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78/180328] 어느 문상과 ‘어머니의 추억’
27일 밤 10시 30분,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 전 직장 선배의 모친상 문상을 갔다(당초 탤런트이자 가수인 김성환님과 만나 같이 가려했는데, 새벽에 지방에 가야 한다하여 부득이 늦은 밤에 혼자 간 것이다). 부조금이나 조화도 받지 않았다. 그저 영정에 두 번 절한 후 상주들과 목례를 하고 악수를 하며 몇 마디 건넨 후 곧바로 식장을 나섰다. 방명록 관계자가 책 한 권을 건넨다. <어머니의 추억>. 책 표지에 흰 수건을 둘러쓰고 박꽃처럼 웃는 분이 오늘의 망자(亡子), 선배의 모친이시다. 옛날분답지 않게 성함도 예쁘시다. 진소임(陳小姙). 누린 해 92세(1926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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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 셔틀버스 안에서 ‘책을 펴내며’를 후다닥 읽었다. ‘이런 사모곡(思母曲)도 있구나’ 집에 한시바삐 돌아가 독파하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인도에는 “신(神)과 어머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는 말로 시작된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삼척동자라도 알리라. 어머니의 위대함을 칭찬한 말 중에 최고일 듯하다. 2006년 모친의 팔순 잔치때 4남 3녀는 어머니와의 추억에 대해 글을 쓰자고, 책으로 만들어 다음해 어버이날에 드리자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곱 남매는 인도 격언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는 각자가 기억하고 추론하는 어머니의 삶과 ‘생각’을, 하나하나 짤막짤막한 ‘소품’으로 털어놓은 것이다. 이것이 진정 수필(隨筆)일진저. 미문(美文)이 따로 없다. 진솔(眞率)하기에 가슴이 먹먹했고, 가식(假飾)이 없기에 아름다운 글투성이였다.
큰딸 5편, 큰아들 17편, 둘째딸 7편, 둘째아들 10편, 셋째아들 5편, 막내딸 23편, 막내아들 6편 등 모두 73편. 편편이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되어 나를 몇 번이고 울먹이게 했다. 큰딸 49년생, 막내아들 69년생. 50∼70년대 초반, 당시 농촌은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일곱 총생을 낳아 기르고 가르치느라 선배의 부모님은 허리가 몇 번이고 휘었으리라. 나(1957년생)도 마침 농사꾼 자식으로 시골 출신이자 7남매(4남 3녀)인지라, 시쳇말로 ‘안봐도 비디오’가 아닌가. 변변한 땅뙈기가 얼마나 있었을까? 어머니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뒤안에 열무와 배추 등 채소를 길러 ‘다라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새벽 3시이면 여지없이 5km나 떨어진 법성장까지 걸어가 팔았다던가. 먹고 사는 길이, 줄줄이 자식들 학비를 마련할 길이 오직 그것뿐이었으므로. 아버지는 좋은 정치를 꿈꾸는, 약간은 한량이셨던 모양이다. 당연히 가장(家長)의 몫을 어머니들이 떠맡지 않던가. 그런가하면 가실(가을)농사가 끝나면 6∼7km 떨어진 영광 백수해변까지 가서 밑반찬거리로 게를 잡으셨다던가. 오죽하면 큰아들이 “어머니는 이 넓은 영광 법성포를 다 헤집으며 나를 키웠다”고 회상했을까.
이 어머니, 고생고생 자식 키워 훌륭하신 게 아니다.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를 깨우치고, 일본어도 몇 개 아셔서 휼륭한 게 아니다. 당신은 못배웠지만 큰아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에 보내셔서 훌륭한 게 아니다. 도무지 범인(凡人)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무한인내(無限忍耐)를 하면서도, 속으로 속으로 다지고 다진 생활철학(生活哲學), 즉 당신의 소신(所信)을 한두 마디 짧은 우리말로 정확히 표현하여 ‘배운 자식들’의 기세(氣勢)를 대번에 누르고, 어떻게 살아야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삶의 교훈(敎訓)을 톡톡히 주시기 때문에 훌륭하고 또 거룩하기 한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의 어머니들은 현명하실까? 그런 슬기와 지혜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천부적(天賦的)인 것인가? 나는 늘 그것이 궁금하다.
