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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_7_210p The widening horizon
In Marx's final synthesis history meant three things, which were inseparable one from another and formed a coherent and rational whole: the motion of events in accordance with objective, and primarily economic, laws; the corresponding development of thought through a dialectical process; and corresponding action in the form of the class struggle, which reconciles and unites the theory and practice of revolution. What Marx offers is a synthesis of objective laws and of conscious action to translate them into practice, of what are sometimes(though misleadingly) called determinism and voluntarism. 마르크스의 최종 종합에서 역사는 세 가지를 의미했다. 그들은 서로 서로 분리될 수 없고 하나의 일관된 합리적인 전체를 형성했다. 하나의 사건들의 운동이었다. 객관적인, 주로 경제적인 법칙들에 따라 전개되는 사건들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에 대응한 발달이었다. 변증법 과정을 통해서 생각들의 대응되는 발달이었다. 그리고 대응되는 행동이었다. 계급 투쟁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들은 조화시키고 통일시킨다. 혁명의 이론과 실천들을 조화시키고 통일시킨다. 마르크스가 제공하는 것은 통합이다. 객관적인 법칙들과 그들을 실행으로 옮기려는 의식적인 행동의 통합이다. 그리고 때때로(물론 잘못 해석되기도 하지만) 결정주의와 voluntarism라 부르는 것의 통합이다.
Marx constantly writes of laws to which men have hitherto been subject without being conscious of them: he more than once drew attention to what he called the 'false consciousness' of those enmeshed in a capitalist economy and capitalist society: 'the conceptions formed about the laws of production in the minds of the agents of production and circulation will differ widely from the real laws'. But one finds in Marx's writings striking examples of calls for conscious revolutionary action.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differently', ran the famous thesis on Feuerbach; 'but the point is to change it. ''The proletariat', declared the Communist Manifesto, 'will use its political dominance to strip the bourgeoisie step by step of all capital, and concentrate all means of production in the hands of the state.' 마르크스는 끊임없이 법칙들에 대해 쓴다. 이 법칙들에 인간들은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종속되어 왔다. 그는 한 번 더 주의를 환기했다. 소위 그가 부르는 거짓 의식에 대해서.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사회에 휘말려있는 허위의식에 대해 환기를 했다. 개념들 생산법칙들에 관해 형성된 개념들. 생산가 유통의 당사자들 사이의 생산에 관한 법칙들에 관한 개념들은 실제 법칙들과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의 눈에 뛸 만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의식적으로 혁명적인 행동을 부르는 눈에 띄는 예들을 본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포인트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라고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유명한 논문에서 말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기를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의 정치적 우위성을 사용할 것이다. 부르조아 계급들로부터 모든 자본을 단계적으로 빼앗기 위해. 그리고 집중시킬 것이다. 국가의 손에 모든 생산 수단들을 집중화 것이다’ 라고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바 있다.
Chapter 6_8_211p The widening horizon
And in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Marx spoke of 'intellectual self-consciousness dissolving by a century-old process all traditional ideas'. It was the proletariat which would dissolve the false consciousness of capitalist society, and introduce the true consciousness of the classless society. But the failure of the revolutions of 1848 was a serious and dramatic setback to developments which had seemed imminent when Marx began to work. The latter part of the nineteenth century passed in an atmosphere which was still predominantly one of prosperity and security. It was not till the turn of the century that we completed the transition to the contemporary period of history, in which the primary function of reason is no longer to understand objective laws governing the behaviour of man in society, but rather to reshape society, and the individuals who compose it, by conscious action. In Marx, 'class', though not precisely defined, remains on the whole an objective conception to be established by economic analysis. 그리고 ‘18세기의 루이 보나파르트’에서 마르크스는 ‘지적인 자아의식은 분해해 나간다. 1세기 걸친 오래된 모든 전통적인 관념들을 타파해 나간다’ 라고 말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가 거짓 의식을 분해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짓의식을 분해할 것이다. 그리고 계급없는 사회의 진정한 의식을 도입할 것이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의 실패는 심각하고 극적인 후퇴가 되었다. 마르크스(1818~1883)가 시작한 일이 임박하는 듯했더니 발달단계에서 심각한 후퇴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는 분위기로 지나갔다. 아직 번영과 안정의 분위기가 지배적인 상태로. 20세기가 지나갈 무렵 우리는 이행을 완성한다. 현대사회로의. 여기서는 이성의 기능은 더 이상 객관적인 법칙을 이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 객관적 법칙들은 사회속의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들이다. 사회를 재개조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을 바꾸는 것이다.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 마르크스에게서 계급은 물론 정확히 정의된 것은 없지만 전반적으로 객관적인 개념으로 남아있다. 경제적 분석에 의해 확립된 객관적인 개념으로 남아 있다.
