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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숨을 끊지 마라.
함석헌
씨알 여러분 살았습니까? 씨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죽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죽지 않는다 믿는 것이 곧 죽음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죽을 수 없다, 내 가슴에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지금은 복드리요 장마철입니다. 볕이 나면 타서 죽을 것 같고 비가 내리면 썩어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만입니까? 여러 가지 더럼(汚染)까지 있습니다. 공장과 자동차에서 뿜어대는 가지가지 가스가 시시각각으로 우리 심장, 폐장, 뼈속, 골속을 먹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습니다. 죽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죽으려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살려고, 고통 속에서도 죽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나왔습니다. 내 뜻 내 지식 내 욕심으로 나온 것 아니라 내보내는 절대의 명령이 있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을 수 없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데, 죽어서는 아니되는 데, 죽음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의 어려움은 삶의 어려움입니다. 삶의 어려움이 삶의 보람입니다. 보람을 느끼면서 땀을 씻고 깊은 숨을 들이마십시오.
여름만 오면 더워 죽겠다, 지루해 못살겠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실없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더위를 겪어보고 장마를 치르고 난 것이 몇 번입니까? 천지개벽 이래 몇 억억 만만 번인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번입니다. 그것을 다 통과하고 그 속에서 닦이어 나온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는 그것을 이기고 남을 만한 힘과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 목숨이란 바로 그 물 불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만두고 동물, 식물, 미생물까지도 자연의 변동에 대해 어떻게 견디며 그것을 변화시켜 어떻게 제 생명으로 만들지를 알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봄이 되면 산과 들에 꽃이 만발합니다. 종자를 위해서라면 몇 송이만 피웠으면 그만인데, 뭐 하자고 그 낭비 같은 일을 합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오는 폭풍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름이 오면 잎이 우거지지요. 무엇 위해서입니까? 지나치게 많은 수분을 빨아올려 헤쳐서 뿌리의 썩음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서 물과 온도가 다 적어지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고 뿌리와 움 속에 다음 해의 자람을 준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능에는 근심 걱정도 비관 원망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해 선이 된다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당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사람 만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한다는 이 한 일 때문에 에덴동산을 쫓겨났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연의 큰 조화(調和)를 깨쳤단 말입니다. 깨쳤으면 어떻게 합니까? 불행은 불행이요 고통인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자연보다는 한층 더 높은 정신적 생명에 올라간다는데 그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이리해서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많아졌습니다.
더러움 곧 공해 문제만은 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럼이 무엇 입니까! 세력 있고 잘사는 사람들이 남 생각은 아니하고 저만 잘 살겠다고 욕심대로 한 결과로 나온 찌꺼기입니다. 찌꺼기는 자연 속에 있어서는 저절로 분해되어 다음 차례의 생명의 자료가 될 수 있도록 돌아가는 법칙이 있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종은 식물의 거름이 되고 동물이 뱉은 탄산가스는 식물의 동화작용에 섭취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인간이 그 생각하는 힘을 잘못 써서 자기의 쾌락만을 구하게 되면 그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고 생명에 해가되는 너무 많은 찌꺼기를 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는 전체 생명 자체가 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더럼을 공해라고 합니다. 공해는 그와 같이 인간의 생각으로 자연의 조화를 깨치는 데서 온 것이기 때문에 높은 정신의 힘과 슬기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해문제가 나오기 전은 삶의 모든 문제는 자연이 우리에게 준대로 개체적인 활동만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해의 위협 속에 빠진 이 인류는 개체적인 힘만으로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체적인 생명으로 살아서만 보다 높은 지경으로 살아 올라갈 것입니다.
나는 6·25 전쟁 중 가는 곳마다 똥이 길 위에 흘러넘치는 것을 보다가「전쟁과 똥」이란 글을 썼던 일이 있습니다. 전쟁은, 살기 위해 먹는 인간이 똥을 누어야 하듯이, 역사 생활을 하노라면 피할 수 없이 나오는 더러운 배설물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자랑 칭찬할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알고 빨리 깨끗이 치워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습니다. 슬프게도 그 말은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마는 나는 옥을 옥이라 주장하다가 얕게 보는 눈에 미움을 사서 다리를 짤리고 피눈물을 쏟던 화씨(和氏) 모양으로 주장을 하다가 어떤 운명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은 종이다”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전쟁만입니까? 이 소위 공업 문명 기술문명이란 것이 왼통 똥입니다. 그것은 이 개개의 몸을 초월한 한 생명의 자리에 올라서만 그 더럼을 면할 수 있습니다.