생일상 차렸다고 물리면서 권총을 사주신 백범 선생의 어머니, 자식 수의를 직접 짓고 절대 항소하면 내 아들이 아니라던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자칫 파락호가 될뻔한 아들의 방황을 단호한 말 한마디로 정리한 김창숙 선생의 어머니……. 여기 비록 키 작은 촌부(村婦)였을지언정, 일곱 자식에게 사랑의 무한추억(無限追憶)을 구십 평생 남기고 눈을 감으신 진소임 여사의 숱한 가족일화(家族逸話)들을 보라. 그분의 삶이 어찌 헛되다 하고, 어찌 감동에 젖지 않을 수 있으랴. 오죽했으면 셋째딸은 “우리 형제들에게 어머니는 감성(感性)의 원천(源泉)이자 이성(理性)의 지주(支柱)이셨다”고 고백했을까?
어지간하면 형제들의 갈등도 있었으련만, 73편의 글에는 조금도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뜨끈뜨끈한 형제간의 우애(友愛)만 보일 뿐. 꾸밈이 없는 글이어야 감동(感動)을 주는 법. 아버지의 ‘시앗 얻음’까지 털어놓았으면 말 다하지 않았을까? 장남이어서 많이 배우고, 형과 오빠 때문에 배우지 못한 형제도 있게 마련일 터이나 그런 갈등이 눈곱만큼 없다. 오로지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 거울처럼 환히 보인다. 각자 배우지 못한 한(恨)은 성인(成人)이 되어 대학원을 나오는 등 모두 풀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읽기에 너무 흐뭇해 좋았다.
큰 아드님은 전 직장에서 거의 15년 동안 겪어본 만큼 알만큼은 안다 할 수 있다. 일단 성품이 한결같이 강직(剛直)했다. 일은 확실히 했고, 당신이 확실하게 하는 만큼 후배들의 잘못에는 지적질도 심했다. 호오(好惡)가 분명했다고 할까. 아, 뚜렷이 기억나는 장면 한두 개 있다. 어느 여름날 신문사 편집국 부장회의(당시 국제부장이었던 듯) 때, 하얀 모시적삼을 입고 나타났다. 분위기상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역시 이부장답네” 무척 신선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시절, 대변인을 하면서 이슈마다 내놓는 촌평이 말 그대로 촌철살인(寸鐵殺人), 상대당의 기세를 눌렀다. 늘 답답하게 꼬이는 정치판, 한 마디 말로 스트레스가 풀릴 정도였으니, 대단한 ‘재능(才能)’이 아닐 수 없었다. 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할까. 그것은 그분만이 가진 심오한 내공(內功), 그 심오한 내공은 오늘의 주인공인 그 어머님의 유전기질(遺傳氣質)이었음을, <어머니의 추억>을 완독하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식이라면 누군들 자신의 어머니께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마는, 일곱 남매의 어머니에 대한 한결같은 존경은 그분의 슬기로운 언행(言行)과 몸가짐 때문일 듯. 큰 아드님은 “어머니는 정치인생의 길잡이였다”며 영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을 계속 끔뻑거릴 뿐. 전남도지사가 되었을 때 참모진에게 자주 “도지사 당선보다 더 기쁜 것은 50년만에 관사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한다. 조선시대 ‘영의정(領議政)’격인 국무총리(國務總理) 아들에게 “길게 봐라”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등 지극히 교훈적인 ‘짧은 말’ 한 마디 하고 전화비 아깝다며 끊어버리는 그 어머니의 명복(冥福)을 삼가 기원합니다.
첫댓글 글 잘 읽었네.이 총리의 내력이 정말 범상치 않네.
그 어머니가 훈륭한 인재를 성장 시켰네
따스한 봄날 장수 하시고 호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