Chapter 6_9_212p The widening horizon
In Lenin, the emphasis shifts from 'class' to 'party', which constitutes the vanguard of the class and infuses into it the necessary element of class-consciousness. In Marx, ‘ideology' is a negative term-a product of the false consciousness of the capitalist order of society. In Lenin, 'ideology' becomes neutral or positive-a belief implanted by an elite of class- conscious leaders in a mass of potentially class-conscious workers. The moulding of class-consciousness is no longer an automatic process, but a job to be undertaken. The other great thinker who has added a fresh dimension to reason in our time is Freud. Freud remains today a somewhat enigmatic figure. He was by training and background a nineteenth-century liberal individualist, and accepted without question the common, but misleading, assumption of a fundamental antithesis between the individual and society. Freud, approaching man as a biological rather than as a social entity, tended to treat the social environment as something historically given rather than as something in constant process of creation and transformation by man himself. He has always been attacked by the Marxists for approaching what are really social problems from the standpoint of the individual, and He has always been condemned as a reactionary on that account; and this charge, which was valid only in part against Freud himself, has been much more fully justified by the current neo-Freudian school in the United States, which assumes that maladjustment’s are inherent in the individual, and not in the structure of society, and treats the adaptation of the individual to society as the essential function of psychology. 레닌에게는 강조하는 무게 중심이 계급에서 당으로 옮겨 간다. 당은 계급의 전위를 이루고 계급의식을 주입한다. 마르크스에게는 이데올로기는 부정적인 용어였다. 거짓 의식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 질서 속에서 거짓 의식의 산물이었다. 레닌에게 이데올로기는 중립 또는 긍정적이었다. 그것은 어떤 믿음이었다. 계급의 엘리트에 의해 주입된. 잠재적으로 계급의식적인 노동자 속에 있는 깨어있는 지도자들. 계급의식의 형성은 더 이상 자동적이 아니라 수행되어야 할 과업이었다. 다른 위대한 사상가, 이성에 새로운 신선한 차원을 추가한 사상가는 프로이드이다. 프로이드는 오늘날 약간 정체를 알기 어려운 존재로 남아 있다. 그는 19세기 자유주의 개인주의자로 훈련받았고 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의심 없이 일반적이고 오해하기 쉬운 가정, 개인과 사회의 근본적인 대립이라는 일반적이고 오해하기 쉬운 가정을. 프로이드는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 접근했다. 사회적 존재라기보다는. 그리고 사회적 환경을 역사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끊임없이 창조와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어떤 것으로 보기보다는. 인간 그 자신에 의해. 그는 언제나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공격당해 왔다. 진실로 사회적 문제들을 개인의 관점에서 접근한다고. 그리고 비난받아 왔다. 그러한 이유로 반동적이라고. 그리고 이러한 공격은 프로이드 자신에게는 일부만 해당되는 것이다. 오히려 신프로이드 학파에 보다 많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 있는 신프로이드 학파. 그들은 가정한다. 부적응이란 인간에게 내재된 것이다. 사회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개인의 사회에 대한 적응을 심리학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라고 한다.
Chapter 6_10_213p The widening horizon
The other popular charge against Freud, that he has extended the role of the irrational in human affairs, is totally false, and rests on a crude confusion between recognition of the irrational element in human behaviour and a cult of the irrational. That a cult of the irrational does exist in the English-speaking world today, mainly in the form of a depreciation of the achievements and potentialities of reason, is unfortunately true; it is part of the current wave of pessimism and ultra-conservatism, of which I will speak later. But this does not stem from Freud, who was an unqualified and rather primitive rationalist. 다른 인기 있는 공격, 프로이드에 대한 인기 있는 공격은 그는 인간 생활에서 비이성의 역할을 확대 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이고 거친 혼란에 기반한다. 인간 행동에 있어서 비이성적 요소의 인정과 비이성의 숭배와. 비이성의 숭배는 영어권 국가에 존재한다. 주로 이성의 성취와 잠재 가능성의 훼손의 형태로. 비이성의 숭배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행히도 사실이다. 그것은 현재의 비관주의 흐름의 일부분이고 극보수의 일부분이다. 나중에 내가 이야기하려는. 그러나 이것은 프로이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약간은 근본적인 이성주의자이다.
