮華)란 팔엽구존(八葉九尊)의 불체(佛體)이니라, 차근차근히 이를 생각할지어다, 이상(已上).
어의구전(御義口傳) 708쪽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본의(本意)는 무상(無上)이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무상중(無上中)의 극무상(極無上)이니라. 이 묘법(妙法)을 가리켜 무상보취(無上寶聚)라고 설(說)하셨느니라, 보취(寶聚)란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만행만선(萬行萬善)의 제바라밀(諸波羅蜜)의 보(寶)를 모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무상보취(無上寶聚)를 신로(辛勞)도 없고 행공(行功)도 없이 일언(一言)으로 수취(受取)하는 신심(信心)이며, 불구자득(不求自得)이란 이것이니라, 자(自)의 자(字)는 십계(十界)이며, 십계(十界) 각각(各各)이 득(得)하느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 이것이니라, 그러한 까닭으로 이 문(文)은 묘각(妙覺)의 석존(釋尊)은 우리들 중생(衆生)의 골육(骨肉)이니 깊이 깊이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운운(云云).
어의구전(御義口傳) 727쪽
어본존(御本尊) 공양(供養)을 위(爲)하여 엽전(葉錢) 오관(五貫)·백미(白米) 한바리·과자(菓子) 보내주신 그 수량(數量)대로 받았소이다. 대저 이 어본존(御本尊)은 재세(在世) 오십년 중(五十年中)에는 팔년(八年)·팔년간(八年間)에도 용출품(涌出品)에서 촉루품(囑累品)까지 팔품(八品)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런데 멸후(滅後)에는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 중(中)에서 정상이천년(正像二千年)에는 아직 본문(本門)의 본존(本尊)이라고 하는 이름조차도 없었으니, 하물며 나타나셨을리가 있으리오. 또한 나타낼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천태(天台) 묘락(妙樂) 전교(傳敎) 등(等)은 내심(內心)에는 깨달아서 알고 있었지만 까닭이 있었는지 말로 나타내지는 않았느니라. 저 안연(顔淵)이 들은 것을 의중(意中)에는 깨달았다 할지라도 말로는 나타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런데 불멸후이천년(佛滅後二千年)이 지나서 말법(末法)의 초(初)의 오백년(五百年)에 출현(出現)하시게 된다는 것은 경문(經文)에 혁혁(赫赫)하고 명명(明明)하며, 천태(天台) 묘락등(妙樂等)의 해석(解釋)에도 분명(分明)하니라.
이에 니치렌(日蓮)이 어떠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인지 용수(龍樹) 천친등(天親等)·천태(天台) 묘락등(妙樂等)조차도 나타내시지 않았던 대만다라(大曼茶羅)를 말법(末法) 이백여년경(二百餘年頃)에 비로소 법화홍통(法華弘通)의 기치(旗幟)로서 나타내 드리느니라. 이것은 결코 니치렌(日蓮)의 자작(自作)이 아니로다, 다보탑중(多寶塔中)의 대모니세존(大牟尼世尊)·분신(分身)의 제불(諸佛)을 판목(版木)으로 한 본존(本尊)이니라. 그러므로 수제(首題)의 오자(五字)는 중앙(中央)에 걸리고 사대천왕(四大天王)은 보탑(寶塔)의 사방(四方)에 좌정(坐定)하고 석가(釋迦)·다보(多寶)·본화(本化)의 사보살(四菩薩)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보현(普賢)·문수등(文殊等)·사리불(舍利弗)·목련등(目連等)이 무릎을 꿇고·일천(日天)·월천(月天)·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용왕(龍王)·아수라(阿修羅)·그 외(外)에 부동(不動)·애염(愛染)은 남북(南北)의 이방(二方)에 진(陣)을 치고·악역(惡逆)의 달다(達多)·우치(愚癡)의 용녀(龍女)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삼천세계(三千世界)의 사람의 수명(壽命)을 빼앗는 악귀(惡鬼)인 귀자모신(鬼子母神)·십나찰녀(十羅刹女) 등(等)·뿐만 아니라, 일본국(日本國)의 수호신(守護神)인 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천신칠대(天神七代)·지신오대(地神五代)의 신(神)들·통틀어 대소(大小)의 신기등(神祇等)·체(體)의 신(神)이 줄지어 있으니 여타(餘他)의 용(用)의 신(神)이야 어찌 빠질소냐, 보탑품(寶塔品)에 가로되 「여러 대중(大衆)을 접(接)하여 모두 허공(虛空)에 있음」 운운(云云). 이들의 불(佛) 보살(菩薩)·대성(大聖) 등(等)·통틀어 서품(序品) 열좌(列座)의 이계팔번(二界八番)의 잡중등(雜衆等)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어본존(御本尊) 속에 주(住)하시어 묘법(妙法) 오자(五字)의 광명(光明)에 비추어져서 본유(本有)의 존형(尊形)으로 되니 이를 본존(本尊)이라고 하느니라.
