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연(?__?)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회보, 호는 야당이다. 어릴 적부터 출중하여 뒤에 장인이 된 당시 병마절도사 남이흥의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에 해미에 살 때였다. 동네 앞에 큰 나무가 있고 나무 아래 제단이 있었는데 항상 그 제단 위에 올라앉아 마치 대장처럼 아이들을 지휘하곤 하였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대자의 명을 어겼다고 군령을 집행한다며 그 아이를 낫으로 혼내 주려는 것을 본 아버지가 깜짝 놀라 그 낫을 빼앗았다. 유혁연은 독서도 좋아하여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제갈량의 출사표와 "악무목전"(송의 충신인 악비의 전기)을 읽을 때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 또한 남달라 큰 베개를 만들어 함께 사용하였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유효걸이 안주에서 전사하자 형제가 함께 출전하여 싸웠으며, 남한산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집에 돌아와 집 뒤에 있는 배나무를 안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니 마을 사람들이 그 배나무를 '유혁연 나무'라고 불렀다. 이듬해 세자가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가자 유혁연은 모화관(조선조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운 집)에 들어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남겼는데, 사람들은 이 시를 읊조리며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서쪽 강에 내리는 부슬비는 군신간의 눈물이요 대궐 위에 모여 있는 구름은 부자간의 정일세
인조 22년(1644)에 무과에 급제, 덕산 현감을 거쳐 선천부사로 나갔다. 이 때 유혁연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나운 북풍이 눈을 몰고 새벽에 닥치니 살을 저미는 추위가 앓아 누운 이불 밑으로 스며드네 아침에 기를 쓰고 일어나 활을 잡고 앉았으니 적병을 모조리 잡는 사냥 오직 그 마음뿐이라네
삼도수군통제사, 훈련대장 등의 요직을 지냈으나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대거 축출될 때 영해로 유배되고, 이어서 대정으로 옮겨 위리 안치되었다가 곧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