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너는 겨레를 위해 감옥에 들어갈 몸이다”“고난을 정면으로 뚫고 보니 그것이 행복이었다”
‘민족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통일의 어머니’이신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늦봄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그리고 삼엄한 독재 치하를 거치는 민족적 수난 속에서 오직 기독교 정신과 나라 사랑 정신으로 약한 자, 억눌린 자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적으로 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국의 통일을 소원하며 아름답게 생을 마감했다. 기억력이 비상하여 간도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간도 시절 경험을 들려주며 북간도 이민사 역사 이해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한 가족의 평안을 넘어 고난받는 이들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하늘나라의 행복과 기쁨이 민중의 아픔과 서러움 속에 있음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고난을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고 뚫고 90여 성상 살고 보니 그것이 더없는 행복이었다”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늦봄은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중심에서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밝은 새날을 위해 온몸으로 밀어 붙이며 전진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한다.
내 자식, 내 가정만을 위해 무도한 일들을 스스럼없이 행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많은 요즈음을 돌이켜보면 큰 울림을 주는 삶에 절로 숙연해진다. 아울러 진정한 기독교 정신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32살 젊은 시절 김신묵 권사. 배신여자성경학원 졸업사진
딸 그만 낳으라고 붙인 이름이 고만녜▲고만녜에서 김신묵으로, 이름을 가지다
1895년 4월 5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실학자 김하규와 김윤하 부부의 3남 6녀 가운데 넷째 딸로 태어난 김신묵 권사는 ‘고만녜’라는 아명으로 불렸다. 딸을 고만 낳으라는 뜻이었다. 그 시절 여자는 호적에 아무개의 몇째 딸 정도로만 올리고 정식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 결혼 후 학교를 가면서 이름이 필요하였다.
당시 북간도 명동촌에서는 기독교와 신문명과 신교육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족의 앞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시대정신의 발로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이에 따라 여성 생활에도 변화가 일었다.
이동휘 선생의 “새가 어떻게 날개를 하나만 가지고 날 수 있으며 수레바퀴가 하나로 굴러갈 수 있는가? 민족의 절반인 여성을 집안에 가둬 놓고 어떻게 일본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설교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명동여학교 정재면 선생은 여학생들에게 이름을 짓자고 제안한다.
주님 안에서 모두 한 가족, 한 자녀라는 의미에서 믿을 신(信)자를 넣어 같은 항렬을 사용하기로 했다. 믿을 신(信)자에 오빠 진묵의 이름에 있는 묵자를 붙여 ‘김신묵’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정신태(정재면 여동생), 주신덕, 김신정, 김신훈, 김신국, 김신우, 문신천 등 몇 주 만에 신자 돌림의 젊은 여성들이 50여 명이나 생겼으며, 나이 드신 분들도 신자 돌림은 아니더라도 각각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명동 마을에 뿌리 내린 기독교는 여성에게는 해방의 복음이었다.
교육과 새로운 이름으로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를 넘어서 독립된 한 인간으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창조적 삶의 토양이 되었다.
생후 9개월 문익환 업은 채 경찰 연행돼 ▲명동의 잔 다르크, 여성 지도자로
결혼 후 북간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명동여학교에 3학년으로 입학하여 1914년 1회로 졸업했다. 이후 3년간 배신여자성경학원을 다니면서 성경을 공부하였다. 유학 간 남편을 대신해 홀로되신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랜 세월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기회만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열심이었다. 배운 내용을 머릿속 지식으로만 두지 않고 몸소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 명동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앞장서서 도움을 주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섬김의 삶을 살았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하여 가르쳤으며, 기독교 복음 전도와 애국 운동을 하나의 독립운동 차원에서 이끌면서 각종 단체를 조직하고 주도하여 야학과 교회에서 여성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다.
YWCA 회장, 명동학교 여동창회 회장, 부인전도회 회장, 주일학교 선생, 명동 여자 기독청년회 회장 등을 맡아 기독교 전도와 민족교육 사업에 힘쓰는 한편 여자비밀결사대 대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의 만세운동으로 경찰에 연행될 당시에는 생후 9개월인 장남 익환을 등에 업은 채였다.
“그리하여 나는 주일학교 선생과 여전도회 회장 일을 하면서 겨울에는 야학 선생까지 한 셈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어서 일을 맡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내가 없으면 명동이 유지 안될 정도로 모든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학교 이사도 했다. 나중에 용정에 가서도 평생신도회 회장과 여전도회 회장을 해서 간도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 할 정도였다.” (문영금 문영미 2006, 453)
두 아들에게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애국정신을 넣어 주려고 태극기를 수놓아 베갯잇을 만들어 주었으며 말을 배우자마자 애국가부터 가르쳤다.
후일 아들들이 민주회복과 민족통일을 위해 수차례 투옥의 수난을 겪으면서도 뜻을 꺽지 않고 신념을 지키며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삶에서 신념을 실천으로 보여 주신 부모님의 모습 덕분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