What Freud did was to extend the range of our knowledge and understanding by opening up the unconscious roots of human behaviour to consciousness and to rational enquiry. This was an extension of the domain of reason, an increase in man's power to understand and control himself and therefore his environment; and it represents a revolutionary and progressive achievement. In this respect, Freud complements, and does not contradict, the work of Marx. Freud belongs to the contemporary world, in the sense that, though he himself did not entirely escape from the conception of a fixed and invariable human nature, he provided tools for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 roots of human behaviour and thus for its conscious modification through rational processes. 프로이드가 한 것은 우리 지식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해도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뿌리들을 열어젖힌 것에 의해. 인간 행동의 의식과 합리적 탐구에 대한 무의식의 뿌리를 열어젖힌 것에 의해. 이것은 이성의 영역의 확장이다. 그리고 인간의 힘, 스스로를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힘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환경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성취를 나타낸다. 이러한 면에서 프로이드는 보완한다. 그리고 모순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작업을. 프로이드는 현대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래 의미에서. 그 자신은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정되고 불가변한 인간성의 개념으로부터, 그는 도구들을 제공했다. 더 깊은 이해의 도구들을. 인간 행동의 뿌리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대한 도구들을. 그리고 그러므로 합리적인 과정들을 통해서 의식적인 변화에 대한 도구들을 제공했다.
Chapter 6_11_214p The widening horizon
For the historian Freud's special significance is two-fold. In the first place, Freud has driven the last nail into the coffin of the ancient illusion that the motives from which men allege or believe themselves to have acted are in fact adequate to explain their action: this is a negative achievement of some importance, though the positive claim of some enthusiasts to throw light on the behaviour of the great men of history by the methods of psycho-analysis should be taken with a pinch of salt. 역사가에게는 프로이드에 특별한 중요성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 프로이드는 못을 박았다. 오래된 생각에 대해. 자기가 주장하는 동기들, 그들 스스로 믿는 동기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는 오래된 생각에 못을 박았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정적인 성취이다. 물론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들의 행동을 분석할 수 있다는 열렬한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주장은 약간 에누리하고 들어야 하지만.
The procedure of psycho-analysis rests on the cross-examination of the patient who is being investigated: you cannot cross- examine the dead. Secondly, Freud, reinforcing the work of Marx, has encouraged the historian to examine himself and his own position in history, the motives - perhaps hidden motives-which have guided his choice of theme or period and his selec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facts, the national and social background which has determined his angle of vision, the conception of the future which shapes his conception of the past. Since Marx and Freud wrote, the historian has no excuse to think of himself as a detached individual standing outside society and outside history. This is the age of self- consciousness : the historian can and should know what he is doing. 심리 분석은 환자와 상호 질문에 의존한다. 그러나 당신은 죽은 사람에게 상호 질문할 수 없다. 두 번째로 프로이드는 마르크스의 작업을 보강하는 것에 의해 역사가들을 북돋웠다. 역사가 스스로 조사하고 역사에서의 그 자신의 위치를 조사하라고. 동기- 주로 숨은 동기이지만-들을 조사하라고. 그가 선택의 주제 또는 시대를 선택하도록 이끈 동기. 그리고 사실들의 선택과 해석을 한 동기. 그리고 국가적 사회적 배경들을, 그 배경으로 그의 역사 시각을 결정해온 국가적 사회적 동기, 그리고 미래의 개념, 그 미래의 개념은 과거에 대한 그의 개념을 형성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가 서술한 이래로 역사가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 자신이 사회로부터 분리된 개인이라도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역사 밖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지금은 자기의식의 시대이다. 역사가는 수 있고 해야 한다. 그가 하고 있는 것을.