씨알 여러분, 여름만이 여름이요, 장마만이 장마입니까? 그보다 더 혹독한 더위와 썩어지는 장마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이 정신적 숨막힘과 썩어듦을 이기고 나야 하고 그것을 우리의 보다 높은 생명의 영양으로 변화시켜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씨알은 죽지 않는다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씨알은 죽을 수 없다 스스로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씨알은 역사의 씨알이요 우주진화의 씨알입니다. 우리에게서 새 민족이 아니라 새 인류가 나와야 합니다. 희망이 너를 건지리라! 우주 의미적인 희망을 가짐 없이 이 목 조르고 정신 썩히는 공해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씨알 여러분 나는 요새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슬픕니다. 때로는 거의 나를 잃어버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나를 잃어서는 아니되지요. 나는 나의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여러분의 나요, 민족의 나요, 인류의 나요, 하나님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육중한 기계가 악마 같은 입을 벌리고 그 아래 들어오는 쇳덩이 나무통을 덜커덕 덜커덕 짤르듯이 사형! 사형! 사형!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미칠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살았더냐?
이 꼴을 왜 보아야 하느냐?
인생의 말로가 어쩌면 이렇게도 참혹하냐?
아, 하나님 맙시사!
그럴 때 내 헐떡이는 내 혼의 타마른 입술 위에 어디선지 모르게 ‘밤 숨’ 하는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려왔습니다. 나는 캄캄한 어둠의 입 속에서 꺼지려는 촛불을 가만히 꺼냈습니다. 그 희미한 빛에 비치어 저 안개 속을 내다봅니다.
그것은 맹자의 입을 통해 내리신 말씀이었습니다.(告子上)
우산(牛山)의 숲이 일찍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것이 큰도시의 들박이었던 탓으로 해서 도끼 가뀌로 찍어내니 어찌 아름다운 대로 있을 수 있겠느냐? 낮과 밤으로 쉬는 숨, 비와 이슬이 젖어줌으로 돋아나는 싹이 없는 것 아니지만, 또 소와 양을 거기 놔 먹이니 저렇듯이 뺀숭뺀숭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 뺀승뺀승한 것을 보고 사람들은 거기 일찍이 나무가 서지 않았던 줄 알지만 그게 어찌 산 본래의 바탈이 그렇겠느냐?
사람의 속에 있는 것도 어찌 인(仁), 의(義)의 마음이 없었을까마는 그 양심을 놔버리는 것이 마치 나무에다 도끼 가뀌 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날마다 날마다 찍어내면 어떻게 아름다울수 있겠느냐? 낮과 밤으로 쉬는 숨, 이른 아침의 정신, 누구나 다 같이 가지는 좋고 나쁜 것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이 그만 거의 다 없어져버리고 만다. 그것은 낮에 하는 일이 그것을 찍대겨 없애기 때문이다. 찍대기기를 거듭하면 그 밤숨(夜氣)이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다. 밤숨이 남아 있지 않으면 짐승에서 멀것이 없다. 그 짐승 같은 것을 보고 그에게는 일찍이 어진 것이 없었던 줄 알지만 그것이 어찌 사람의 근본 바탈이겠느냐?
일본 시대만 해도 우리 마음 속에 우산이 있었습니다. 정치주권을 잃었지만 그래도 도리는 살아 있고 인정도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슬픔 속에 있어서도 인생을 살 수 있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 있고,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 한 믿음이 우리게 서로 위로를 주고받게 하고 서로 정신을 가다듬음으로 슬프고 고된 역사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어 그 산의 아직 남았던 아름다움을 보고 새 역사의 궁궐을 꿈꿨던 것도 잠깐, 나라를 세운답시고 그 굵직굵직한 것을 찍어 버렸고, 6·25로 그 자라나는 것을 깎아버렸고, 이제 온즉 마 소를 놔서 되는 대로 짓밟고 뜯어먹게 한 형편입니다.