경(經)에 가로되 「제법실상(諸法實相)」 이것이니라. 묘락(妙樂)가로되 「실상(實相)은 반드시 제법(諸法)·제법(諸法)은 반드시 십여(十如) 내지(乃至) 십계(十界)는 반드시 신토(身土)」 운운(云云). 또 가로되 「실상(實相)의 심리(深理) 본유(本有)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등(等)이라고 운운(云云). 전교대사(傳敎大師)가 가로되 「일념삼천(一念三千) 즉(卽) 자수용신(自受用身)·자수용신(自受用身)이란 출존형(出尊形)의 불(佛)」 문(文). 그런 고(故)로 미증유(未曾有)의 대만다라(大曼茶羅)라고 삼가 이름하였느니라. 불멸후(佛滅後)·이천이백이십여년(二千二百二十餘年)에는 이 어본존(御本尊)은 아직 출현(出現)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어본존(御本尊)을 공양(供養)해 드리시는 여인(女人)은 현재(現在)에는 행운(幸運)을 초래(招來)하고 후생(後生)에는 이 어본존(御本尊)이 좌우(左右) 전후(前後)에 다가서서 어둠에 등불과 같고 험난(險難)한 곳에서 강력(强力)한 종복(從僕)을 얻은 것과 같이 저쪽으로 돌고, 이쪽으로 다가와서 니치뇨부인(日女夫人)을 둘러싸고 지켜 주시리라. 결단코 명심하여 유녀(遊女)가 나의 집에 접근하는 것을 꺼리듯이 방법자(謗法者)를 방지(防止)하시라, 악지식(惡知識)을 버리고 선우(善友)에게 친근(親近)하라 함은 이것이니라.
이 어본존(御本尊)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求)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흉중(胸中)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九識心王眞如)의 도(都)라고 하느니라. 십계구족(十界具足)이라 함은 십계(十界)가 일계(一界)도 빠짐없이 일계(一界)에 있음이라, 이에 의(依)해서 만다라(曼陀羅)라고 하며 만다라(曼陀羅)라고 함은 천축(天竺)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도 공덕취(功德聚)라고도 이름하느니라. 이 어본존(御本尊)도 다만 신심(信心)의 이자(二字)에 들어 있으니 이신득입(以信得入)이란 이것이니라.
니치렌(日蓮)의 제자단나등(弟子檀那等)·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불수여경일게(不受余經一偈)라고 무이(無二)로 믿음으로써·이 어본존(御本尊)의 보탑(寶塔) 안에 들어 갈 수 있느니라·미덥고 미덥도다. 어떻게든 후생(後生)을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라, 결단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라, 신심(信心)의 후박(厚薄)에 달려 있으며, 불법(佛法)의 근본(根本)은 신(信)으로써 근원(根源)으로 하느니라. 그러므로 지관(止觀)의 四에 가로되 「불법(佛法)은 바다와 같다. 오직 신(信)만이 능(能)히 들어감」이라고, 홍결(弘決)의 四에 가로되 「불법(佛法)은 바다와 같다, 오직 신(信)만이 능(能)히 들어 감이란 공구(孔丘)의 말씀도 역시 신(信)을 첫째로 했느니라, 하물며 불법(佛法)의 심리(深理)에 있어서랴. 신(信)이 없이 어찌 들어 가겠느뇨. 고(故)로 화엄(華嚴)에 신(信)을 도(道)의 근원(根源) 공덕(功德)의 모(母)로 하느니라」 등(等), 또 지(止)의 一에 가로되 「어떻게 원(圓)의 법(法)을 듣고 원(圓)의 신(信)을 일으키며 원(圓)의 행(行)을 세워서 원(圓)의 위(位)에 주(住)하리오」 홍(弘)의 一에 가로되 「원신(圓信)이라고 함은 이(理)에 의(依)하여 신(信)을 일으키고 신(信)을 행(行)의 본(本)으로 함」 운운(云云). 외전(外典)에 가로되 「한왕(漢王)이 신하(臣下)의 말을 믿었으므로 하상(河上)의 물결이 갑자기 얼었으며, 이광(李廣)이 아버지의 원수(怨讐)라고 생각하였기에 풀속의 돌이 화살을 삼키었다」라고 했느니라. 결국(結局) 천태(天台) 묘락(妙樂)의 석(釋)은 분명(分明)히 신(信)으로써 본(本)으로 삼았으며, 저 한왕(漢王)도 의심(疑心)하지 않고 대신(大臣)의 말을 믿었기에 물결치던 강(江)물이 얼어서 건너갔느니라. 돌에 화살이 박힌 것은 이것도 역시 아버지의 원수라고 생각한 지신(至信)때문이었으니 하물며 불법(佛法)에 있어서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즉(卽) 오종(五種)의 수행(修行)을 구족(具足)하느니라. 이 사실(事實)은 전교대사(傳敎大師)가 입당(入唐)하여 도수화상(道邃和尙)을 만나 뵙고 오종돈수(五種頓修)의 묘행(妙行)이라고 하는 것을 상전(相傳)받으셨느니라. 니치렌(日蓮)의 제자단나(弟子檀那)의 간요(肝要)는 이 이외(以外)에 구(求)하지 말지어다. 신력품(神力品)에 설(說)함. 상세(詳細)하게는 또 다시 말하겠나이다. 공공근언(恐恐謹言).
니치뇨부인답서(日女夫人答書) 1243~5쪽
지금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또한 이와 같다.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 남녀(男女)의 모습 이외(以外)에 보탑(寶塔)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貴賤上下)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자신(自身)이 보탑(寶塔)이고 자신(自身)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외(以外)에 보탑(寶塔)은 없으며,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이 보탑(寶塔)이고 보탑(寶塔)이 또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지금 아부쓰상인(阿佛上人) 의 일신(一身)은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의 오대(五大)이며, 이 오대(五大)는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니라. 그러므로 아부쓰보(阿佛房)가 바로 보탑(寶塔)이고 보탑(寶塔)이 바로 아부쓰보(阿佛房)이며 이것 이외(以外)의 재각(才覺)은 무익(無益)하니라. 문(聞)·신(信)·계(戒)·정(定)·진(進)·사(捨)·참(慚)의 칠보(七寶)로써 장식한 보탑(寶塔)이니라. 다보여래(多寶如來)의 보탑(寶塔)을 공양(供養)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自身)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며 자신(自身)이 또한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이니라. 이렇게 믿으시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시라. 이곳이 바로 보탑(寶塔)의 주처(住處)이니라. 경(經)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는 일이 있는 곳에는 나의 이 보탑(寶塔)이 그 앞에 용현(涌現)함」이란 이것이니라. 너무나 존귀(尊貴)하시므로 보탑(寶塔)을 써서 나타내어 드리느니라, 자식이 아니면 물려 주지 말것이며 신심(信心) 강성(强盛)한 자(者)가 아니면 보이지 말지어다. 출세(出世)의 본회(本懷)란 이것이니라.
