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4일 / 신영미
수능일이다. 고등학교로 옮긴 후 벌써 세 번째 수능 감독이다. 작년과 같은 학교로 배정되었다. 이 학교에서 동료교사와 나란히 앉아 친분을 쌓았었다. 학교를 벗어난 공간에서의 만남은 왠지 특별하게 느껴진다.
전날에 이곳저곳 일 보러 다니느라 피곤해서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잠들어 버렸다. 감독관 유의사항을 읽어봤어야 하는데 망했다. 후다닥 챙겨서 샛길을 찾아 초스피드로 학교에 도착했다. 정문은 응원 부대로 꽉 차있을테니 옆 중학교 운동장에 차를 세우고 연결된 문을 통해 감독관 대기실에 도착했다. 전날 교장 선생님께 아침을 주는지 미리 확인해 놔서 집에서 바쁘게 챙겨먹지 않아도 되었다. 꼬마 김밥과 오뎅, 컵라면, 과일 등 푸짐하게 준비돼 있었다. 김밥과 오뎅을 우걱우걱 넘기고 자리에 앉아 시간대별로 유의사항을 탐독했다. 전 해에 1교시 제1감독관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걸린다 하더라도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교육청에서 준 번호가 명찰표에 있었는데 학교에서 다시 번호를 매겨서 명찰을 바꿔 끼웠다. 18번 땡땡 고등학교 신영미다.
1교시가 걸렸다. 줄을 좍좍 그어가며 감독관 할 일과 시간을 체크했다. 전날 추워서 겨울 체크무늬 긴 자켓을 입고왔는데 오히려 따뜻해서 외투를 벗고 난방을 끈 채로 감독했다. 학생들도 겨울 패딩을 입고 왔다가 앞에 놓아둔 가방 위에 부피가 큰 외투를 벗어놓아서 난잡한 교실을 정리하느라 옷을 개켜놓았다. 시간은 더디 흘렀으나 중요한 날이니만큼 반짝이는 아이들의 미래, 그 순간에 내가 있음에 뿌듯하다.
부부교사가 여기로 배정되어 나란히 앉아 부부애를 뽐냈다. 두 교사는 곤색 자켓과 블랙 이너웨어로 옷까지 커플이었다. 나는 전입온 지 얼마 안 되어 말도 잘 섞어보지 못한 동료교사 옆에 앉았다. 내가 한참 선배이므로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배 교사와 나는 모든 간식이 똑같이 분배되어 처음엔 후배의 선행인 줄 알고 대견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부부교사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핫식스 음료만 나에게 없어서 의아했는데 나눠주지 않고 본인의 것만 사와 혼자 마셨다. 다른 먹을 것이 많아 그다지 서운하지는 않았다.
점심은 황홀했다. 추어탕에 보쌈, 잡채, 야채전부터 식혜까지 열 가지가 넘는 것 같았다. 그 학교 교무부장 선생님은 당일 날이 전보다 조금 덜 나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1,2교시 연속 감독이어서 3교시는 쉬기 때문에 잔뜩 먹고 한숨 잤다. 음식의 맛이 그 학교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점심이 맛이 없고 볼품 없거나 간식이 부실하면 감독관들은 시험장 학교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번 시험장은 단연 최고였다. 간식도 쉬는 시간마다 새로운 것으로 채워주었는데 한 쟁반 과일이 가득했다.
5교시 제2외국어 영역이 걸리는 불운은 내게 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수능 감독을 하면 갑자기 들어온 돈이라 봉투채로 어머니께 드렸었다. 이번에는 맥주 두 캔과 컵라면을 사와 자축했다. 술이 달다. 하루 열두 번씩 선택의 기로에서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는 버릇이 생겼다. 스트레스가 오면 잠들어버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다.
그리고 오늘이 즐거워야한다. 무박 2일로 연수를 다녀왔다. 연수 후에는 게임을 하면서 어찌나 신나게 놀았는지 졸음도 달콤하다. 어떤 인연은 세 번을 놓친다. 알고도 놓친다. 내가 살고있는 세상에서 타협한다. 고통이 없다. 눈물도 없다. 들판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을 것이며 부드러운 바람이 볼을 간지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