Chapter 6_12_215p The widening horizon
This transition to what I have called the contemporary world-the extension to new spheres of the function and power of reason-is not yet complete: it is part of the revolutionary change through which the twentieth-century world is passing. I should like to examine some of the main symptoms of the transition. Let me begin with economics. Down to 1914 belief in objective economic laws, which governed the economic behaviour of men and nations, and which they could defy only to their own detriment, was still virtually unchallenged. Trade cycles, price fluctuations, unemployment, were determined by those laws. As late as 1930, when the great depression set in, this was still the dominant view. Thereafter things moved fast. 내가 소위 현대 세계라 부르는 곳으로 이행-이성의 기능과 힘의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혁명적인 변화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20세기는 그 혁명적인 변화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 전환의 주요한 현상들의 일부분에 대해 조사해 보고자 한다. 먼저 경제학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1914년까지 경제적인 법칙들에 대한 믿음은 개인과 국가의 경제적인 행위들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무시하면 오직 손해만 입을 것이라는 믿음이 아직까지도 거의 실제로 도전받지 않은 채 있었다. 경기순환, 가격 변동들, 실업과 같은 것들은 이러한 법칙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대공황이 시작된 1930년까지도 이와 같은 견해는 지배적이었다. 그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In the 1930s, people began to talk of ‘the end of economic man', meaning the man who consistently pursued his economic interests in accordance with economic laws; and since then nobody, except a few Rip Van Winkles of the nineteenth century, believes in economic laws in this sense. Today economics has become either a series of theoretical mathematical equations, or a practical study of how some people push others around. The change is mainly a product of the transition from individual to large-scale capitalism. 1930년에 사람들은 경제적인 인간의 종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인간이라 끊임없이 그의 경제 이익들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경제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그 이후 아무도 믿지 않았다. 립 반 윙클 외에는, 그는 19세기 사람이었다. 19세기 사람인 립 반 윙클외에는 아무도 이와 같은 의미의 경제 법칙들을 믿지 않는다. 오늘날 경제학은 일련의 이론적인 수학방정식으로 되어 왔다. 또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밀어 낼 수 있을까라는 실제적인 연구가 되어 왔다. 이와 같은 변화는 주로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대규모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산물이다.
Chapter 6_13_216p The widening horizon
So long as the individual entrepreneur and merchant predominated, nobody seemed in control of the economy or capable of influencing it in any significant way; and the illusion of impersonal laws and processes was preserved. Even the Bank of England, in the days of its greatest power, was thought of not as a skilful operator and manipulator, but as an objective and quasi-automatic registrar of economic trends. 개인적인 기업가나 상인들이 지배력을 갖던 시대에는 경제를 통제한다든지,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비개인적인 법칙과 과정이라는 환상이 보존되었다. 최전성기의 영국 은행조차도 능숙한 조작자나 조종자로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반자동적인 기록가로서 생각되었다. 경제 동향에 대해서.
But with the transition from a laissez-faire economy to a managed economy(whether a managed capitalist economy or a socialist economy, whether the management is done by large-scale capitalist and, nominally private, concerns or by the state), this illusion is dissolved. It becomes clear that certain people are taking certain decisions for certain ends, and that these decisions set our economic course for us. Everyone knows today that the price of oil or soap does not vary in response to some objective law of supply and demand. Everyone knows, or thinks he knows, that slumps and unemployment are man-made: governments admit, indeed claim, that they know how to cure them. The transition has been made from laissez-faire to planning, from the unconscious to the self-conscious, from belief in objective economic laws to belief that man by his own action can be the master of his economic destiny. 그러나 자유 방임주의 경제가 통제 경제(그것이 자본주의적 통제 경제이건 혹은 사회주의적 경제이건, 즉 통제가 대중의 대자본가에 의해 행해지건 혹은 국가에 의해 행해지건.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취한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이러한 결정들이 우리의 경제적 진행을 결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안다. 오일이나 비누의 가격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객관적인 수요 법칙에 대응하면서 변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안다. 그리고 안다고 생각한다. 슬럼프나 실업은 인간의 만든 것이라고. 정부는 인정한다. 사실 주장한다. 그들은 어떻게 그들을 치유할 것인지에 대해. 그 전환은 자유방임에서 계획 경제로, 무의식에서 의식적으로, 객관적인 경제법칙으로부터 인간의 그 자신에 의해 그의 경제에 대한 운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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