아부쓰보어서(阿佛房御書) 1304쪽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보리(菩提)이니라. 소위(所謂)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상행(上行)·무변행(無邊行) 등(等)·보현(普賢)·문수(文殊)·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 대범천왕(大梵天王)·석제환인(釋提桓因)·일월(日月)·명성(明星)·북두(北斗)·칠성(七星)·이십팔수(二十八宿)·무량(無量)의 제성(諸星)·천중(天衆)·지류(地類)·용신(龍神)·팔부(八部)·인천(人天)·대회(大會)·염마법왕(閻魔法王)·상(上)은 비상(非想)의 구름 위로부터 하(下)는 나락(那落)의 불길 바닥까지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이 수제(首題)를 봉창(奉唱)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 모두 불리어서 여기에 모일 때 자신(自身)의 법성(法性)의 법보응(法報應)의 삼신(三身)이 함께 이끌려서 현출(顯出)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 예(例)컨대 새장 속에 있는 새가 울 때, 하늘을 나는 많은 새가 동시(同時)에 모이는데 이를 보고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 498쪽
물어 가로되, 부처의 명호(名號)를 가지듯이 법화경(法華經)의 명호(名號)를 유다르게 가져야 할 증거(證據)가 있느뇨 없느뇨. 답(答)하여 왈(曰), 경(經)에 가로되 「부처가 여러 나찰녀(羅刹女)에게 고(告)하시기를 좋도다 좋도다, 그대들 다만 능(能)히 법화(法華)의 이름을 수지(受持)하는 자(者)를 옹호(擁護)하는 복(福)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운운(云云). 이 문(文)의 의(意)는 십나찰(十羅刹)이 법화(法華)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수호(守護)하리라고 서언(誓言)을 세움을 대각세존(大覺世尊)이 칭찬하여 가로되, 좋도다 좋도다, 그대들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수지(受持)하는 사람을 수호(守護)하는 공덕(功德)은 얼마인지 헤아리기 어렵고·뛰어난 공덕(功德)이며 신묘(神妙)하니라고 말씀하신 문(文)이로다. 이는 우리들 중생(衆生)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를지어다 라는 문(文)이니라.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불성(佛性)과 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의 불성(佛性)과 문수(文殊)·미륵(彌勒) 등(等)의 불성(佛性)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묘법(妙法)과 일체불이(一體不二)인 이(理)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일체(一切)의 불(佛)·일체(一切)의 법(法)·일체(一切)의 보살(菩薩)·일체(一切)의 성문(聲聞)·일체(一切)의 범왕(梵王)·제석(帝釋)·염마(閻魔)·법왕(法王)·일월(日月)·중성(衆星)·천신(天神)·지신(地神)·내지(乃至)·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천(人天)·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불성(佛性)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라.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
법화초심성불초(法華初心成佛抄) 556~7쪽
지자(智者)는 독송(讀誦)에 관념(觀念)도 병행(並行)할 것이며 우자(愚者)는 제목(題目)만을 부를지라도 이 이(理)를 회득(會得)하리라. 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의 심성(心性)이며 총(總)하여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성(心性)·팔엽(八葉)의 백련화(白蓮華)의 이름이며 이를 가르치시는 부처의 말씀이로다. 무시(無始)부터 이래(以來) 나의 신중(身中)의 심성(心性)에 미혹(迷惑)되어 생사(生死)를 유전(流轉)한 몸이 이제 이 경(經)을 만나 뵈옵고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를 부름으로 나타나서 현세(現世)에 기내증성불(其內證成佛)함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하느니라, 죽으면 빛을 발산하니 이는 외용(外用)의 성불(成佛)이라 하며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란 이것이니라. 약거경제(略擧經題)·현수일부(玄收一部)라 하여 한 번은 일부(一部) 운운(云云).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부를 때·심성(心性)의 여래(如來)가 나타나고 귀로 듣는 유(類)는 무량아승기겁(無量阿僧祇劫)의 죄(罪)를 멸(滅)하며 일념(一念)이라도 수희(隨喜)할 때 즉신성불(卽身成佛)함이라.