내가 운 것은 우리 가슴속에서 사라져 가려는 한 가락 남은 밤숨의 한 쌕쌕거림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아주 끊어져 버리면 남는 것은 짐승뿐 입니다. 3천만이라 해도 5천만이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짐승으로는 나라는 못합니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새끼를 낳고, 그래요, 노래를 하고 춤을 잘 출줄 알고, 재주 있게 핵무기를 써서 전쟁까지를 할 줄 안다 해도 그것은 짐승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왜요? 사람은 힘으로 살고 맛에 사는 것 아니라 뜻으로 살고 보람에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심을 가지고만 할 수 있는데 이 양심을 살리는 것이 곧 밤숨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천지 배판 이래 자연과 인위의 갖은 고난을 겪으며 자라고 닦이어 오늘까지 계속되어온 이 생명이, 너와 나의 가슴속에 뛰놀고 있는 이 거룩한 생명이 오늘에 와서 너와 나의 사람답게 하지 못함으로 인해 이 순간에 아주 끊어져 허망에 떨어져 버린다는 데 어떻게 한 줄 눈물과 한 번 내쉬는 한숨이 없겠습니까?
젊은 목숨이 아까워서만 하는 말 아닙니다. 물론 목숨도 귀하지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목숨입니다. 그러나 그 목숨만이라면 아깝기는 해도 죽으면 다시 낳을 수 있습니다. 목숨보다 더 큰 것이 있어서 하는 호소입니다. 민족 전체, 인류 전체를 사람이 되게 하느냐 짐승이 되게 하느냐 하는 그 한 가락 밤숨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귀한 줄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어떤 목적을 위해 방편으로, 사람의 목숨을 쉽게 쉽게 졸라버릴 때 죽는 것은 그 몇 개인만이 아니라, 그를 죽이는 너와 그것을 보고 서 있는 우리 전체입니다. 죽는 그들은 그 몸이 죽겠지만 그들을 죽이고 남는 너와 나는 정신이 죽어버립 니다. 몸이 죽는 사람은 죽으면서도 정신을 차리면 새 몸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죽어버리면 영원히 전체가 망해버립니다. 예수는 죽었지만 부활했습니다. 베드로로, 요한으로, 바울로, 억만 신자로 부활했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은 그 몸을 부활하려는 생명에 몸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자유와 정의를 위해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부활하려 날아나오는 영을 내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도 살고, 나도 살고 전체가 삽니다. 그러나 보고 있는 우리의 정신이 죽어 그 영을 받아들일 줄 모르면 이 나라는 살 길이 없습니다.
우리 김박사는 잊을 수 없는 4월 20일 밤 우리게 잊지 못할 좋은 말 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것은 영국 토머스 모어의 이야기입니다. 임금 헨리 8세와 틀려서 단두대에서 목을 잘리우는 그가 장차 제 목을 내리치려는 도끼가 와 닿으려 할 때 아끼던 그 긴 수염이 거기 걸려들었습니다. 그러자 모어는 손을 쓱 들어 그 수염을 빼놓으면 “수염이야 무슨 죄가 없지 않아?”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다가 목구멍으로 짠물을 삼키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이 어찌 죽는 사람의 말입니까? 살았습니다. 그 생명은 칼로는 만 번을 내리쳐도 못 끊습니다. 죽은 것은 모어가 아니라 헨리 8세였습니다. 모어를 죽인 헨리 오늘 어디 있습니 까? 모어는 분명 살았습니다. 한국의 한 선비로 하여금 그 최후와 장엄한 시를 말해 수백 명 청중의 가슴에 숨구멍이 환히 뚫리게 한 것은 모어였습니다. 대영제국이 무슨 죄악을 다 지었다 해도 그렇게 여유 늠름한 하나의 영혼을 가졌으면 능히 속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숨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숨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찍고 뜯어먹어도 또 돋아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야말로 밖에서 오는 물건의 시달림 짓밟힘을 받아 거의 길바닥처럼 그 감수성을 잃어서 그렇지, 그렇지 않고, 맹자가 말하는 평단지기(平且之氣) 곧 이른 아침의 맑은 생각으로 본다면 찍힌 데서 다시 돋아나는 새싹의 모습이야말로 참 시요, 찬송이요, 기도입니다. 