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태평양 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던 때.
일본 해군은 자살 특공대를 조직하게 된다.
바로 가마가제 특공대이다.
특공기에는 적함에 격돌하는 순간 폭발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250킬로짜리 폭탄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공중전 기량이 우수한 베테랑 파일러트들의
특공대 지원은 일체 불허 되었고,
그 대신 전우들을 죽음의 현장까지 안내하는 엄호대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당시 일본 해군의 주력 구리다 함대를 격파하고
레이테만에서 휴식을 취하느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 때 한대의 미츠비시에서 양산해 낸 제로전투기가
미 항모 '세인트 로오' 를 향해 급강하 자세를 취하더니
갑판 한복판을 향해 격돌하였다.
1~2분 뒤 연료탱크에 불이 붙고,
곧이어 대폭발이 천지를 뒤흔들자 강철로 만든 비행갑판이
통째로 벗겨져 공중으로 300 미터나 튀어올랐고,
'세인트 로오' 는 바다위에 떠있는 불덩어리로 변했으며
불과 30분만에 바다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세인트 로오' 가 불타고 있는 그 순간,
다른 4대의 특공기들도 차례차례 정확히 목표를 항해 격돌하여
항모 '키컨 베이' ,'캘러닌 베이' ,'화이트 프렌즈' 가
차례차례 가미가제 특공기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
5 대의 특공기 전부가 4 대의 함선에 명중하여
항모 1척 격침,1척 대파, 중순양함 1척 격침 이라는
혁혁한 전과를 세웠으니 당시 일본 전투기 수백대로도
얻어내기 힘든 대 전과인 셈이었던 것이다.
출격직전 마지막잔으로 결의를 불태우는 특공대원들
가미가제 대원은 훗날 강제차출로 변질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종전 막바지의 이른바 '본토결전'의 순간까지도
가미가제 지원자는 모자라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상관들은 조금이라도 전투경험이 있는 조종사들과
이, 착륙조차 서툰 신참 조종사들이 가미가제에 지원하는 것을
만류하느라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는 얘기이다.
18세 부터 24세 까지의 특공대원들
나중에는 육군도 고물 기체들을 사용하여 자살작전에 나섰다.
그런데 가미가제 특공작전은 투입된 기체의 100%손실을 전제되었지만
공급되어 오는 신조기의 숫자는 그 손실률에 크게 못미쳤으니
가미가제가 확산되어 가는 것은 바로 일본군 비행기가
점차 바닥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공대의 질도 점차 떨어져,
기초 비행훈련을 겨우 마친 나이어린 신병 조종사들에게
겨우 일주일간의 특공 훈련 기간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이 특공훈련 기간에는 적 항모에 자살을 위한 기본적인 동작,
즉,적의 레이다를 피하기 위한 초저공의 수면비행,
그리고 목표를 발견하는 순간 고도를 3000m 까지
급히 상승시킨 다음에 목표를 향해 45도 각도로 내려 꽂는
동작을 훈련 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숙한 가미가제 조종사들은 조금만 기상이 나쁘거나
미군기가 나타나기만해도 곧 방향을 잃고 방황하다가
연료가 떨어져 바다속으로 추락하는 일이 점차 비일비재했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마지막 촬영
1945년 1월 5일을 끝으로 필리핀에서의 일본군의
가미가제 작전은 종말을 고했다.
미군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지만 필리핀에 배치되어 있던
최후의 전투기 한 대까지 이 '특공' 에 밀어 넣어버린
일본의 희생이 더 컸다는 것이 후일 학자들의 지적이다.
이 글을 쓰기위해 여러 자료를 찾으면서
내가 줄곧 가졌던 궁금중은,
과연 특공대 비행기가 몇대나 되었었나 하는 점이다.
'미쓰비시' 가 제작한 제로기가 주축을 이루고,
나중에는 육군기까지 투입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360 대, 400 대, 등이 언뜻 보이긴 하나 확실성에는
상당한 의문이 있는게 사실인듯 하다.
반면에 가미가제 특공대 편성 5~6 년 후인 6.25 때,
우리 공군은 연습기 몇대가 고작이었다니- [에밀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