일념삼천법문(一念三千法門) 415쪽
어찌 기원(祈願)의 성취(成就)가 늦으리요. 대지(大地)를 가리켜서 빗나갈지라도 허공(虛空)을 동여매는 자(者)는 있을지라도·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없는 일은 있을지라도, 해는 서(西)쪽에서 돋을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모든 보살(菩薩)·인천(人天)·팔부(八部) 등(等)·이성(二聖)·이천(二天)·십나찰(十羅刹) 등(等)이 천(千)에 하나라도 와서 수호(守護)하시지 않는 일이 있다면 위로는 석가제불(釋迦諸佛)을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구계(九界)를 속이는 죄가 되리라. 행자(行者)는 확실히 부실(不實)할지라도 지혜(智慧)는 어리석을지라도 몸은 부정(不淨)할지라도, 계덕(戒德)은 갖추지 않았을지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수호(守護)하시리라. 주머니가 더럽다고 하여 금(金)을 버리지 말지니라. 이란(伊蘭)을 미워하면 전단(栴檀)은 있을 수 없느니라. 계곡(溪谷)의 연못을 부정(不淨)하다고 싫어 한다면 연(蓮)꽃은 취(取)하지 못할 것이며 행자(行者)를 퇴박 하신다면 서원(誓願)을 깨뜨리심이라. 정상(正像)이 이미 지나 버렸으니 지계(持戒)는 시중(市中)의 호랑이와 같고 지자(智者)는 인각(麟角)보다도 희귀(稀貴)하리라. 달이 뜨기 전(前)에는 등(燈)불을 의지할 것이며 보주(寶珠)가 없는 곳에는 금은(金銀)도 보배(寶貝)로다. 백오(白烏)의 은(恩)을 흑오(黑烏)에게 갚고 성승(聖僧)의 은(恩)을 범승(凡僧)에게 갚을지니라. 속히 속히 이생(利生)을 주십사 하고 강성(强盛)히 기원(祈願)한다면 어찌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으리요.
기도초(祈禱抄) 1351~2쪽
대저 이 법화경(法華經)을 펴서 배견(拜見)하노라면 「여래(如來)는 즉 그를 위해 의복(衣服)으로써 이를 덮어 주시고 또한 타방(他方) 현재(現在)의 제불(諸佛)이 호념(護念)하는 바가 되리라」 등(等) 운운(云云). 경문(經文)의 뜻은 동서남북(東西南北)·팔방(八方)·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외(外)·사백만억나유타(四百萬億那由佗)의 국토(國土)에 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잇따라와서 충만(充滿)하시었다, 하늘에는 별과 같이·땅에는 도마(稻麻)와 같이 열(列)지어 계시며,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시는 것을 비유하면 대왕(大王)의 태자(太子)를 모든 신하(臣下)가 수호(守護)하는것과 같다. 단(但) 사천왕(四天王)의 동류(同類)가 수호(守護)하여 주시는 것도 황송한 일인데, 일체(一切)의 사천왕(四天王)·일체(一切)의 성수(星宿)·일체(一切)의 일월(日月)·제석(帝釋)·범천(梵天) 등(等)이 수호(守護)하시니 만족(滿足)해야 할 일이니라. 게다가 일체(一切)의 이승(二乘)·일체(一切)의 보살(菩薩)·도솔내원(兜卒內院)의 미륵보살(彌勒菩薩)·가라타산(伽羅陀山)의 지장(地藏)·보타락산(補陀落山)의 관세음(觀世音)·청량산(淸凉山)의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등(等)·각각(各各) 권속(眷屬)을 구족(具足)하여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해 주심으로써 만족(滿足)해야 할 것인데·또한 황송하게도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친(親)히 자진(自進)해서 내림(來臨)하시어·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동안 수호(守護)해 주심에 대한 황송함은 말로 다하지 못하노라.
우에노전모친답서(上野殿母親答書) 1570쪽
대저 인신(人身)을 받기는 희귀(稀貴)한 일이니라, 이미 희귀(稀貴)한 인신(人身)을 받았으며 또한 만나기 어려움은 불법(佛法)·이것 또한 만났노라, 같은 불법(佛法) 중에서도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을 삼가 만나서 결국(結局) 제목(題目)의 행자(行者)가 되었으니, 참으로 참으로 과거십만억(過去十萬億)의 제불(諸佛)을 공양(供養)한 자(者)이니라.
자쿠니치보어서(寂日房御書) 902쪽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일신(一身) 제일(第一)의 진보(珍寶)이니 일일(一日)이라도·이를 연장(延長)한다면 천만량(千萬兩)의 황금(黃金)보다도 더 값지도다, 법화경(法華經)이 일대(一代)의 성교(聖敎)보다 초과(超過)하여 존귀(尊貴)하다 함은 수량품(壽量品) 때문이니라.
가연정업서(可延定業書) 986쪽
일행(一行)이란 묘법(妙法)의 일행(一行)에 일체행(一切行)을 포함(包含)하였으며, 법구(法具)란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에 만법(萬法)을 구족(具足)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러하므로 삼세시방(三世十方)의 제불(諸佛)도, 상행보살(上行菩薩) 등(等)도, 대범천왕(大梵天王)·제석(帝釋)·사왕(四王)·십나찰녀(十羅刹女)·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산왕이십일사(山王二十一社)·기외(其外)·일본국(日本國) 중(中)의 소신(小神)·대신(大神) 등(等)·이 경(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할 것이니라고, 법화경(法華經)의 제오권(第五卷)에 분명(分明)히 설(說)해져 있느니라. 그림자와 몸·소리와 울림과 같은 것이다, 법화경(法華經) 이십팔품(二十八品)은 그림자와 같고 울림과 같다.
제목(題目)의 오자(五字)는 체(體)와 같고 소리와 같은 것이니라, 제목(題目)을 봉창(奉唱)하는 소리는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닿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우리들의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제목(題目)이라는 대음(大音)에 넣어서 봉창(奉唱)하므로 일대삼천계(一大三千界)에 도달(到達)하지 않는 곳이 없다. 비유(譬喩)컨대 소음(小音)이라도 조개껍질에 넣어서 불면 멀리 울리는 것과 같고, 손의 소리는 작지만 북을 치면 멀리 울리는 것과 같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대사(大事)인 법문(法門)이 이것이니라.