만물은 다 그 속에 그런 생명의 숨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근본이요, 인생 역사의 근본입니다. 우리 속에는 다 그 생명의 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방해하지 말고 기르란 말입니다. 도끼로 나무통을 찍어넘긴 것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무꾼이 낫으로 벤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말과 소가 한두 번 뜯어먹었다 해도 희망 있습니다. 그러나 한 두 번도 아니고 계속 뜯고 뜯으면 아무리 하늘이 준 자연의 힘이기로서 어찌 견디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한없이 약한 듯 하면서도 한없이 강하고 질긴 생명의 소생하는 작용은 언제 되느냐 하면 밤 동안에 됩니다. 낮은 일이 주장 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소모되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낮이 좋은 줄만 알고 밤이 어떻게 필요한 것은 모르는 일이 많지만 사실 이 천지에 낮만 있고 밤이 없었다면 생명은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씨이 아구를 트는 것은 밤입니다. 상처가 아무는 것도 밤입니다. 밤은 쉬는 때입니다. 쉬는 때가 사는 때입니다. 숨을 쉰다 숨 태운다는 말이 이것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아마, 안식(安息)사상의 근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겠느냐 죽이겠느냐 하고 반문을 하셨습니다.
생물적 생명에서도 그렇지만 도덕적, 정신적 생명에서는 더합니다. 밤은 고요하고 쉬는 시간입니다. 이 고요하고 쉬는 동안에 상했던 생명력이 도로 살아납니다. 그래서 맹자는 이 밤숨마저 끊어지면 짐승이 되어버린다 한 것입니다.
6·25 이후 오늘까지 우리 사회의 나쁜 것은 쉼이 없는 것입니다. 종용함이 점점 더 없어져가는 것입니다. 양심은 고요하고 안정하는 데서만 살아납니다. 민중은 건드리지를 말아야 마음이 착해지고 솔직하고 감수성이 있고 창조력이 왕성하게 발동하는 법입니다. 십자로 위에서 하는 기도는 억지의 거짓 기도입니다. 선전구호로 국민의 양심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속담에 장작불과 의붓자식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의붓자식만이리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의붓자식이 무엇입니까? 인간성의 짓밟힘을 입은 마음, 상처난 혼입니다. 권력에 시달리면 모든 민중은 의붓자식이 돼버립니다. 이것이 정치와 교육과 종교를 지도해가는 모든 지도자의 마음에 깊이 새길 점입니다.
씨알 여러분! 이러다가는 우리 가슴에서 밤숨이 사라져버립니다. 큰일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데 없습니다. 원망해서는 아니됩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바로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공산국가 팟쇼국가를 보면 압니다. 악한 지배자의 죄까지 내 등에 지는 것이 씨입니다. 우리의 가슴은 밤숨만 쉬면, 어떤 포악 무도한 세상 속에서도 고요하게 생각하고 기다리는 정신의 여유만 가지면, 폭풍이 지나간 후 거칠었던 들을 푸름으로 꾸미는 풀씨같이 상처나고 비뚤어지고 중독된 역사를 다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져서 구차하게 살고 싶어서 스스로 속이는 말을 한다 하시지야 않겠지요. 내가 이제 무엇을 아끼고 겁을 낼 것이 있습니까? 잃을 것은 벌써 다 잃었고 뺏길 것은 벌써 다 빼앗겼습니다. 마음의 친구를 잃은 다음에는 천지가 다 골고다입니다.
그런 것 아니라 내리시는 명령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성공 실패가 뵈는 눈, 네편 내편이 갈라져 생각되는 마음을 가지고는 역사를 건질 수는 없다고 고요하게 엄하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하의 씨알들, 밤숨을 끊어서는 아니됩니다!
교수대에 올라가는 씨알들, 죄 없는 네 수염을 올가미에서 뽑아내줄 정신의 여유를 가져라!
그럼 내 가슴이 너를 사흘 밤 안아주는 돌무덤이 되마! 오, 하나님!
씨알의 소리 1974. 7월 34호
전작집; 8- 185
전집; 8-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