어강문서(御講聞書) 807~8쪽대양약(大良藥)은 말법(末法)의 성불(成佛)의 감로(甘露)이니라.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대양약(大良藥)의 본주(本主)이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보리(菩提)이니라. 소위(所謂)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상행(上行)·무변행(無邊行) 등(等)·보현(普賢)·문수(文殊)·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 대범천왕(大梵天王)·석제환인(釋提桓因)·일월(日月)·명성(明星)·북두(北斗)·칠성(七星)·이십팔수(二十八宿)·무량(無量)의 제성(諸星)·천중(天衆)·지류(地類)·용신(龍神)·팔부(八部)·인천(人天)·대회(大會)·염마법왕(閻魔法王)·상(上)은 비상(非想)의 구름 위로부터 하(下)는 나락(那落)의 불길 바닥까지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이 수제(首題)를 봉창(奉唱)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 모두 불리어서 여기에 모일 때 자신(自身)의 법성(法性)의 법보응(法報應)의 삼신(三身)이 함께 이끌려서 현출(顯出)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 예(例)컨대 새장 속에 있는 새가 울 때, 하늘을 나는 많은 새가 동시(同時)에 모이는데 이를 보고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 498쪽이제 말대(末代)에 들어와서 이 주(珠)를 나타내는 것은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며, 소위(所謂) 미증유(未曾有)의 대만다라(大曼茶羅)야말로 진정(眞正)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보주(寶珠)이니라. 견(見)의 자(字)는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 널리는 일염부제(一閻浮提)의 중생(衆生)이니라, 그러나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라고 할 때는 니치렌(日蓮)의 제자단나(弟子檀那) 등(等)의 신자(信者)를 가리키느니라, 결국(結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체달(體達)함이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이니라.어본존은 흔히 우리가 아는 불화(佛畫) 같은 그림이 아니고 글자로 된 것은 인간 최극의 지혜의 상징입니다.
즉 석존은 오로지 말로써 설하고 100년, 500년 지나 경(經)이라는 글로 남겨지고, 천태대사에 의해 철저하게 분석돼 뛰어난 법과 낮은 법이 구별되고, 대성인에 의해 그 실체가 명확하게 나타나는 등, 불교의 역사가 3천년이 지나는 동안 최고로 발전한 형태가 어본존님입니다.
어서(御書)의 『니치뇨부인답서(日女夫人答書)(신편어서 p.1387)』는 어본존상모사로도 불리며, 어본존님에 쓰여 있는 문구의 내용과 구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어본존님은 법화경에 나오는 허공회 의식을 그대로 도현한 것인데 중앙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대법을 중심으로 아래 니치렌대성인 즉 그 법과 일체인 본불님을 쓰고 계십니다.
그리고 본존님의 네 귀퉁이에는 대비사문천왕, 대증장천왕, 대광목천왕, 대지국천왕이라 하여 흔히 사천왕이라 부르는 제천선신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허공회 의식을 수호합니다. 다시 말해 사천왕은 본존님을 믿고 부르는 사람의 주위를 수호하는 작용을 나타냅니다.
또 본존님은 위에서 아래로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는데, 맨 위에는 석가불, 다보불을 비롯해 본화의 사보살(상행, 무변행, 안립행, 정행)이 위치합니다. 즉 이는 불계를 나타냅니다.
또 그 아래에는 석존의 대표 제자인 사리불, 목련 등과 함께 보살, 이승계의 인물들이, 또 그 아래에는 제바달다, 귀자모신, 십나찰녀 등 육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나열됩니다. 그리고 맨 아래 일본국의 수호신인 팔번대보살과 천조태신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본존님 안에는 십계의 대표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은 또 일체 모든 사람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대생명을 마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내듯 불계의 생명을 끌어올려 주는 대상이므로 거울과 같은 대상, 대경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본존님 위쪽 왼쪽에 ‘유공양자복과십호(有供養者福過十號)’라는 공덕이, 오른쪽에 ‘약뇌란자두파칠분(若惱亂者 頭破七分)’이라는 벌이 명시돼 있습니다. 또 니치렌이라는 이름 근처에는 본존님을 서사(베껴 씀)한 사람의 이름과 날짜 등이 기재돼 있습니다.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불성(佛性)과 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의 불성(佛性)과 문수(文殊)·미륵(彌勒) 등(等)의 불성(佛性)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묘법(妙法)과 일체불이(一體不二)인 이(理)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일체(一切)의 불(佛)·일체(一切)의 법(法)·일체(一切)의 보살(菩薩)·일체(一切)의 성문(聲聞)·일체(一切)의 범왕(梵王)·제석(帝釋)·염마(閻魔)·법왕(法王)·일월(日月)·중성(衆星)·천신(天神)·지신(地神)·내지(乃至)·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천(人天)·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불성(佛性)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라.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
법화초심성불초(法華初心成佛抄) 556~7쪽
지자(智者)는 독송(讀誦)에 관념(觀念)도 병행(並行)할 것이며 우자(愚者)는 제목(題目)만을 부를지라도 이 이(理)를 회득(會得)하리라. 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의 심성(心性)이며 총(總)하여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성(心性)·팔엽(八葉)의 백련화(白蓮華)의 이름이며 이를 가르치시는 부처의 말씀이로다. 무시(無始)부터 이래(以來) 나의 신중(身中)의 심성(心性)에 미혹(迷惑)되어 생사(生死)를 유전(流轉)한 몸이 이제 이 경(經)을 만나 뵈옵고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를 부름으로 나타나서 현세(現世)에 기내증성불(其內證成佛)함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하느니라, 죽으면 빛을 발산하니 이는 외용(外用)의 성불(成佛)이라 하며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란 이것이니라. 약거경제(略擧經題)·현수일부(玄收一部)라 하여 한 번은 일부(一部) 운운(云云).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부를 때·심성(心性)의 여래(如來)가 나타나고 귀로 듣는 유(類)는 무량아승기겁(無量阿僧祇劫)의 죄(罪)를 멸(滅)하며 일념(一念)이라도 수희(隨喜)할 때 즉신성불(卽身成佛)함이라.
일념삼천법문(一念三千法門) 415쪽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체(體)의 존귀(尊貴)하심은 어떠한 체(體)이신가 하고 추구(追求)해 보았더니 나의 심성(心性)의 팔엽(八葉)의 백연화(白蓮華)라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몸의 체성(體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말한 것이므로 경(經)의 이름이 아니고·이미 나 자신(自身)의 체(體)라고 알았기에 자신(自身)이 그대로 법화경(法華經)이며 법화경(法華經)은 나 자신(自身)의 체(體)를 불러 나타내시는 부처의 말씀이시므로 다름아닌 나의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인 것이니라. 이렇게 깨닫는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이래(已來) 지금까지 항상 생각해 온 그릇된 망상(妄想)은 어제의 꿈을 생각하듯이 형적(形迹)도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니라. 이를 믿고 한번이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면 법화경(法華經)을 깨닫고 여법(如法)으로 일부(一部)를 봉독(奉讀)함이니라. 열번은 十부(部)·백(百)번은 百부(部)·천(千)번은 천부(千部)를 여법(如法)으로 봉독(奉讀)한 것이로다. 이렇게 믿음을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말하느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십여시사(十如是事) 가마쿠라(鎌倉) 34세에 술작 411쪽불교에서 본존이라고 하면 불상을 떠올리는 것 같은데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상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에는 부처의 모습을 그림이나 형상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실은 없었습니다.
초기의 경전인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이십일(卷二十一)에는 “여래(如來)의 몸은 만들지 말 것”이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또 초기의 율(계율을 모은 것)인 『십송율(十誦律)』에도 “불신상(佛身像) 같은 것은 정히 만들지 말것”이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가 본래 단순히 도상(圖像)으로 나타낼 수 있는 외면적인 것보다도 부처를 부처답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을 설한 것이고, 사람들도 그것을 숭배해 왔기 때문에 부처를 도상으로 표현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불교에서 불사의 창작과 그것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게 되는 것은 간다라 불교 이래의 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들 하는데 부처와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부처를 갈앙(渴仰)하고 그 생각이 불상창작과 그 숭배를 추진해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것은 어디까지나 구해야 할 것은 부처를 부처답게 한 법이라는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의 법사품(法師品) 제십(第十)에는 “경권소주(經卷所住)의 곳에는 모두 바로 칠보의 탑을 세우고 극히 고광엄식(高廣嚴飾)할 것이니라.(중략) 이 중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있음”이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경전을 신앙의 대상으로 해서 숭배할 것이 권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로 되기 위한 법이 거기 설해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같이 부처의 불상이 아니고 부처를 부처이게 하는 법, 우리들을 부처이게 하기 위해 부처가 설한 법을 숭배하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정수인 것입니다.
따라서 간다라 이후 불상을 안치하고 그것을 본존이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행의 보조로서 인정되었다고 해야되겠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이 나타내신 어본존은 『본존문답초(本尊問答抄)』에서「법화경(法華經)의 제목으로써 본존으로 삼을 지어다.」(신편어서 p.127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중앙수제(中央首題)로 하는 본존입니다.
『초목성불구결(草木成佛口決)』에서「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을 흔들어 헹궈 세운 것이 대만다라(大曼茶羅)이니라.」(신편어서 p.523)고 기술하시고 있는 것처럼 석가불을 비롯, 온갖 부처를 부처이게 한 근본법인 일념삼천이라는 생명의 법리를 그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만다라의 어본존 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성불의 근본으로 되는 본존인 것입니다.이 세계(世界)는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의 소령(所領)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시(無始) 이래(已來) 그 마왕(魔王)의 권속(眷屬)이니라. 육도(六道) 중(中)에 이십오유(二十五有)라고 하는 감옥(監獄)을 짓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들여 보낼 뿐만 아니라, 처자(妻子)라고 하는 굴레를 씌우고 부모(父母) 주군(主君)이라고 하는 그물을 하늘에 치고 탐진치(貪瞋癡)라는 술을 마시게 하여 불성(佛性)의 본심(本心)을 어루꾀느니라. 오직 악(惡)의 안주(按酒)만을 권하여 삼악도(三惡道)의 대지(大地)에 엎드려 자게 하고, 간혹 선심(善心)이 있으면 장애(障碍)를 하느니라.
형제초(兄弟抄)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본존님 안에 일본의 신(神)인 천조태신과 팔번대보살이 쓰여 있어, 일련정종은 일본의 신을 믿는 일본종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왜곡된 비판이 있습니다.
먼저 본존님에 천조태신이나 팔번대보살이 쓰여 있는 것은 예배 대상으로서가 아닙니다. 니치렌대성인의 만다라 본존에는 법화경에 표현된 깨달음의 세계(즉 허공회)의 모습을 빌려 우주 근원의 법이자 보편적인 성불의 법이기도 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가 나타나 있습니다. 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와 일체인 불계의 생명이 나타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만다라본존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니치렌(日蓮)<화압(花押)>’이라고 중앙에 크게 쓰여 있으며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가 근본적인 숭배 대상임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닛코(日興 )상인도 「오직 어서(御書)의 뜻에 따라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를 가지고 본존으로 해야 하느니라.」(신편어서 pp.1871~1872)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성인의 만다라는 타 종파에 있는 부처·보살만의 만다라가 아니라, 법화경에 설한대로 십계를 모두 구족한 만다라입니다. 십계의 중생을 모두 포함하는 근원의 법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십계 모두를 포함하는 근원의 법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며, 본존님 중앙에 크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남묘호렌게쿄를 우주 안에서 지극히 존귀한 당체로 배알합니다.
또 만다라에 쓰여 있는 십계의 중생은 예배, 기원의 대상이 아니라 십계의 모든 중생을 비추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힘의 보편성, 근원성을 나타냅니다.
대성인은『니치뇨부인답서(日女夫人答書)』에 「십계구족(十界具足)이라 함은 십계(十界)가 일계(一界)도 빠짐없이 일계(一界)에 있음이라. 이에 의(依)해서 만다라(曼陀羅)라고 하며 만다라(曼陀羅)라고 함은 천축(天竺)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도 공덕취(功德聚)라고도 이름하느니라.」(신편어서 p.1388)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에 대해 일본의 진언종이나 천태종 그리고 티베트 불교인 금강승 등 밀교의 만다라는 부처·보살 등 존귀한 존재만을 모은 만다라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만다라들은 소원을 의뢰하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니치렌 계보 종파 중에서도 대성인의 만다라를 밀교와 동일하다고 오해하고 만다라 속의 각 중생을 예배, 기원의 대상으로 여겨 개별적으로 상(像)을 만들어 본존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성인 만다라의 참뜻을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조태신·팔번대보살은 꼭 일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디라도 현실에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넓히는 사람을 지키는 선신의 작용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천조태신은 태양신이며, 팔번대보살은 농신(農神)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쪽도 생명과 국토를 풍요롭게 하는 힘을 상징합니다.아무리 해도 이 몸은 헛되이 산야(山野)의 흙이 되리니, 아까워한들 무엇하리오, 아까워한들 끝내 아낄 수 없으며, 사람이 오래 산다 해도 백년(百年)은 넘지 못하니 그 간(間)의 일은 다만 한잠의 꿈과 같다. 받기 어려운 인신(人身)을 얻어 간혹 출가(出家)한 자(者)도 불법(佛法)을 배우고 방법(謗法)의 자(者)를 책(責)하지 않고 헛되이 유희잡담(遊戱雜談)만을 하며 지내는 자(者)는 법사(法師)의 가죽을 쓴 축생(畜生)이니라. 법사(法師)의 이름을 빌어서 세상(世上)을 살고 몸을 보양(保養)한다 해도 법사(法師)로 되는 의(義)는 하나도 없고 법사(法師)라고 하는 이름을 훔친 도인(盜人)이니라, 부끄러워 할지어다, 두려워 할지어다. 적문(迹門)에는 「나는 신명(身命)을 사랑하지 않고 단(但) 무상도(無上道)를 아낌」이라고 설하고 본문(本門)에는 「스스로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음」이라고 설(說)했으며, 열반경(涅槃經)에는 「몸은 경(輕)하고 법(法)은 중(重)하니 몸을 죽여서 법(法)을 넓힌다」라고 쓰여 있느니라. 본적양문(本迹兩門)·열반경(涅槃經) 다 같이 신명(身命)을 버려서 법(法)을 넓힐지어다 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훈계(訓誡)를 배반(背反)하는 중죄(重罪)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쌓여서 지옥(地獄)에 떨어진다 함은 비유(譬喩)컨대 한열(寒熱)은 형체(形體)도 없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겨울이면 추위가 와서 초목(草木)이나 인축(人畜)을 괴롭히고 여름에는 더위가 와서 인축(人畜)을 열뇌(熱惱)케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재가(在家)의 몸은 다만 여념(餘念)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고 승(僧)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 간심(肝心)이외다.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 미노부에서 55세에 술작불단을 구입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불단은 ‘최고의 본존을 자택에 안치하기 위한 엄숙하고 청정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최근의 세태 풍조로 가능한 한 싼 것으로 좋다라든지 불단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고 하는 등의 관점에서 불단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과연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집의 넓이에 비해 걸맞지 않을 정도의 큰 것이나, 실제 수입에 걸맞지 않는 고가의 불단을 구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단은 현재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면 나이가 들수록 자가가 넓어지거나 수입이 증가했을 때 일생에 2~3번은 서서히 훌륭한 것으로 교체해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 집을 새로 훌륭히 지었는데도 불단은 예전처럼 작고 초라한 채로 방 한구석에 숨도록 놓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방에 알맞은 크기로 그때 수입에 맞춰 힘껏 불단을 마련해 놓고 본존님을 모시면 됩니다.이와 같이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바의 해골(骸骨)은 비부라산(毘富羅山)보다도 많고, 은애(恩愛)나 애민(哀愍)의 눈물은 사대해(四大海)의 물보다도 많지만 불법(佛法)을 위하여서는 일골(一骨)도 버리지 않았었다. 일구일게(一句一偈)를 청문(聽聞)하여 한방울의 눈물조차도 흘리지 않은 고(故)로 삼계(三界)의 농번(籠樊)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십오유(二十五有)의 거리에 유전(流轉)하는 중생(衆生)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삼계(三界)를 벗어나는가 하면 불법수행(佛法修行)의 공력(功力)에 의(依)하여 무명(無名)의 어둠이 개어 법성진여(法性眞如)의 깨달음을 열어야 하느니라. 그러면 불법(佛法)은 무엇을 수행(修行)해서 생사(生死)를 출리(出離)할 것인가 하면 오직 일승묘법(一乘妙法)이어야 하느니라.
여인성불초(女人成佛抄) 가마쿠라에서 44세에 술작예부터 존귀한 사람은 남쪽을 향한다는 풍습에 따라 본존님을 남향으로 안치하는 것이 좋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현대는 집의 구조나 방 배치 문제도 고려해야 하므로 가장 경배(敬拜)하기에 알맞은 곳을 선택하여 안치하면 됩니다.
원칙으로 불단은 남향(본존을 바라보는 우리가 북향으로 앉는 형태)으로 설치합니다. 그러나, 일반 가정의 경우, 주택이나 집합주택 등의 차이가 있어, 그러한 방의 구조를 생각하면, 반드시 방향을 신경쓸 필요는 없습니다.
침착하게 본존님을 모실 수 있는 장소에 설치하도록 합시다.오직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단설무상도(但說無上道)라 믿는 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개회(開會)의 법문(法門)이라 하느니라, 그 까닭은 석가불(釋迦佛)·다보여래(多寶如來)·시방삼세(十方三世)의 제불(諸佛)을 증인(證人)으로 받들어 모셨느니라, 명심하여 그와 같이 심득(心得)하시어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사문자(四文字)를 시시(時時)로 음미하실지어다·양약(良藥)에 독(毒)을 섞는 일이 있을손가·조수(潮水) 속에서 하천(河川)의 물을 뽑아내는 일이 있을손가, 달은 밤에 뜨고·해는 낮에 뜨는 이 사실(事實)을 언쟁(言諍)할손가. 이로부터 후(後)에는 그와 같이 이해(理解)하시고 문답(問答)하시라.
시조깅고전답서(四條金吾殿答書)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불단은 청정한 장소를 택하고 본존님은 사람이 앉았을 때의 눈높이보다 약간 윗쪽으로 안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련정종의 불단이나 불구에는 학환(鶴丸)의 문장(紋章)을 쓰고 있는데 꼭 문장 유무에 구애 될 필요는 없습니다.
불단 문은 보통 열어둡니다만 실내 청소를 할 때나 취침할 때 또는 외출할 때는 닫습니다.
불단 위는 액자 등으로 장식하거나 물건을 얹어서는 안됩니다. 불단과 그 주변은 늘 청정하게 하도록 유의합시다.아함경(阿含經)·방등경(方等經)·반야경(般若經) 등(等)은 오천(五千)·칠천여권(七千餘卷)이니라. 이들의 경(經)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다만 법화경(法華經)의 일자(一字)·일구(一句)만 읽으면, 그러한 경(經)들을 일자(一字)도 빠뜨리지 않고 읽은 것이 되나이다. 비유하자면, 월지(月氏) 일본(日本)이라고 함은 이자(二字)·이자(二字)에 오천축(五天竺)·십육(十六)의 대국(大國)·오백(五百)의 중국(中國)·십천(十千)의 소국(小國)·무량(無量)의 속산국(粟散國)·오척(五尺)의 사람을 비추고, 일장(一丈)·이장(二丈)·십장(十丈)·백장(百丈)의 대산(大山)까지도 비추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이 경문(經文)을 읽어 보면, 이 경(經)을 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 글월이로다. 구계(九界)·육도(六道)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각각(各各) 마음이 다르니라. 비유하자면 이인(二人)·삼인(三人)·내지(乃至) 백천인(百千人)이 있다 해도, 일척(一尺)의 얼굴 모습이 참으로 닮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마음이 닮지 않기 때문에, 얼굴도 닮지 않느니라. 하물며 이인(二人)·십인(十人)·육도(六道)·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의 마음이 얼마나 다르겠소. 그러므로 꽃을 사랑하고·달을 사랑하고·신 것을 좋아하고·쓴 것을 좋아하며·작은 것을 사랑하고·큰 것을 사랑하고 각색(各色)이로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좋아하고 각양(各樣)이로다. 이와 같이 각양각색(各樣各色)이지만, 법화경(法華經)에 들어오면 오직 한 사람의 몸, 한 사람의 마음이니라. 비유하자면 중하(衆河)가 대해(大海)에 들어가면 동일함미(同一鹹味)로 되는 것과 같고, 중조(衆鳥)가 수미산(須彌山)에 다가가면 일색(一色)으로 되는 것과 같으니라. 제바(提婆)의 삼역(三逆)도 나후라(羅睺羅)의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도 다같이 부처로 되었고, 묘장엄왕(妙莊嚴王)의 사견(邪見)도, 사리불(舍利弗)의 정견(正見)도 다같이 수기(授記)를 받았느니라. 이는 즉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이기 때문이니라. 사십여년(四十餘年) 이내(以內)의 아미타경(阿彌陀經) 등(等)에는 사리불(舍利弗)이 칠일간(七日間)에 백만번(百萬番) 대선근(大善根)을 설(說)했으나,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고 퇴박 당하였기에 칠일간(七日間) 물을 끓여서 대해(大海)에 던져 넣은 것과 같으니라. 위제희(韋提希)가 관경(觀經)을 읽고 무생인(無生忍)을 득(得)하였으나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이라고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법화경(法華經)을 믿지 않으면 도리어 본래(本來)의 여인(女人)으로 되돌아 가느니라. 대선(大善)도 필요(必要)하지 않다. 법화경(法華經)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所用)이 없다. 대악(大惡)도 한탄(恨歎)하지 말지어다. 일승(一乘)을 수행(修行)하면 제바(提婆)의 뒤도 이으리라. 이것들은 모두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의 경문(經文)이 허망(虛妄)하지 않기 때문이로다.
센니치니답서(千日尼答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318 ~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